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858호 갑질과 갑의 권리는 다르다 (눅19:11~27)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 정말 없습디까? 아니요, 어디에 가든 위, 아래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분명히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28:13)라고 하심으로 사람 간에 계층이 존재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갑질하는 사회’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승무원을 겁박하고 항공기를 회항한 어느 항공 회사 임원의 일, 주차요원을 무릎 꿇게 한 어느 모녀의 일,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단가를 후려치는 일…. 우리는 이것을 ‘갑질’이라고 합니다. ‘갑질’이란 갑을관계에서 파생된 말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갑(甲)이 그렇지 못한 을(乙)에게 공평치 못한 일을 자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갑질과 갑의 권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말하는 갑질은 다 갑질이 아닙니다. 물론 정말 갑질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당연한 갑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번 대학청년 연합수련회에서 향수업체 에데니크의 김온유 대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향수를 납품하는 회사에서 ‘이것이 맘에 안 드니 다시 해라’거나 제품에 하자가 있다며 컴플레인을 걸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갑의 당연한 권리다.”
맞습니다. 많은 사람이 갑질과 갑의 권리를 혼동하는데, 이제는 갑질과 갑의 권리를 구분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김 대표가 향수를 납품하고 있는 회사 대표를 제가 잘 압니다. 우리 교인이니까요.
그렇다고 김 대표가 저에게 와서 “목사님, 저쪽 회사에서 자꾸 컴플레인을 거는데요, 목사님이 잘 아는 분이니까 말씀 좀 잘해주세요.” 라고 애원해서 제가 납품회사 대표에게 “그러지 마라. 이제 신생회사인데 좀 봐줘라.” 한다면, 납품회사 대표는 제 얼굴을 봐서 이번에는 그 제품을 받겠지요. 그러나 다시 계약하려고 할까요? 다시는 안 할 겁니다.
또 김 대표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다가 결국 문을 닫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김 대표 말대로 납기일을 맞추느라 힘들고, 경제적 손실이 있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기에 신뢰를 얻어 계속 수주를 따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갑이 그냥 갑이 된 게 아닙니다. 그 사람도 을의 단계를 지나 갑이 된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갑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갑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권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자동차 회사에는 각 부품을 만드는 하청업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업체가 계속 불량품을 만들어오는데도 그것을 그냥 받아준다면 하청업체만 망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 회사가 망할 수 있습니다.
공멸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안 된다. 이렇게 만들면 다른 업체를 찾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입니다. 그게 을 입장에서는 횡포처럼 느껴지겠지만, 아닙니다. 그것은 갑의 권리요 의무입니다. 이 때 을이 ‘아, 이렇게 하니까 불량이 나는구나. 이것을 보완해야겠다’ 하고 노력하고 연구한다면 그 을도 그 분야에서는 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갑의 권리가 을의 성장원동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서울교회 담임 이시대 목사를 참 사랑하고 믿습니다. 동생이라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제가 청년대학 교육부서로, 대구로, 인천으로 여기저기 발령을 내도 단 한 번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더니 오늘날 서울교회 담임목사로서 일을 너무나 잘하고 있습니다. 가끔 어느 목사를 지방으로 발령을 내면 ‘강등되었다느니, 퇴출이라느니’ 합니다.
총회장 목사라 맘대로 갑질 한다는 거지요. 그런 자에게 성장발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 직원들에게 일을 시킬 때도 저는 한 번에 ‘OK’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다시 해봐’를 수없이 합니다. 물론 힘들겠지요. 그런데 저의 이런 행동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야. 왜 다시 하라는 거야? 이 정도면 된 거 아냐?’ 하는 부류와 ‘아, 왜 맘에 안 드실까? 이렇게 해볼까? 더 나은 방법이 뭘까?’ 하는 부류입니다. 제가 갑질 한 것이 아닙니다. 교단의 책임자로서 교단의 발전을 꾀하기 위한 저만의 권리입니다.
어떤 자가 발전하고 성장하겠습니까? 후자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의 말씀은 주인의 당연한 권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한 므나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둔 자의 것을 빼앗고 어둔 곳에 내치는 것은 갑질이 아니라 주인의 당당한 권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진짜 갑질한 인물이 있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입니다. 그는 야곱을 부려먹고 노임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을 빌미로 7년 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런 와중에도 성공한 것은 외삼촌의 갑질을 갑질로 생각지 않고,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울의 횡포에도 그는 불만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더니 사울보다 더 큰 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식당을 합니까? 갑인 고객의 불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음식이 맛이 없다, 친절하지 않다, 비위생적이다 하는 소리를 듣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 대박 식당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옷 가게를 하는 땅끝예수전도단 회원이 있습니다. 그가 성공하는 비결을 묻기에 “고객이 옷이 맘에 안 든다고 가져오면 언제든 바꿔줘라. 그들의 불만을 듣고 개선해라.” 했더니, 그대로 실행하여 가게가 잘 된다고 합니다.
그럼요, 그래서 요즘 ‘컴플레인 마케팅’이 인기라고 합니다. 갑인 고객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수렴해서 개선하고 시행하는 마케팅 전략이 성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도가 갑입니다.
성도들이 불평을 하걸랑, 뭐가 맘에 안 든다고 하걸랑 ‘불평불만하지 말라’고 하기 전에 그것을 받아들여 내가 더 낮아지고, 내가 더 기도하고, 더 공부하면 최고의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가끔 까다로운 성도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목사, 전도사들이 있는데, 그것을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 생각하여 인내하고 노력하면 어디서든 목회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 드리자면, 절대 갑에게 대항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대 주권자, 절대적인 갑인 하나님께 대항한 루시엘과 그의 추종자들이 어찌 되었습니까? 집주인에게 대들었다가 방 빼라고 하면 난감한 일 아닙니까? 고객에게 따졌다가 인터넷에 올려버리면 수습불가 아니겠습니까? 갑에게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을로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다고 갑을 향해 불만을 해서 뭐하겠습니까? 불평대신 ‘갑이 나 잘 되라고, 성장하라고 그러는 거구나’ 생각하고 이겨내는 겁니다. 역경은 성공으로 가는 필수코스요, 필수과목입니다. 역경을 거꾸로 하면 경력이 된답니다. 성공한 모든 자들이 이 역경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니 행여 갑질을 당하걸랑 그것을 에너지 삼아 더욱 뛰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도 갑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됩니다.
우리 주님도 수치와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구원과 상에 대해 권세를 가지고 계심은 갑질이 아니라 그 권세가 있음을 알고 믿음을 지키고 믿음의 성장을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갑은 을이 잘 되기를 원합니다. 을이 잘 되어야 갑도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갑이 갑질이 아니라 권리를 주장함을 알고, 그에 따른 노력으로 성장발전을 이룹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롬8:17). 할렐루야!
No cross, No crown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거센 파도가 유능한 해군을 만든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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