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장 맑혀진 자리엔 연꽃이 핀다
중생이 바라고 바라는 염원 ‘극락왕생’
극락왕생과 연화화생은 같은 의미 상징
욕심 버리고 보리심 일으켜 수행한다면
부처님을 따라 왕생하고 연꽃에서 화생
그림① 연꽃 봉우리 속에 갇혀 있는 중생의 모습(〈관경16관변상도〉의 연화화생 장면)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누가 기대하지 않았던 행동을 갑자기 했을 때 하는 표현이다.
“철들면 죽는다”라는 말과도 같다. 그만큼 자신의 악습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하지만, 사람이 진정 변했을 때는 (물론 육신은 그대로이나) 그의 마음이 죽은 것이다. 마음의 재탄생! 이를 ‘화생(化生)’이라 한다.
극락왕생, 우리 중생의 공통된 염원이다. 극락왕생은 연화화생과 상통하는 말이다.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은 곧 ‘연화에서 화생한다’는 말과도 같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연화(연꽃)에서 태어나다니? 그것도 태생(胎生)이 아니라 화생(化生)이라고 한다.
화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극락왕생과 연화화생의 표현을 살펴보도록 하자.
“더 이상 염부제(우리가 사는 세상)와 같이 혼탁하고 사나운 곳에서는 아예 살고 싶지 않습니다!
더럽고 악한 이곳에는 지옥·아귀·축생이 넘치고 못된 무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다음 세상에는 험악한 소리를 듣지 않고, 이러한 사나운 무리들과는 일체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관무량수경〉, ‘제5절 극락을 흠모함’
“거칠고 사나운 이 세상에는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위데휘 왕비의 절규이다. 〈관무량수경〉의
도입부에는 아들 아사세 태자에 의해 감금당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위데휘 왕비의 간절한 염원이 나온다.
그 염원은 ‘괴로움과 번뇌가 없는 처소’인 ‘극락에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극락왕생’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참으로 유구하고도 영원한 바람이다. 극락왕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 멀리 어디엔가 극락이란 곳이 있다는 것일까? 정말 이 속세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건가?
그럼, 어떻게 하면 거기에 태어나는가?
사생, 네 가지 종류의 태어남
“나무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조석 예물문에 빠지지 않는 문구이다.
이 문구에서 ‘사생자부(四生慈父)’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만물의 자애로운 아버지’란 뜻이다.
만물은 네 가지 종류의 태어남으로 비롯된다 해서 ‘사생’이라 한다.
‘사생자부’의 출처는 〈법화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기서 석가모니 붓다는 사생자부로 정의된다.
절대적인 신이 아니라,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것이다. ‘자비’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대승사상의 핵심이다.
사생은 난생(卵生)·태생(胎生)·습생(濕生)·화생(化生)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 네 가지 과정 중 하나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초기경전 〈맛지마니까야〉의 ‘사자후의 긴 경’에는 석가모니 붓다께서 사생에 대해
직접 설하신 내용이 있는데, 요약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이 사생인가?/ 알의 껍데기를 깨고 태어나는 중생들을 난생이라 한다.
/ 태의 막을 찢고 태어나는 중생들을 태생이라 한다.
/ 부패한 생선·부패한 시체·부패한 유제품·소택지·오물구덩이에서 태어난 중생들을 습생이라 한다.
/ 신들·지옥에 태어난 자들·몇몇 인간들·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을 화생이라 한다.”
붓다 설법의 취지는 사생(네 가지의 태어나는 과정)과 오취(다섯 가지의 태어나는 장소)는
중생들이 여의여야 하는 대상이고, 열반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는 〈금강경〉의 설법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드러난다. ‘대승정종분’ 첫머리에는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일체 중생의 종류인 난생·태생·습생·화생(사생),
물질인 것과 비물질인 것, 인식이 있는 것과 인식이 없는 것,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 모두를 소멸함으로서 제도하여 절대 열반에 들게 하리라.(필자 번역)”라고 쓰여 있다.
태어나는 과정과 태어난 형태, 이 모두를 멸하여 ‘윤회를 끊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정토3부경(〈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는,
화생 중에서 ‘연화화생’이 궁극의 목표로서 등장하게 된다. 그 내용을 보도록 하자.
극락왕생, 곧 연화화생
사생, 네 가지 형태의 탄생 중에 우리는 태생에 속한다. 어머니로 인연 지어진 여성의 태(胎), 즉 자궁에서 나온다. 그런데 아미타신앙에서 중생이 바라는 것은 태생이 아니라 화생인데, 특히 연화화생을 말한다.
경전 속의 표현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유일한 귀의처인 ‘나무아미타불’에 대한 염불이 언급되고
아미타불이 곧 ‘극락’이라고 한다. 극락이란, 〈관무량수경〉에 의하면 ‘청정한 업으로 이루어진 곳’
또는 ‘지극히 평안하고 즐거운 곳’이란 뜻이다. 더럽고 오염된 속세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극락왕생이라 한다.
