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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60. [역경의 열매] 박종순 (1-35) “너는 커서 목사가 돼야 한다” 어머니의 당부
가난으로 하루하루 힘겨운 삶 속에도 신앙심 깊은 어머니 기도 덕에 늘 담대
박종순 목사가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한국교회지도자센터에서 인터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40년, 나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화선 전도사는 경남 함안에서 농사를 지으시다 머슴에게 모든 걸 뺏기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가족은 전북 정읍의 작은 마을 화호리에 정착했다. 말이 정착이지 피난 온 셈이었다. 아버지는 화호교회에서 설교하셨던 조사였다. 평일에는 농사짓고 주일에는 교회 종 치는 일부터 청소와 설교까지 도맡아 하셨다.
신학을 공부하셨을 리 없는 아버지는 오직 기도로 설교를 준비하셨다. 주석도 없으셨다. 단지 1932년 쉬러 윌리엄 선교사가 쓴 ‘구약사기’라는 역사책을 참고해 설교를 준비하셨다고 한다. 신학을 배우지 못하셨지만 언제나 정성스럽게 설교를 준비하셨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는 구약사기 책을 펴보거나 가만히 볼에 대 봤다. 아버지는 이 책을 유산으로 남기셨다. 어렸던 난 그 책에 기대 아버지의 숨결을 느꼈다.
어머니 최선옥 권사는 마흔세 살에 날 낳으셨다. 노산이었다. 세 명의 누나들에 이어 첫 번째 낳은 아들이자 마지막 자식이었다. 아들이라고 특별 대우를 받았던 기억은 없다. 가난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큰일이었다.
대신 어머니는 길을 보여주셨다. “종순아. 너는 커서 목사가 돼야 한다. 엄마랑 약속하자.” 눈만 마주치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만큼 자주 이야기하셨다.
아들의 꿈을 정해주셨지만, 목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셨다.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면서 힘겹게 살아가던 분이 목사가 되는 길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가 목사가 되기를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셨다. “주님, 종순이를 주님의 종으로 바칩니다. 좋은 목사 되게 해 주세요.” 어머니의 기도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가난을 이긴 힘은 신앙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설교하시던 화호교회에 다녔다. 나만 신앙에 의지했던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동네 사람들은 우릴 불쌍하게 여겼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가장까지 없으니 걱정이 될 법도 했다.
어머니는 배운 건 없으셨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기쁨을 아셨다. 새벽마다 날 깨우셨다. 그 길로 교회로 향했다. 어두웠던 새벽길,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아마 어머니도 내게 의지해 새벽길을 걸으셨으리라. 교회에 도착하면 무릎을 꿇으셨다. 나도 서성이다 눈을 감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들리는 건 어머니의 기도 소리뿐. 나는 그 기도 안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내 체온을 느끼며 기도하셨다.
기도의 그늘은 날 담대하게 만들었다.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부잣집 아이들이 부럽지도 않았다.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지만, 주눅 들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했다. 배고프면서도 누구보다 배부른 것처럼 행동했다. 위선이 아니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늘 배부르니까.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종순 (1) "너는 커서 목사가 돼야 한다" 어머니의 당부
* [역경의 열매] 박종순 (2) 달콤한 사탕 한 알과 바꾼 '주님의 것'
* [역경의 열매] 박종순 (3) "종순이 노래 잘하네, 음악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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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순 목사 약력=1940년 전북 정읍 출생. 장로회신학대·숭실대 졸업, 미국 풀러신학대 목회학 박사, 서울 충신교회 담임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숭실대·국민문화재단·한국세계선교협의회 이사장 역임. 현 충신교회 원로목사, 한국교회지도자센터 대표.
***[역경의 열매] 박종순 (2) 달콤한 사탕 한 알과 바꾼 ‘주님의 것’
사탕 사 먹자는 친구의 제안에 주일 헌금으로 사 먹고 헌금은 절반만…사실 알고 회초리로 일깨우신 어머니
박종순 목사가 지난 22일 서울 용산구 충신교회 사무실에서 어머니 최선옥 권사의 사진을 들고 있다.
화호리는 산과 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지었다. 마을 중심에는 화호교회가 있었다. 아버지가 설교하던 교회는 내게도 특별했다. 교회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기도를 한 걸 안 뒤로는 더욱 각별했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는지 교회에 가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교회학교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설교를 듣고 나면 구연동화 시간이 이어졌다. 선생님이 동화 이야기를 시작하면 정신을 놓고 들었다.
성경공부가 시작되기 전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셨다. 대답 대신 성경구절을 외워야 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하는 식이다.
학사관리도 철저했다. 헌금 액수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전도도 해야 했다. 성경구절 암송과 헌금, 전도가 필수 과제였다. 성탄절이 되면 시상을 했다. 큰 상을 받겠다고 모두 열심히 외웠고 성실하게 헌금했으며 전도했다.
어머니는 주일 저녁마다 다음 주일 헌금 10환을 주셨다. 지폐는 다리미로 정성스럽게 다리셨다. 빳빳하게 펴진 돈을 두 손으로 받아 성경 사이에 넣었다.
이토록 소중한 헌금 때문에 사달이 났던 적이 있다. 동네 입구에 구멍가게가 있었다. 식료품도 팔고 군것질거리도 팔던 작은 가게였다. 물건들에는 항상 뿌연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토요일이었다. 친구가 느닷없이 사탕을 사 먹자고 했다. “종순아, 너 헌금 있잖아. 그걸로 사 먹자. 남은 돈 헌금하면 되잖아.”
솔깃한 제안이었다.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성경 안에 넣어뒀던 돈을 꺼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심장이 뛰었고 손은 떨렸다. 하지만 사탕 먹을 생각에 한없이 설렜다.
10환을 내자 주인은 사탕 한 개와 5환을 거슬러줬다. 누가 볼까 서둘러 입에 넣었다. 달콤했다. 오물거리며 빨아 먹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지에 싸 다락에 감췄다.
주일 아침, 사탕 먹을 새도 없이 교회로 달려갔다. 헌금을 냈더니 선생님이 “맨날 10환 하더니 오늘은 5환이구나”라고 했다. ‘어머니에게 확인할 것이다’라는 경고라는 걸 알 리 없었다.
한참 놀다 집에 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이리 오거라.” 어머니가 건조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단단한 버들가지 두 개가 어머니 앞에 있었다. 하필 방 청소하던 어머니가 신문지에 싸둔 사탕을 발견하신 것이었다. 선생님도 어머니를 만난 뒤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주의 종이 되라는데 헌금에 손을 대다니. 종아리 대라.” 부끄러웠다. 맞기 시작하니 너무 아팠다. 셀 수 없이 맞았다. 밥도 안 주셨다. 퉁퉁 부은 종아리를 만지다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자는데 숨쉬기가 답답한 걸 느꼈다. 눈을 떴다.
어머니가 나를 안고 기도하고 계셨다. “주님, 종순이의 죄를 대신 회개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종순이가 다시는 주님의 것에 손대지 않게 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짐했다. “주의 종이 될 사람이니 정직해야겠다. 거짓말하지 말자. 주님은 모두 보고 계신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3) “종순이 노래 잘하네, 음악가가 되면 좋겠다”
머릿속에 목사 소명으로 가득한 내게 “웅변도 잘하니까 정치인 돼도 좋겠다” 길잡이 돼주신 은사들
박종순 목사(오른쪽)가 11살이던 1951년 고향 마을 화호리에서 어머니 최선옥 권사와 함께했다.
좋은 목사가 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새 나의 꿈이 됐다. 장래희망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장점이었다. 푯대를 세웠으니 좌고우면할 이유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기도하게 됐다. “주님, 좋은 목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절 이끌어 주세요.”
교회와 학교는 놀이터였다. 산과 들에서 뛰어노는 것도 좋았지만 교회와 학교에서는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사실 날 키운 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화호초등학교에서 많은 스승을 만났다. 2학년 때 담임은 이영자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 중 유일하게 이름을 기억하는 은사이시다.
친구의 누나이기도 했고 장로님 딸이다 보니 공감대가 많았다.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걸 알았던 선생님은 늘 복음을 선포하셨다. 신앙적으로 이끌어 주신 것이다.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분이었고 하나님이 내게 보내 주신 도움의 손길이었다.
4학년 때는 정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내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종순아, 글씨를 바로 써야 한다. 괴발개발 써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 글을 바르게 써야 정직한 말을 할 수 있는 거란다. 건강한 말은 널 바른 어른이 되는 길로 이끌 것이다.”
따뜻한 조언이었다. 사실 누구도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도 계시지 않았고 주변에 친척도 없었다. 인생의 길잡이를 만나는 게 쉽질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선생님들의 사랑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선생님들로부터 풍성한 사랑을 받았다. 모두 주님의 은혜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음악 담당이었다. 그분이 어느 날 포스터 한 장을 내밀며 전라북도 주최 노래경연대회에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얼떨결에 출전했다. 연습이라고는 교회에서 찬양을 부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독창 부문에서 1등을 차지했다. 경쟁을 통해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기회였다.
그 뒤로 선생님은 날 음악실로 자주 부르셨다. 굶는 걸 아셨던 선생님은 자신의 도시락도 나눠주셨다. 짧은 식사시간이 끝나면 함께 노래를 불렀다. 시골 학교였지만 낡은 피아노가 있었다. 선생님은 연주하시고 난 노래를 불렀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민요인 산타루치아를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난다. “음악에 소질이 있구나. 종순이는 음악가가 되면 좋겠다.” 선생님의 조언에 잠시나마 성악가를 꿈꿨다. 그분은 내게 여러 직업의 세계를 보여줬다. “얘야, 넌 웅변을 잘하니까 정치인이 돼도 좋겠구나.” 가끔 생각한다. ‘그 선생님이 교회에 다니셨다면 내게 목사가 되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당시 내 머릿속엔 목사라는 꿈이 가득했다. ‘역시 목사가 나의 소명이구나.’ 물론 말을 잘하는 것과 설교를 잘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설교는 신앙적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바람이 서원기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목회자의 길이 주님이 내게 준 소명이라고 확신했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4) ‘중학교 마크 붙은 교복’ 보자 눈물이 왈칵
학비 없어 진학 포기하고 막막한 때 평소 아껴주시던 음악 선생님 등록금 내주시고 교복까지 선물로
박종순 목사가 졸업한 전북 부안 백산중학교의 현재 모습. 박 목사가 다녔던 학교는 현 교사에서 4㎞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머니가 중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누나들도 마찬가지였다. 온 가족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고민에 빠졌다.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지. 설마 가지 말라는 건가. 입학시험 합격할 실력도 되는데….’
친구들은 중학교 입시를 준비한다고 난리였다. 정작 공부를 잘해 큰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됐던 나만 제자리걸음이었다. 초조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어머니, 저….” 말을 시작도 안 했는데 어머니가 내 말을 잘랐다. “종순아, 미안하다. 중학교 보낼 형편이 안 되는구나. 일단 1년만 쉬었다가 형편을 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초가을이었지만 시골이라 찬바람이 불었다. 어두운 논두렁을 무작정 달렸다. 어머니 말씀은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중학교에 가지 말라니…. 당시는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학비를 내야만 다닐 수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은 중학교 학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목사가 되라면서, 중학교도 안 보내면 어떻게 목사가 되란 거야.’ 불만이 터져 나왔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일단 시험은 보기로 했다.
시험날이 되자 6㎞를 걸어 시험장에 도착했다. 왠지 친구들 보는 게 민망해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에 숨어 있었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서둘러 교실로 돌아왔다. 문제는 쉬웠다. 그럴수록 절망은 깊어졌다.
시험을 치르고 해가 지났다. 친구들은 새로 산 교복을 자랑했다. 새 책가방을 샀다며 보여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언제나 당당했지만, 중학교도 못 갈 상황이 되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2월 중순쯤이었다. 날 아껴주던 초등학교 음악 선생님이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만나자마자 근처 고깃집으로 가는 게 아닌가. ‘고기를 사주시려나’했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선생님은 고기 두 근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종순아, 미안한데 고기 좀 내 하숙집에 가져다줄래.” ‘이게 무슨 소리지. 가난하다고 놀리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춥고 배고픈데 난데없이 심부름을 시키다니,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뜨거웠다.
문득 서러웠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리움은 짧았고 원망은 길었다. 고기는 선생님 하숙집 방 안에 던져놓았다.
며칠 후 그 선생님이 또 날 보자고 했다. ‘참을 수 없어. 한마디 해야겠다.’ 이런 다짐으로 약속장소인 학교로 갔다. 굳은 표정으로 교실 문을 열었더니 선생님이 환하게 웃고 계신 게 아닌가. “가까이 오거라.” 그러더니 큰 종이가방을 건네셨다. “종순아, 꺼내봐라. 선물이다.” 검은색 교복이었다. 모자도 나왔다. 백산중학교 마크가 붙어있었다. 기쁨의 눈물이 쏟아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종순아, 내가 그 학교 교장과 친구다. 널 추천했다. 그날 고기 잘 가져다 줘서 고맙다. 심부름했다고 중학교에 보내주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라.”
그리고는 날 안아 주셨다. 음악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등록금을 내주시기로 한 것이었다. 교복도 이분들의 선물이었다. 주님은 내게 천사들을 보내주셨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5)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게 “교회 개척해 볼래?”
알고 지내던 목사님 제안으로 방학동안 여름성경학교 열어… 훗날 그 기도처가 교회 돼 감격
박종순 목사가 첫 목회를 경험했던 전북 완주군 율소리의 기도처는 훗날 봉동율소교회가 됐다. 사진은 봉동율소교회 종탑과 예배당 모습.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꿈까지 꿀 정도였다. 가난은 소년의 열망까지 뺏지 못했다. 늘 기도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는 기도가 간절하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주님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좋은 선생님들을 통해 날 중학교로 이끌어 주셨다. 언제나 좋은 곳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때도, 지금도 그렇다.
은혜 가운데 시작한 중학교 생활은 감사와 기쁨이 가득했다. 마음도, 몸도, 신앙도 성숙했다. 날이 갈수록 목회자가 되겠다는 희망이 또렷해졌다.
