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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4개월 간의 비상기도회를 선포하면서 기도자 명단이 적힌 유인물들을 이제 거의 다 준비를 했어요. 내 마음에 이번에는 유인물을 만들지 말고 기도하자라는 그런 마음이 생겨서 그렇게 결정을 하고 이제 유인물을 배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 이렇게 내가 인간적으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시면 하신다는 기대가 있었고 두 번째로는 성도에 대한 신뢰, 그래도 우리가 오랫동안 많이 기도해 왔으니까 성도들이 함께 열심히 기도할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생겨나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이 이제는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나님이 저에게 주셨어요. 오랫동안 함께 기도했고 또 지금도 함께 기도하는 성도가 많기 때문에 목회자가 이렇게 기도를 강조하면 왜 기도를 강조할까에 대해서 이제는 조금 알지 않을까라는 그런 마음이 들어서 굳이 유인물을 배포해가면서 좀 강압적으로나 억압적으로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저에게 주셨고 또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결과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습니다. 성도 중에는 또 한편으로는 왜 담임 목사가 저렇게 기도를 강조할까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 기도를 하자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에요. 기도하는데 왜 기도하자고 하지라는 거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에요.
근데 어떻든 기도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 같아서 왜 제가 기도를 강조하는지에 대해서 두 가지 정도를 나누고 또 함께 말씀도 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는 제가 왜 지금까지 이렇게 수많은 시간 기도를 강조하느냐 그것은 제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인 거예요.
두 번째로는 기도의 능력을 완전히 믿기 때문인 거예요. 저 자신은 못 믿어도 제가 기도는 믿기 때문에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모든 문제에 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 사연을 여러분께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열심히 산 흔적이 제 몸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아직 나이가 좀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육체의 아픔과 연약함이 저에게 있습니다.
근데 열심히 살아도 안 된다는 것을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열심히 사는 순간부터 알았어요. 열심히 살아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늦게 깨달은 게 아니라 열심히 살면서 부지런히 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면서부터 깨닫게 되었어요.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열심은 자기 만족이다.
할렐루야 열심은 자기 만족이지 반드시 일을 되게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내가 오늘 열심히 살았다. 내가 오늘 부지런히 살았다. 내가 오늘 게으르지 않고 정말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자기 만족을 주는 것이 열심이지 반드시 이 열심이 교회의 또 사역에 그리고 인생의 일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세상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저보다도 훨씬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교회에도 저보다 열심히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열심히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에요. 농부가 열심히 농사를 짓지만 농사가 망합니다. 제 주변에 목회를 하면서 농사를 짓는 목회자들이 조금씩 이렇게 늘어나요. 근데 이분들이 이제 4년, 5년 6년 정말 길어졌는데 한 번도 잘 된 적이 없어요.
전 그래서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대단한 걸 알았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그래도 3년에 한 번 정도는 맞추더라고요. 3년에 한 번 정도는 농작물도 잘 되고 가격도 비싸서 그래도 농사를 지을 어떤 보람이나 의미가 좀 있었어요.
제가 아는 이 목사님은 6년 7년이 넘었는데 한 번도 성공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농사를 열심히 짓지만 열심히 짓는 것만으로는 안 되더라고요. 밤을 세워 일을 하지만 공장이 문을 닫기도 하고요.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시험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아도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열심은 일종의 자기 만족이지 반드시 일을 되게 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20살에 교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 전도사라는 명칭을 담근 22살이고 그냥 일반적으로는 교회 사역은 20살 때부터 시작을 했어요.
근데 정말 긴 시간 목회를 했잖아요. 그런데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 투성이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어요. 제가 기도를 시작하게 된 이유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기도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실제로 기도가 진행될 때 기도가 끝났을 때 그동안 제가 하지 못했던 일들이 진행되는 것을 수없이 많이 경험했어요. 내가 정말 열심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는데 해결되지 않던 것들이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풀리기 시작하고 기도가 끝날 쯤은 다 해결돼 있는 것들을 종종 경험합니다.
