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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2) † 일곱 대접을 쏟아 붓기 전의 하늘의 광경(계15:5-8)
지금부터 우리는 일곱 대접에 왔다(계15-16장). 계8:13절에서는 중천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곧 불게 될 세 천사의 남아 있는 나팔 소리로 인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禍), 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세 나팔의 세 화(계9:12; 11:14)들은 대환난의 화들이 될 것이다(마24:21).
첫째 화는 9장에 있는 다섯째 나팔이고, 둘째 화는 같은 9장에 있는 여섯째 나팔이다. 셋째 화(11:14)는 일곱째 나팔의 소극적인 내용의 일부분으로서 일곱 대접들이다(계시록의 구조가 마지막 일곱째 인은 다음 일곱 나팔을 대표하고, 마지막 일곱째 나팔은 다음 일곱 대접을 대표한다).
이 일곱 대접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들이다(15:1).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의 처음 네 나팔을 합한 것이 대환난의 서막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대환난 그 자체는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계15:5-8절에서 우리는 일곱 대접을 쏟아 붓기 전 하늘의 광경을 본다.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가 끝날 때이다(15:1). 계15장 1절과 7절, 그리고 16장 1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수, 특히 적그리스도와 그 왕국에 대해 분노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비록 하나님이 그분의 심판 중 많은 부분을 집행하셨고 또 그분이 하셔야 하는 모든 것들을 거의 성취하셨지만, 그분의 진노는 아직 다하지 않았다. 그분의 마지막 격심한 진노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뤄지기 전에 또 하나의 하늘의 광경이 계시된다. 계15:5절의 “성전이 열려 있는,” 하늘의 광경이 지난번 글(제15장 1)의 내용이었다.
<성전이 열려 있음>
계15:5절은 “또 그 일들이 있은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막인 성전이 열리고,”라고 말한다.
성전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나오스(naos)"는 성전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 성전인 지성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장막의 성전”은 장막의 지성소를 뜻한다. 구약의 장막은 성소와 성소 내부에 있는 지성소로 구성되었다.
“장막의 성전”이 성전이 비록 하늘 위에 있지만, 장막같이 지어진 성전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다. 모세가 만든 장막은 하늘의 양식에 따라 만들었지만(히8:5), 성전이 지어진 후에는 장막이 폐해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원 세계에 이를 때 어린양 자신이 성전이 되시며 이 하늘의 장막의 성전도 지나가게 될 것이다.
“증거”는 “언약궤”와 관계되기 때문에 “법궤”는 성전으로 번역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이 구절의 성전은 성전의 내부로서 법궤가 있는 곳인 지성소이다. 증거란 하나님의 율법을 말한다. 하나님을 증거하며 법궤 속에 넣어져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말한다(출25:16). 법궤(언약궤)가 장막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장막은 증거의 장막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막의 성전이 열려 있음을 본다. 그것은 더 이상 감춰져 있지 않고 온 우주가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5절은 계11:19절의 연속이므로 반드시 그 구절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계11:19절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라고 말한다.
계4:2-3절에 있는 무지개를 두른 보좌는 소극적인 측면으로서 계6-11장까지에 있는, 땅에 대한 집행된 모든 심판의 중심인 반면에, 언약궤를 가진 성전은 적극적인 측면으로서 12-22장까지에서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수행하신 모든 성취의 중심이다. 다시 말하면 계시록의 첫 번째 부분인 1장-11장까지에서 계시의 중심은 무지개가 있는 보좌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분인 12-22장까지에서 계시의 중심은 더 이상 무지개가 있는 보좌가 아니라 언약궤가 있는 성전이다. 무지개가 있는 보좌는 주로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것이나, 언약궤가 있는 성전은 주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 곧 성전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증거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란 그분의 건축을 통한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다. 첫째 부분인 11장 끝에는 큰 지진이 있지만, 둘째 부분의 끝인 21-22장에서는 하나님의 건축이며 하나님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간증인 새 예루살렘이 있다. 새 예루살렘은 전체가 지성소이다. 이 성은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일만 이천 스다디온(약1,300마일)인 정육면체로 되어 있다(21:16).
이것은 확대된 성전이요, 계시록의 마지막 열한 장의 결론이다. 처음 열한 장은 큰 지진으로 끝맺지만, 마지막 열한 장은 새 예루살렘으로 끝맺는다.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은 확대된 성전이 될 것이며, 그 안에는 언약궤, 곧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12-22장까지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서 우리는 영원한 언약궤가 있는 영원한 성전을 본다.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옴>
6절은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그 성전에서 나오는데 그들은 순결하며 흰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더라.”고 말한다.