중학교 3학년이 됐다.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는지 어머니가 고등학교 이야기를 먼저 꺼내셨다.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보던 내겐 천군만마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저 전주로 유학 가고 싶어요. 영생고등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좀 더 넓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어차피 대학도 서울로 가야 하니까 미리 경험하자는 노림수도 있었다. 중학교 입학을 위해 너무 마음을 졸여서였을까. 고등학교 진학은 순조로웠다.
전주에서의 유학 생활은 유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실했다. 뭘 하든 열심히 했다.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좋은 목사가 되자는 것이었다. 흔들리지 않았던 목표가 일상을 이끌었다. 신앙이 깊어졌던 시간이었다. 영생고에 신앙 좋은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났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목사님이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종순아, 너 교회 개척해 볼래?” 뜬금없었다. “전 못합니다. 어린 데다 신학을 한 것도 아니고….” 목사님은 완고하셨다. “너보고 목사 노릇하라는 게 아니다. 방학 동안 시골에 가서 동네 아이들과 잘 놀라는 말이다. 전주에서 신앙 생활하며 배운 것도 가르쳐 주고 좋잖니.”
‘또래들과 여름성경학교 하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어차피 화호리에 가도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목사님께는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방학이 시작되기까지 찬양 연습도 하면서 즐거운 상상에 빠졌다.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방학식이 끝나고 바로 짐을 싸 전북 완주 봉동읍 율소리를 찾았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작은 기도처가 있었다.
교인들은 많지 않았다. 주민들은 낯선 외지인을 내치지 않고 품어 주셨다. 마을의 한 부잣집에서는 마당을 내주고 천막까지 마련해 줬다.
그해 여름, 나와 율소리의 까까머리들은 기도처와 천막, 산과 들을 뛰며 즐겁게 지냈다. 기도하고 찬양하다 축구와 배구도 했다. 물고기 잡는다고 온 냇가를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전주에서 갈고 닦은 찬양을 전수했다. 이웃 마을에서도 율소리를 찾았다. 어느새 100여명이 모였다.
훗날 율소리의 기도처는 봉동율소교회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 찾았던 기도처가 교회가 됐다는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감격스럽다. 교회가 반석 위에 서는 데 작은 기여를 한 것 같아서다.
얼떨결에 경험한 서툰 목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목사가 된 뒤 눈물 날 정도로 힘겨웠던 순간에 율소리를 떠올렸다. 교인들과 즐겁게 사역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님의 종이 늘 비단길만 걸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역경의 열매] 박종순 (6) 갓 스무 살에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다
‘교회개척을 한 소년’이라는 소문에… 한 목사님, 교회 맡아 달라 요청
박종순 목사가 다녔던 전주고등성경학교의 전경. 학교는 1961년 전주한일신학원이 된 뒤 4년제 대학인가를 받아 98년 한일장신대로 교명을 변경한다.
1940년생인 나는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일제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냈고 철이 들자 전쟁이 터졌다. 결핍이 일상이었고 살아남는 게 은혜였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 감사할 것도 많았다. 주변의 모든 것을 두고 감사기도를 했다.
율소리에서 동네 아이들과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독특한 경험이었고 큰 은혜를 받은 시간이었다. 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대학에 가지 않았다. 전주 시내에 있던 ‘전주 고등성경학교’에 먼저 진학했다. 이 학교는 훗날 한일장신대가 됐다.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사모하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니 꿀맛처럼 달았다.
그런데 지역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개척을 한 소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율소리에서 보낸 여름방학을 두고 하는 뜬소문이었다.
소문은 무서웠다. 한 목사님이 날 찾아오셨다. “자네는 목회 경험도 있으니 완주에 있는 서두교회를 맡아주겠나.” 목회경험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찬양하며 여름방학을 보낸 게 전부였다. 그래도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를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다리에 힘이 풀리고 비지땀이 쏟아졌다.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이 돌보기엔 교회 규모가 너무 컸다. 교인이 300명이 넘었고 장로님도 3분이나 계셨다. 도망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퇴로가 없었다. 부딪혀 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뭐라 설교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과연 설교를 했던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청년부원들과 시간이 날 때마다 배구를 했던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성탄절을 앞두고 음악회를 준비했던 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휘자가 없어 직접 선곡부터 지휘까지 맡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래도 교역자였다. 대접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리다고 무시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장로님의 기도가 마음에 걸렸다. “주님, 이 시간 어린 종이 나와 말씀 전하니 능력 주옵소서.”
맞는 말이었는데도 기분이 나빴다. 시내에 나가 중절모와 검은색 뿔테 안경을 구했다. 어른들의 물건 뒤로 숨기로 작정했다. 그런다고 나이가 들어 보일 리는 없었다. 위장을 한 뒤 장로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장로님, 늘 사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많이 어리죠?” 장로님께서는 날 한참 쳐다보시더니 “알았어요”하고 일어나셨다.
주일이 됐고 그 장로님이 기도를 위해 단에 오르셨다. “주님, 사랑하는 젊은 종에게 능력과 권능을 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어린이가 젊은이가 된 것이었다. 어리고 젊은 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런 데 신경을 썼던 그때, 지금 생각해도 많이 어렸다.
나이와 관련해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총회장까지 마치고 200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나성영락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 61세 때였다. 설교에 앞서 그 교회 장로님이 대표기도를 하셨다. “이 시간 모국에서 노종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 노종이라니, 내가 그렇게 늙었다니’ 언짢았던 그 순간 서두교회 장로님 앞에서 투정하던 약관의 박종순이 떠올랐다.
“그래, 어린 종이 젊은 종을 지나 이제 노종이 됐구나. 나이 어리고 많은 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언제나 주님의 종으로 살고 있는데.”
***[역경의 열매] 박종순 (7) 장로회 신학대 진학… 가난했던 시절, 늘 기도했다
나이·수준 달랐던 동기들과 경쟁, 공부 어렵고 배고파도 늘 당당해… 식비 부족해 산책하며 묵상하기도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학교 옛 본관 건물 모습. 박종순 목사는 이곳에서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전주 고등성경학교를 마치고 장로회신학대에 진학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성경학교였다.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 신학교였던 장신대와 연결됐다. 선교사님들이 교수로 사역하는 학교였다. 세계의 신학을 접할 수 있는 학풍이 마음에 들었다.
1960년대 초, 장신대가 있던 서울 광진구 광장동은 민둥산이었다. 사방이 벌판이었다. 저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였다. 여름에 큰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범람했다. 작은 동산에 학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외딴 섬 같은 적막함이 있었다.
장신대에서 공부는 어려웠다. 동기들과 수준이 맞지 않았다. 당시에는 학생 구성이 다양했다.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대학에 다니다 편입한 학생도 있고 아예 대학을 졸업한 형님들도 있었다.
많이 배운 이들과 경쟁하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시골에서 초보 목회를 경험하다 성경학교 다닌 게 전부인 나는 내세울 이력이 없었다. 함께 공부한 친구 중에는 훗날 월드비전 회장 박종삼 박사, 장신대 교수 이형기·박수암 박사, 예장통합 총회장 김순권 목사 등이 있었다.
수준과 나이에 차이가 났지만 우린 모두 친구였다. 가난하던 시절, 가난이 우릴 하나로 묶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대표였다. 스스로 ‘가난과 과대표’라 여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늘 당당했다. 오랜 세월 따라다녔던 가난이 오히려 날 강하게 만들었다.
장학금 덕분에 휴학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보요한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남장로교 총회가 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기숙사 비용은 권세열 선교사가 홍제동에 연 야학에서 교사로 일하며 받은 돈으로 충당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었지만 기숙사 비용을 낼 정도는 됐다.
문제는 식사였다. 식비가 늘 부족했다. 학교 식당에서 파는 식사가 13환이었다. 밥 한 그릇에 시래깃국이 전부였지만 이마저도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밥을 못 먹은 날이면 조용히 학교 뒷산인 아차산으로 향했다. 산책하며 묵상했다. 나름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산책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종종 사라지는 날 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63년 문을 연 워커힐호텔이 화근이었다. 한 친구가 날 따로 불렀다. “종순아, 너희 집이 아무리 부자라도 그렇지. 신학생이 매일 워커힐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니.”
황당했지만 크게 웃고 말았다. 가난하다고 좌절하지 말자는 소신을 친구들이 알아준 것 같아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가난했던 시절, 우린 늘 기도했다. 밤마다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가마니를 깔고 무릎을 꿇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하늘의 별은 잡힐 듯 가까웠다. 들리는 건 옆에 있는 친구의 기도 소리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화호리 교회에서 어머니와 기도하던 때가 떠올랐다. 물려줄 유산이라고는 신앙밖에 없었던 어머니가 정말 좋은 걸 주셨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장학금을 준 선교사님이나 좋은 신학의 동지들, 언제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았다. 돌아보면 후배들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삶이었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8) 우연한 두번의 만남이 이어준 충신교회
정훈상 목사님과 찬양 인도 맡았던 인연으로 사역 약속… 다시 만나 사역 부탁에 두말없이 “네”
박종순 목사(오른쪽 첫번째)가 1960년 12월 25일 전북 서두교회 성탄절 예배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
신학 수업을 마친 뒤 목사 고시를 보기 전 전도사로 사역해야 했다. 1964년, 나는 운명처럼 충신교회와 만났다. 당시 교회는 용산구 후암동에 있었다. 교회 근처에 병무청과 시장이 있었다. 작은 교회였다. 지금 충신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정훈상 목사님이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성결교 목사였지만 장로님들이 그분의 설교에 감동해 담임목사로 모신 것이었다. 내가 전도사로 가게 된 건 정 목사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정 목사님은 부흥강사로 유명하셨다. 어느 날 목사님이 한 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오셨다. 그 교회 목사님이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박 전도사가 찬양을 잘하니 이번 부흥회에 오셔서 찬양 인도를 해 주세요.” 거절할 수 없었다. 순종하며 부흥회 찬양 인도를 했다. 거기서 정 목사님을 만났다. 그때 목사님이 나를 유심히 보셨던 것 같다.
부흥회 마지막 날 목사님이 나를 불렀다. “박 전도사. 다음에 나랑 같이 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모시고 싶습니다.” “사역할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짧은 대화였다. 물론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일상적인 인사라고 여겼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둔 63년, 동기들 모두 임지를 두고 기도했다. 그때도 충신교회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가장 먼저 부르는 곳에서 사역하겠다고 기도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는 찬양이 교회 선택의 유일한 조건이던 시절이었다.
그해 11월 학교에서 정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우리 교회로 오셔야죠.” 목사님은 그때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네. 가겠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기도한 것처럼 순종했다.
정 목사님은 내게 교회학교와 장년 교육을 맡기셨다. 하지만 막상 교회에 가보니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교회 예산으로는 내 사례비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옛날 충신교회의 모습이 그랬다.
정 목사님은 교회 집사 3명에게 매달 1000원씩 부담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렇게 모아진 3000원이 내게 책정된 사례비였다. 그 돈으로는 쌀과 부식을 샀다. 여가활동 등을 할 형편은 안 됐다. 밥 먹으면 사역하는 게 일상이었다.
사택은 갈월동에 얻어 주셨다.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허술한 집이었다. 방이 세 개였다. 처음에는 나 혼자 다 쓰는 줄 알고 잠시 기뻤다. 꿈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간방에는 알코올 중독자인 주인이 앉아 있었다. 끝 방에는 모자가 살았다. 나에게 배정된 방은 한 칸이었다.
천장은 쥐들의 놀이터였다. 비가 많이 내려 천장이 젖으면 쥐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방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그때는 그래도 감사하며 살았다.
사역은 쉽지 않았다. 외부 활동이 많으셨던 정 목사님을 대신해 모든 사역을 해야 했다. 새벽기도부터 심방, 교육부 행사 준비 등이 모두 내 책임이었다. 단독 목회를 경험한 셈이었다. 혹독한 훈련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때 받았던 목회훈련이 내 생애를 지배했다. 그만큼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면에서 늘 정 목사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게 기회를 주셨으니까 말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9) 화사하고 밝게 웃는 모습… 첫눈에 반해 결혼
여러 젊은 여성 중 유독 눈에 띈 여인… 차 마시며 ‘목사 사모 적임자’로 확신
박종순 목사(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의 가족사진. 박 목사의 왼쪽이 최영자 사모다.
아내 최영자 사모를 만난 건 내가 스물여섯 살 때였다. 충신교회 교육전도사 시절이었다. 어느 주일, 교회학교 아이들과 함께 있는데 교회에 여러 명의 젊은 여성들이 들어왔다. 유독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교회에 오면 주위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멀리 지나가는 것만 봐도 한 주가 즐거웠다. 오가다 인사한 게 전부였지만 내 마음은 커졌다.
우연히 미래의 아내와 차를 마실 기회가 생겼다. 어색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화를 해보니 심성이 고왔다. 신앙은 청교도적이었다. ‘목사 사모로 적임자를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속앓이가 시작됐다. 결혼할 운명이었는지 몇 차례 더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내도 내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 시절 용산구 갈월동에 ‘태양당’이라는 이름의 빵집이 있었다. 가난한 전도사가 데이트 비용이 있을 리 없었다. 아끼고 쪼개 모은 돈으로 빵 한 개와 우유 한잔을 시켰다. 이걸 둘이 나눠 먹는 게 데이트의 전부였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했다. 가정형편이며 장래희망, 신앙을 이야기했다.
만나면 좋았고 헤어지면 애틋했다. 내세울 것 없는 전도사가 선뜻 고백하는 게 쉽지 않았다. 기도했다. 의지할 데라고는 주님뿐이었다. 기도 끝에 용기를 냈다. 아내는 화사했다. 밝게 웃는 모습이 마음을 떨리게 했다.
“가난한 전도사입니다. 저를 만나면 고생할 겁니다. 어쩌면 자급자족하는 목회를 할지도 모릅니다. 손수레에 잡동사니를 싣고 팔러 다녀야 할지도 몰라요. 전 영자씨가 좋습니다. 선택은 영자씨가 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수십 번 연습했던 말이었다. 눈앞이 멍해졌다.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하루가 1000년 같다는 성경 말씀이 실감 났다. 도무지 시간이 가질 않았다. 답은 없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드디어 연락이 왔다. 초조해졌다. 뭐라고 할까. 궁금했다. 장소는 태양당이었다.
입만 쳐다보는데 드디어 말문이 터졌다. “전도사님이 수레를 끌면 저는 뒤에서 밀게요.” 됐다. 감사했고 기뻤다. 그리고 미안했다. 고생할 게 뻔해서였다.
