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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쟁이 능선과 소금장수 무덤은 어디에서 왔는가?
염두고도는 함양 마천, 인월과 장수 번암의 사람들이 소금을 구하기 위하여 서리태 콩을 짊어지고 벽소령(1316.3m)을 넘어 화개 장터로 가서 소금을 교환했던 길이다.
남해에서 생산된 소금은 뱃길로 화개장터까지 이송해 육로로 쌍계사,의신마을을 경유해 벽소령을 넘어 소금쟁이능선을 넘나 들었고 비린내골의 지명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또 다른 길은 화개에서 쌍계사,칠불사를 지나 화개재(1304.9m)를 넘어 뱀사골을 경유해 운봉으로도 소통했다. 그 흔적으로 능선에 소금쟁이 무덤과 간장소등이 남아있다.
옛날 화개 장터에 소금 간수(염) 서리태 콩(두)으로 만든 두부가 유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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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능을 넘기 좋은 벽소령은 지리산의 동,서로 벋은 등줄기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빨치산을 토벌할때도 그런 연유로 작전도로를 개설했을 것이다. 이 고개를 기준으로 남해의 해산물은 섬진강을 통해 화개로 모여들었고, 북쪽의 산내,인월,제한에서 중간 수집된 산촌에서 생산되는 물자들을 마천 음정마을을 통해 벽소령을 넘어서 오고갔다. 그 대표적인 물품이 남해의 소금과 장수군 번암지역의 콩이 오고 갔기에 염두고도라 한다.
마천은 닥나무가 많아 질 좋은 한지가 생산되었고, 산내는 산촌에서 수집되는 임산물, 인월은 인근에서 생산되는 여러 밭작물이 주였다.
남쪽의 대표 화물기지는 화개였다. 화개장터의 노래 가사에서 알수 있듯 바다와 내륙의 물자가 모이는 곳이였기 더욱 번성했다. 북쪽은 마천이다. 좌측으로는 산내와 인월리 연결되고 창원마을을 지나 오도재를 넘으면 함양과 연결되는 중심에 있다. 콩은 가볍지만 소금은 비중이 2.2라고 하니 고개는 최단거리로 넘었을 것이다. 그 경로를 추정해보면 화개~화개동천~의신마을~삼정마을~오리정골~벽소령~소금쟁이능선~삼정리~마천이 최단거리 길이다.
이외에도 칠불사를 통해 연동골~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도 일부 접근했을 것이다. 삼도봉 부근에 소금쟁이무덤과 뱀사골의 간장소의 지명도 연관성이 있다.
이번엔 음정마을에서 우수청골로 진입해 주막터에서 계곡을 횡단해서 소금쟁이 능선에 진입했다.
지역 토박이인 관리인의 말로는 주막집에 예쁜 딸이 있었다고 한다. 인근에 사는 총각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미스함양에 뽑히고도 남을 미인이었나보다.
무거운 소금을 옮길때는 소, 당나귀를 이용했다. 소금쟁이 능선 초입은 급경사라 접근하기가 힘들어서 비교적 완만한 이길을 선택했다고 본다. 길을 조금 더 단축하기 위해선 비린내골로 진입해서 지능선을 가로 지르면 주막터로 바로 진입할수 있다.
능선 바로 아래에 샘터, 경로상에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능선길은 발굽으로 형성된 길이 뚜렸했다.
염두고도트랙
차마고도(차와 말)는 중국, 염두고도(소금과 콩)는 지리산 남원
지리산은 동서남북으로 여러 고을을 내었다.
산청과, 하동, 구례와 남원이 있고, 장수와 함양이 있다.
그 고을들에는 지리산의 이야기가 오랜 세월동안 진화하여 왔다.
지리산의 여러 고을들 중에서도 사람들의 인문과 자연환경이 융합된 지리산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가진 곳은 남원이다.
남원이 가진 지리산의 여러 이야기들 중에는 일상의 생필품이었던 소금 이야기가 있었다.
그 소금 이야기는 지금도 지리산의 벽소령에 소금장수 무덤으로 다가와 있다.
남원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원치를 넘어야 했다.
여원치를 넘어서면 자그마한 고원이 보인다.
북쪽에는 개마고원, 남쪽에는 운봉고원이라는 작은 고을이 사람을 반긴다.
1930년대 신작로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흔 아홉 고개를 넘어야 오갈 수 있었던 첩첩산중 지리산 분지 속에 있는 작은 나라와도 같은 고을이 운봉이었다.
