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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장 영광과 교만 (9)
이윽고 회맹일이 되었다.
모든 제후가 의관을 정제하고 제단 위로 올라갔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장식품으로 매단 환패(環佩)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다.
확실히 이 날의 주인공은 제환공(齊桓公)이었다. 주양왕의 대리인인 태재 공(孔)은 왕실에서 가지고 온 고기를 제단 꼭대기의 상 위에 올려놓고 좌우로 늘어선 제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주양왕(周襄王)의 말을 전했다.
"천자인 나는 주문왕, 주무왕께 제사를 드리고 조를 백구(伯舅)에게 하사하노라."
백구란 천자가 성(姓)이 다른 큰 제후국의 군주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는 물론 강성(姜姓)을 가진 제환공을 가리킨다.
참고로, 성이 다른 작은 제후국의 군주를 부를 때는 숙구(叔舅)라고 하며, 같은 성의 큰 제후국 군주에게는 백부(伯父)라는 말을 썼다.
태재 공(孔)의 낭랑한 음성이 울려퍼지자 제환공(齊桓公)은 조를 받기 위해 자리에 일어났다. 천자가 물건을 하사할 때는 일단 계단 아래 뜰로 내려갔다가 다시 단 위로 올라와 받아야 한다. 제환공 역시 그러한 예를 따르기 위해 계하(階下)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대 천사(天使)인 태재 공(孔)이 다시 입을 열어 외쳤다.
"천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환공은 공이 크고 연로함에 특별히 작위를 한 등급 높이노니 계하(階下)로 내려가 절하지 말라'하고 명하셨습니다."
제환공(齊桓公)의 작위는 후작. 작위를 한 등급 높인다면 공작의 작위를 내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뜰로 내려가 절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파격의 특전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만저만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태재 공(孔)의 말에 제환공(齊桓公)은 우쭐하는 마음이 생겼다. 얼굴에 거만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나를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제환공(齊桓公)은 계단을 내려가려다 말고 그 자리에서 그냥 조를 받으려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러한 마음을 관중(管仲)이 읽었다.
그는 다른 제후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제환공(齊桓公)을 부축하는 척 재빨리 다가가서는 낮게 속삭였다.
"주공은 겸손하십시오. 신하로서 존경하는 예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제환공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즉시 허리를 굽혀 태재 공(孔)을 향하여 말했다.
"천자의 위엄스런 빛이 내 이마에서 지척간에 있는데 어찌 이 소백(小白)이 예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 몸이 뜰로 내려가 절을 올리지 않았다가는 아마도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져 천자께 욕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즉시 계하(階下)로 내려가 재배한 후 다시 제단 위로 올라와 태재 공(孔)이 내미는 주양왕의 하사품인 조를 받았다.
이 모습을 본 여러 나라 제후들은 제환공(齊桓公)이 끝까지 겸손해하며 예를 잃지 않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감복했다.
제환공(齊桓公)의 겸손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 이 제사 지낸 고기가 어찌 나 혼자만의 것일쏘냐.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음날부터 잔치를 베풀어 그 고기를 여러나라 군주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10여일간이나 이어진 잔치가 끝나자 제환공(齊桓公)은 태재 공(孔)이 배석한 가운데 여러 군주들과 회의를 열어 새로운 평화조약안을 체결했다. 맹약의 내용이 낭독되고 모든 제후들이 앞으로 나와 삽혈할 순서가 되었다. 삽혈이란 가축을 죽여 그 피를 입술에 바르는 맹세 행위이자 오랜 세월 동안의 관습이다.
그런데 이때 제환공(齊桓公)이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번부터 가축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삽혈 맹세를 철폐하도록 합시다."
짐승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것은 원시시대부터의 관습이다.
야만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음산하고 섬뜩하다. 그 절차가 복잡하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형식의 간소화, 실리(實利)로써 패업을 이룬 제환공다운 제안이었다.
모두들 제환공의 의견에 찬성했다. 규구회맹은 삽혈 없이 맹세한 최초의 회맹이 되기도 했다.
- 신(神)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이로써 상징적으로나마 남아있던 제례 정치는 그 막을 완전히 내리고 말았다. 이것을 진보라고 하면 너무 억측일까.
