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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자정이 넘어 새벽으로 가는 시간. 그러나 그 늦은 시간에 어머니는 직접 현관까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휘린의 등짝을 아프지 않게 한 대 후려갈겼다. 대학시
절, 그가 전화도 없이 늦게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 그랬지. 인석아."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어머니. 내일은 저 깨우지 말아주세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온 사람을 맞이하듯 휘린을 대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평이했다. 어머니의 가슴속에나 집에 그의 자리는 늘 마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항상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관대하고 거의 대부분 공정하신 분.
그리고 필요할 때 아낌없이 당신의 품을 빌려주시는 분.
이제는 너무 자라버려 작은 인형처럼 그의 팔 안에 납싹 안기는 어머니를 감사한
마음으로 한번 포옹한 후 휘린은 3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집이 있든 없든,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그의 방은 언제나 온기에 가득 차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가 싹싹 쓸고 화분에 물을 주고 책의 먼지를 털어 주셨
을 테니 말이다. 그의 푸른 체크무늬 잠옷은 침대 위에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고, 슬리
퍼도 신기 좋게 침대 발치에 돌려 놓여져 있었다. 불을 켜기도 전에도 이미 휘린은
그가 좋아하는 연한 녹색 체크 무늬가 있는 시트가 침대 위에 깔려있을 것이라는 데
에 자신의 신탁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휘린은 편안한 잠옷 차림을 하고 담배 한가치를 물면서 테라
스 소파로 향했다.
그의 젊은 육체에 넘치도록 채운 쾌락의 여진은 아직도 강렬했다. 그의 몸이, 감각
이 기억하는 승빈의 흔적과 체취가 아직도 독한 향수처럼 그의 몸에 가득 차 그는 마
치 향내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까지 했다.
집착일까? 아니면 연민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그의 몸이 열광하고 원하는 여자에 대한 소유욕일까?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강해지고 더해지는 승빈에 대한 집착으로 미쳐가는 자신이
휘린은 이제 두려울 지경이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 말뚝처럼 박힌 정우의 어두운 그림자를 잠시 잊기 위한 작은 유희라
고 생각했다. 그 끝이 어디든 간에 그의 호기심과 수컷으로서의 감성을 건드리는 흔
치않은 여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알고 맛보고 그리고 즐기면 끝나리라 생각했던
가볍고도 무책임한 관계맺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종종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 덫을 만들어놓고 인간을 희롱하기를
즐긴다는 것을 어째서 잊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가볍게 시작한 관계. 이기적이고 무
책임한 놀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이제는 그에게 다시 온 사랑 같은 것. 그래서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절대의 의미가 되어버릴 줄이야.
승빈은 그렇게 치명적으로 그의 마음속에 말뚝 하나를 박아 버린 것이다. 김정우라
는 그림자에 휩싸여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던 그의 메마른 가슴속에 소낙비를 내
린 그 여자. 강승빈.
'당신. 대체 어떤 여자지?'
휘린은 다시 그녀에게 속삭였다.
처음에는 그랬다. 헤쳐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나서 같이 하면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가까이 가면 갈수록 미궁(迷宮)이 되는 여
자. 그래서 자꾸만 그로 하여금 빨려들게만 하는 그 여자. 강승빈.
작은 나무처럼 약한 얼굴을 하고있는데, 뜻밖에도 단단하고 거친 질감을 가진 여자.
눈물을 흘리는 대신 하늘을 보고 핫하 크게 웃어 버리는 여자.
드러낸 것보다 감추어진 아픔과 고통이 더 많은 얼굴을 하고서도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양 잘도 상글거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사는 여자.
어떤 삶의 고통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러나 사실은 가장 내밀한 장미꽃의 내겹처럼 보드랍고 여린 감성을 보여주는 그 여
자. 그래서 한없이 사랑스럽고 자꾸만 손을 뻗어 어루만지고 싶은 그녀.
'그렇게 사랑스러운 널 보면서 항상 네가 울고 있다는 생각을 왜 하게되는 것일까?
강승빈. 분명 가장 씩씩한 얼굴을 하고 의연한 척하는데 왜 난 자꾸만 네가 아프다,
제발 도와달라 소리치는 것처럼 보일까?'
휘린은 깊숙하게 담배연기를 들여 마셨다.
