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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聖域)이 형성된 고등종교 음악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에 맡겨져 있던 인류문명은 BC 500년 무렵부터 고등종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전의 종교가 신(神)이라는 막연한 대상을 향한 찬가를 불렀던 것과 달리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고등종교는 이전의 종교와는 비할 수 없는 결속력과 강한 파급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 종교는 이전의 자연방임적 행위와 달리 계율과 윤리적 실천을 요구하듯 음악에도 그와 같은 정신을 부여하므로써 세속 음악과 다른 종교음악의 성역을 갖게 되었다.
1.불교의 탄생과 율조
1)초기 승단의 율조
BC 5세기에 성립된 불교를 시작으로 인류는 고도의 정신세계를 구현한 종교를 갖게 되었고, 종교의 성립은 성현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문자가 일반화되지 않았으므로 종교의 가르침은 암송으로 구전(口傳)되었다. 그러나 음악의 '생명기능'을 중시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힌두 사제들과 달리, 초기 불교승단은 금욕적 계율에 따라 뜻의 전달을 넘어서는 과도한 율조는 멀리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남방지역에서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남방지역에서는 일반 신도들이 사찰에서 단기 수행을 하더라도 8계를 수지한다. 8계 중에 일곱 번째 계율을 빠알리 발음 그대로 옮겨보면, "낫짜 기-따 와-디따 위수- 까닷사나- 마-라-간다 위레-빠나 다-라나 만다나 위부-사낟타-나:스스로 춤추거나 다른 이를 춤추게 하여 즐기는 일(낫짜) - 스스로 노래부르거나 다른 이를 노래 부르도록 시켜 즐기는 일(기-따), 스스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다른 이를 연주하도록 시켜 즐기는 일(와-디따) 부처님의 가르침을 벗어난 볼거리를 보고 즐기는 일(위수-까닷사나), 금・은으로 만든 꽃, 모든 종류의 꽃 등으로 몸을 치장하는 일(마-라-다라나), 향기로운 분으로 화장하여 얼굴을 매끈하게 치장하는 일(간다 만다나), 색깔있는 분, 향수, 향유, 화장품 등을 발라 얼굴을 치장하는 일(간다 위레-빠나 위부-사나) 등을 삼가는 계율을 기꺼이 지키겠습니다"
2)중국 대승불교의 율적 활용
『상서(尙書)』의 「무전(舞典)」에는 "노래(歌)란 말을 길게 하는 것이라, 성음을 길게 뽑아내어야 율려가 성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歌永言 聲依永 律和聲)"는 대목이 있다. 당나라의 범패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고, 오늘날 한국에서 불리는 홑소리와 짓소리 범패는 중국의 이러한 음악과 같은 맥락이다. 중국의 초기불교는 남방과 마찬가지로 패찬(唄讚)과 전독(轉讀)이 주된 것이었으나 경전의 한역과 함께 불교음악의 응용이 확산되었다. 양(梁)나라 혜교(慧皎)의 『고승전』 5권 5 「석도안전(釋道安傳)」에는 도안(道安)이 정한 승려규범에 행향(行香)․정좌(定座)․상경상강지법(上經上講之法)을 비롯하여 일상에서 예를 올리는 규범(行道飮食唱時法)을 마련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규정이 후세 승단 수행의 전형적 모범이 되어 패찬의 의례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이들은 오늘날 중국과 대만에서 연중 법회와 매일의 조석예불로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의례와 음악이 홍법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면서 대승 불교를 적극 활용한 중국식 범패가 정착해 감에 따라 음성 본연의 힘을 중시하던 자세에서 찬사의 전달로 옮겨져 갔다. 이는 남북조시기에 우란분법회, 수륙법회, 양황보참(한국의 자비도량참법) 등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승불교에서 의식이 장엄한 것은 의례가 사람을 무리 짓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의례는 개인을 집단에 소속시키고 그 관계 설정 속에서 교법이나, 남이 한 선근공덕을 기뻐하며, 함께 참여하여 체득하는 수희의 기능을 배가시키는데 음률의 효용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성진(聲塵)으로서 도(道)를 얻는다. 음성으로 불사(佛事)를 한다. 소리를 경으로 삼는다(以聲爲經)"는 원리를 범패수행의 지침으로 삼아왔다.