한 사가(史家)는 이때의 일을 시로써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춘추시대를 의심과 혼란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초(楚)를 누르고 주(周)를 높여 승리를 이루었도다.
제환공의 공적이 이렇듯 위대하지 않았던들
그 누가 삽혈 없이 맹세에 임했을 것인가.
아마도 제환공(齊桓公)의 생애 중 이때가 가장 절정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영광이 지나치면 교만이 찾아오게 마련인가. 제환공(齊桓公)은 뭇 제후의 추앙 속에 절정의 영광을 맛보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또 다른 욕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회맹이 끝나고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서였다.
제환공은 별안간 태재 공(孔)에게 물었다.
"봉선(封禪)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태재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태재 공(孔)은 깜짝 놀랐다.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릴 뻔하기까지 했다.
봉선(封禪)은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이다. 그것을 물어오는 제환공의 저의가 무엇인가? 태재 공(孔)은 두 눈을 들어 제환공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환공은 태재 공(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길을 마주쳐오며 다시 채근했다.
"봉선(封禪)의 의식에 대해 아시오, 모르시오?"
"왕실에 전해오는 전적을 통해 다소 알고는 있습니다."
태재 공(孔)의 대답에 제환공은 눈에 빛을 뿜으며 한걸음 다가앉았다.
"아시는 대로 말씀해보십시오."
"예부터 천자는 하늘과 땅을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높은 곳에 올라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봉(封)'이라 하고, 낮은 곳에 임해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을 '선(禪)'이라 합니다. 이 봉과 선을 합친 것이 바로 봉선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부터 천자들은 태산(泰山) 에서 바로 이 봉선을 행해왔습니다."
태산(泰山)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거대하고 웅장한 것을 비유할 때 '태산처럼'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 때문이다. 태산(泰山)은 지금의 산동성 제남시 남쪽으로 약 250리 가량 떨어져 있는 중국의 오악(五嶽)중 하나이다. 높이는 1,524m.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만큼 높지는 않으나 중원 동쪽 일대에서는 그보다 높은 산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태산(泰山)은 중국인들이 자랑할 만한 명산이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인들의 최고 권위 있는 의식이랄 수 있는 봉선(封禪)이 바로 이 태산에서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태산을 성산(聖山)으로 외경시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하왕조는 안읍(安邑)에 도읍하고 은왕조는 박에 도읍하고, 우리 주왕조는 풍호에 도읍을 정했기 때문에 이 곳 태산과 멀리 떨어져 있었소. 그래서 천자들이 봉선(封禪)하기가 매우 힘들었겠지만, 지금 이 두 산은 모두 제(齊)나라 영토안에 있소이다. 이제 과인이 천자의 은총을 받음에 천자대신 몸소 봉선의 대례(大禮)를 올리고 싶소. 태재께서는 나의 이 뜻을 어찌 생각하시오?"
태재 공(孔)은 얼굴이 전보다 더 핼쑥해졌다.
'역시 다른 속셈이 있었구나.'
그러나 제환공(齊桓公)이 누구인가.
천하를 호령하고 그 위엄과 세도가 천자를 능가하는 패공이 아닌가.
태재 공(孔)은 마음속으로 언짢았지만, 대놓고 그것을 표현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제환공(齊桓公)께서 하시겠다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묘하게 뒤틀린 말이었으나 제환공의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여러 군후와 함께 이 일을 의논해보겠소이다."
그 날 밤, 늦은 시각이었다.
태재 공(孔)은 제환공이 봉선을 행할 의향이 있음을 알고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는 천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음이다!'
제환공(齊桓公)은 능히 그럴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안 될 일!'
태재 공(孔)은 스스로를 타이르듯 속으로 외쳤다.
비록 주왕실이 힘을 잃고 권위를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천하의 중심이다. 외방이 중심을 넘보면 천하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여기서 주왕실이 무너질 수는 없다.
태재 공(孔)은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끝에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냈다.
'관중(管仲)이다!'
이 세상에서 제환공(齊桓公)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관중뿐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제환공(齊桓公)이 주양왕의 특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것을 관중이 몰래 간하여 계하로 내려가 절을 올린 후 조를 받지 않았던가.
"등불을 밝혀라!"
태재 공(孔)은 튀어오르듯 일어나 관중(管仲)의 처소로 향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