보통의 경우 부족함을 사람이나 물질로 채우려고 해요. 뭔가 부족함이 생기면 사람을 더 투입하고 물질을 뜯어 쏟아붓는 거예요. 그래서 부족함을 메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물질로는 결코 부족함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로만 우리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주변에 뭔가 아쉬운 것, 부족한 것이 있다면 기도로만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돼요.
여러분이 열심히 살았는데 좀 아쉬운 게 있어요. 부지런히 일하고 수고했는데 뭔가 부족함이 있어요. 정말 최선을 다하는데 약간 아쉬움이 있어요. 근데 여러분 이 부족함과 이 아쉬움은 오직 기도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족함이나 아쉬움은 처음부터 느끼는 감정은 아니에요.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미 열심히 노력해 왔다는 거예요. 나한테 부족함이나 아쉬움의 감정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 그 사람은 지금까지 열심히 산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열심히 살았는데 뭔가 부족해요 열심히 살았는데 뭔가 아쉬워요. 열심히 살았는데 약간 안타까움이 있어요.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인간적으로 열심을 다했다는 의미예요.이 지점부터 부족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감정인 이 지점부터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아쉬움과 부족함은 더 커지는 거예요.
우리 잘 아셔야 돼요. 내가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껴요. 그래서 이것을 메우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을 해요. 그런데 이 부족함과 아쉬움은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쉬움과 부족함의 감정은 기도하라는 싸인인 거예요.
많은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때 열심히 노력하더라고요. 아심과 부족함의 감정이 들어요. 그래도 지금은 기도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노력을 더 해요. 여러분 수고와 노력으로는 결코 부족함과 아쉬움을 채울 수 없어요. 오직 기도로만 우리의 부족함과 아쉬움을 메울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제가 기도를 강조하는 것은 기도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잘 알려진 EM 바운즈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성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거룩한 인물은 참된 기도의 힘에 의해서 형성된다.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성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기도의 힘이다. 거룩한 인물은 참된 기도의 힘에 의해서 형성된다.
참된 기도가 있는 곳에 참된 성도가 있다는 거예요. 참된 기도가 많은 교회에 믿음의 인물이 있고 성자가 있고 거룩한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참된 기도가 사람의 크기와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고 만든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기도가 온전해질수록 사람도 온전해지고, 기도가 온전해질수록 교회도 온전해지고, 기도가 거룩해질수록 사람도 거룩해지고, 기도가 거룩해질수록 교회도 거룩해지는 겁니다. 기도가 완전할수록 사람도 완전해지고, 기도가 완전할수록 교회도 완전해집니다. 참된 기도가 사람과 교회와 사역을 결정하는 거예요. 부족함과 아심을 메우기 위한 더 열심히 사는 이 노력이 이 수고와 이 땀흘림이 사람과 교회와 사역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기도가 교회와 사역과 사람을 결정하는 겁니다.
참된 기도의 힘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인 거예요. 제가 계속 지금 참된 기도라는 용어를 써요. 참된 기도, 참된 기도가 성도를 만들고, 참된 기도가 성자를 만들고, 참된 기도가 사역을 온전히 하고 온전하게 만들고 성도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도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인 거예요. 기도의 힘이 강력한 것이 아니라 참되게 하는 기도의 힘이 강력한 거예요. 기도를 많이 하지만 기도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참되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 거죠.