그 일곱 천사는 제사장으로서의 천사들인데, 이는 그들의 옷이 제사장의 옷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하늘 위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일 것이다. 구약에서 제물을 드릴 때 먼저 전제를 붓고 그 다음 희생물을 불살랐다. 그들이 행한 것도 이와 부합되는 것 같다.
이것은 일곱 천사에 의해 일곱 대접이 쏟아 부어지는 것이 불이 뒤섞인 유리 바다 위에서 후기의 이기는 자들의 찬양에 대한 응답임을 가리킨다. 후기의 이기는 자들은 유리 바다 위에 서서 그들의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때에는 기도에 이어 찬양이 시작될 것이다.
다섯째 인에서 우리는 순교한 성도들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본다(6:9-11). 그러나 15장에는 부르짖음이나 기도가 없고 그 대신 찬양만 있다. 곧 후기의 이기는 자들은 ‘주님, 적그리스도는 우리를 핍박했고 우리를 순교하게 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오셔서 우리의 피의 원한을 갚아 주시고 그의 왕국을 멸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기도 대신에, 후기의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들의 찬양에 대한 기록 직후에 일곱 대접을 쏟아 붓기 전 하늘의 광경이 계시된다.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막의 성전으로부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온다. 이 천사들은 군인들처럼 차려 입지 않고, 그들의 직임을 이루려고 나오는 제사장들처럼 차려 입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지 심판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의 심판은 하나님이 그분의 표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 경륜의 성취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계16:17절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 일곱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공중에 쏟으니, ”다 되었다“라고 하는 큰 음성이 성전 보좌에서 났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두 가지, 곧 성전과 보좌가 뒤섞여 있음을 주목하라. 이 구절의 문법 구조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성전에서(out of the temple), 보좌로부터(from the throne)”,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전편)에 있는 하나님의 행사는 보좌에서 나오며, 둘째 부분(후편)에서의 그분의 행사는 성전에서 나온다.
계시록은 먼저 하나님의 심판의 중심이 보좌라는 것을 보여 주며,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증거의 중심이 성전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보좌와 성전이 연합되어 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표현, 곧 하나님의 증거와 뒤섞여 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증거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증거를 위해 있다는 것이다. 성전은 보좌에서 나오고 보좌는 성전을 위해 있다.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곧 하나님의 표현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심판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처음 열한 장의 중심 원칙이 반드시 우리 일상생활과 우리의 공적 생활과 우리의 교회 생활에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 안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심판받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 삶 안에는 수많은 전갈들과 뱀들과 개구리들이 있다. 많은 전갈이 여전히 우리 가정생활과 결혼 생활에 기어들어 오고 있으며, 개구리들이 여전히 교회 생활에 고통을 주고 있다. 이 모든 전갈과 개구리들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이 심판의 결과는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오는 증거(간증)”가 된다.
다시 정리해 보자.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것은 후기의 이기는 자들의 찬양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은 단지 보좌로부터 만이 아니라 성전 안으로부터도 후기의 이기는 자들의 찬양에 응답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저 심판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더더욱 그분의 증거와 그분의 표현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들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특히 하나님의 간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성전에서 나온다. 그들은 심판의 보좌로부터 나올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표현을 위해 성전에서 나온다. 마지막 대접이 부어진 뒤에 모든 소극적인 것들이 뿌리채 뽑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 직후에 신부가 등장한다(19:7-9).
<금대접 일곱 개가 일곱 천사에게 주어짐>
계15,7절은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일곱 금 대접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라.”고 말한다.
네 생물 중 하나에 의해 주어진 일곱 대접은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채워져 있다. 대접이란 작은 것으로서 제한을 상징한다. 비록 마지막 일곱 재앙이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라고 할지라도 그분의 진노는 제한적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온 땅과 그 모든 거민은 다 멸망될 것이다.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여전히 땅에 대한 심판에 있어서 그분의 마지막 진노에 제한을 가하신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다. 짐승과 그의 시민들과 그 왕국 전체는 마땅히 어떤 제한도 없이 철저하게 멸망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진노를 쏟아 붓는 것을 소규모로 제한하신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가득함>
8절은 “그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권능으로부터 나오는 연기로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아무도 능히 그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더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때로부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중보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는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었다(애3:44).
하나님의 진노가 사탄에 의해 선동되고 적그리스도에게 영향을 받은 거역한 사람들 위에 완전히 쏟아 부어지기까지는 아무도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기도하려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아멘감사르♡♡♡
진노중에도 제한을 두시는 그 인자하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