마음속에 돋아나 자꾸만 엉켜가서는 종내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앞에 두고 답답해
하는 사람처럼. 아니 한발만 더 내딛으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벼랑 끝에 선
사람이 최후의 결단을 내리듯이..
'널 어떻게 해야할까? 강승빈.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우를 잃은 후, 절망으로 고갈한 휘린의 슬프고 공허한 심장은 어떤 사람도 받아
들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 승빈은 5년만에 처음으로 그로 하여금 인간, 그것도
여자라는 존재에 다시 관심을 느끼게 하고 그가 가진 본능의 욕정을 건드린 것이다.
그가 지닌 인간다운 감정을 다시 싹틔운 것이다. 그래서 휘린은 이것저것 따져보지
않고 무작정 승빈을 가지리라 했다.
정직하게 말하자. 솔직히 처음에는 정말 그냥 지독한 욕망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난생 처음으로 그가 마신 죽음보다 더 깊은 망각의 쾌락을 선사한 그녀. 사내인 그
가 욕망하는 달디단 깊은 샘물을 탄력있고 하얀 몸 속에 감추어 두고 있는 여자였기
에 그 단물에 싫증날 때까지 곁에 두고 싶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 강승빈.
휘린이 뼈아프도록 안타깝게 잃어버린 유일하고도 아름다운 그 여자 정우처럼 무심
하지만 당찬 눈동자를 가진 그녀 승빈은 그냥 아름다운 육신만을 가진 암컷이 아니었
던 것이다.
정우처럼 생생하고 약동하는 눈빛을 지닌 그 여자. 허허로운 바람처럼 무엇에도 걸
리지 않고 무애의 대 자유를 지닌 듯한 얼굴을 한 그 여자.
무엇보다 가장 고마운 것은, 승빈은 그와 같은 하늘 아래서 따뜻한 육체를 지니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녀라면, 정우를 잊게 해 줄 것 같아서.... 아니. 그의 가슴속에 감추어진 상실의 슬
픔과 사랑을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을 잃어버린 무참한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읽어주고
이해해줄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어서 휘린은 승빈을 곁에 두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것이기를 소망했다.
절대로 주어지지 않으리라 여긴, 그러나 다시 온 삶의 두 번째 기회.
이번만큼은 제대로 하고싶다고,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사랑을 놓치는 어리석음은
한번으로 족하다고 믿었기에 그와 그녀, 두 사람 다 절망한다 말한 <사랑>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모한 용기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간절
한 소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휘린은 무거운 손길로 담뱃재를 털었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면 넌 한발자국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물러서지. 내게 넌 항상
너의 반만 보여 주고 있어.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난 나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고통의 무게보다 더 큰 빙하가 네 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그래서 안타
깝고 답답하다. 강승빈.'
처음에는 그녀의 허허롭고 쓸쓸한 웃음의 정체가 다른 남자를 홀로 외사랑하는 절
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꼭 그 것만은 전부가 아니라는 직감은 그만
의 착각일까?
그가 주는 치열한 육체의 쾌락에 신음하고 이성과 존재를 망실케 하는 욕정에 깊이
자맥질하면서도 그러나 기이하게 승빈의 눈 안에는 언제나 한 꺼풀 차디찬 어둠이 깔
려 있었다. 아무리 그가 그녀를 뜨거운 몸으로, 손길로 어루만지고 나와라 손짓하고
흔들어보아도 깨어지지 않는 어떤 벽, 혹은 황량한 두터움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러
니까 윤휘린은 강승빈이라는 여자를 소유했지만, 동시에 조금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래서 난 너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던 거야. 나처럼 너 역시 마음에
아주 큰 상처를 입고 안에서부터 빗장을 두른 두터운 돌문 안에 홀로 웅크리고 있는
여자 같아서. 그래서 난 널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걸까? 대체 너에게 잠긴 아픔은 무엇
인지.... 알고 싶다, 강승빈. 가능하다면 네 마음속에 자맥질 해 들어가 네가 아파하는
것들, 절망하는 것들을 전부 읽어내고 싶다. 그리고 감싸주고 싶다. 네가 존재하는 것
만으로 나를 이토록 위로해주는 것처럼...'
