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세계사 178 중동 이야기(5편) '빛바랜 오스만제국의 개혁']
'나폴레옹의 충격, 이슬람을 깨우다'
15세기를 넘어가면서 오스만 제국은 계속 승승장구한다.
콘스탄티노플을 넘어 두 차례나 유럽의 심장부인 빈을 공격하면서 서유럽의 문을 거세게 두들긴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친 세계 최강대국이다. 오스만의 무슬림들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메흐메드2세의 무용담과 쉴레이만 대제의 찬양가는 자손대대 넘쳐난다. 십자군 전쟁 때 잠시 예루살렘의 작은 부분을 빼앗긴 건 늘상 있는 사소한 분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에게 침략을 당해본 적도 거의 없는 강대국이다.
유럽 국가들을 압도하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과 문화는 영원하리라 생각하는 무슬림들 눈 앞에,
179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낯선 군인들이 상륙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다. 알렉산드리아를 간단하게 제압하고 바로 카이로로 진격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 천하무적이라는 이집트의 맘루크 기병대가 나선다. 그러나 이들도 카이로 외곽에서 한 시간만에 끝난다. 나폴레옹 군대의 소총 사격에 전멸하다시피 참패한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 약 3백명 맘루크 군대는 6천여 명이 전사하는 일방적인 결과다.
나폴레옹은 1년 후 프랑스로 돌아가지만 그의 군대는 3년동안 주둔한다. 이 기간동안 이집트인들은 거대한 문화 충격을 경험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기술력과 사상에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슬람의 자부심이 무너진다.
새로 임명된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는 프랑스 군이 물러간 후에도 유럽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사절단을 파견하여 신문물을 들여와 유럽을 모방하고 고문관을 초빙하여 산업화를 추진하고 무기를 혁신하며 군사와 행정 조직을 개혁한다.
짧은 시간에 강력해진 이집트는 아라비아의 와하비 세력을 물리치고 시리아까지 점령하면서 오히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이집트의 행동을 두고 볼 수만 없는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를 공격하지만 오히려 패배한다. 나중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도움으로 시리아에서 이집트 군대를 몰아내기는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달라진 이집트의 모습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탄지마트(Tanzimat)'
일개 지방 총독이던 무함마드 알리에게 의외의 위협을 당한 오스만 제국은 현실에 눈을 뜬다. 다른 나라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가는 동안 오스만은 제자리 걸음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집트의 도전을 물리치는 동안 유럽국가들의 군사력을 목격했다. 유럽 국가들을 본받아 개혁을 먼저 한 이집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실감했다. 앞으로 오스만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이집트처럼 유럽을 배워 국력을 키우고 강한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1839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 메지드 1세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신민의 안전을 법으로 보장하며 세금, 군대 등은 법으로 정한다는 '궐하네 칙령'을 선언한다.
법 제도를 만들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날부터 헌법이 제정되는 1876년까지를 투르키에인들은 '탄지마트(Tanzimat, 재편성)'라고 부른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비이슬람 지역인 발칸 반도에서 더욱 거세다. 레반트 지역과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반오스만 물결이 서서히 일어난다.
오스만 정부는 민족주의 운동을 무마시키고 하나의 정서적 유대감을 만들기 위하여 그동안의 종교 차별을 철폐한다. 종교 뿐만 아니라 권리와 의무에도 차등을 없애고 여러 종교 여러 민족을 평등하게 같이 끌어안겠다는 취지이다.
유럽은 종교전쟁이라는 피비린내나는 30년 전쟁을 치르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개별국가를 만든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오랫동안 특이한 변화없이 자치권을 인정받는 여러 민족들이 평화롭게 지내왔다. 오히려 이러한 자치권때문에 오스만의 술탄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하고 제국 내의 신민들도 통일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 더구나 광활한 영토때문에 변방 세력들이 수시로 나타난다. 절대 왕정으로 강력한 군주를 만들어낸 유럽국가들과는 다른 체질이다.
몸통은 느슨한 제국인데 유럽식 국민국가 제도를 이식한다고 유럽과 같은 결과가 나올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종교 차별을 없애겠다는 조치는 오히려 종교 갈등을 더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발칸반도, 레바논, 리비아 지역에서 종교간 민족간 무력충돌이 여러 차례 일어나 수백명씩 사상자를 낸다.