결혼식은 1966년 6월 6일 충신교회에서 했다. 정운상 목사님이 주례를 해 주셨다. 특별히 준비할 게 없었다. 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흰색 한복에 베일만 썼다. 반지도 없었다. 나의 예복은 남대문에서 헌 양복을 팔던 최 집사님이 마련해 주셨다.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기차에 앉으니 현실이 보였다. 무겁고 힘겨운 현실이었다. 그래도 나는 교역자 아닌가. 아내에게 신앙 안에서 희망을 심어주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신방은 내가 살던 갈월동 셋방이었다. 그러다 도원동으로 이사했다. 그 뒤로는 어디로 언제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만큼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아내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나는 늘 책을 샀다. 다행히 기독교문사를 운영하시던 고 한영재 장로님이 날 많이 도와주셨다. “박 전도사님, 필요한 책 있으면 가져가고 책값은 천천히 갚아요.” 형편에 맞지 않는 비싼 책을 싸들고 집에 올 때마다 아내 눈치를 봤다. 아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가난한 전도사의 아내는 그렇게 남편을 응원해줬다. 그 힘으로 나는 점점 목회자가 돼 갔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0) “주님 저를 쓰소서”… 결혼하던 해 목사안수 받아
영락교회 부목사 청빙 받아… 한경직 목사 그늘에서 사역하며 목회철학 가까이서 지켜봐
박종순 목사(오른쪽)가 1993~94년쯤 남한산성 우거처에서 한경직 목사를 만나 대화하고 있다.
1966년은 큰 의미가 있는 해였다. 결혼을 했고 목사안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삶의 변곡점이 두 차례나 있었다. 당시 충신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서울노회 소속이었다. 지금은 서울서노회 소속 교회다. 나는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늘 목사가 되라고 하셨던 어머니께 감사했다. 내게 목사의 씨앗을 심어준 아버지 박화선 전도사 생각도 많이 났다. 아버지 얼굴은 당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으로 어렴풋이 추억할 뿐이다. 아버지가 목사가 된 나를 보고 기뻐하실 것만 같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교회를 섬기셨던 분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따라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되리라.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기도하셨다. “주님, 박 목사가 이제 목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바로 가게 해 주세요. 바른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 이 기도가 목사로 출발하는 내게 준 어머니의 유일한 선물이었다. 다짐했다. 목회도, 인생도, 신학도 정도를 걷겠노라고 말이다. 훗날 내가 ‘바른신학, 바른목회’를 기치로 내건 것도 이때의 다짐 덕분이었다. 좌고우면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현실은 변한 게 없었다. 충신교회는 여전히 가난했다. 부목사가 됐지만, 대우는 전도사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가난한 일상이 반복됐다.
하루는 새벽기도 설교를 마치고 단에서 내려왔는데 새벽기도회에 가끔 나오던 영락교회 장로님이 교회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박 목사님, 교회 한번 옮겨 보시면 어떨까요?” 영락교회 교육부에서 부목사를 청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교구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영락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님이 계시질 않는가. 그 그늘이라면 어떤 직책을 맡겨 주셔도 좋았다.
67년부터 69년까지 영락교회에서 사역했다. 한 목사님의 그늘은 정말 좋았다. 삶이 목회였고 신학이셨던 분이었다. 3년 동안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 나의 안테나는 늘 한 목사님을 향해 있었다. 그분의 목회철학을 가까이에서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겸손하신 분이었다. 젊은 목사들에게도 함부로 말씀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항상 한국교회 걱정을 하셨다. ‘신학은 시계추와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그 축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진보도 보수도 가능하나 신학의 추가 흔들려서는 안 되다는 경고였다. 평범한 진리였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고조되던 시기에 큰 가르침이었다. 신학적 입장이 달랐던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이유도 됐다.
한 목사님은 목회를 네 가지 분야로 나누셨다. 교육, 선교, 봉사, 행정관리였다. 각 분야 모두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다. 각별히 살피셨고 균등하게 관심을 가지셨다. 그런 배려가 영락교회를 세운 힘이 아니었을까.
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뒤 남한산성에 계실 때도 나는 자주 찾아뵀다. 목사님 앞에 서면 나는 어린아이 같았고 그분은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내가 과연 사역을 잘하고 있는가. 그분 앞에 서서 나의 자리를 돌아봤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1) “우리 교회 돌봐주세요”… 목회 배우러 남현교회로
장로님들과 마찰 생긴 담임 목사님, 주일 설교만 하시고 산기도처 기거
박종순 목사가 2005년 고 방지일 목사와 고 김의환 전 총신대 총장(왼쪽부터)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영락교회에 있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숭실대 교수 한 분이 교회로 찾아오셨다.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남현교회 교인이었다. 이 교회에는 숭실대 교직원들이 여럿 출석했다.
교수님은 다짜고짜 교회 상황을 설명하셨다. “박 목사님, 들어보세요. 최근 교회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수습하시다가 힘에 부치셨는지 주중에는 관악산의 기도처에 머무십니다. 교회를 돌볼 분이 안 계십니다.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를 돌봐주실 수 있으실까요.”
간청이었다. 사실 영락교회에선 교육부에 속해 있어 목회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어차피 경험해야 할 것, 아는 분들이 계신 곳에서 배우기로 하고 남현교회 행을 결정했다.
교회 사정은 듣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갈등이 심했다. 담임목사님은 정말 주일 설교만 하시고는 산에 오르셨다. “박 목사가 당분간 교회를 다 돌봐 주세요.” 이런 부탁만 남기셨다.
담임목사님이 안 계시니 주중 설교와 장례식 결혼식 심방 새벽기도 등 모든 걸 혼자 해야 했다. 덕분에 훈련은 제대로 받았다.
늘 피곤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교인 가족이 세상을 떠나 장례예배를 집례하러 장례식장에 갔을 때였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앉아있는데 갑자기 향 연기가 코를 찔렀다. 바로 기절해 버렸다. 누적된 피로에 독한 연기를 마시니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병원에 실려 가 주사 맞고 정신을 차린 뒤 교회로 돌아왔다.
어느 날부터 담임목사님은 주일에도 교회에 오시지 않으셨다. 난감했다. 하지만 부목사란 담임목사를 도와 교회를 돌보는 사람 아닌가. 주일 설교를 마치면 언제나 담임목사님이 계시는 관악산 기도처로 올라갔다. 담임목사님을 만나서는 교회 돌아가는 상황을 소상히 보고했다. 상당 기간 교회와 산을 오갔던 것 같다. 보고하면 담임목사님은 내가 할 일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담임목사님 말씀을 그대로 교회에 전했다.
이때 부목사의 덕목을 체험했다. 부목사의 도리는 담임목사님의 목회를 잘 돕는 데 있다. 이게 싫으면 부목사를 하면 안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목회는 담임목사가 되면 할 수 있다.
관악산 기도처와 교회를 오가는 원격 목회도 결국 끝났다. 장로님들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담임목사님이 사의를 표하신 것이었다. 결국, 교회의 선장이 사라지고 말았다. 담임목사님이 그만두기 얼마 전부터 교회 건축도 시작됐다. 그 일도 내 일이 됐다. 교회 건축이 얼마나 힘든가. 평안해도 쉽지 않은데 이 교회는 갈등이 컸다.
다툼이 생기면 낮이고 밤이고 달려가 중재했다. 우여곡절 끝에 건축도 마무리돼 갔다. 그때 장로님들 중 일부가 나를 담임목사로 모시자는 의견을 냈다. 곧바로 반대하는 분들이 생겨났다.
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게 아닌가. 고작 30대 초반이었다. 담임목사 하겠다고 욕심부릴 나이가 아니었다. 마침 목포에서 목회하던 목사님을 모셔오자는 의견이 나왔다. 내가 먼저 장로님들께 말씀드렸다. “장로님, 그분을 담임목사님으로 모시는 게 좋겠습니다. 모시러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렇게 새 담임목사님을 모셨다. 나는 교회에 양해를 구하고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담임목사 하겠다고 우기지 않았던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지혜를 깨달은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2) “이토록 행복하게 목회하는 내게 왜 이러시나”
목포 양동제일교회에서 사역중 충신교회 어려움 하소연에 고민… 아내의 지지 얻어 다시 고생길로
목포 양동제일교회 교인들이 1962년 5월 10일 교회 창립 65주년 예배를 드린 뒤 단체촬영을 했다.
남현교회가 안정기에 접어 들자 목포 양동제일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다. 서른세 살 때였다.
양동제일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파송을 받아 사역하던 유진 벨 선교사가 1897년 세운 교회였다. 장년만 500명이 넘게 출석하고 있었다. 지방교회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큰 규모였다.
교인 대부분은 미션스쿨인 정명학교 교직원과 그 가족들이었다. 이분들이 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셨다. 워낙 오래된 교회다 보니 유지들도 다수 출석했다. 든든한 교회였다. 목포의 첫인상은 거칠다는 것이었다. 선입견이었다. 교인들은 가슴이 따뜻했고 정이 많았다.
병원장이시던 한 장로님 기억이 난다. 깐깐한 성격의 장로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매년 초가을이면 일꾼과 함께 내가 살던 사택에 오셨다. 오래된 한옥이었다. 부임하자마자 겨울 추위가 걱정됐을 정도였다. 장로님도 추위 때문에 오신 것이었다. “목사님 사택이니 잘 봐주세요. 모든 창문을 비닐로 잘 막아주세요.” 일꾼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이후로 매년 가을 초입이면 장로님이 사택에 오셨다.
부목사를 하다 바로 큰 교회에 부임해 걱정이 컸다. 하지만 남현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은 게 도움이 됐다. 물론 교인들이 교회를 너무 사랑해 생긴 일이었다. 나는 그 덕에 목회 실습을 톡톡히 했다. 양동교회도 훌륭한 목회 학교였다. 나를 목사로서 한 단계 성장시켜 준 교회였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1976년이 시작됐다. 어느 날 충신교회 장로님들이 목포에 오셨다. 긴 하소연을 하시는 게 아닌가. “이촌동으로 이전한 뒤 교회 건축을 시작했는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담임목사님도 안 계십니다. 교회는 겨우 1층만 지었어요.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충신교회 교인들을 돌봐 주세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목포에서 이토록 행복하게 목회하는 내게 왜 이러시나.’ 양동제일교회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충신교회가 이전한 이촌동은 당시 벌판이었다. 모래사장과 미군 부대가 전부였다. 71년 세워진 한강맨션이 교회 근처 유일무이한 주택가였다.
게다가 내가 충신교회 사정을 너무 잘 알지 않은가. 교육전도사 월급도 주지 못해 집사 세명에게 내 사례비를 부탁했던 교회였다. 어느 정도 재정이 있어야 전도와 봉사, 선교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건축 중이라니, 그 자리에서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장로님들, 지금은 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제가 홍콩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로님들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목사님, 언제 귀국하시나요. 공항으로 나가겠습니다.”
진짜 고민은 따로 있었다. 충신교회 장로님들을 만난 순간 목사의 도리에 대해 생각했다. “목사를 원하는 교회로 가야지. 그게 목사지. 멋진 교회만 찾아다니려는 마음이 드는 순간, 그 순간을 경계해야지.”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지지가 필요했다. 다시 고생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충신교회에 가겠다고 답을 드렸다. 교회는 기뻐했고 내 마음은 무거웠다.
76년 5월 목포를 떠났다. 목포역에는 대충 봐도 6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날 환송하기 위해 모인 교인과 목포 각계 인사들이었다. 시장과 목포시 공무원들도 왔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내, 아이들 셋과 기차에 올랐다. 내 마음 알 리 없는 호남선 특급열차 ‘풍년호’는 용산역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3) 교인들의 눈물과 땀방울로 건축한 충신교회
건축 중단돼 흉물된 교회 둘러보며 사택 전세보증금 빼 건축헌금 다짐
충신교회 교인들이 1976년 교회 건축 현장에서 일손을 돕고 있다.
목포의 교우들과 눈물의 이별을 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차는 용산역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충신교회의 상황이 어렵다는 걸 알고 가는 길이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래도 희망이 컸다. 그곳에도 그리운 교인들이 있어서다. 건축이 중단됐다니 당장 해야 할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 솔직히 놀랐다. 절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나만 따라 서울행을 결정한 가족들에게 가장 미안했다. 충신교회 교인 두 명이 역에 나와 있는 게 아닌가. 꽃길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차가울 줄이야.
역에서 동부이촌동(이촌1동)까지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유명한 부촌이 됐지만 1976년에는 형편없었다. 한강맨션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판자촌도 군데군데 있었다. 개발로 어수선하기까지 했다.
교회는 1층까지 공사가 진행되다 수년째 중단됐다. 흉물스러웠다. 동네 주민들이 교회를 보고 대체 뭐라 생각할까 두려웠다. 사택은 서부이촌동(이촌2동)의 한 아파트에 있었다. 연탄보일러가 있는 아파트는 좁고 어두컴컴했다. 마당이 있고 널찍했던 목포의 사택이 잠시 생각났다.
아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 모습에 더욱 미안해졌다. 건축이 중단된 교회를 둘러봤다. 보면 볼수록 빨리 건축을 마무리 짓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사택 전세보증금을 빼 건축헌금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충신교회에 부임한 첫날이었다.
차마 아내에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도 그 길뿐이었다. 내가 희생해야 교인들에게도 건축헌금을 독려할 수 있었다. 나는 짓다 만 교회 구석에 합판으로 벽을 세워 생활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계획이 선 뒤 장로님들과 상의했다. 장로님들도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담임목사가 부임하자마자 사택을 포기하는 게 무척 미안했다고 한다. 교회가 결정했으니 가족에게 이실직고해야 했다.
면목이 없었다. 갈월동 판잣집에서 신혼 생활하던 때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충신교회의 지금 본당이 당시 건축한 예배당이다. 그때도 화장실이 교회 마당에 있었다. 교회 구석 간이 사택에서 지낼 때는 화장실이 늘 문제였다.
“아빠, 화장실 가고 싶어요.” 막 잠이 들었는데 아이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간 아이를 기다리던 밤이 이어졌다. “아빠, 어디 가면 안 돼. 앞에 있지.” 아이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나는 젊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지금이야 웃으며 추억하지만, 그때는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았다.