그런데 정토3부경(〈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속의 극락왕생하는 대목을 보면,
“연꽃에서 화생한다” 또는
“극락의 연못 속 연꽃에서 태어난다”
“극락의 연못(또는 물가)으로 향한다”
“연화대(연꽃대좌) 위에 올라타고 극락으로 향한다” 등의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극락왕생은 연화화생과 동일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출가하여 사문(중)이 되고, 보리심(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켜,
오로지 한결같이 무량수불(아미타불)을 염(念)하며, 갖가지 선근 공덕을 쌓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원을 세운 자〔상배자上輩者: 상근기의 무리〕는
임종 시에는 무량수불이 대중과 더불어 그 앞에 나투신다.
부처님을 따라 극락왕생하는데, 바로 연꽃 가운데 자연히 화생(化生)한다.
그는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자리에 머문다.”
-〈무량수경〉, ‘제3절 극락왕생의 인행(因行)’ 중
그림② 연꽃이 활짝 만개하여 그 위에 화생한 모습(〈관경16관변상도〉의 연화화생 장면)
‘마음의 정화’와 화생의 뜻
극락왕생을 약속하는 정토3부경의 요지에 따르면,
‘지혜와 선업 공덕을 많이 닦은 사람일수록 보다 큰 연꽃이 열리고,
또 보다 오래도록 열린 상태로 있어서, 극락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상근기에서 중근기,
다시 하근기로 내려갈수록 연꽃의 크기와 열려있는 기간,
그리고 극락을 맛보는 차원과 심도가 좁아지고 또 짧아진다.
즉, 마음의 맑음의 정도에 따라 연화화생의 급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무량수경〉에는 3품(상배, 중배, 하배)으로,
〈관무량수경〉에는 9품으로 급수를 나누고 있다.
‘화생’이란 ‘마음이 바뀐 것’을 말한다.
그냥 지엽적인 마음자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마음바탕이 통째로 갈아엎어지는 변화를 말한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바른 행동을 갑자기 했을 때 익히 하는 말이다.
“철들면 죽는다”와 같은 말이다. 그만큼 자신의 악습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
거의 있을 수 없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진정 변했을 때는,
육체는 그대로이나 그의 마음이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악습의 마음이 죽고 청정해지면 그는 새로 태어난 것이나 진배없다.
다시 말해, 화생이란 마음바탕이 완전히 바뀌어, 겉모양은 예전 그대로 같을 수 있으나,
언행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경우가 해당된다.
이때 ‘마음바탕’이라는 것은
(대승불교에서는)업장,
(심리학에서는)무의식,
(유식학에서는)말라식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화생은 마음이 청정업(淸淨業)쪽으로가 아니라,
부정업(不靜業)쪽으로 전향되는 것도 해당된다.
‘선(善)의 화신’도 있지만 ‘악(惡)의 화신’도 있다.
화생을 통해 선처에 태어날 수도 있지만, 악처에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연꽃 봉우리에 갇혀 있는 중생
조선시대 1465년 〈관경16관변상도〉(속칭 〈극락도〉)를 보면,
하품 중생의 연못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연꽃들이 보인다.
연꽃이 봉우리인 채로 있고 그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그림①) 그래서 극락을 볼 수 없다. 수행과 공덕이 모자라,
대기 상태인 것이다. 반면, 상품 중생의 연못에는 연꽃이 활짝 피고
거기서 화생한 보살이 보인다.(그림②)
보통 ‘부처와 보살이 연화좌,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라고 표현하지만,
실은 ‘연꽃에서 화생한 모습’인 것이다.
청정업으로 마음바탕이 완전이 속속들이 맑혀지면 (관무량수경의 표현대로)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극락”이 된다. 얼마만큼 맑혔는지의 비율에 따라 극락을 체험하는
기간과 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과의 철칙’이다.
업장이 맑혀진 자리에는 연꽃이 핀다.
이는 무의식의 바탕이 청정한 에너지로 탈바꿈한 것을 말한다.
그 청정에너지는 빛나는 연꽃처럼 찬란하게 피어난다.
뭇 중생들의 마음바탕은 무명(無明, 청정한 깨달음의 빛이 없는 상태)이다.
‘무명’의 반대말이 ‘연꽃’이다.
무명을 밝힌 자리에 나타나는 찬란한 빛과 상서로운 에너지.
어머니의 자궁을 거쳐 태생의 형태로 태어난 근원자리에는 어두운 무명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명에서 태어난 것이다.
무명에서 태어난 존재가 자신의 근원(무명)을 대담하게 공략하는 방법!
그것을 붓다께서는 가르쳐 주셨다. 자신의 밑 둥을 스스로 처 버리는 그 방법은 무엇일까?
연화화생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로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