3)일본 쇼묘(声明)와 수행체계
당대(唐代)의 종파불교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일본은 종파마다 의례 설행과 범패(쇼묘声明) 창화에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한․중․일 삼국 중 가장 보수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 쇼묘 창화에 대해 가장 엄격한 전승 법도를 요구하는 곳은 진언종이라 할 수 있다. 순밀(順蜜)의 진언종에서는 스승의 인가 없이는 승려라 할지라도 다라니나 진언을 함부로 암송할 수 없다. 또한 의례와 범패는 승려들만이 행하는 것이므로 신도들은 그 세계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성역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본 책에서 "범패를 하는 그 사람도 부처다"(声明を唱える自分自身も仏 なのです)"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이성위경(以聲爲經)"과도 같은 이치이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해방전후 대어장 용운스님의 범패를 들은 사람들이 "그 소리가 바로 부처님 소리라요"라거나 "그 소리를 들으면 오만 근심이 다 사라지는기라요"라고 했던 말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범패는 대승적 법신사상을 설하는 영산재의 정신과 가장 부합하는 범패의 역할이라 할만하다.
2.신약과 기독교 음악
유발 → 셈 → 모세 → 다윗 → 솔로몬...(하략)..으로 이어져온 구약시대의 제례와 음악은 춤과 악기와 노래가 어우러진 향연(饗宴)적인 성격이 있었지만 예수 이후 신약 시대의 음악은 절제되고 엄숙한 면모를 갖추었다.
1)그리스 철학
이집트의 선진 문화를 흡수한 그리스 음악관이 로마의 교회음악으로 이입되었다. 서양음악의 'Music'에는 'Incarnation'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고, 여기에는 그리스 사람들의 우주관이 담겨 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음악은 신에게서 나왔으며 최초의 연주자들은 아폴론, 암피온, 오르페우스와 같은 신이나 반신(半神)이었다. 원초적 종교의 무속음악에서 얘기했듯이 그리스 사람들도 "음악은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음악으로 병을 고치고, 정신을 정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기적도 일으켰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음악(music)'은 참된 것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원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음악은 천문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인간과 사회적 윤리와 연결지어 생각했다. 그리스의 에토스(Ethos)론은 음악의 도덕적 성질과 효과에 대해 설명하며, 음악을 소우주(Microcosm)로 보았고, 이는 보이지 않는 창조물 모두에 작용하는 동일한 수학적 법칙의 규제를 받는 음고와 리듬체계와 연결지어졌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이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는 방식을 모방이론을 통하여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비열한 감정을 모방한 음악을 계속 듣다보면 그 사람 성격 자체가 그렇게 바뀌게 되어 천박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체의 훈련을 위해서는 체육을, 정신의 훈련을 위해서는 음악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상국가에서의 음악은 "음악이 과도하면 사람이 나약해지거나 신경질적이 되고, 체육이 과도하면 사람이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지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너무 많은 줄을 메어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추방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중국 『악기(樂記)』와 한국의 『악학궤범』에서도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어, 이 무렵 음악에 대한 인류의 가치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로 일치점이 많음을 확인하게 된다.
2)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흡수한 로마교회
정복으로 영토를 확장한 로마였지만 문화와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축적된 자양분이 없었다. 그리하여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의 음악용어에 대해 알아야 했고, 그리스의 음악교육을 받는 것이 품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 당시 로마에는 대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유행했으며, 음악제와 경연대회가 열렸고, 유명한 연주자들이 인기를 누렸다. 당시 로마제국의 음악관을 보면, 음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자유로운 선율로 이루어졌다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었고, 리듬과 박자, 선율은 가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또한 음악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예술로써 간주되었다.
서기전 3세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헬레니즘은 모든 것이 사람에서 시작되며,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세계 시민주의와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이와 달리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구약 성서에 근원을 둔 헤브라이즘은 인간이 아닌 신(神), 즉 여호와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을 삶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초기 로마교회에는 암브로시우스(Ambrose, 340-397)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의 음악철학이 교회 음악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음악의 상징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오성가의 기본 토대도 암브로시우스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암브로시우스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술 「음악에 관하여 -On Music」에서 음악과 리듬의 심리학, 윤리학, 미학에까지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의 『고백록』에서 초기 기독교의 음악관을 엿볼 수 있다.
"내가 맨 처음 믿음을 되찾았을 때 주님 교회의 노래에 흘리던 눈물을 돌이켜 보고, 지금도 부드러운 목청이 음률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들을 때, 그 선율의 매력보다 가사에서 전하는 내용에 감동하는 것을 보면 음악이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생각은 음악의 위험성과 유용성 사이에서 오락가락하지만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익하다는 쪽으로 마음이 쏠립니다. 음악을 통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승화되기 위해서이오나 만약 제가 가사의 내용보다 곡조에 더 끌렸다면 벌 받을 죄를 지은 것으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노래를 아니 듣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지금 나의 상태, 자신의 마음을 잘 가다듬을 줄 알아야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내 주시여, 나를 굽어 살피소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잇는 교회음악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 470-524)는 그의 저술 『음악의 원리(De institution musica)』에서 음악의 종류를 무지카문다나(musica mundana), 무지카 후마나(musica humana),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musica instrumentalis)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이들 중 첫 번째로 꼽은 무지카 문다나는 천체의 음악(musica coeiesti)이었다. 이는 우주의 운동, 4계절의 변화 등, 우주․자연법칙과 연관이 있으며 인간이 직접 들을 수 없는 음악이다.