그 날 밤, 휘린은 5년만에 처음으로 꿈속에서 정우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심술궂은 눈빛으로 그의 약을 퍽퍽 올려가며 염장을 지르는 얄미운 그
녀. 열을 받아 어항에서 튀어나온 금붕어처럼 발라당 뒤집어지는 그를 보며 입을 크
게 벌려 핫하 웃고있던 그녀를 보았다.
아주 짧은 찰나. 어지러운 꿈속의 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살아생전 그 모습
그대로, 마치 휘린을 칭찬하듯이 태양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아스라한 그리움과 아픔. 혹은 못 다한 미련에서일까? 그녀를 기억하며 뒤척이던
불면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항상 축축하게 젖어들던 눈언저리가 그날은 꿈에서 깨어
났어도 보송보송했던 것은 그렇게 꿈속에서 잠시 만났던 정우가 투명하게 행복한 웃
음을 머금고 있어서였을까?
휘린은 소중한 추억을 끌어안듯이, 이제는 집착과 미련과 아픔의 기억에서 벗어나
무연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정우의 환몽을 보듬어 안았다.
'너, 내게 허락한 거야, 정우야.'
휘린은 웃음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그러나 어느새 축축하게 젖어드는 얼굴을 베개
속에 감추었다.
'그래, 행복해질 거다. 정우야. 이제는 나도 행복해질 거야. 네가 그곳에서 웃으며
살고 있는 것처럼, 나도 여기에서 행복해질 거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나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게... 짧은 생을 네가 그토록 치열한 불꽃처럼 살았듯이 나도, 너
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내가 사랑한
그 사람에게 주었던 그 사랑과 헌신만큼... 나도... 내 몫으로 정해진 그 여자를 그렇게
사랑할 거다. 그러니 이제는 날 놓아줘, 정우야. 내가 행복해지게... 내 마음속에 넓혀
둔 네 자리를 반만 비워 줘. 그 자리에 새로 온 내 작은 꽃을 심을 수 있게.... 너에게
만 주었던 내 마음을 반만 내어 주라. 정우야.'
아침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을까? 휘린이 식당에 내려갔을 때 부친
윤회장은 상을 물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후식으로 나온 포도껍질을 손으로 까고 있었
다.
듬직한 나무 아래 핀 작은 꽃송이처럼 할아버지 옆에 붙어 앉은 두 손녀가 포도알
을 까지 못할 만큼 어린것도 아닌데, 일일이 껍질을 까서 직접 손녀들 입에까지 넣어
주고 있는 모습을 휘린은 정겨운 눈초리로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웃음기 머금은 휘린과는 달리 윤회장은 새벽에 어슬렁거리며 기어 들어와
늦잠까지 늘어지게 자고 나타난 막내아들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눈썹을 치켜 뜨
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조카 하늘이와 바다는 갑자기 나타난 숙부의 모습에 까
약 소리지르며 병아리가 어미닭 주변에 모이듯이 그의 팔 다리를 부여잡으며 난리를
쳤다.
"오랜만인데요. 데이빗 숙부?"
아마도 역시 늦잠을 잔 모양이다. 그보다 더 늦게 폴이 물기 젖은 흑마노 같은 머
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식당으로 내려오다가 싱긋 웃으며 휘린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마루. 학교는 다닐 만 하냐?"
"제 눈이 고양이 같다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요. 어제도 헛소리를 하는 두어 놈을
손 좀 봐 줬죠"
어린놈이 어떻게 된 것이, 잠시 손을 좀 봐주었다는 수준이 종종 <전치 3-4주>는
나온다는 것일까? 친절하고 선량한 제 아비 아르젤을 닮지 않고 갈수록 하는 짓이 점
입가경이니... 휘린은 폴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방학마다 제 대부인 무서운 무형과 찰싹 붙어 지내는 폴인지라 저 놈도 제 아
비를 닮는 대신 무형을 닮아갈 터이니 천지분간 못할 정도로 사악해지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래서 조기 교육은 무서운 것인 모양이다.
"폴하고 휘린이 식사해라. 하늘이는 할아버지께 차 가져다 드리고, 바다는 냅킨 가
져다 올려주세요."
"네. 할머니."
지여사가 주방에서 나오며 그들에게 아침식사를 재촉했다. 모처럼 집에서 먹는 아
침식사는 식욕을 돋군다. 이제는 한참 먹을 때라 휘린의 양보다 두 배는 더 먹어치우
는 폴을 바라보며 보리차를 마시던 휘린은 건너편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부친의
말에 고개를 들렸다..