외부 세계와도 소통이 쉽지 않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서,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생활 세계를 가져야 했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노는 것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교육의 방법까지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을 가졌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자급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소금을 구하는 것이었다.
바다와는 너무나 멀고 먼 첩첩 산중의 환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리산에서 자라는 붉나무에서 소금을 얻어 생활을 했다.
소금 나무라고 불리는 붉나무는 오배자 나무라고도 불렀으며, 가을이 되면 이 열매 껍질에 생긴 짠 성분을 소금대용으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사용하게 될 바다 소금이 필요하여, 지리산 벽소령을 넘어 화개 장터까지 가서 소금을 구해 와야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길을 사람들은 소금 길이라고 불렀다.
지리산의 소금 길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운봉에서 뱀사골을 지나 벽소령을 넘어 가면 화개장터가 나오고 거기에 가면 남해안의 소금이 있었다.
운봉 사람들은 그곳의 소금을 구하기 위하여 서리태 콩을 짊어지고 벽소령을 넘어 화개 장터로 가서 소금을 교환하여 왔다.
옛날 화개 장터의 유명했던 서리태 콩 두부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삼십 명으로 이루어진 운봉의 소금무데미들은 노랫가락을 부르면서 지리산을 넘나들며 하동 화개 사람들과 이웃사촌하고, 소금과 서리태 콩을 주고받으면서 살았다.
그 소금무데미 선창꾼은 훗날 동편제 소리꾼이 되기도 했고 그 소리꾼들 덕분에 동편제가 탄생되어 남원이 국악의 고장의 되는데 일조를 했다.
지리산 벽소령에 가면 그 소금 길을 오고 가다가 죽은 소금장수의 무덤이 있다.
그 소금장수의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뱀사골을 지나다가 소금가마니를 빠뜨린 일도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그 계곡물이 짜다고하여 간장소라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고, 지금도 와운 마을 입구에는 간장소가 있다.
중국의 운남성을 지나는 차마고도 보다도 더 사람 냄새나는 한국의 염두고도가 지리산 남원에 있었고 그 이야기의 스토리텔링은 이렇다.
지리산 소금장수가 다니던 염두고도 이야기
때는 고려 말!
남해안에 상륙한 왜군들은, 해안가 사람들이 개 밥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는 뚝배기 그릇을 보았다.
일본에서는 귀중품 중에 귀중품이던 옹기그릇이 조선에서는 개밥 그릇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을 침략한 왜놈들은, 그 그릇들을 귀중품으로 여기고 약탈을 해 갔다.
한편 고려 관군의 힘이 첩첩산중 운봉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 왜군의 선발대는 운봉에 잠복 침투해서 정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전략의 원칙을 가졌다.
식량은 현지에서 약탈하여 보급하고, 소금은 휴대하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왜구들은 소금을 직접 가져 왔으나, 그것이 다 떨어지면 소금을 내어놓으라며 운봉의 민가에 가서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귀하기가 이를 때 없는 소금을 운봉 사람들은, 백방으로 찾아보았다. 그러나 운봉에는 소금이 나는 곳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벽소령 너머 하동에서 온 선비 한분이 인월 장터 주막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저녁 선비는 하동 고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하동에서는 서리태 콩이 꼭 필요한 생필품이라는 것과, 하동 사람들은 농사 대신 바닷가에서 나는 소금을 팔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인월 장터 주모 할매가 아들과 함께 벽소령을 넘어 화개 장터에서 소금을 가져다 팔게 되었다. 그 후로 운봉 부자는 운봉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서리태 콩과 소금을 서로 바꾸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월 장날 주막에서 술안주를 만들면서 하동 선비가 하던 말을 듣고 있던 주모가 말을 거들었다.
“하동 화개 고을이 저 벽소령 재 너머에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거기로 사람이 오갈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는디, 어느 핸가부터 운봉 사람들이 콩 봇짐을 짊어지고 벽소령을 넘어 화개 장터에 갔지요. 절대 사람을 넘나들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지리산 벽소령도 콩 봇짐, 소금 봇짐이 넘나드는 것을 허락 하는걸 보면 지리산 성모신이 두 고을 사람들을 굽어 살피고 있다는 증거 지라우”
“그렇지라우, 저 벽소령 고개가 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세상은 없는 거지요”
사실 그랬다.