참되게 기도하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주관하게 하시기 때문에 기도가 힘이 되고 기도가 곧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이르시되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아이를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면서 하신 말씀이에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따라 하겠습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병을 고치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전쟁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문제는 이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에요. 내게 있는 능력이 기도를 하면 더 강해진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자꾸 기도의 능력이 내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도를 하면 내 능력이 강해진다고 생각해요. 이건 틀린 거예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내 능력이 강해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성도가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난 후에 죄를 지으면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기도하면 내 능력이 강해지고 그래서 내가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그러니까 목회자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요. 틀린 거예요. 목회자는 단지 도구일 뿐인 거죠.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그 조건을 만드는 것이 기도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능력이고, 하나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성도를 만드는 것이 기도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아닙니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있는 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어요. 기도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으면 특별히 참된 길.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가진 그 어떤 것도 교회는 소유하고 누릴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교회가 하나님이 가지신 것을 소유하거나 누릴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참되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인 거죠. 참되게 기도해야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니게 되고, 참되게 기도해야 하나님이 가진 것들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권세를 내가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더 강해지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착각하면 안 돼요. 우린 기도하면 내가 더 강해진다고 생각 아니요.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고난이 강하게 내게도 부여되는 거예요.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자주 쓰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번 따라가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교회의 능력 되게 하는 게 기도고, 하나님의 능력을 성도의 능력 되게 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가정에 능력 되게 하는 것 또한 기도인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능력 되게 하는 것이 기도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뛰어난 거예요. 뛰어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내가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는 시간은 베드로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였다라고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은 시간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려고 갈 때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을 보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왜 이렇게 상세하게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하러 가는지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을까요? 성경의 저자의 의도는 이거예요. 기도가 이런 상황을 가져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가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는 거예요. 기도가 걷게했다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한 기도 때문에 기도하러 간 기도 때문에 이 역사가 있었다는 거예요. 기도하는 습관이 기도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켰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써놓은 것입니다.
따라합니다.
기도가 걷게 하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기 때문에 결국 기도가 능력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고보는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지 말하고 싶었어요. 가르쳐주고 싶어서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지 이걸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기록해서 우리 초대교회 가운데 서신으로 보낸 거예요. 해결할 문제가 많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 능력인지를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거예요.
병든 자가 있느냐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어려움이든 기도하라는 의미인 거예요. 어떤 문제든 기도하라, 어떤 상황이든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멈춰졌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렸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야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고 소개해요. 이렇게 엘리야를 굳이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엘리아의 개인의 특별함이 이 역사를 만든 게 아니라는 의미예요. 개인의 특별함이 아니라 기도의 능력이 이 역사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여서 엘리야가 특별한 사람이어서 비가 멈춰지고 비가 내려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도가 그를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교회를 특별하게 만들어요. 힘없는 교회를 특별하게 만들고 연약한 성도들을 특별하게 만들고 여러분 우리는 좀 특별하게 되고 싶잖아요. 근데 우리가 수고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아요. 열심은 열심히 한 성공을 보장하거나 열심히 한 능력을 보장하지를 않아요. 앞에 말하는 것 등 자기 위로에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아요. 내가 오늘 열심히 살았다. 너 오늘 참 부지런히 살았다. 내가 엄마로서 정말 내가 아빠로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냥 자기만족에 불과한 거예요.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의 특별함이 이런 역사를 가져오게 한 게 아니라 엘리야의 기도가 이런 역사를 가져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직분을 가졌든 어떤 직책을 가졌든 간에 기도하지 않으면 특별함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직책을 가져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할 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17절에 보면 간절히 기도한 즉이라는 이 문장이 나와요. 그런데 한 글에는 보면 간절히 기도한 적이 간절히 와 기도한 적이라는 이 단어들이 완전히 다른 의미처럼 이렇게 씌여져 있잖아요. 간절이라는 단어와 기도하는 자라는 단어는 전혀 의미가 다르잖아요.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 보면 같은 단어를 연속해서 써놓았어요. 그러니까 이 문장을 어떻게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했냐 하면 자기의 기도 속에 기도했다.
이게 문장을 좀 더 소개해야 되겠네요. 간절이라는 이 단어와 기도한 적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인데 기도했다는 단어예요. 기도했다 기도했다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말 성경에는 간절히 기도했다고 돼 있지만 헬라인은 기도했다 기도했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 문장이 잘 해석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정말 기도의 사람이 이 문장을 좀 해석을 해놨어요. 자기의 기도 속에 기도했다.