"오랜만에 같이 운동이나 가련?"
"그러실래요? 같이 가시죠, 뭐. 오늘은 약속도 없어요"
땀을 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휘린은 그러마 했다.
근처의 피트니스 클럽으로 가기로 하고 휘린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벽장 속의 스
쿼시 라켓과 짧은 운동복을 가방에 쑤셔넣고 다시 내려갔다.
부친 윤회장은 몇 년 전부터 심장에 주의하라는 진단을 받고 있었다. 당장 치명적
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제 당신도 벌써 칠순이 가까워지고 있는 나이이다. 조
심해야 하는 나이였다.
"꾸준히 운동하시죠?"
같이 러닝머신을 달리며 휘린은 아버지에게 캐물었다.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아직도
활력에 넘치는 윤회장이 그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운동을 빼먹으면 네 어미가 날 가만두는지 아니? 그 잔소리... 아이고.."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 과묵한 부친과 하루라도 수다를 떨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어머니의 묘한 궁합. 휘린은 소리내어 웃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
으면서도 또 아버지께서는 그 잔소리를 듣지 못하면 기운이 나지 않는 분 아니신가?
게다가 부친은 이미 일찌감치 진리를 터득한 분이시다. 성북동 지무이 여사 손에
걸리면 살아남는 사람이 없다는 것. 위대한 어머니 앞에서는 누구든지 절대 복종하고
납작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운동 꾸준히 하시고 주치의 시키는 대로 잘 들으세요. 건강하셔야 하잖아요."
"아, 건강해야지. 추하게 오래 살 욕심은 없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건강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솔직히 난 오래 살고 싶다."
"왜요?"
"네 어머니랑 백년 해로 하고 싶어서."
윤회장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는 힘든지 땀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수건으로 문
지르며 그가 잠시 쉬는 소파로 다가갔다. 휘린도 러닝머신에서 내려 부친의 뒤를 따
랐다.
"그 연세에 닭살 돋게 아들 앞에서 이런 말씀 하셔도 되는 거예요?"
휘린은 이온 음료수를 건네주며 짓궂게 캐물었다. 그러나 부친은 뜻밖에도 진지한
낯빛이었다.
"농담 아니다. 네 어미 생각해서 내가 정말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게야. 나도 네 어머니에게 의지하지만 그 사람도 나에게
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 아니냐? 네 어머니 혼자 두고 눈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
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구나."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부친의 솔직하고 인간적인 말에 휘린은 미소를 짓다가
문득 가슴이 싸해지는 느낌이었다. 윤회장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이 나이에 더 이상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오래 살고 싶을 것이냐? 다만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 내가 손잡아주고 내 어깨에 기댄 사람들 생각하면서 가능
한 한 건강하고 오래 살고 싶은 게다."
"그렇지요."
"그 중에 자식들도 포함되는 게다. 빨리 네가 자리잡고 가정 이루고 네 형이나 누이
처럼 무탈하게 살아야 내 걱정이 덜한 텐데.."
그가 혀를 쯧쯧 찼다. 휘린은 솔직히 서른 살을 훌쩍 넘은 나이로 아직도 부모님의
애물단지인 자신의 처지가 어쩐지 민망하고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윤회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기는 한 거냐?"
"네."
"그럼 미안하지 않게 빨리 네 마음 추스르면 되겠구나. 낼모레면 마흔 줄에 들어서
는 늙은 아들 뒷치닥거리나 하게 네 어머니가 뛰어다녀야 하겠냐?"
"어흑, 마흔이라니요? 하루아침에 귀여운 아들을 중늙은이로 만드실 일 있으세요?
저, 아직도 쌩쌩한 삼십대 초반입니다"
"가는 세월, 그거 눈 깜짝할 새다. 이 녀석아. 이 아비는 네 나이 때 벌써 자식이 둘
이었다. 그런데 네 놈은 아직 장가도 못간 놈 아니냐?"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이런 얼굴로 윤회장이 퉁박을 주었다. 휘린은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쳇, 못간 게 아니고 안간 거죠."
"이거나 그거나 똑같은 게지. 나도 어디 귀여운 막내며느리 옆에 끼고 골프장에 한
번 가보자."