손에 쥔 게 없는데 교회 건축을 재개하니 어려운 게 이만저만 아니었다. 나부터 건설현장에 나갔다. 교인들도 하나둘 힘을 보탰다. 권사님들도 벽돌을 날랐다. 눈물로 지은 예배당이다. 그러니 이 좁은 예배당에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몇 차례 교회를 이전하자는 말도 나왔지만, 그 자리를 지켰다. 지금도 동부이촌동 초입에서 주민들을 맞이한다. 교회 구석구석에는 교인들의 눈물과 땀방울이 스며 있다. 교회 건축이 마무리됐으니 예배당을 채워야 했다. 나는 전도에 모든 걸 걸고 거리로 나섰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4) 아파트 문패에 손 얹고 “충신교회 교인 되게…”
교회 주변에 하나둘 아파트 들어서면서 직접 가정 방문해 전도대상자들 만나
박종순 목사(가운데)가 1976년 9월 교회 건축을 마무리 하기 위한 건축 기공식에서 기도하고 있다.
충신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교회 건축을 마무리하느라 고군분투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교회에 부임한 걸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다. 노회 어른들이 하나같이 혀를 찼다. “박 목사, 축하해 줘야 하는데 너무 힘든 교회라 걱정이네. 목포에 있지 그랬어.”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낙담하지 않았다. 목사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물러서지 않겠다. 선택한 길이니 스스로 포기할 수도 없다. 선택자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교회에 활력이 필요했다. 기도운동이 출발이었다. 새벽기도에 방점을 찍었다. 수요기도회와 금요 철야도 활성화했다. 부임 후 10년 동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사택도 교회 안에 있었다. 교회가 기도의 집이자 삶의 공간이었다. 설교하고 또 설교했다. 설교가 끝나면 바로 다음 설교를 준비하는 게 일상이었다. 수시로 전도대와 함께 동부이촌동을 누볐다. 마침 지역에 하나둘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황금어장이었다. 1970~80년대 전도는 대면전도가 대부분이었다. 직접 전도대상자들을 만났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을 방문해야 했다. 환영해 주는 집도 있었지만 문전박대하는 곳도 많았다. 내가 오뚜기 아닌가. 밀어내면 다시 일어나 그 집을 찾았다. 당시에는 아파트에도 집마다 문패가 있었다. 어느 집을 방문하더라도 문패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주님, 이 집 문에 충신교회 교패를 붙일 수 있게 해 주세요. 이 가정, 저희 교인 되게 해 주세요.”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 일로 바빠 운동할 시간도 없었다. 전도가 운동이었다. 승강기도 없던 아파트를 수시로 올랐다. 동부이촌동 서쪽 끝에 있던 교회에서 반대편 끝에 있던 금강아산병원까지의 거리가 2㎞쯤 된다. 이 길이 조깅 코스였던 셈이었다.
교회 로비에는 전도 현황판을 만들어 걸었다. 어떤 교인이 몇 명 전도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표였다. 전도왕 시상식도 수시로 했다. 메달도 수여했다. 모든 교인이 온 힘을 다해 전도했다. 자연스럽게 교인이 늘었다.
충신교회에 온 지 얼마 안 돼 구청이 길가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손목 굵기의 나무는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언제 자라나 했는데 지금은 아름드리나무가 됐다. 교회도 그렇게 성장했다. 나약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든든한 교회로 성장했다.
부임 초장기, 교인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전도와 함께 회복 목회에 방점을 찍었다. 마음의 상처는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수 없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치료해야 한다. 내과적 접근이 필요했다. 좋은 약을 투약하고 보식을 해야 했다. 그 길을 택했다. 인내가 필요한 과정이었다. 늘 긍정적으로 목회했다. 설교에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지난 세월에 얽매이지 말라고 권했다. 비전을 품고 작은 걸음을 내딛자고 했다. 예언서 대신 바울서신을 택해 설교했다. 비전을 심기 위해서였다. 80년대 중반이 지나자 경직돼 있던 교회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걸 느꼈다. 교인들이 따뜻해졌다.
위로의 말이 넘쳐났다. 새신자들도 늘었다. 스스로 문턱을 넘는 교인들도 많았다. 고난과 인내를 겪은 이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일까. 교인들의 수고에 감사를 전한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5) 매서운 추위 넘긴 충신교회, 봄이 찾아오다
어려운 시기 부임해 교회 건축 마무리… 기도와 선교로 개척해 재정 위기 극복
박종순 목사가 1988년 6월 5일 서울 용산구 충신교회에서 열린 ‘3만명 초청 큰잔치’에서 설교하고 있다.
목회에는 사계절이 있다. 언제나 따뜻한 봄날일 수 없다. 기쁨이 있으면 반드시 아픔이 따라온다. 몸을 펼 수조차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목회다.
목회 사계절에는 지혜가 담겨 있다. 매서운 추위를 몰고 오는 가혹한 시절도 끝난다는 사실이다. 목회가 순풍에 돛 단 듯 잘 되다가도 강추위가 찾아오고 그러다 봄으로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간단한 사실 같지만 체험한 목회자만 이해할 수 있는 진리다.
그런 면에서 나는 충신교회의 한겨울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낙담하지 않았다. 교회가 아픔 속에 있다면 목사는 극복할 길을 여는 선장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너지면 교회는 끝이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만다. 이는 목사에게 가장 큰 죄다.
지난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선교사가 참여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그곳에 강사로 갔다. 까마득한 후배들 앞에 서서 2시간 동안 메시지를 전했다. 주제는 ‘사명과 결단’이었다.
“여러분, 힘든 선교 현장에 계십니다. 외로우시죠. 하지만 누가 선교지로 가라고 떠밀었나요. 스스로 온 길입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겁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이 자리에 온 만큼 소명에 책임을 지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위로보다 책임을 강조했다. 귀에 편한 말이 몸에도 좋은 건 아니다. 우리교회 부목사들에게 강조했던 말도 있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도 말고, 성공하더라도 건방 떨어서는 안 된다. 힘들 때도 주님의 일, 잘돼도 주님의 일을 대신하는 목사일 뿐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
교회 건축을 마치자 또 다른 어려움이 줄을 섰다. 빈약한 재정도 문제였다. 1979년 어느 날 당회가 열렸다. 한 장로님이 발언권을 얻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최근 동네 땅값이 오르고 있습니다. 교회 본당과 붙어 있는 부지 일부를 매각해 부실한 재정을 확충하길 제안합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동부이촌동에 한 기업의 본사가 입주했다. 그 회사의 홍보 책임자가 어느 날 교회를 찾았다. 용건은 우리 교회 벽면에 회사 광고판을 붙이고 싶다는 거였다. 적지 않은 사용료를 준다고도 했다.
사실 이런 제안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재정이 문제라면 교회가 잘 성장하면 됩니다. 이외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교회라 할 수 없죠.” 정답이었다. 하지만 정답을 찾아가는 길은 오로지 목사가 개척해야 했다.
동부이촌동을 누비며 전도했다. 막무가내로 한 건 아니었다. 전도대는 CCC의 사영리와 14만6000명을 전도한 제임스 케네디 목사의 전도폭발 훈련프로그램으로 무장시켰다. 훗날 총회 전도부장을 할 때 충신교회 전도대를 훈련시켰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78년 새 성전을 완공한 뒤 충남과 강원도에 교회를 세웠다. 80년과 81년에는 각각 스웨덴과 케냐에 선교사도 파송했다. 어렵던 시절에 했던 일들이었다. 목회 멘토인 한경직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랐다. “교회 재정이 부족해도 선교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쓸 게 없어도 교회 개척해야죠.” 한 목사님의 소신이 이랬다.
헌신은 결실로 돌아왔다. 교인과 예산 규모가 빠르게 늘었다. 1000석 정도 되는 본당이 교인으로 차고 넘쳤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6) “박 목사님에게 딱 맞는 부서가…” 총회에 첫 발
이단대책위원장으로 총회 봉사 시작… 전도부장 맡아 교재부터 제작, 전국 노회 돌며 전도강습회 열어
박종순 목사가 지난달 22일 서울 용산구 충신교회 원로목사실에서 아버지 박화선 전도사가 남긴 유품인 ‘구약사기’를 들고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섬기는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1976년 충신교회에 부임한 뒤 10년 동안 교회만 생각했다. 어차피 목사는 교회 소속이다. 다른 모든 일은 시간이 남을 때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해야 한다. 첫째도 교회, 둘째도 교회다. 목회가 ‘주’라면 대외활동은 ‘객’이다.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교회 밖의 일에만 관심이 큰 이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제 목회하고, 언제 기도하며, 언제 성경 연구하냐.’
89년 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총회에서 활동하는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 목사, 총회 총대로만 봉사하지 말고 부서 좀 맡아줘요. 목사님에게 딱 맞는 부서가 하나 있는데….” 그 자리는 ‘총회 사이비집단 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이단 문제는 교단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 교회도 늘 주의해야 하는 일 아닌가. 결국, 교회를 위한 일이었다. 수락했다. 이단대책위원장이 총회를 위해 봉사했던 첫 출발점이었다.
열심히 했다. 연구해야 할 사안이 발생하면 그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연구했다. 지역교회들이 노회를 통해 총회에 연구 의뢰하는 이단 의혹 집단들도 많았다. 공명정대하게 연구해 결과를 발표했다.
91~93년에는 총회 전도부장을 맡았다. 교회를 부흥시켜 교단을 든든히 세우기 위한 정책을 세우는 부서였다. 부장이 돼 보니 체계적인 전도 프로그램이 없었다. 총회에 맞는 훈련 방법이 필요했다. 교인을 양육해 전도에 나섰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개인전도’ ‘전화전도’ ‘학원전도’ ‘직장전도’를 위한 교재부터 만들었다. 그런 뒤 전국 노회를 돌며 강습회를 했다. 모든 교육에는 전도 실습이 들어 있었다. 2명씩 짝지어 오후 내내 전도하는 것이었다.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 시내 공원들로 전도대가 파견됐다. 이튿날 전도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그런데 결실이 없었다. 목사들끼리만 구성된 전도대가 특히 부진했다. 그래서 목사 한 명과 평신도 한 명으로 팀을 짰다. 평신도가 감독관 역할을 한 셈이었다. 사실 자극제였다. 평신도도 전도하는데 목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역교회에서도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 전도해야 한다. 그래야 결실을 볼 수 있다.
총회를 위해 봉사할 때 한 가지 규칙을 정했다. 공식회의가 열리는 날이 아니면 절대 총회본부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참견을 줄이고 목회에 충실하기 위한 조치였다. 총회 돈도 절대 쓰지 않았다. 이는 훗날 총회장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총회에는 총회장의 휴식을 위한 방이 있었다. 이곳도 사용하지 않았다.
공식일정을 위해 책정된 여비나 판공비도 다 돌려줬다. 총회 재정을 함부로 축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총회 돈 귀한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 총회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소신이다.
남의 것을 내 것처럼 쓰면 결국 탈이 난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누구라도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덫에 걸릴 확률이 높다. 후배들에게도 늘 강조했다. 목회자의 삶은 가지런해야 한다고. 무분별해서도 안 된다. 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7) 선거운동 없이 기도로만… 부총회장에 당선
주변에서 부총회장 선거 출마 권유… 전국 교회 위해 봉사할 기회라 생각
박종순 목사(오른쪽)가 1996년 9월 13일 서울 소망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81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취임하고 있다.
총회장이 되기 전, 총회에서 봉사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이단대책위원장과 전도부장이 총회 경력의 대부분이었다. 총회장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총회 임원도 하지 않았다. 정치적 계보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총회장도 임원회를 구성할 때 나를 찾지 않았다.
총회장이 되겠다는 꿈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경력을 쌓을 필요도 없었다. 교회는 안정됐고 성장했다. 총회 활동 대신 전국 교회를 찾아 말씀을 전하는 데 힘썼다. 가보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로 전국을 누볐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부총회장 선거에 나가보라는 권유가 이어졌다. 내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는 선거를 통해 부총회장에 당선되면 이듬해 총회 총대들의 추대를 받아 자동으로 총회장이 됐다. 총회장이 되기 위해서는 부총회장 선거만 거치면 되는 것이었다.
1500명의 총회대의원들이 부총회장 선거의 유권자다. 전국 교회를 대표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분들이다. 선거는 선거다. 선거운동을 반드시 해야 했다. 전국 총대들에게 나를 소개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총회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선거운동까지 해 가면서 선거전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전국 교회를 위해 봉사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추대한 분들께 분명히 말씀드렸다. “전국을 순회하는 선거운동은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비우고 선거운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기도로 선거운동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도 된다면 부총회장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좀 황당한 제안이었다.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부총회장 선거전에 뛰어든다니, 내게 권유하셨던 분들도 당황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나를 믿고 지지해 주셨다.
본격 선거전이 시작됐다. 나보다 학식이나 교회 규모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목사님과 경선을 해야 했다. 부담은 컸다. 하지만 내심 ‘나는 이미 선거운동을 했다’고 여겼다. 전국 교회로부터 부흥회 강사로 초청받은 일이 많았다. 실제 교회들을 방문해 보니 형편이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강사 사례비를 받으면 교회에 반환했다. 교회 형편에 따라 목적 헌금을 했다. ‘건축 헌금’ ‘목회자 자녀 장학금’ 등 명목으로 모두 교회에 돌려 드렸다.
나는 지역교회를 이렇게 도운 게 선거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고맙게도 지역에 있는 선후배 목사님들이 “걱정하지 말아라. 이 지역은 내가 맡겠다”는 연락을 해 주셨다. 대가를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선의였다.
결전의 장소는 서울 명성교회, 1995년 9월 21일이었다. 예장통합 제80회 총회가 열린 날이었다. 나는 교인들에게 총회 장소에 와 나를 대신해 총대들에게 인사해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대신 홀로 기도했다. 명성교회에 부탁해 작은 방 하나를 빌렸다. 그곳에서 점심도 배달해 먹으면서 기도했다.