발칸반도 지역에서 대규모 유혈충돌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정교회 신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력 침공을 한다. 1853년 크림전쟁(Creamean War)이다.
이때 러시아는 오스만,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패배당하면서 깨닫는다. 아무리 정교회를 도입하고 같은 종교를 내세워도 결국 서유럽 국가들은 자기들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크림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제국은 관직은 물론 교육 병역에도 종교적 차별을 없앤다. 이미 비무슬림인 유대인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차에 이런 선언은 무슬림들에게 큰 불만을 가지게 하여 종교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이 발생한다. 특히 1860년 다마스쿠스에서 벌어진 약 5천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의 학살과 폭행 약탈 사건은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할 정도로 큰 사태이다.
'차관에 발목 잡힌 개혁'
다마스쿠스 사태 이후 대중의 민심에 거슬리는 정책은 중단한다. 그들의 지지가 없으면 탄지마트가 성공하기 어렸다는 것을 깊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경제성장과 복지 확대로 방향을 바꾼다. 유럽식 산업화를 추진하고 사회간접자본 건설사업을 펼친다. 철도를 깔고 전기 시설을 확충하고 과학기술 개발에도 공을 들인다. 대중들은 서서히 탄지마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유럽에서 들여온 차관이다. 탄지마트를 집행할 조직을 대폭 늘리고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면서 군비 지출도 확대된다. 게다가 대규모 건설사업까지 벌이다보니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다.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유럽 국가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관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수수료와 선이자로 떼고 또 간접 비용으로 쓰다보니 실제 경제 현장에 직접 투입되는 금액은 그나마 또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외채 빚을 갚기 위해 또다른 차관을 들여오고 이렇게 반복하다 결국 1874년 오스만 정부는 파산 선언한다. 이 부채는 훗날 투르키에 정부가 1954년에야 모두 갚을 정도다.
대외채무가 늘다보니 오스만 제국은 외세에 잠식당한다. 유럽 열강들은 이자 상환을 유예해주는 대신 더 많은 특혜를 요구한다. 이런 상황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개혁을 시작한 이집트도 결국 파산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이슬람 국가들의 개혁은 오히려 유럽의 지배를 받는 모양이다.
'헌법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다'
탄지마트 동안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청년 오스만'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서구 문물만 도입하는 오스만 정부의 오판을 비판하며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나선다.
정치개혁 요구안을 거부하는 오스만 정부에게 신식교육을 받은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1876년이다.
쿠데타 세력은 오스만 제국 최초의 헌법을 공포하여 참정권과 평등권을 명시함으로써 이슬람권 최초의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다. 그러나 늘 불안정했던 발칸 반도에서 또다시 내전이 벌어진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슬라브계 민족주주의 세력들에게 패배하면서 발칸 반도와 동유럽 지역의 영토를 잃는다.
술탄은 전쟁 패배의 비난을 무책임하고 무능한 의회로 돌리면서 다시 술탄 전제군주로 돌아간다. 젊은 지식인들이 요구한 정치개혁은 결국 실패로 막을 내린다.
'폐허 속의 희망'
다양한 종교와 민족으로 구성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국민국가를 모델로 개혁을 시작하지만 막대한 대외채무로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신민들간의 갈등과 충돌은 더 깊어진다. 게다가 전쟁에 패하여 북아프리카를 빼앗기고 발칸과 이집트는 독립해 나간다.
유럽의 병자로 놀림을 받던 중, 탄지마트로 교육 받은 젊은 지식인들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정치 개혁을 요구한다. 이들 지식인 중의 한 명이 훗날 투르키에공화국 건국의 주역인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다.
이들은 1908년 다시한번 쿠데타를 일으켜 입헌군주제를 확립시킨다.
반면 오랫동안 튀르크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온 아랍인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더 이상 이슬람을 대표하지 못하는 오스만 제국 대신 아랍인들의 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가장 구체적인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먼저 일어난다.
참고: '중동은 왜 싸우는가? 박정욱(2018)'
다음은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이슬람 근본주의'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