만약 정우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아주 이기적으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때 그녀를 끝까지 잡았다면....
싫다, 널 사랑하지 않는다, 우린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가 아무리 앙탈해도 입을 틀
어막고 무작정 잡아채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휘린은 부친을 따라 스쿼시 코트로 걸어 들어가며 아주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지금 그도 부친의 나이인 지금쯤 그녀를 닮은 혹은 그를 닮은 자식을 두
엇쯤 낳았을 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무척 타는 그 앤 대가족을 갖고 싶다 말했지. 그
리고 휘린은 그녀를 닮은 아이라면 넷 정도는 낳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한때 그런 생각을 아주 자주 했었다. 그녀 정우와 같이 잠들고 같이 잠을 깨는 행
복한 환상을...
그녀가 곁에 남아 주었다면, 바보 같은 그는 매일매일 괄괄한 그녀에게 줘 맞으면
서도 그저 해실거리며 행복에 겨워 살고 있을 지도 몰랐다. 마음속으로는 늘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고 혹시 그녀가 연인에게로 도망갈까봐 불안해했겠지만, 그러나 나머지
시간은 끔찍하게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
휘린은 비주룩히 입술꼬리를 떨어뜨리며 혼자 웃었다.
바보 같은, 정말 바보 같은 윤휘린.....
이뤄지지 않은 운명은 잔인하다.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니까.
<만약에...>라는 가정은 더욱더 잔인하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도 사람으로 하여금 여전히 슬픈 꿈을 꾸게 만드니
까.
사이좋은 부자는 가볍게 스퀴시 한 게임을 더 뛰고 샤워를 했다.
"등 좀 밀어주랴?"
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그의 등을 밀어준 것도 십여 년이
넘었다. 부자지간 같이 목욕을 하지 않은 것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어린 날 아버지는 사우나를 갈 때면 언제나 하린과 휘린 그들 형제를 양팔에 끼고
갔었다. 꼼꼼하게 머리를 감겨주고, 등을 밀어주고... 막내인 그는 언제나 개구지게 아
버지 겨드랑이에 난 털도 끄집어 당겨보고 막막하게 크기만 하던 아버지 발바닥을 간
지럽히기도 했었다. 늘 찐 달걀이랑 초코 우유 사달라 칭얼거리던 그때. 철없이 행복
하기만 하던 그날들.
휘린은 샤워를 마치고 돌아서서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는 아버지의 아직은 넓은, 그
러나 이제는 까칠하고 윤기 바랜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술을 물며 잠시 망설이던 그는 조용히 그 넓은 등을 향해 말했다.
"여자, 생겼어요. 아버지."
"데려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덤덤하게 말을 받는 부친을 향해 휘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무조건 데려오라니. 만약 그 애가 형편없는 애
라면 어떡하시려구요?"
"그런 쓸 데 없는 걱정을 왜 하겠니? 시원찮은 여자라면 네 눈에 찼을 리도 없을
테니, 그 아이 인품이야 따져볼 것도 없는 것 아니냐? 겉의 형편이 모자란 건 네가
채우면 돼."
"....제 눈을 신용하세요? 저 같이 어리석고 모자란 놈의 눈도 이제는 인정하신다는
건가요?"
비로소 윤회장이 돌아섰다. 그는 한발 다가와 휘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넌 내 아들이다. 아비가 아들을 믿지 않고 밀어주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널 믿어주
고 도와주겠니? 그리고 난 내 아들이 아주 멋진 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멋진 놈
이 다시 선택한 아이라면 이 아빈 사랑할 게다. 그러니 데려와."
휘린은 히죽 웃었다.
"그 녀석. 좀 더 길들인 후예요. 전 그 녀석이 좋은데 그 녀석은 제게 맘을 열지 않
네요."
윤회장이 쯧쯧 혀를 찼다.
"에잇, 못난 놈. 제것이라 생각한 여자를 여적지 휘어잡지 못해? 이 아비는 말이다.
네 엄마를 딱 한 달만에 길들였었다. 아냐?"
휘린은 쿠헐헐 비웃는 웃음을 흘렸다.
설마... 농담도 잘하시지. 윤휘린의 자랑스럽고 대단한 어머니이시자, 대찬 성북동
싸모님 지무이 여사가 어떤 분인데 휘어 잡히시겠어? 한 달만에 아버지께서 코가 꿰
이셨다는 말씀이시겠지.
