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에도 막부幕府시대(1603~1867)까지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과의 국교 유지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막부가 안정을 유지하면서 막부의 지배를 유지, 강화하려는 국학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신의 나라로 미화하여 민족의지를 단합하는데 노력한다. 그들은 일본의 신과 천황이 조선의 신과 왕이 되어 조선을 다스렸다고 없는 말을 조작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직적이고 계속적인 국민교육을 통해 상식화하고는 막부 말기에 정한론으로 발전시킨다.
그러한 사고가 바탕이 되어 명치시대(1868)이후 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일한일역론(日韓一域論) 등 조선 침탈의 관념적 이론들이 나온다.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를 흉내내며 1874년 4월 대만을 침공, 쉽게 장악하여 식민통치의 경험을 쌓은 일본은 즉각 조선으로 눈을 돌려1875년 강화도사건을 일으키고 그 다음해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1885년 <대동아합방론>이 나온다. 그 무렵에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조작한다.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의 명문銘文을 긁어내어 조작한 것은 이미 그 이전이고, 그리고 마침내 한반도를 집어삼킨 일제는 철저히 한국사를 말살한다. 그 방법은 먼저 이 땅에 전해 온 모든 역사책을 샅샅이 찾아내어 불태워버리는 작업이었다.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운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 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압수에 나섰다. 전국의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兩班家, 세도가勢道家를 샅샅이 뒤졌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 정확히 알수 없으나,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할때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한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 관계, 조선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 열전류에, 심지어 미국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았던 초대총독 데라우찌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 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 시킴으로써, 사서史書의 인멸에서 더 나아가 역사의 왜곡 편찬에 직접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중추원은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附日)역적들이 고문으로 앉아 있었고, 참의와 부참의 15명이 편사업무를 맡고, 일본의 역사학자 3인이 지도, 감독을 맡았는데, 그들 어용학자들이 총독부의 명령으로 작성한<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는 조선인에 대한 동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편찬사업의 이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때 그 어용학자들에게 내려진 편사지침에는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고 되어 있다. 조선총독부는 이 같은 편사 원칙을 세우고 공명 적확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면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여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한다. 겉으로는 중추원이 사료 수집을 맡아 대여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하였다. 압수범위는 이 나라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인물등으로 더 늘어났다. 이에 따라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까지도 압수되었다.
문헌이 풍부했던 문화의 나라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서적들이 나왔던지 총독부 당국자들은 <1918년 말까지 오로지 사료의 수집에만 노력하였던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예상외로 많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압수하고 불태우고 다시 수색하고, 엄청난 인원과 비용을 들였지만 씨를 말리려던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일제는 서적 수색을 계속 사업으로 연장하며 본격적인 조선사 왜곡 편찬 업무에 들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 사이또는 1922년 조선사람을 반半일본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떠벌렸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책의 하나로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총독부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위원회가 1923년 1월8일 결정한 편찬강령에서는 조선사 편찬의 시대구분을 함에 있어서 제1편을 삼국이전으로 정하여, 그 전인 1916년1월 조선사편찬사업 착수 당시 정했던 시대구분 중 <상고삼한>을 없애버림으로써, 우리 상고사를 점차 말살하려는 저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편찬위원회는 1925년 일황 칙령에 의하여<조선사편수회>라는 독립관청으로 승격되었다. 자료 수집 방법에 있어서, 강제 수색, 압수가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장자들이 자료를 숨기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하는 형식으로 그 방법을 완화하면서 총독은 관계자들에게 편찬사료 탐방이란 이름으로 광범위한 사료 수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국의 도, 군, 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토록 강력히 지시하였다. 한편 조선사 시대구분에 있어서, 제1편을 종전에 정한<삼국이전>에서<신라통일이전>으로 고쳐 다시 끌어내림으로써 상고사 말살의 저의를 거듭 보였다. 겨우 남겨둔 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였다. 삼국사기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 신화로 각색해버린 것이어서, 이 두 책은 단군을 부정하는데 활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두개의 책도 변조를 기도하였다. 예켠대. 삼국유사는 진본이 2권 남아있는데 한국의 규장각에 있는 책에는 신불이라 된것을 일본이 가지고 있는 다른 한 권에는 신시로 획을 약간 삐쳐 바꾸어 놓았다. 신불은 한웅천황의 이름이다. 이것을 신시라고 고치면 땅이름이 되어 버린다.