선거가 시작됐고 2~3시간쯤 지나 결과가 발표됐다. 내가 부총회장에 당선됐다.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내 나이 55세 때였다. 역대 총회장 중 서울 지역 교회 목사로는 가장 젊은 부총회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당시 총회장은 정복량 목사님이셨다. 덕장이셨다. 정 목사님을 모시고 드디어 부총회장의 직임을 수행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8) 총회장 취임 후 개혁 위한 컨설팅 맡겼는데…
총대 박수 받으며 추대 책임감 막중… 컨설팅 보고서 나왔지만 이듬해 사장 두고두고 아쉬워
박종순 목사(오른쪽)가 1996년 9월 13일 서울 소망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81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취임하며 최영자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5년 9월 26일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제80회 정기총회가 막을 내렸다. 부총회장은 총회장만 잘 보필하면 된다. 1년 동안 총회장의 직무를 배우는 기간이다. 부총회장이 나설 일은 없다. 정복량 총회장 옆에서 도움을 드렸던 시간이었다.
나는 96년 9월 12일 서울 소망교회에서 열린 예장통합 제81회 정기총회에서 총회 대의원(총대)들의 박수를 받으며 총회장에 추대됐다. 총회는 오후 2시에 개회한다. 총회장을 비롯해 총회 임원들과 본부 직원들이 성경과 헌법, 총회 깃발을 앞세우고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입장을 기다리며 예배당을 둘러봤다. 소망교회 예배당은 천장이 높다. 윗부분에는 큰 유리창이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밝게 비쳤다. 1500명의 총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무거운 책임감이 날 누르고 있었다.
개회예배가 끝나고 회무가 시작됐다. 첫날에는 부총회장 선거가 진행된다. 81회기 부총회장은 청주 복대교회 민병억 목사가 선출됐다. 저녁 식사를 한 뒤 총회장 이취임식이 진행됐다. 이때까지는 축제다. 새 총회장과 부총회장을 축하하는 잔치인 셈이다.
본격적인 회의는 둘째 날부터였다. 아침 기도회가 끝나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전투 전야의 긴장감이 돌았다. 나는 경력이나 경험이 짧았다. 당연히 회무처리가 서툴렀다. 전국에서 모인 총대 중에는 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총회 참석 자체에 의미를 두는 총대부터 뭔가 작심하고 이를 갈고 있는 총대, 법률 전문가를 자처해 교단 헌법 책에 밑줄을 치며 벼르는 총대, 안건토의 때마다 ‘회장’을 외치며 발언권을 요구하는 총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다양한 총대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15명이 총회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알고 왔다. 총대 중 1%가 총회 분위기를 쥐고 흔드는 셈이었다. 이분들이 여기저기서 발언을 요청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건토의의 흐름을 놓치기 일쑤였다.
이분들의 발언은 마치 무슨 사명을 받은 것처럼 절박했고 날카로웠다. 날이 선 발언은 반드시 상대가 있었다. 일격을 당한 상대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예장통합 총회는 총대들에게 발언 시간을 3분 동안 준 뒤 마이크를 끈다. 하지만 이분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이크는 꺼졌지만 육성으로 주장을 펼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넓은 예배당을 갈랐다.
기도했다. ‘주님, 저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절 지켜주소서.’ 힘겹게 이어지던 총회가 어느덧 폐회를 향했다. 어떻게 지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장로교 총회장은 정기총회 진행을 잘해야 한다. 영어로 총회장이 ‘마더레이터’(moderator) 아닌가. 분쟁의 조정자나 토론의 사회자라는 의미다. 이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시간이었다.
정기총회가 끝나자 ‘박종순 총회장’의 임기가 시작됐다. 늘 궁금했던 게 있었다. 과연 예장통합 총회의 현주소가 어디인가였다. 현실을 알아야 미래 청사진도 그릴 수 있지 않은가. 한국생산성본부에 의뢰해 총회 컨설팅을 했다. 임기 중 컨설팅 보고서가 나왔다. 총회 개혁을 위한 지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교회들은 변화를 싫어했다. 이듬해 총회 때 보고 과정에서 보고서가 사장됐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그때 보고서를 바탕으로 총회 개혁을 위한 로드맵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19) 헝가리서 조그련 위원장과 ‘통일의 노래’ 함께 불러
총회서 첫 만남 후 몇 번 교류하며 북한교회에 옥수수 지원… 뚜렷한 결실로 이어지질 못해 늘 아쉬워
박종순 목사(왼쪽 세번째)와 강영섭 조그련 위원장(왼쪽 첫번째)이 1997년 헝가리 데브레첸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에서 손을 잡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총회장 임기는 1996년 9월부터 1년 동안이었다. 임기 중이던 97년 3월 헝가리 데브레첸에서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총회가 열렸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장 자격으로 총회에 참석했다.
데브레첸은 헝가리 개혁교회 총회 본부가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500년 역사의 교회다. 전 세계 개혁교회 중에서도 어른이다. 이곳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강영섭 위원장을 처음 만났다. 강 위원장도 나처럼 북한교회 대표단을 이끌고 총회에 참석했다.
총회 셋째 날 저녁에 ‘남북교회의 밤’ 행사가 마련돼 있었다. 나와 강 위원장은 함께 단에 올랐다. 한국과 북한교회 대표들을 순서대로 소개했다. 강 위원장과 나는 ‘통일의 노래’를 부르기로 사전에 약속했다. 실무진들은 가사를 영어로 번역해 총대들에게 나눠 줬다.
“노래를 함께 부릅시다. 이 노래에는 한반도의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남북교회의 기도 제목입니다.” 전 세계에서 온 교회 대표들에게 합창을 권했다.
남북교회 대표 중에는 벅찬 마음에 울먹이는 이들도 있었다. 세계교회 대표들에게 통일의 당위성을 알린 시간이었다.
강 위원장과 만남은 또 이어졌다. 같은 해 8월 미국 뉴욕에서 남북한 교회와 미국 교회 대표들이 모여 선교와 통일을 위한 포럼을 열었다. 세 나라 교회가 통일의 물꼬를 트자는 취지로 모였지만 분위기는 답답했다. 서로 자기 이야기만 했기 때문이다.
개회예배 설교는 내가 했다. 예배가 끝나자 강 위원장이 웃으며 다가왔다. “박 목사님, 설교 감사합니다. 저희 봉수교회에 오셔서 부흥회 인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 설교 듣고 다 따라나설까 걱정됩니다.” 강 위원장이 농담을 했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당장이라도 북한 방문 일정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북한에 간 일이 없다. 뚜렷한 목적 없이 방북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한번 가보자’는 식의 방북이 못마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북교회 지도자들이 또 모였다. 이때 대화가 진지하게 이어졌다. 우리도 북한교회에 요구할 것들을 제시했고 북한도 그랬다. 대화 중 남한교회가 도울 일이 생겼다. “이번에 말씀하신 옥수수를 반드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강 위원장에게 약속했다. 이상하게도 강 위원장의 표정이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약속을 지켰다. 중국을 통해 북한에 옥수수를 보냈다. 수신자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 못 박았다. 위상을 높여주려는 조치였다. 옥수수를 담은 포대에는 ‘한국기독교’라고만 썼다. 양국 교회의 신뢰 표현이었다.
훗날 강 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다. “제3국에서 한국교회 관계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대화할 때는 뭐든지 도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약속을 지키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틀림없이 지킨 박 목사님께 감동 받았습니다.”
목회하면서 약속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나는 목사 아닌가. 신뢰 없는 목사는 목회도 할 수 없다. 목회하면서 늘 다짐했다. 어린 꼬마와 한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자고 말이다. 강 위원장과 쌓은 신뢰가 뚜렷한 결실로 이어지질 못해 늘 아쉽다. 통일은 주님의 시간에 반드시 이뤄질 것으로 믿는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0) 교단 교회 없는 지역 찾아라… ‘만사운동’ 펼쳐
야심차게 ‘1만 교회, 400만 성도운동’… 전도학교 만들고 지역 조사에 나서
박종순 목사가 2006년 8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몽골 한인 선교 15주년 기념대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총회장이 된 뒤 많은 일을 했다. 이런 경험이 교회연합운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돌아보면 부총회장으로 총회장을 보필하면서도 총회 발전을 위한 여러 의견을 냈다. 전도부장으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총회장이 되고 나니 총회의 여러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은 면도 있었지만 개선할 점도 많았다. 가장 의아했던 것이 ‘총회 주제’였다. 매년 총회장들이 새로운 주제를 제안하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명색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인데 주제가 껍데기뿐이었다. 내용이 없었다.
총회장이 내건 주제에 대해 교회들도 관심이 없었다.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주제를 선정한 배경은 무엇이고, 시대적 상황과는 어떻게 어울리며 전국 교회들은 한 회기 동안 어떻게 목회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이 전혀 없었다.
그때 제안한 게 ‘총회 주제연구위원회’였다. 다행히 총회장께서도 동의해 주셔서 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위원회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시의적절했다. 나는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장로회신학대 교수이던 이수영 목사와 이종윤 서울교회 원로목사 등이 연구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들은 총회 주제를 신학과 성서적 측면에서 연구했다. 결과는 책으로 만들어 전국 교회에 배포했다. 좋은 전통이다. 총회 산하 교회들에 목회 나침반이 됐다. 주제 해설집은 총회와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총회 전도부장을 할 때의 일이다. 1991년이었는데 이미 교인 감소가 시작됐다. 지금처럼 큰 감소는 아니었어도 교인이 줄고 있는 노회들이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전도부 실무자·실행위원들과 자세히 조사했다.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도 청취했다.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를 총회에 보고했다. 총대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듯했다.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자, 모두 보고 드렸습니다. 총회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총대들께서 토론 없이 박수로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일이 ‘만사 운동’이었다. 1만 교회, 400만 성도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전도학교를 만들고 전도에 필요한 각종 교재를 펴냈다. 노회별로 훈련원도 만들어 전도를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리서치도 했다. 교단 교회가 없는 지역을 이 잡듯 찾았다.
전도를 위해서는 지역을 알아야 한다. 충신교회 부임 직후 아들 정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교회 주변을 구석구석 다녔던 기억이 난다. 유치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아이와 함께 지역조사를 한 것이었다. 이런 경험을 만사 운동에 적용했다. 지역조사는 개척교회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됐다.
하지만 이 운동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좌초하고 말았다. 연속성이 사라진 게 이유였는데 지금도 아쉽다. 몇 회기라도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늘 나를 따라다닌다. 이제라도 부흥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교세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고 좌절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알았으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20년 전의 일인 만큼 부흥을 위해 새로운 접근과 연구가 필요하다. 한 교단만의 문제도 아니다. 교단들이 연합해 부흥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할 일이자 사명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1) NCCK와 한기총, 하나된 부활절 연합예배 드려
기독교 진보와 보수 수장 지낸 경력으로 갈라진 부활절 연합예배 합치는 일 해내
박종순 목사가 2006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공동 주최한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에서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이 1987년 서울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전 세계 107개국 215개 개혁교회가 회원인 WARC는 1875년 설립된 국제 기독교 기구다. 나는 총회 준비위원회 예배분과위원장을 맡았다.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고 한국의 문화까지 담아낸 예배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달라도 모두 주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다. 서로를 이해할 때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총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세계와 소통한 기회가 됐다.
나 역시 많은 걸 배웠다. 86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을 할 때 당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NCCK는 오랜 전통을 가진 대표적인 연합기구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세계교회와 끈끈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NCCK가 크게 헌신했다. 하지만 어둡던 시절, 사회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NCCK가 민주화가 정착된 뒤 혼란을 겪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회장을 맡았던 때가 바로 그랬다.
교회들은 진보적이라며 굴레를 씌웠다. NCCK도 과거의 영광 속에서 제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나는 보수적 교단들과 NCCK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내가 NCCK 회장을 할 때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소속 최훈 목사가 대표회장을 맡고 있었다. 최 목사님은 나보다 14살이나 많았고 84년 예장합동 총회장을 지내신 교계 어른이었다.
나는 최 목사님과 자주 만났다.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놨다. “목사님, NCCK와 한기총이 지금처럼 갈등만 빚는다면 한국교회 미래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자주 만나 협력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할 길을 찾길 소망합니다.” 최 목사님은 나의 제안을 지지해 주셨다.
그 시절 한기총과 함께 북한에 쌀도 보내고 여러 모양으로 협력했다. NCCK 회장이지만 한기총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일까. 나는 2006년 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됐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진보와 보수 연합기관의 수장을 지내는 흔치 않은 경력을 갖게 된 것이다.
양 기관을 모두 경험한 나는 갈라진 부활절 연합예배를 하나로 합치는 일을 시작했다. NCCK는 대한성공회 박경조 주교가 이끌고 있었다. 수차례 모임과 회의 끝에 연합예배가 성사됐다.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생명과 화해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8만명이 운집한 자리에서 말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절 연합예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배 준비 과정에서도 갈등이 컸다. ‘빈 무덤과 부활 신앙’을 주제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설교하셨는데 사전에 설교 원고를 검토해야 한다고 해서 갈등이 커졌다. 결국, 원고 검토는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조 목사님의 설교는 더없이 은혜로웠다. 이후 2010년까지 서울광장에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렵게 합친 예배가 다시 나누어진 게 안타까울 뿐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2) 카자흐스탄국립대에 한국문화원 개원하다
국민의 73%가 이슬람교도인 나라
박종순 목사(오른쪽 세 번째)가 1996년 6월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의 카자흐스탄국립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뒤 기념품을 받고 있다. 박 목사 왼쪽이 나리바예프 총장.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사이에 끼어 있는 내륙 국가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나라이며 국민의 73%가 이슬람교도다. 구소련의 일원이었으면서도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을 적게 받았다. 그만큼 이슬람 전통이 강하다.
우연히 이 나라를 방문해 교류하게 됐다. 소련이 붕괴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러다 1992년 충신교회가 카자흐스탄국립대에 한국문화원을 개원했다. 당시 나리바예프 총장은 구소련 시절 문화부 장관을 지낸 유력자였다. 교수들은 모두 이슬람교도였다. 말이 한국문화원이었지 사실 선교학과를 꿈꿨다.
내가 목사인 것도 다 알려졌다. 한국문화원 개원 소식이 알려지자 교수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기독교인이 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와 총장은 카자흐스탄과 한국의 교류를 확대하는 가교로 삼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한국문화원을 통한 선교도 꿈꿨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도 대폭 확대되길 바랐다.