아들의 비웃음에 상당히 자존심 상한 얼굴로 이 놈이! 하고 그의 등짝을 한 대 후
려패는 아버지에게 휘린은 비로소 아주 진지하게 질문했다.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깨서는 어머니가 운명의 여자인줄 어떻게 아셨어요? 전 그
게 정말 궁금해요. 어떻게 하면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알아 볼 수 있는 거죠?"
<13>
전화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가는 그 몇 초 동안 승빈은 이미 천만번은 후회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왜 이 번호로 전화를 걸고 있는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 없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는 것.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전화만 노려보는 것이라든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베란다로
뛰쳐나가 그 꼴 보기 싫은 은빛 람보르기니가 나타나지 않았는지 살피는 일은 더 이
상 할 수가 없다.
패 죽여도 시원찮을 그 썩어질 인간은 열흘 전 밤, 헤어지면서 야리꾸리한 눈빛을
하고 승빈 그녀를 보면 살고 싶다는 둥, 우리는 닮은꼴이라는 둥 말도 되지 않는 감
언이설로 그녀 마음을 염치없이 요구했었다. 너랑 그 잘난 사랑이라는 것 나는 하고
싶다 하는 욕심사나운 속내를 은근슬쩍 드러내면서 그녀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았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승빈 조차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아픔 깊은 눈을 하고 있
던 그 남자가 양심이 있다면 말이다.
얼마든지 그녀의 고통을 어루만져 두고 이해해 줄 것 같은 그런 얼굴을 하고 제발
네 마음가는 대로 나에게 오라 하는 끔찍한 유혹의 세리프를 읊어대며 승빈의 깊은
곳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으면 말이다.
모가 되든 도가 되든 말끔하게 뒷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망할 놈의 남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그 날 이후로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
로 꺼졌는지 종무소식이었다.
지겹도록 수시로 올려대던 전화벨 소리에, 뻔질나게 집 앞에 서있던 그 남자. 그의
은색 람보르기니 머리통만 보아도 두통이 생기던 것은 이미 지난 날. 그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전화도 하지 않는 날이 벌써 일주일하고도 닷새나 지났다.
하루 이틀.. 사흘..
사람을 고문해도 유분수이지. 개자식.
승빈의 꼿꼿한 자존심과 당당한 심장도 이제는 문드러지고 있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로 여름 햇살처럼 지글지글 익어가고 분노를 참지 못한 승빈
은 드디어 열 사흘만에 윤휘린이란 그 망할 인간의 휴대전화 번호를 자발적으로 먼저
누르게 된 것이다.
-"나야."
그런데 이게 뭐야?
그는 그 맘쯤 해서 승빈이 먼저 연락을 해 올 줄 알았다는 듯 너무나 얄밉게도 침
착하고 냉정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
아주 찰나이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목소리가 어찌 그리도 반갑고 안도감이 드
는 것인지 승빈은 문득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혹시나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닐까?
혹시 과로를 해서 병이라도 든 것은 아닐까? 얄궂고 불길한 별별 상상들이 한순간 날
아가 버리던 것이다. 그러나 금새 그녀의 뇌리를 채운 것은 이 열흘, 완전히 이 망할
남자로부터 개무시당하고 버림당한 분노였다. 훼손당한 자존심 혹은 무시당한 서러움
과 노여움으로 승빈은 이를 갈며 음산한 어조로 내뱉었다.
"당신, 뭐야?"
-"내가 뭘?"
"이 망할 놈아! 헤어지고 싶으면 솔직히 말해! 헤어지자고. 너 싫증났다고, 찢어지자
고 솔직하게 말로 하라고! 이런 식으로 볼일보고 닦지 않은 것처럼 찝찝하게 굴지 말
란 말야! 내가 너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것 같으니? 몇 번 같이 잤다고 해서
날 책임져라 귀찮게 굴었어?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사람 비참하게 해? 네가 그렇게
잘났니? 사람 두고 무슨 장난질이야? 언제는 싫다는 사람 붙잡고 하루도 멀다하고 귀
찮게 하더니, 이제는 볼 일 끝났다는 거야? 그래, 좋아!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 두자
고! 난 뭐 자존심도 없는 여자인줄 알아?"