운봉 부자가 하동으로 소금을 구하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운봉 고을에서 힘센 장정들을 모아 하동으로 보냈으나 되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짐을 지고 가기에 험한 산길이기도 하거니와, 지리산 호랑이가 길목을 지키고 있어 도저히 고개를 넘을 수가 없었다.
벽소령이야 산내 지나 마천 음정 마을에서 십 오리이고, 하동 화개 삼정 마을에서도 십리밖에 안 되는 지척 간이지만, 그 고개를 넘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인월 장터 주모에게 부탁하여 지리산 성모신에게 고사를 지내 빌어 달라고 했고, 백무동에 성모 신당을 모시고 있던 주모가 성모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고사를 지낸 후 비로소 벽소령을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일이 있게 된 후, 소금을 구하러 화개 장터로 간 무데미들은 소금 값을 단단히 치러야 했다.
산중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값을 소금을 사는 데 들여야 했음으로 여간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준비 했습니까?”
노인이 물었다.
“주모가 그 답을 가져왔지요. 사람들은 콩을 먹지 않으면 잔병이 많고 키가 작은데, 화개 장터에서 힘이 없고 생기도 없는 잔병이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 거지요. 그래서 콩을 자주 먹냐고 물어보니 거의가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화개 장터에서 필요한 것이 콩이겠다고 생각하고 운봉 부잣집 어른에게 그 사실을 전했고, 그렇게 해서 운봉에서 콩을 가지고 화개 장으로 가서 소금과 맞바꾸게 되었지요.”
밖에 나갔던 주모가 돌아와 주방에서 기름장 소금을 볶다가 이 말을 듣고는 끼어들었다.
“화개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저 벽소령을 짐을 지고 넘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헙니다. 그러니 소금을 지고 지리산 금단의 고개를 넘어 오갈 사람들은 당연히 운봉 사람들뿐이지요. 어디 그 뿐이겠능기요, 지리산 성모신의 허락을 받아 낼 사람도 인월에 사는 주모 할매이고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길을 사람들은 지리산 소금 길이라고 불렀고, 중국에 차마고도 보다도 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를 가진 염두고도(鹽豆古道)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출처] 차마고도(차와 말)는 중국, 염두고도(소금과 콩)는 지리산 남원 |작성자 남원시
☞ 아영 가야고분의 소금길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 소금과 콩)
지리산 소금길은 장수군 번암면에서 남원 운봉읍과 지리산을 넘는 경남 함양 벽소령을 지나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까지 125리(약 50㎞)에 걸쳐 있다. 소금길은 1500여년 전 첩첩산중 요새에 터 잡은 ‘철의 왕국’ 가야 기문국에서 주민들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소금을 구하기 위해 오갔던 데서 유래했다. 지금의 전북 남동부 소맥산맥 자락인 운봉고원에 든 가야인들이 외부 세계와도 소통이 쉽지 않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생활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으나 소금만은 예외였다. 지리산에서 소금나무라고 불리는 붉나무 열매껍질에서 얻은 짠 성분을 소금 대용으로 사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가야인들은 소금을 구하기 위해 서리태(콩)를 짊어지고 굽이굽이 고갯길을 수없이 넘어 50㎞가량 떨어진 하동 화개장터까지 찾아 소금과 맞교환했다. 지리산 소금 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콩과 소금의 교역 거점은 언제부터인가 벽소령이 됐다. 지리산 북서쪽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에서 콩을 짊어진 짐꾼들이 인월·산내면과 함양군 마천면을 거쳐 벽소령에 도착해 지리산 남부 화개장터에서 소금을 메고 온 짐꾼들을 만나 콩과 소금을 맞바꿈으로써 물물교환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이 길은 소금과 콩의 이름을 따 ‘염두고도(鹽豆古道)’로도 불렸다.
출처 : 아영 가야고분의 소금길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 소금과 콩) 남원뉴스 news@namwonnews.com
첫댓글 이길은 벽소령은 의신조사의 불사(佛事)의 길이고
보부상이 오고간 염두고도이고, 의병들의 넘나들던 고난의 길입니다.빨치산 토벌을 위한 비운의 작전도로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소금과 콩이 오고간 염두고도(鹽豆古道)
이 길은 함양 마천, 인월과 장수 번암의 사람들이 소금을 구하기 위하여 서리태 콩을 짊어지고 벽소령(1316.3m)을 넘어 화개 장터로 가서 소금을 교환했던 길입니다.