교수들을 설득하는 건 총장의 몫이었다. 교수회의에서 총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과 교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가 나서 교류의 기회를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안 하면 다른 대학이 합니다. 좋은 기회인 만큼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결국 교수들도 동의했다. 문화원의 이름을 빌었지만 한국학과였다. 학과 개설은 그해 5월에 했다. 나는 기념 강연자로 초청됐다. 500여명의 교직원과 학생 앞에 섰다. 담담하게 우리나라 선교 역사를 소개했다. 그리고 경제가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전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다. 대신 기독교의 긍정적인 면을 전했다. 결국, 교세와 한국경제가 동반 성장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연은 90분 동안 이어졌다. 긴 시간이었는데 순식간에 지나 버렸다. 그만큼 청중의 집중도가 높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화원이 현재 카자흐스탄국립대 한국어학과의 전신이다.
92년에는 교회 밖으로 눈을 돌린 해였다. 김창환 선교사를 인도에 파송했고 경북 김천에 부황중앙교회도 개척했다. 93년에는 대구충신교회와 경주충신교회를 개척했다. 94년에는 조충일 선교사를 프랑스로 파송했고 경기도 고양 일산에 충신교회도 개척했다. 이 시기 교회는 해외 선교사 파송과 국내 교회개척에 힘썼다.
교회가 교회 내부로만 힘을 응축시키면 늘 문제가 생긴다. 교인이 늘고 재정이 늘면 반드시 교회 밖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힘이 모이면 다툼이 일어나는 법이다. 충신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성장통에 이은 몸살감기로 신음하던 교회의 힘을 일시에 밖으로 향했다. 이런 아웃리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선교적 교회’를 실천한 셈이다. 물론 막무가내로 교회 밖으로 향한 건 아니었다.
신중하게 교회의 형편을 살폈다. 나의 욕심과 이상만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장로님들과도 충분하게 논의했다. 목회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함께 만들어가는 종합예술이다.
‘천천히, 확실하게’가 지론이다. 천천히 하자는 건 미뤄둔다.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준비이며 기다림이다. 목적을 정한 뒤 기다리는 건 성숙과 완성의 기회와 맞닿아 있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3) “한국교회가 왜 탈북자들 돕습니까” 막무가내 트집
중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딴지에 기독교 교류 위한 첫 모임 중단 위기
박종순 목사(가운데)가 2004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중기독교교류회 기자회견에서 중국교회 대표들과 악수하고 있다.
1994년 중국 옌볜에 영상문화원을 열었다. 중국 선교를 위한 초석이었다. 중국인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죽하면 ‘꽌시(關係)의 나라’라는 말이 있겠는가. 중국을 수차례 방문해 많은 이들을 만났고 깊이 교제했다. 중국인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동생들은 나를 따거(大哥)라 불렀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들이 모두 중국 선교를 도울 사람들 아닌가.
살벌하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느렸다. 뭐든지 빨라야 하는 한국인이 쉽게 적응할 나라가 사실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중국은 최고였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랜 교류 끝에 깨달은 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옌볜에서 사귄 친구들은 나를 베이징으로 이끌었다.
본격적인 선교는 96년 7월부터 시작했다. 꽌시가 선교의 막힌 길을 조금씩 열어줬다. 그래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선교한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공안의 눈을 피해 사는 게 선교사들의 일상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복음의 결실을 본 선교사들의 노력은 언제 들어도 눈물겹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주먹구구식 관계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뭔가 정례적인 교류 가 필요했다. 중국 친구들과 한·중기독교교류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지만 기독교 역사는 오래됐다. 삼자교회가 공산당 산하의 교회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다. 교류를 통해 동북아시아 기독교의 미래를 논할 수 있었다. 첫 출발이 중요했다.
2003년 9월 양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상하이에서 만났다. 개회식은 11시에 열기로 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중국 대표들과 언쟁이 벌어졌다. “한국교회가 왜 탈북자들을 돕습니까.”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았다.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탈북자들은 우리의 동포인데 교회가 돌보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한다는 말인가.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이 목을 맴돌았다. 하지만 서로를 탐색하려는 기 싸움일 뿐이었다. 여기서 중단하면 미래도 없었다.
갈라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결국 역사적인 첫 모임이 열렸다. 이를 시작으로 양국 기독교는 허심탄회한 대화와 협력을 했다. 벅찬 기억이다. 양국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기독교 교류도 흐지부지됐다. 안타깝다.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중국과 교류하면서 한국교회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의 역사를 복기해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중국교회를 얕잡아 보는 실수를 범했다.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을 무시한 것이다. 심지어 교회 크기와 예산 등을 자랑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서둘렀다. 천천히, 느리게 살아온 이들과 한두 마디 대화한 뒤 모든 일이 성사됐다고 착각한 것이다. 우리만 흥분했고 그러다 실망했다. 혼자 오해하고 혼자 돌아섰다. 대화가 잘 풀리지 않으니 무리한 약속도 남발했다. 다 헛발질이었다. 결국, 신뢰가 다 깨졌다. 이를 복원하고 깨진 걸 봉합해가며 한·중교류를 이어왔다.
우리나라와 중국 기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북한의 빗장을 풀기 위해서도 반드시 교류해야 한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던 양국 기독교의 교류사는 다음 회에 소개한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4) 다시 이은 한·중 기독교 교류, 천천히 걷는 지혜가…
중국교회 바라보는 시각 수정돼야
박종순 목사(오른쪽 다섯 번째)가 2005년 11월 중국 남경신학원에서 열린 3차 한·중기독교교류회에서 양국 교회 지도자들과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54년 자치·자양·자전을 기치로 내건 삼자애국운동을 시작한다. 외국인 선교사가 중국 교회에 영향을 주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8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개신교협회도 조직됐다. 이 둘을 중국기독교양회라고 부른다.
양회와는 90년대 초부터 교류를 시작했다. 2003년 9월 16~18일 중국 상하이에서 제1차 한·중기독교교류회를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모임이었다. 주제는 한·중 교회의 협력과 동역 방안 모색이었다. 협력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자리였다. 두 번째 모임은 2004년 10월 18일부터 양일간 서울에서 진행됐다. ‘한·중 신학교육, 이단 대처, 기독교 사회봉사전략’를 수립하는 자리였다. 왕쭤안(王作安) 중국 국가종교국 부국장과 선청언(沈承恩) 중국기독교협회 부회장 등 중국 정부 및 기독교계 인사 26명이 방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충신교회를 비롯해 한국세계선교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관계자와 교단 대표들이 참석했다.
3차 교류회는 2005년 11월 21~23일 중국 남경신학원에서 열렸다. 주제는 ‘이단 대처와 현대신학의 동향, 교회성장과 신학교육’이었다. 기독교교육 교류방안도 논의했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 주요 신학대 총장과 교수 등 학자 50여명이 참석했다.
이듬해 12월 14일부터 3일 동안 진행된 4차 교류회는 서울 타워호텔에서 진행됐다. 중국 대표단만 60여명이 방한했다. 대규모 행사였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중국 기독교 대표들도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기독교 대표들이 해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한 사례”라며 반색했다. 중국 공산당 종교국과 삼자애국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들의 입을 통해 생생한 중국교회의 현실이 전해졌다.
4차 교류회를 끝으로 양국 모임은 상당 기간 중단됐다. 흐지부지됐던 모임이 재개된 건 2014년의 일이었다. 그해 6월 14~19일 서울 쉐라톤 디큐브시티 호텔에서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교류회가 열렸다. 말 그대로 중국과 한국교회의 교류 역사를 돌아봤고 미래 청사진을 그렸다. 당시 행사를 준비하면서 오랜 세월 되뇌어온 말을 수없이 많이 생각했다.
‘서둘면 가다가 멈춰야 하고 천천히 가면 끝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역 철학이기도 하다. 중국은 상존하는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나라다. 중국과의 교류는 천천히 걷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두르면 우리만 지친다. 한번 단절된 관계를 봉합하는 건 쉽지 않다.
중국교회를 바라보는 우리 시각도 수정돼야 한다. 중국은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은 성공의 고속열차를 타고 있다. 경제성장과 인재양성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중국교회가 그 안에 있다. 이제라도 너와 내가 동등하다는 동반자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양국 교회 사이에 대화와 교류의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원칙이 어디 중국에만 적용되겠는가. 세계의 모든 선교지를 우리보다 낮게 봐서는 안 된다. 모두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다. 이를 인정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과업이 남아 있다. 선교의 깃발을 들고 땅끝으로 향하자.
***[역경의 열매] 박종순 (25) 암이라니… “주님, 말기 아니라 감사합니다”
위암 진단 결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부정·원망으로 혼란 중 ‘감사’ 떠올라
박종순 목사(왼쪽 세 번째)가 1998년 3월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여사(왼쪽부터)와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목사님, 위 조직검사를 해야 합니다. 간호사를 따라가세요.”
1999년 3월 말, 서울 삼성의료원 건강검진센터에서였다. 진료한 의사가 교인이었다. 짧은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큰일이 난 걸 직감했다. 아찔했다.
부총회장에 총회장까지 지내면서 사실 하루도 제대로 쉰 날이 없었다. 건강검진도 3년이나 미루다 한 것이었다. 조직검사를 위해 누웠다. 마음이 복잡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화호리 생각이 났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달려온 여정이 뒤따라 떠올랐다.
총회 일을 하면서도 목회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소 하던 대로 금식기도도 했다. 철야기도에 새벽기도와 주일설교에 심방까지…. 늘 분주했던 시간이었다.
안식년도 사용하지 않았다. 장로님들이 제발 좀 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나는 안식년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안식년에 쉰 목사님들을 탓하는 게 아니다. 내 생각이 그랬단 것이다. 1년씩 교회를 비우고 싶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결국, 내가 미련했다. 몸이 무쇠인 줄 알았으니 나보다 미련한 사람이 또 있을까. 쉬었어야 했다. 1년이 부담됐다면 한 달이라도 안식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며칠이 지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날은 4월 2일 성금요일이었다. 의료원장이 직접 결과를 전해 준다고 했다. 원장을 만났다. 각오하고 간 자리였다. 그런데 원장이 날씨부터 부활절 이야기까지 딴소리를 시작했다. 차마 결과를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먼저 말했다. “결과가 나왔지요?” 대화는 중단됐고 침묵이 흘렀다. “암이에요, 위암입니다.”
‘암이라니….’ 큰 병을 각오했다. 암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보통 암 환자들은 ‘부정-반항-수용’의 단계를 거치면서 투병을 한다. 정신이 돌아오자 나도 암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몸속에 자라는 악성종양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원장이 정적을 깼다. “빨리 수술해야 합니다. 다행히 말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시간이 없습니다. 급해요. 지금 입원하시면 제일 좋습니다.” 준비했던 말을 쏟아냈다. 날 당장 붙잡아 입원시키려는 마음이 전해졌다.
“제가 오늘 성금요일 예배 설교를 해야 해요. 제가 갑자기 입원하면 교인들이 많이 놀랄 겁니다. 급한 일만 마치고 입원하겠습니다.”
말은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강변북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무심히 창밖을 내다봤다. 늘 보는 풍경인데 그날따라 낯설었다. ‘목사도 암 앞에서는 별수없구나. 이 풍경을 계속 볼 수 있을까.’ 부정과 원망이 뒤섞였다. 혼란스러웠다. 당장 성금요일 예배 설교를 못 할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하니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감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도 말기는 아니지 않은가. 그나마 다행이다. 나를 기다리는 의료진도 있지 않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교인들을 만나러 가자. 가서 말씀을 전하자. 이제 이틀만 지나면 부활주일 아닌가. 부활의 벅찬 희망을 전해야지.’
그리고 기도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만해서 다행입니다. 건강 지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치료받고 더욱 열심히 목회하게 해 주세요.” 평화가 찾아왔다. 저 멀리 충신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6) 암 진단받고 당장 입원하라는 목사가 설교하러…
입원 앞두고 설교 약속 어길 수 없어 정해진 일정 마무리하고 입원…다행히 병 깊지 않아 일주일 만에 퇴원
박종순 목사(왼쪽 두번째)가 지난 9일 미국 뉴저지주 웨인 베다니교회에서 열린 ‘2019 선교적교회 콘퍼런스’에서 성찬식을 인도하며 위암 수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교인들이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차 안에서 많은 근심을 했지만, 교인들을 만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가 나왔다. 반갑게 인사하고 몇몇 교인과는 안부를 나눴다.
단에 올랐다. 준비한 대로 설교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한 예배였다. 나의 고난을 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절 위해 기도해 주세요. 곧 수술받으러 갑니다.’ 생각만 했고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설교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목사님, 할렐루야 축구단입니다. 내일 동대문경기장에서 멕시코와 친선경기가 있습니다. 확인차 문자 드립니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던 축구단이 국제경기를 한다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 “내일 뵙겠습니다”라고 답을 보냈다.
봄바람이 원래 차다. 암 진단을 받고 나니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아프다는 소릴 들어서인지 더 춥게 느껴졌다. 축사도 하고 축구경기도 관람했다. 경기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와 주일예배 설교를 준비했다. 주일에는 1부 예배부터 설교했다. 힘차게 설교하고 매 주일 저녁에 하던 교역자 회의까지 인도한 뒤에야 교회를 나섰다.
교회를 나오니 이미 어둠이 깊었다. 병원에서는 언제 입원할 수 있는지 계속 연락해 왔다. 이미 몇몇 장로님들께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 두었다. 장로님들도 빠른 입원을 권했다. “목사님, 어서 입원하셔서 수술받으시지요. 병원에서도 급히 수술하자는데 왜 기다리십니까.” “장로님 내일 A장로님이 남동공단에서 공장 준공식을 하잖아요. 준공 예배 설교까지는 하고 입원하겠습니다.”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는 게 목사다. 이미 정해진 일은 해야 한다. 그것도 설교이지 않은가. 설교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남동공단으로 향했다. 나를 기다리던 장로님은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암 진단받고 당장 입원하라는 목사가 설교하러 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죄송할 일이 아니었다. 미리 약속한 일인데 당연한 일이었다. 주님 안에서 사업이 번창하길 기도했다.
“교회로 갑시다.” 장로님들이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교회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도착해 책상 정리를 한 뒤 원고를 쓸 수 있는 준비만 해서 병원으로 갔다. 가족들은 이미 입원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 병원으로 떠났다.