정작 그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자말자 왜 그리고 열불이 돋아나던 것인지, 승빈은
숨도 쉬지 않고 고래고래 수화기에다 대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만약 휘린이 눈앞에
있었다면 그 잘난 낯짝에 피멍이 들게 할퀴어주고 머리털을 뜯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녀의 패악질 섞인 고함소리에 대하여 돌아온 것은 핫하 하는
웃음 소리였다. 패 죽이고 싶도록 능글맞고 밉살스런 그 인간은 아주 만족스러운 듯
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하, 강승빈. 너, 지금까지 내가 연락하기를 기다린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날 은
근히 그리워했구나?"
순간적으로 기습공격을 받은 지라 승빈의 잘 돌아가던 입이 갑자기 딱 막혔다.
"오..오버하지 맛! 내, 내가 언제..."
말문이 막혀 우물거리는 그녀의 입을 다시 한번 찰싹 때려박듯이 그가 수화기 안에
서 나른하게 웃었다.
-"기분 좋은데? 튕기기만 하던 내 얼음 공주님이 드디어 이 몸을 자발적으로 찾아
주시다니."
"다.닥쳐! 누가, 누가 그랬다고? 당신 이제 나에게 국물도 없어. 알아? 누가 당신 같
이 무책임하고 무정한 남자하고 다시 만난대? 이젠 끝장이야! 다시 찾아오지도 맛! 연
락하지도 말라고!"
-"화났었니?"
반쯤 웃음기를 머금고,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마치 그녀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
듬던 어느 날 그 남자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바로 그 순간, 승빈은
갑자기 눈물 같은 것이 그녀의 눈에서 후드득 바닥으로, 그녀의 반바지 위로 얼룩을
만들며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아아, 그렇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 남자를 무척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던 모양이
다.
아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연락하지 않은 사이, 그렇게 분노하고
열 받고 짜증이 났던 이유를.
이미 승빈은 휘린의 부재(不在)를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의 굳어진
마음에 오직 하나 남은 빈약한 불꽃의 심지를 파랗게 점화시켜버린 그의 부드럽고 낮
은 목소리와 그의 정다운 손길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보이지 않게 그러나 치명적
으로 윤휘린이란 남자에게 강승빈은 이미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라 말하면서도, 지긋지긋하다 도리질 치면서도, 너하고의 사랑 같은 것은 사치
이고 불가능이라 고함지르고 한 발자국씩 물러서면서도 사실은 그 남자의 곁에 있고
싶었던 것이었다. 말하지 않았어도 그녀의 눈 속에 잠긴 아픔을 읽어내고, 설명하지
않았어도 아프다 힘들다 비명지르는 그녀의 절망을 읽어내는 그 특별한 남자 곁에 머
물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무 그늘처럼 포근한 그의 품에서 안겨 잠자고 따뜻하게 온
기를 나누며.... 아니, 아니.. 그것이 용서받지 못할 욕심이란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그와 서로 사랑하며 살고 싶었던 것이었다.
-"승빈아. 강승빈! 대답해. 이 망할 여자야!"
울먹이느라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휘린이 약간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정말 화가 난 것이라 샌각했나 보다. 휘린은 웃음기를 지우고 승빈에
게 자신이 왜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는지 설명하려 애썼다.
-"들어봐! 일부러 너에게 연락하지 않은 게 아니라고. 우주 기지에 문제가 생겼었어.
급한 사고여서 잠자다 말고 나도 날아간 거야. 그래서 미처 연락할 틈이 없었다. 남극
하고 북아프리카에 다녀왔어. 미안하다. 전파 방해가 너무 많아서 전화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
"쳇, 누가 그딴 것 궁금하댔어? 전화 끊어!"
토라진 어린애가 무작정 떼를 쓰듯이 불퉁하게 쏘아부치는 승빈의 목소리가 그러나
아까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것을 느꼈나보다. 휘린이 비로소 편안한 숨을 들이쉬며 웃
었다.
"용서해 주라. 응? 잘난 네 애인이 널 보고 싶어서 미친댄다. 어제 밤에 콩코드 타
고 날아왔어, 임마."
"흥, 웃기네! 됐어!! 누가 애인이라고 난리야?"