남해에서 생산된 소금은 뱃길로 화개장터까지 이송해 육로로 쌍계사,의신마을을 경유해 벽소령~소금쟁이능선을 넘나 들었고 비린내골의 지명도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길은 화개에서 쌍계사, 칠불사를 지나 화개재(1304.9m)를 넘어 뱀사골을 경유해 운봉으로도 소통했습니다. 그 흔적으로 능선에 소금쟁이 무덤과 간장소등이 남아 있습니다.
옛날 화개 장터에 소금 간수(염) 서리태 콩(두)으로 만든 두부가 유명했답니다
동선으로 봐선 벽소령 길이 많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리산 소금길 염두고도 탐방
지리산 화개재 소금길에서 만난 간장소 이야기
지리산 화개재 소금길에는 간장소가 있다.
소금장수들이 다니던 소금길에 소금 아닌 간장 이야기는 무슨 사연을 가진 것일까?
간장은 메주에 소금물을 넣어 발효시킨 것인데 그 간장의 이야기가 화개재 소금길에 보인다.
인월장터를 생활권으로 가진 장수, 아영, 인월, 운봉, 함양과 마천의 소금장수들은 인월장터에 모여 화개재를 넘어가서 소금을 가져다 팔았다.
화개재 소금길은 번등짐 길이다.
소금 번등짐이란 소금장수 한 사람이 인월장터에서 빈 지게 두개를 지고 화개장터로 가서 소금 지게 두개로 바꾸어 오는 것을 말한다
인월장터에서 빈지게 두개를 화개장터로 가져간 다음 소금을 진 지게 하나는 화개소금곡간에 세워두고 소금지게 한 개를 먼저 지고 화개재를 향하여 가다가 오리쯤에 도착하면 그 자리에 소금지개를 내려놓고 빈 몸으로 화개장터로 되돌아 간다.
빈 몸으로 화개장터로 돌아온 다음에는 화개장터 소금곡간에 세워둔 소금지게 한 개를 다시 지고 화개재를 향하여 십리쯤 가서 소금지게를 내려놓는다.
(계속)
그런 다음 오리를 되돌아 가서 먼저 새워둔 소금지게를 지고 화개재를 향하여 십리를 가서 세워두고 또다시 오리를 되돌아 가서 거기에 세워둔 소금지게를 십리 앞으로 옮기는 운반법이 소금번등짐이다.
그렇게 하면 화개장터에서 출발한 소금지게는 화개재를 넘어 소금장수 한명마다 소금지게 두개가 번등짐으로 인월장에 도착한다.
그 소금 번등짐 길에 간장소 이야기의 씨앗이 있다.
화개재를 넘어 먼저 가져온 소금 지개 하나가 쉬는 곳은 뱀사골 용룡대 계곡이었다.
계곡 중간지점에 뱀소가 있는데 그 쏘에서 오래 동안 살던 뱀이 이무기가 되어 아래 쏘로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 뱀은 백일만 지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세워둔 소금지게가 너머 지는 바람에 소금이 그 이무기가 살던 쏘에 쏟아져 버렸다.
짠물을 몽땅 들이 마신 이무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도망을 가서 안착한 곳이 지금의 요룡대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화개재 소금길에는 용이 못된 그 이무기의 행패가 넘쳐났다.
갑자기 천둥번개를 몰아와 소금가마니가 비에 젖게 하고 항상 다니던 길에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기도 했다.
(계속)
소금장수들은 그 이무기가 당초 살던 쏘에 제를 올렸다.
한참 제를 올리는데 쏘 가운데 구멍에서 간장 냄새가 나는 시커먼 물이 솟구쳐 올랐다.
그 쏘에는 이무기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소금지게가 그 쏘로 넘어질 때 형 이무기는 아래 요룡대로 피할 수 있었으나 동생 이무기는 소금물에 체한체로 구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소금장수들이 그곳에 제를 올리게 되자 동생 이무기 배속에 있던 소금물이 검거 발효가 되어 토해낸 것이다.
그 후로 소금장수들은 화개재 소금길을 무탈하게 오고가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간장소라고 부르게 되었다.
안내판에는 소금장수가 소금을 빠트려 생겨난 이름이라고 전할 뿐이다
그 길은 이제 간장소 이야기를 상속받지 못한 등산길이다.
(끝)
김용근님 페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