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주민 김성도씨에 대해
포항에서 운영하고 있는 시민로스쿨에 김모씨가 입학했다. 직업란에 독도 디자인이라고 되어 있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독도리 이장인 김성도 씨의 딸이며, 독도 컨텐츠로 다양한 상품을 조달청에 납품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약 2주 전에 갑자기 아버님이 아파서 대구 큰 병원에 가야하는데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약속이 있었지만 급히 대구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가면서 아버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가는 동안 내내 몹시 아프신지 신음소리를 냈다. 마음이 바빴다. 무사히 도착해서 입원 수속 밟는 동안 기다리며 병간호할 손녀에게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인지, 독도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물어본 기억이 있다.
인물에 초점을 맞춰 공부하는 입장에서 독도를 지켜낸 한 인물에 대해 쓰는 것도 아주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락을 취해보니 지금은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 중이라는 전갈과 함께 인터뷰가 가능할 것 같으냐는 물음에 아직은 어렵다고 전해 왔다.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다. 될 때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인터뷰할 때를 대비해서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보았다.
딸의 이야기로는 아버지인 김성도 이장은 굉장히 고집이 세며 완고하다고 했다. 그리고 성질이 보통이 넘으며, 근래에 아프고 나서부터는 식탐이 아주 많아졌다고도 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명감 하나만으로는 견디기 힘든 혹독하고 척박한 환경의 독도에서 그러한 고집과 완고함이 있었기에 무려 40여년을 잘 버텨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인 김신열씨는 내성적이며 밖을 자주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어부였던 아버지와 해녀였던 어머니가 만나 사랑을 키워 1남 2녀의 자식을 두고 있으며, 40여년을 함께 독도에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김성도 독도이장에 대한 보도 자료들을 살펴보다 “일본에서 독도 이야기할 때 꿈쩍도 하지마라. 여기가 우리 땅 아니고 누구 땅이냐”며 호통을 치는 모습이 영상에 잡혔다. 그리고 일본 기자가 왔는데 그는 내 청춘을 여기서 다 보냈는데 왜 자기 땅이라고 하는지 답답해서 말도 하지 않고 쫒아 보냈다고 했다. 그의 독도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었다.
독도 주민 김성도씨는 1970년대부터 최초의 독도 주민인 최종덕씨 소유어선의 선원으로 독도(서도)에 거주하면서 수산물 채취 등 공동어로 활동을 해오다가 1987년 최종덕씨 사망 후 본인 소유의 어선을 이용하여 서도에 상시 거주하면서 본격적인 어로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1991년에 현재의 주소지에 주민등록을 등재했다. 현재 독도에는 김성도씨 부부 및 독도경비대원 35명, 등대 관리원 2명, 울릉군청 독도관리 사무소 직원 2명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도영유권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그가 조명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대한 자료가 많이 없음에 놀랐다. 어느 정도 알고 인터뷰를 진행해야 하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가족들과 자주 만나 그에 대해 알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