여러분 잘 이해 안 되죠. 기도로 기도했다 이거는 잘 이해가 안 돼요. 기도의 에너지를 모두 합해서 기도했다. 이것도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되긴 해요. 그래서 제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이 문장을 좀 정리했냐 하면 설명이 되지 않는 간절함으로 엘리야가 기도했다 이렇게 저는 이해를 했어요. 간절히 기도함을 전한 이 문장은 우리가 설명이 되지 않는 간절함으로 기도했다고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했다는 이 의미는 정말로 특별한 기도 니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도를 엘리야가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비를 내리게 하기도 하고 비를 멈추게 하기도 했던 거예요. 그냥 기도해서 이런 역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기도를 엘리야가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간절함을 넘어선 기도를 했다는 거예요. 간절을 넘어서는 기도 그냥 단순히 소리를 크게 외치고 막 목이 터져라 외치고 눈물이 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기도를 넘어선 기도를 엘리야가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런 기도의 경험이 만들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정말 열심히 간절히 기도하면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이 온다는 거예요. 그때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순간인 거예요. 야고보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좀 더 설명하면 열왕기상 18장 42절에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라는 문장이 있어요. 엘리야가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인데 정말 몸이 빼빼 마른 사람도 이렇게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엎드려서 넣기란 되게 힘들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예 안 돼요. 예전에 제가 이 설교를 한두 번 했잖아요. 저도 가끔 내가 정말 엎드려 기도할 때 내 머리가 무릎 사이에 들어가는지를 굽혀봤는데 아예 안 돼요. 아예 할 수 없어요. 아마 지금 우리 교회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는 그렇게 기도하기가 그런 모양으로 기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어떤 의미냐? 엘리야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으면 그냥 그냥 제 해석인데 너무 의미를 두지 말고 그냥 들으세요.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으면 관절이 이렇게 풀렸을까요?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으면 평상시에 몸이 아닌 다른 몸이 됐을까요?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응답을 기도하고 소망했으면 간절히 근육이 평상시와 달라졌을까요?
여러분 기도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있을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의 힘이에요. 간절한 기도가 자연 현상을 통제하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건 상황에 맞는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지금 상황이 죽을 것 같은데 거기에 걸맞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건 믿음이 좋지 않다는 거예요. 믿음이 좋다는 것은 지금 상황이 죽을 것 같으면 죽도록 기도해야 이게 믿음이 좋은 거예요. 지금 상황이 정말 고통스럽고 힘들어요. 그러면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들게 기도하는 것이 믿음 좋음의 증거예요.
엘리야는 상황에 맞는 기도를 한 거죠. 그 간절함이 너무 심해서 평상시에 그의 신체와 몸과는 달라진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어요. 물론 엘리야가 정말 빼빼 말라서 그리고 몸이 너무너무 유연해서 이럴 수도 있어요. 그냥 우리 상황에 저의 상황에 비춰서 본문을 그렇게 풀어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인 거죠.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멈추지 말라는 거예요. 기도하라는 명령에도 우리가 순종해야 되고, 기도를 멈추지 말라는 명령에도 우리가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능력이 되는 데는 믿음도 필요하고 순종도 필요하고 간절함도 필요하고 회개도 필요합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기도가 능력이 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기도가 능력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는 상황인데 기도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때론 기도하지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정확하게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라. 기도가 안 돼도 기도하라는 거예요. 응답되지 않는 데도 기도하라는 거예요. 기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워도 기도하라는 거예요.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능력의 세계로 여러분과 저를 이끌어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됩니다.
여러분 멈추지 않는 기도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멋진 열매를 우리 교회 가운데 맺게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멈추지 않는 기도가 기도 제목보다 더 멋진 응답을 여러분과 저에게 선물할 줄 믿습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여러분과 저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