입원한 뒤 3일 동안 재검사를 받았다. 틈틈이 신문에 연재하던 칼럼도 썼다. 언제 퇴원할지 몰라 설교도 미리 써 뒀다. 막상 입원하니 마음은 편했다.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도 하며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암이 깊지 않았다. 수술을 받았다. 위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이었다. 마취에서 깨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일생 느껴본 일이 없는 아픔이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했다. 주님의 고통은 얼마나 크셨을까. 고통과 인내의 십자가를 날 위해 대신 지셨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1966년 목사안수 받고 셀 수 없이 많은 설교를 했다. 그런데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느꼈을 아픔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지 못했다. 주님이 수술을 통해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 주셨으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나는 당시 아픔을 성찬식 때 종종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을 함께 느끼기 위해서다. 주님은 나를 기념하라 하셨다. 우리는 그 아픔과 인내, 희생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해야 한다. 회복하면서 30가지 감사기도를 썼다. 기도를 읽고 또 읽으며 받은 복을 세어봤다. 모든 게 은혜고 모든 게 축복이다. 입원과 수술, 회복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7) 억울한 옥살이 재미교포 이한탁 구명운동 펼치다
방화범으로 종신형 수감 중인 이씨 화재 원인 밝혀졌는데도 재심 안해… 한국교회 힘 합쳐 풀려나
박종순 목사(왼쪽)가 김영호 미국 이한탁구명위원회 위원으로부터 2016년 4월 서울 마포구 한국교회지도자센터에서 감사패를 받고 있다.
2000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재미교포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교도소에 억울하게 수감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들어봤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수감 중인 교포의 이름은 이한탁이었다.
1989년 7월, 이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딸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교회 수련원을 찾았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밤 수련원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씨는 살았지만 딸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슬픔도 잠시, 이씨가 영어를 잘하지 못하자 초동 수사를 하던 경찰들이 그를 방화범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느닷없이 딸의 살해범이 됐다.
재판 결과는 종신형이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억울한 일이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졸속 재판이라는 주장도 이해됐다. 화재 원인도 누전으로 밝혀졌는데 재심도 없었다. 이미 교포들이 대대적인 구명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논의했다. 모두 내 뜻에 공감했다. 이씨를 돕기 위한 구명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그해 5월 18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이한탁 구명운동 한국본부를 출범했다. 나는 대표회장을 맡았다.
한국본부를 출범한 건 미국에 한국에 대한 바른 시각을 심어주고 교포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였다. 출범식에서 나는 “일방적 재판 때문에 종신형을 받은 이한탁씨 사건은 백인사회의 두꺼운 벽과 소수민족이 처한 열악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일이다. 한국교회가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억울한 이씨에게 격려와 함께 동포애를 확인시켜 주자”고 했다.
운동본부는 2만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3만5000달러를 모금했다. 나도 이씨를 면회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았다. 뉴욕에서 차로 5시간이나 가야 했다. 먼 곳이었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갔다.
면회하는 내내 이씨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울면서도 “저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진심이 전해졌다.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벽이 없다면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오랜 수감 생활로 건강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기도해 준 뒤 헤어졌다.
그 뒤 나와 이씨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꿈과 희망을 전했다. 결국, 이씨는 2014년 화재감식전문가의 무죄 주장으로 재심이 받아들여지면서 풀려났다.
25년 억울한 옥살이에서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모두의 기쁨이었다. 미국처럼 엄격한 법치주의 국가에서 종신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25년 만에 석방된 건 기적과도 같았다. 운동본부 관계자들과 감사기도를 드렸다. 모든 게 주님의 은혜였다.
석방된 이씨와 전화통화를 했다. 기쁨을 나눴다. 그가 흘렸던 감격의 흐느낌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긴 수감생활을 견뎠다. 미국 구명위원회가 면회를 갈 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다. 기도 생활을 하고 있다. 기도 부탁드린다”고 했다고 한다.
나는 2016년 미국 이한탁 구명위원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그날 나는 담담하게 소감을 전했다. “같은 동포로서 이씨의 억울한 사연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역경의 열매] 박종순 (28) 화해중재원 만들어 “교회 문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 일 사회법에 맡기는게 안타까워… 교회 분쟁 화해·중재할 공식조직 설립
박종순 목사(왼쪽 두 번째)가 2008년 4월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내 한국기독교화해중재원 사무실 개관 뒤 현판을 가리키고 있다.
2006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을 지낼 때였다. 당시 이단 문제가 심각했고 각종 소송도 빈번했다. 한국교회도 법률적 보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초반 소송을 시작한 한 대형교회 소송도 옥신각신하며 끝나질 않고 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임원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한기총 안에 변호인단을 꾸리기로 뜻을 모았다. 기독교인 변호사 33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민족대표 33인이 떠올랐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기총 법률자문단이 조직됐다. 나름대로 활동을 잘했다. 변호사들도 적극적이었다. 그만큼 필요했다는 의미다.
나는 1년 임기를 마치고 한기총을 떠났다. 하지만 그만두고 나니 법률자문단의 역할이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
교회 안에서 소송이 발생하면 처음에는 교회법으로 다투는 척하다 결국 사회법으로 가는 분위기가 생기던 시절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교회 일을 놓고 사회법의 판결을 받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이 더 많았다. 무조건 변호사를 만나 소송을 시작하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법률자문단에 계시던 몇몇 변호사들과 상의했다. 그리고 교회 분쟁을 중재할 공식 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한국기독교화해중재원은 2008년 3월 21일 서울 앰배서더호텔에서 창립이사회를 열었다. 교회의 각종 갈등과 분쟁을 화해조정과 중재로 해결하자는 기치를 내걸었다.
내가 이사장을, 당시 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이던 피영민 목사가 부이사장을 맡았다. 초대 원장에는 대법관을 지낸 김상원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날 나는 화해와 중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회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화해중재원을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이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이 땅에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싸움보다는 화해합시다. 중재원이 그 중심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화해중재원이 활동하고 있다. 2011년 대법원으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아 공적 분쟁 해결기관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다만 중재 건수가 많지 않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중재원으로 오면 정말 편하다. 그런데 사람들 마음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법원으로 가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이런 분들에게는 주변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법원에 가서 시비를 가린 교회치고 상처받지 않은 교회가 있는지 세어보라고 하고 싶다. 큰 싸움은 반드시 큰 상처를 남긴다. 상처 없이, 나한테만 유리한 방향으로 싸우고 이길 길은 없다.
제발 시작도 끝도 없는 재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법원에서도 교회 송사를 싫어한다. 끝도 안 나고 서로 승복도 안 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법원 재판 결과를 승복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대법원까지 송사를 한 교회 치고 온전한 교회는 없었다. 교인은 떠나고 교회는 갈라진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말씀의 전당이 소송의 전당으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이다. 미국의 화해 중재 역사는 오래됐다. 활용 빈도도 높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복음만 전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싸우는 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29) 꽃길도 고생길도 아닌 ‘정도목회’의 길
정도를 벗어나면 목회 오래가지 못해 푯대인 주님 바라보고 바른길 걸어야
박종순 목사 성역 40주년 '기념 논문집 출판기념회 및 헌정식'에 참석한 충목회 회원들이 2006년 서울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1976년부터 2010년까지 34년, 충신교회에서 목회했던 기간이다. 그동안 교회를 섬긴 걸 생각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앞선다. 좋은 교인을 만났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도 아니었는데 교인들은 나를 따랐고 함께 신앙을 키웠다. 사랑을 주고 기도로 조력했다. 긴 세월 따뜻한 사랑을 준 교인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교회의 그늘에 머물게 해준 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반면 후회스러운 마음도 크다. 도량이 컸다면 교회를 더 성장시킬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나는 굳은 목회철학을 세우고 흔들리지 않는 목회를 했다. 목회자가 흔들리지 않아야 교인들이 신앙 안에 바로 선다.
‘정도 목회’를 강조했다. 위임 목사가 되는 후배나 제자들에게 한자로 ‘正道 牧會’라는 휘호를 써서 선물하곤 한다. 무슨 뜻인지 몰라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지만 받자마자 “바르게 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목회하다 보면 수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대체로 편한 길과 고생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꽃길만 걷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단명하기 쉽다. 고생길로만 가는 것도 답이 아니다. 정도 목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목사의 삶과 신앙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나 창의력, 톡톡 튀는 이벤트를 통해 재미있는 목회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정도를 벗어나면 오래 못 간다. 옳은 것은 바로 밀고 나가고, 옳지 않은 것은 성공과 행운이 손짓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정도 목회의 출발점이다. 푯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바른길을 걷는 것, 이것이 정도 목회의 종착점이 돼야 한다.
‘화해 목회’도 나의 목회철학 중 하나다. 교회들이 분규나 분란, 갈등에 빠지는 건 대부분 중직자들이 원인을 제공해서다. 욕심이 앞서면 싸움이 시작된다. 평소 교회든 총회든 봉사기관이든 연합기관이든 모두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이끌어야 한다는 소신이 있다.
의외로 이 방법은 쉽다. 사욕을 버린 뒤 섬기겠다고 각오하는 것이다. 내려놓고 내가 죽으면 평화와 화해가 찾아온다. 할 말 다 해서는 갈등만 있을 뿐이다. 뒤끝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다혈질이다. 본인에게는 뒤끝이 없을 수 있지만 수시로 다툼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다. 뒤끝을 키우는 셈이다.
나무를 키우면 집을 지을 수 있다. 사람을 키우면 교회를 짓고 역사를 세운다. 사람을 키우는 목회에도 관심이 컸다. ‘키울 수 있을 때까지 키우자’고 다짐했다. 유학을 지원했을 때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도왔다. 한때 비슷한 또래의 충신교회 부교역자 출신 세 명이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함께 공부하며 해석학과 교회사, 선교학 박사학위를 받은 일도 있다.
나와 함께 사역했던 후배와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이 충목회다. 회원이 250여명을 넘어섰다. 가장 중요한 건 ‘쓸모 있는 나무’를 찾는 데 있다. 찔레나 엉겅퀴는 100년을 키워도 잡목이다. 좋은 나무를 찾았다면 꾸준히 키워야 한다. 이들이 결국 한국교회 다음세대를 견인하는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30) 내풍·외풍 드센 목회… 균형과 조화로 감당
개발 광풍 불던 해에 부임, 교회 건축 문제로 교인들 간 대립… 성경공부와 기도로 영성 채우며 소통
충신교회 찬양대가 2007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교민을 위한 사랑의 음악회’에서 찬양하고 있다.
나는 타고난 성격이 민감하고 예민하다. 인상도 후덕한 이웃 아저씨와는 거리가 멀다. 차갑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인간관계도 ‘예’ ‘아니오’가 분명한 편이다. 우물우물하거나 속임수 쓰는 걸 싫어한다. 대신 한번 신임한 사람은 힘든 상황에 부닥쳤을 때 반드시 변호하고 감싸준다.
충신교회도 이런 원칙 안에서 섬겼다. 목회는 내풍과 외풍이 드세다. 그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런 원칙이 필요했다.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목사는 없다. 쓴나물도 먹고 마라의 쓴 물(출 15:23~26)도 마셔야 한다.
실패를 겁내면 성공의 자리에 닿을 수 없다. 바닥까지 실패했을 때 그 주변에 성공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 성공을 교회의 크기로 결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늘 ‘균형 목회’를 염두에 뒀다. 나도 이렇게 목회했고 후배와 제자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했다. 줄타기 묘기는 절묘한 균형감각이 있어야 가능하다. 몸의 균형과 바른 방향성이 고공 줄타기의 성공 요인이다. 목회도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균형에 많은 신경을 쓰신 것 같다. 우뇌와 좌뇌, 두 다리, 두 팔 등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있다.
충신교회에 부임했던 1976년 동부이촌동은 개발 광풍이 불던 곳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동네였다. 후암동 골목에 있던 교회도 동부이촌동 초입으로 이전했다. 교회 건축 중 갈등이 발생했고 담임목사님이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내가 부임하기 전 이미 두 명의 교역자가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전쟁터에 소대장으로 부임한 셈이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게 균형과 조화였다. 교인 사이의 양극화와 대립을 감싸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새벽기도와 성경공부, 금요철야기도회였다. 10여명으로 시작한 철야기도회가 입소문을 타면서 1000명을 넘어섰다. 당시 철야기도회는 금요일 밤 10시30분에 시작해 이튿날 새벽 5시까지 했다. 성경공부를 통해 지적인 부분을 채워줬다. 철야기도와 새벽기도는 영성을 채우는 자리였다. 이렇게 균형을 맞췄다.
목회자의 신학도 바른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과 교회는 함께 가는 것이다. 교회는 신학을 만들고 신학은 교회를 세운다. 교회는 신학 태동의 산실이며 바른 신학은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출발점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의 분열과 혼란은 모두 신학 싸움 때문이었다. 여과되지 않은 채 서구신학을 직수입한 것도 다툼의 원인이었다.
폐쇄 정책은 발전을 막고 성도를 우민화한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수입하면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렵다. 해외 신학의 무분별한 이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극단의 진보신학이나 보수신학 모두 마찬가지다. 이 또한 균형이 필요하다. 교회와 신학은 소통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인들이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에는 걸림돌이 많다. 신앙은 하나님이 대상이지만 목회는 사람이 대상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면해야 한다. 그들을 신앙인으로 양육하고 인도하는 것이 목회다. 그런데 그들이 목회 걸림돌이 될 때도 있다. 목회자가 오만가지 생각에 빠지는 순간이다. 목회자가 균형 감각을 찾아야 하는 때가 바로 이때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나 친절로 포장하며 득실을 따지려는 사람들, 그들을 잘못 다루면 목회 현장이 고통스럽고 소란스러워진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한 교인일 뿐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31) 충신교회 사역 30주년 기념문집 헌정 받아
가족·후배·제자·교계인사들 편지형식… 84명의 글 모아 선물한 ‘충목회’ 회원들
충목회 회원들이 2006년 11월 박종순 목사에게 헌정한 기념문집 ‘그대는 솔바람 거느린 거목이어라’의 표지.
34년 7개월. 충신교회에서 사역했던 기간이다. 분규가 심했던 교회에 부임해 교회를 안정시켰으니 목회자로서 이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교인을 모아 등록 교인 1만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시킨 건 주님의 은혜다.
목회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장으로 봉사할 기회도 얻었다.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을 맡아 한국교회도 섬겼다. 사실 양 기관 회장을 지낸 건 흔치 않은 경력이다.