두 번째로 꼽은 무지카 후마나는 인간의 정신과 혼과 육체의 조화에서 발현되는 것으로써 역시 그 소리는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의 무지카 인스트루멘탈리스가 흔히 말하는 인간의 귀에 들리는 음악으로써 노래하거나 악기로 연주되는 보통의 음악이었다. 보에티우스가 저술한 「음악의 원리 - De institutione musica」는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져온 사상들을 수렴ㆍ반영하였고, 음의 생성에 대하여는 피타고라스의 이론을 수용하면서도 반 피다고라스적인 새로운 논지를 더 하기도 했다.
3)기독교 정신이 반영된 그레고리오성가
보에티우스는 음악이 사람의 인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므로써 음악의 교육적 효과를 설파하였는데, 이는 플라톤의 국가론이나 공자의 예악관과도 상통하는 점이 많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신학자, 수도사, 사제와 성도들의 진지하고도 엄숙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 그 음악을 들었을 때 영혼의 반응은 어떠한지에 대한 진지한 노력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립된 것이 그레고리오성가였고, 이는 오늘날 전 인류의 종교음악 중에 가장 성스러운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이 무렵 로마 교회는 스콜라 칸토룸(Schola Cantorum)에 가수들과 교사들을 채용하여 소년과 성인 남자들을 교회 음악가로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였고, 각 수도원에는 음악 프로그램, 필사, 전례를 위한 연주와 지휘를 맡는 칸토르가 있었고, 6세기에는 교황 합창대가 있었다.
590-604년까지 재위한 그레고리오 1세는 전례 성가를 표준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업을 펼쳤으므로 이 무렵까지의 성가에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당시의 성가는 전례 절차와 분리될 수 없는 신앙행위 그 자체였다. 교회음악이 발전하는 데에는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간파한 신학자들과 수도자들의 끊임없는 논의와 성찰이 있었다. 신학자들은 "음악이 영혼으로 하여금 신성한 것을 사색하도록 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그 효용성이 매우 크다"고 하였다. 따라서 음의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위해서, 혹은 연주나 감상에 따른 쾌감을 자극하는 음악은 절제하였고, 춤이나 유희의 관습이 배어있거나 이교도적인 광경을 연상시키는 음악들은 교회음악에서 배제하였다.
3.이슬람의 음악관
유대ㆍ기독ㆍ이슬람은 모세ㆍ예수ㆍ무함마드(570-632)가 대략 500년 간격으로 발원한 같은 뿌리의 종교이지만 율적 활용에 있어서는 이슬람에서 특히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슬람의 1년 신행 중 가장 축제성이 큰 라마단이 끝나는 날에도 일체의 음악이나 악가무 행사가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성전에서는 예배를 알리는 '아단'과 『꾸란』의 송경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 어떠한 사원에도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합창단이 없고, 음악을 업으로 하는 성직자나 음악 전문가도 없다.
이슬람이 발현하기 이전에 율적 전통으로는 서사적 장시(長詩)인 까시다(qaṣīdah)가 있었다. 까시다는 시의 형식으로서 단일한 각운을 사용하며 크게 세 부분의 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산문은 주로 대중 앞에서 낭송되었는데 여기에는 예전부터 전승되어온 즉흥시와 산문 까시다의 성격이 다분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이후에는 꾸란의 운율이 최고의 가치로 부상하였다. 무함마드의 출생지의 꾸라이쉬족이 쓰던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꾸란』 율조는 이슬람의 정복여정과 함께 급속하게 전파되었고, 이 과정에 토착 방언에서 영향을 받은 다양한 구어체와 신성화된 꾸란의 문어체를 두루 갖추며 다른 언어가 따를 수 없는 고유한 율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이 출현한 1세기 동안 메카와 메디나지역의 음악이 이슬람 음악의 토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종교 지도자와 세속 정치가 분리되어온 것과 달리 이슬람은 성직자와 평신도가 분리되지 않으므로 왕정과 종정 또한 일치되어 왔다. 그러므로 왕궁의 음악은 곧 이슬람 지도자(칼리파)들의 음악이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전(聖殿) 밖에서 행해지는 궁중음악 내지는 행사음악이지 이슬람 성전에서 행해지는 신행 율조는 아니다.
<범패, 그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고찰/ 윤소희 위덕대학교 밀교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