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 남연군 묘
남연군묘 도굴 사건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6년 2월에 영국 상선 로나호에 승선하여 충청도 해미 부근에 나타나 조선과의 통상을 시도하고, 6월에 다시 엠페러호로 조선에 입국하여 통상을 요구하였다. 두 차례 모두 통상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과 중국인, 말레이인 선원 140여 명을 차이나호에 승선시키고, 1868년 4월에 충청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거산 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빼앗고 건물을 파괴하여 도굴에 필요한 장비를 챙긴 다음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으로 직행하여 밤중에 도굴하다가 발각되자 달아났다. 전통적으로 조상의 묘를 신성시하던 조선에서는 이 사건으로 서양 열강에 대한 강경한 거부 정책이 더욱 고조되었다.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은1868년 고종5년 상인이자 학자인 독일인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남연군(南延君)의 묘를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1]에른스트 오페르트 도굴 사건(Ernst Oppert 盜掘事件)으로도 불린다.
이 일로 인해병인박해때부터 시작된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1]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에페르트는1866년고종 3년, 쇄국중이었던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2차례나 거절당한다. 오페르트는 천주교 탄압에 보복한다는 명분하에1868년고종 5년에 차이나號(호)를 빌려서충청도 아산만에 내항해덕산군에 상륙해흥선대원군의 부친인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급보를 받고 충청 감사가 군병을 급히 파견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돌아가고 난 뒤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다시 북항(北航)해 인천영종도(永宗島) 앞바다에 들어와 개국 통상을 교섭코자 관리 파견을 요청했으나 조선 수비병과 충돌해 아무 성과도 없이상하이로 돌아갔다.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은 후일 흥선대원군의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된다.
워낙 오페르트는 조선의 사신 1명을 초빙하고 세계 일주를 시키려던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