2006년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충목회’가 나의 충신교회 사역 30년을 기념해 ‘그대는 솔바람 거느린 거목이어라’는 제목의 기념문집을 헌정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는 가족뿐 아니라 나와 가깝게 지냈던 교계 인사와 후배, 제자들이 내게 쓴 편지 형식의 글이 담겨 있다. 읽을 때마다 나를 돌아보게 된다.
대부분이 나에 대한 추억들이다. 추억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줄과도 같다. 추억을 통해 현재를 살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작은딸 미진이는 새벽에 해 줬던 기도를 기억했다. “우리 세 남매 모두 잘 기억하고 있는 건 부모님의 기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기도 다녀오시면 우리 방에 들어오셔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시곤 했다. 보통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느끼지 못했지만, 가끔 선잠을 잘 때면 차가운 손이 느껴져 잠을 깨곤 했다. 손은 차가웠지만, 그 손에 담긴 사랑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기도로 성장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자식에게 이런 평가를 받은 내가 축복을 받았다. 월드비전 회장을 지낸 박종삼 목사는 장로회신학대 입학 때부터 친구였다. 그의 우정 어린 글도 기억에 남는다. “나의 70년 삶에서 박종순 목사님과 친구로 인생의 절반인 35년 이상 지내왔다. 믿음 안에서 형제로 격려와 위로, 조언,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친구다. 하나님이 내리신 축복의 통로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둘 사이에 우정을 주신 건 말년을 풍요롭게 보내라는 의미다. 나에게 형제 같은 우정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박 목사님께 하나님의 복이 함께하길 기도한다.”
정진경(1921~2009) 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님이 주신 사랑은 늘 차고도 넘쳤다. 그분이 내게 과분한 평가를 해 주신 것도 감사한 일이다. “연합사업을 같이하면서 박 목사님은 누구보다 카리스마 강한 분이면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셨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정당한 주장에는 후퇴하지 않으면서도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미소와 유머로 상대방을 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불합리한 주장에 대해서는 냉엄했습니다. 일치를 추구하면서도 무분별한 타협은 용납하지 않는 소신이 철저한 민주적인 지도자이십니다.”
충목회 회원들은 은퇴를 앞둔 내게 기념문집이라는 큰 선물을 줬다. 사랑은 나누면 더욱 커진다. 2010년 12월 은퇴한 나는 기념문집에 나와 나눴던 추억을 기록한 84명의 사랑과 축복 속에서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었다. 사실 은퇴한 뒤에도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모두 날 기억하고 나의 목회를 이해해 준 삶과 신앙, 목회의 동반자들 덕분이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32) 목회는 은퇴했지만 더 바빠진 사역자의 삶
은퇴 후 홀가분한 삶 생각했지만 전국 교회와 해외에서 초청 받아 부흥강사로 늘 설교하는 현역생활
박종순 목사(오른쪽 두 번째)가 2010년 12월 26일 주일 저녁예배에서 은퇴를 아쉬워하는 교인들이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받고 있다.
2010년 12월 충신교회에서 은퇴했다. 비로소 원로목사가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설교나 교회 행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새벽기도회를 비롯해 수요·금요예배, 주일예배 등 담임 목회를 하면 매주 많은 설교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늘 성경을 묵상해야 한다. 교인들의 삶 속에서 살아 넘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사는 자신을 소진한다. 주일 사역을 마치고 나면 모든 게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지만, 다시 기운을 내야 새로운 한 주 동안 말씀을 전할 수 있다.
여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큰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홀가분했다. 사실 홀가분해질 거라 생각했다. 막상 은퇴하고 나니 그렇지 않았다. 다양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회는 은퇴했지만, 사역은 은퇴하지 않은 셈이었다.
물론 누구도 제도로 정한 정년을 피할 길은 없다. 정년을 앞두면 하루가 1000년 같지 않고 1000년이 하루와 같다. 축지법으로 걷는 것처럼 은퇴의 날이 빨리 다가온다.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먹고살 것도 준비해야 하지만,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준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나는 일찌감치 은퇴를 받아들였다. 은퇴 이후를 꿈꿨다. 2011년부터 전국 교회와 해외 한인교회에서 부흥강사로 나를 초청하기 시작했다. 주일설교만 하지 않았지 늘 설교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현역일 때와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그나마 시간 여유가 생겼다. 될 수 있는 대로 저녁 식사 모임도 피하려고 한다. 교회 돌보느라 긴 세월 집안일을 돌보지 못한 걸 보충해야 한다. 웬만하면 아내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과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매일 맨손체조와 스트레칭을 한다. 원래 소식을 했기 때문에 식사량을 조절할 필요가 없는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바울의 고백은 목회를 내려놓은 지금도 태산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회자의 삶이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며 살았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는 자괴감으로 괴롭다.
은퇴를 앞두고 동역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그것은 목회에 마침표를 찍는 날 ‘완주자의 노래를 부르자’는 것이었다. 인생도 그렇다. 삶에도 마침표가 필요하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를 보내신 주님만 아신다.
지금 누리는 그 자리, 머무는 그곳, 움켜쥔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설교한다. 목사에게 욕심을 버리라, 내려놓으라고 설교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비행기는 엄청난 양의 화물과 사람을 싣고 장시간 하늘을 난다. 이를 위해 가벼운 소재로 몸통을 만들고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달지 않는다. 과체중, 과부하는 은퇴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이 피해야 할 것들이다.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다. 다만 아직 내 삶은 끝나지 않았다. 사역에서는 은퇴하지 않은 현역 아닌가.
***[역경의 열매] 박종순 (33) ‘친구야 천국 가자’… 어르신 전용 교회 세운 한지터
시니어 교인 친화적 목회 필요해… 65세 이상만 출석해 예배 드리며 멋지게 늙을 수 있는 길 제시
박종순 목사가 지난 9월 30일 경기도 여주 마임비전빌리지에서 열린 한국교회지도자센터 주최 ‘시니어 임파워링’ 세미나에서 인사하고 있다.
시니어 임파워링(Senior Empowering). 어른들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의미다. 이를 교회에 적용하면 어르신 친화적인 목회가 필요하다는 걸로 풀이할 수 있다.
한국교회지도자센터(한지터)는 지난 9월 말 이 주제를 갖고 바른신학 균형목회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서는 교회들이 시니어 교인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사례를 소개하고 다른 교회들도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경기도 성남 선한목자교회는 65세 이상 교인만 출석하는 갈렙교회를 세웠다. 교회 안에 있는 교회다. 예배는 목요일마다 드린다. 어르신 교인들의 만족도는 높다. 다른 교회들이 견학도 온다. 이 교회의 표어는 ‘친구야 천국 가자’. 어르신 전도 표어로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갈렙교회와 같은 생생한 사례들은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을 줬다.
주제에 대해 시의적절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드는 것이 즐거울 수는 없지만 멋지게 늙을 수는 있습니다. 교회가 그 길을 제시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한지터가 첫발을 내디딘 지 어느덧 13년이 됐다. 한지터는 2006년 목회 40주년을 맞아 바른신학과 목회 균형감을 지닌 목회자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한 단체다. 바른 신학이 바른 교회를 세운다는 믿음으로 세워졌다. 한지터의 비전은 한국교회를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자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담아 빚어낸 한지터는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를 열어왔다. ‘바른 예배 바른 설교’ ‘섬김의 리더십’ ‘건강한 교회 세우기’ ‘따뜻한 소통과 행복한 동역’ ‘워라밸 시대의 행복한 일터 목회’ 등이다. ‘한국교회 문제에 관한 실태 조사’ ‘현대 한국사회 신앙 의식 조사’ ‘한국교회 소통과 동역 현황’ ‘2030세대의 현실, 희망’ 등을 주제로 의식조사도 진행했다.
이 주제들은 모두 바른 신학과 균형 잡힌 목회를 돕는 자양분이었다. 주제는 나 혼자 정하는 게 아니다. 세미나가 끝나면 전문위원들이 모여 평가회를 한다. 전문위원들은 목회자와 신학자들로 구성했다. 평가회에서는 지난 세미나도 점검하지만 새로 할 세미나의 주제도 정한다. 결국, 새로운 세미나는 1년 동안 준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문위원들과 두 달마다 모임을 한다.
이렇게 다듬어서 만들어 내는 게 한지터 세미나다. 신학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극좌나 극우 모두 경계해야 한다. 너무 감성적으로 나가서도 안 되고 지성이나 이성만 강조되는 것도 곤란하다. 이성과 감성, 말씀과 성령, 삶과 신앙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 신학이 바로 서야 설교가 산다.
매년 반복하는 세미나를 1년 동안 준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도 치우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시대에 딱 맞는 주제를 정한 뒤에는 이 주제가 자칫 한쪽으로 쏠리지는 않을지 검토한다.
모두 한국교회를 성숙시키기 위한 일들이다. 나는 이를 위해 작은 역할을 할 뿐이다. 사실 한지터는 충신교회가 심은 나무다. 나와 함께 사역했던 후배와 제자들의 모임인 충목회가 불씨를 댕겼다. 모두 함께 일궈야 할 미래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역경의 열매] 박종순 (34) 성장 일변도 한국교회… 각고의 노력으로 정체성 찾아야
공교회성 상실한 지나친 경쟁으로 교회 상층부 병들어 지도력에 균열… 좋은 지도자 품은 교회들 늘어나야
박종순 목사가 지난 9월 서울 마포구 한국교회지도자센터 사무실에서 십자가 액자를 가리키며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영향력은 크다. 점점 커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 교회와 지도자들 때문에 우리나라 교회 전체가 피해를 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지도자들부터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지도자들이 따를 길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길 외에는 탈출구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했을까. 모든 지도자가 쉬지 않고 자문해야 한다. 교회에 대해 사회가 우려하는 일은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를 둘러싼 사건과 사고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 점차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사회에서 일어났더라도 충격적인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진다. 부끄러운 일이다.
교회는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자업자득이다. 한국교회가 성장 일변도로 치달으면서 자기만족에 도취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은 낮아짐이다.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급성장 한 한국교회는 낮아짐을 상실했고 스스로 비대해졌다. 정체성을 잃은 것이다. 성장 일변도에 매몰됐다. 공교회성을 상실한 지나친 경쟁, 지도자의 스캔들 등 감춰진 악성 바이러스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다.
논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설수 속에서 부흥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개혁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단이 필요하다. 어디가 병들었는지 알아야 한다. 교회를 사람 몸으로 비유하곤 한다.
현재의 교회는 상층부인 머리가 병들었다. 지도력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머리가 온전치 못하니 온몸이 병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해법은 간단하다. 무릎 꿇고 회개해야 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회개하면 낮아질 수 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한국교회에 가득해야 한다.
나는 교회의 자정 능력을 믿는다.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는 정글에서 거목(巨木)이 자랄 수 있는 건 썩은 나무가 스스로 쓰러지는 ‘자연 솎음질’ 때문이다. 치유하도록 참고 기다리는 편이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한도 끝도 없이 자정을 기다려 달라는 것은 아니다.
자정하기로 했으면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내려놓음 없이 변화는 없다.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을 이겨내야 변화를 얻는다. 고통 없이 남는 것은 없다. 요행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거듭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곳곳에 절망이 가득하더라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 자체가 소망이며 생명이다. 교인들도 주님이라는 희망을 붙잡아야 한다. 교회들은 사심 없이 대의를 추구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면 희망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이것저것 붙잡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교회가 바로 서야 국가도 바로 설 수 있다. 지도력도 마찬가지다. 바른 지도자가 건강한 교회를 이끌 수 있다. 요행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좋은 지도자를 품은 교회들이 늘어나야 교회도 국가도 길을 잃지 않는다.
***[역경의 열매] 박종순 (35·끝) 주님, 이 땅과 한국교회를 되살려주소서
교회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위기들 원인과 단초 제공은 모두 우리 자신
박종순 목사가 2015년 경기도 여주 마임비전빌리지에서 열린 바른신학 균형목회 세미나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교회 안과 밖에서 모두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위기의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위기 ‘제조 공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바로 나 때문에 위기가 생성되고 증폭된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나 외부 요인 때문에 위기가 왔다는 오판의 늪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주목할 것은 ‘핑계’다. 핑계의 본질은 떠넘기기다. ‘떠넘기기 바이러스’가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다.
물론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위기의 폭풍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원인과 단초를 제공한 건 우리다. 그래도 외풍이 너무 세다. 의기투합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매체와 단체들이 교회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교회는 방패도 갑옷도 없다. 어떤 공격도 막아내겠다고 방패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해법은 하나뿐이다.
한국교회가 자중지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교회연합체의 균열도, 교회 내의 갈등도 중단해야 한다. 더 이상의 추락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도 바울은 “혈과 육이 아니라 세상 악한 권세들과 악한 영들”이라며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끼리 싸우는 건 애초에 싸움의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전우를 적으로, 형제를 원수로 여기고 으르렁거렸다. 걸핏하면 교파를 나누고 갈라섰다. 치졸한 싸움판에서 기선을 잡았다며 개선의 노래를 부르는 일도 많았다. 어리석은 일이다.
은퇴를 하고 나니 한국교회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안타까울 때마다 기도한다. 인생의 연수가 늘어나니 기도 제목도 늘어난다.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는 가장 중요한 주제다. 나는 한국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이 땅을 황무케 한 저희 허물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 땅을 고쳐 주옵소서. 바로 서지 못하고 바로 걷지 못한 저희의 우매함을 용서하시고 한국교회를 바로 세워 주옵소서. 나 때문이라던 요나의 고백이 함성처럼 터지게 하옵소서. 가시처럼 메마른 겨레의 현실은 눈물샘이 마른 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통회의 강변으로 나가 눈물로 그 강을 메우게 하옵소서. 국가도 교회도 주님이 주인이심을 잊지 않게 하시고 교만과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지지 않게 하옵소서. 에스겔 골짜기에 부흥의 생기를 불어넣으신 주님, 이 땅과 교회를 되살려 주옵소서. 그리하실 줄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는 삶의 기준이자 나침반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끈이다. 은퇴의 날이 빠르게 다가왔다. 주님 앞으로 가는 순간도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그때까지 묵묵히 사명을 감당할 뿐이다.
이제 한 가지 소망이 있다. 들림 받을 그날, 바울처럼 완주자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는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고 싶다. 완주자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 앞에 서는 그날, 빈손으로 주님의 그 큰 손을 덥석 붙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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