신시라는 땅 이름은 <신의 도시> 가 되어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냄새를 풍긴다. 바로 일제가 우리 상고사를 신화로 조작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렇게 바꾼 것이다. 한웅의 이름인 신불이 맞다는 것은 그 뒤의 역사서술에서 여러 책에 신불씨神市氏라는 족명이 계속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도 그렇다. <옛날에 한구이 있었다>는 뜻인 석유한국昔有한國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도 석유한인으로 변조하여 고조선의 입국 사실을 깍아 버리고 환인과 환웅을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하는데 활용하였다. 이러한 무모한 변조는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조선에 와서 조선사편찬 초기부터 16년여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이마니시류가 1921년 <단군고>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모교인 경도제대에<조선고사연구>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조선 중종7년(1512)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을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 영인본이라 하여각계에 배포한 것에 현출 되어있다. 육당 최남선은 이를 일컬어 <천인의 망필>이라고 통박한 바 있다.
이마니시류는 단군신화설을 조작한 장본인인데. 이와 같이 천박한 자에 의해 명백히 변조한 자료에 기초한 역사왜곡을 우리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여 우리 스스로 단군을 신화라고 하고 있으니, 통곡할 노릇이다. 조선사편수회는 명목상 소수의 조선인 학자들을 포함하여 들러리 역할로 악용했을 뿐, 조선사편찬은 일본인 학자들의 주도로 강행되었다. 조선사편수회의 마지막 회의는 1935년 7월5일 열렸다. 그리고 1938년에 본문 35권 총 24,110쪽의<조선사>가 완간 됐다. 그 방대한 기록 중에서 단군에 대하여 기술한 것은 고려 공민왕24년 백문보라는 사람이 죽을때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 <우리나라는 단군이래 이미3천6백년이 되니 이는 곧 대주원(大周元)의 운이 다시 돌아오는 때이다.>라는 구절에 나오는 <단군>두자 뿐이다. 일제는 이 책의 발간을 위하여 1910년부터1937년까지 무려 27년간에 걸쳐, 자신들의 표현으로도<전 조선 각 도의 방방곡곡에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또한 내지(일본)와 만주까지 찾아>가서 사료를 수집하였는데 <전국에서 발견되는 사료가 너무 많아 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조선사>를 발간하고는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펴낸 그 책을 뒷받침하는 사료만 남기고 나머지는 인멸해 버렸다. 일본이 인멸한 것은 역사책뿐만 아니다. 민속도 말살했다.
■일제는 침탈 초기 한국의 민속조사에도 착수하였을 뿐아니라 급기야는 서낭당이나 부락제 등을 미신이라는 명목으로 말살했다.
이는 미신을 없애기보다는 한국 민족의 단결을 우려하여 그 초점을 없애려는 기도였던 것이다 일제가 주장한 이른바 미신은 현재의 일본에 더욱성행하며 요즘도 마을제를 중심으로 일본 민족의 단결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부락제나 서낭 신앙 등을 일본보다더 철저하게 미신으로 치부하여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고학적 발국 성과도 인멸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알려진 구석기 유적은 1940년 일본인 나오라 노부오가 발견한 함경북도 종성군 동관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식민사관에 따라 그 사실을 쉬쉬하고 발견 사실 자체까지 외면했다. 조선 땅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이 나오지 않아야 그들이 조작한 조선사(조선에는 구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가 없다는 주장)를 한국의 역사로 강요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석기 유물의 발견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패망 직전까지 우리나라의 무수한 고분을 파헤쳐 왕관을 비롯한 역사시대의 유물을 강탈하였다.
◾황종국 : 1953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부산상고로 진학하였다. 졸업 후 한국은행에 근무하면서 성균관대학교 법학과를 다녔다(동 대학원 박사과정 1학기 수료).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14기)을 수료하였다. 1985년부터 거의 부산지역에서만 법관으로 근무하였다. 1992년에 무면허 침구사에 대한 구속영장청구를 기각하면서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이 진정한 의사다."라는 말을 남겼다.
출처 :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 - 황종국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