-"강승빈, 오빠 미치게 하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정신없다. 참, 방학도 끝나
가는데 같이 여행이나 가자. 나도 아주 힘든 출장이었다고. 난 내일부터 정식으로 이
틀의 휴가를 받을 거야. 근사하게 즐기자고. 그 동안 못 다한 몫까지.. 저녁에 데리러
가지. 기다려."
승빈은 투덜거리며 난 허락한 적 없어!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망할 그 남자는
자신만만하다 못해 느물거리는 듯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의 불평을 싹 잘라냈다.
-"까불지 마라 강승빈. 나 화나면 무섭다."
"이. 이 망할 인간이!!"
-"두 시간만 기다려. 이 빌어먹을 보고서만 작성하고 달려갈 테니까."
"흥! 웃기네. 설마 내가 꽃단장하고 당신을 고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흠. 날 위해 꽃단장까지 할 생각이었단 말이지? 강승빈, 정말 마음에 들어. 넌 정
말 내 애인 자격이 충분한 여자라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제꺽 알아차리잖아. 벗기기
좋게 아예 브래지어는 하지 말라고. 거기다가 노(no)팬티면 더 좋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 승빈이 수화기를 집어던졌을 때도 그 남자는 무엇이 그리 즐거
운지 크크크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망할 자식!! 패 죽여도 시원찮을 썩을 놈.
그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승빈은 그런 욕을 아마 수십 번은 했을 것
이다. 그러나 가슴에 풍선 수백 개를 달아놓은 듯 하늘로 둥둥 떠 올라갈 것만 같은
설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젠가, 강렬한 딮 키스를 하고 난 휘린이 아주 짓궂은 얼굴을 하고 네 입술, 무지
맛있어 하고 말했었다. 아마도 휘린은 승빈이 그의 입술에 잘 묻어나지 않고 향기가
강하지 않은 시슬리의 립스틱을 바르고 있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시슬리의 연분홍색 립스틱을 집어들었다.
꼼꼼하게 신경써서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던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거울 속의 자
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설렘과 기쁨으로
안에서부터 발간 빛으로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 하나가 그 거울에 떠올라 있었다.
'너, 정말 행복해 보이는구나. 강승빈.'
그러나 승빈은 가감없이 솔직한 자신을 인정하기로 한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행복했다.
조만간 손에서 놓아야 할 테지만. 조만간 쫓겨나가야 할 에덴 동산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행복했다. 승빈은 짧고 불안하기에 더 강렬하고 눈물겨운 이 행복을
마음껏 누리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울컥 날 정도로 아름다운 기쁨을 그녀
에게 주는 윤휘린이란 남자가 그녀 곁을 떠나지 않는 동안, 언젠가 드러나게 될 승빈
의 감추어진 치부와 누추함을 그가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경멸하는 눈빛으로
침을 뱉고 떠날 때까지는 그는 그녀 것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행복은 오롯이 강승빈
의 것이었다. 마음껏 누리라라. 마음껏 담아두리라. 그가 떠나버리고 나면 다시는 오
지 않을 인생의 화려한 행운을 승빈은 넘치게 마실 것이다.
여행을 가자 하더니 간편한 반바지 차림의 승빈처럼 그 역시도 편안한 면 폴로 셔
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오랜 출장에 피로가 쌓였나 보다. 못 본 사이 그의 잘생긴 얼
굴은 까칠해져 있었다. 수염도 정리하지 못하고 홀쭉해진 그 볼을 한번 쓰다듬어 주
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승빈을 바라보며 웃는 그의 해바라기처럼 눈부신 미소는 여전히 변함없다.
그녀를 마치 사탕인양 삼켜 버리고 싶다는 듯한 눈빛도 똑같았다. 그녀를 위해 차 문
을 열어주던 휘린은 문득 승빈의 귓볼에 입술을 가져왔다. 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노 팬티야?"
"망할!!"
"올라탈래? 네게 들어가고 싶어 정말 미치겠다."
남자의 따스한 입김이 예민한 귓볼을 따끔거릴 정도로 자극하는 그 느낌. 아주 청
결한 얼굴을 한 그가 마치 우아한 밀어라도 속삭이듯 그러나 사실은 노골적으로 음탕
한 말을 내뱉는 것이 얼마나 강렬한 자극인 지...
염치라는 것도 없는 지 이 방탕한 짐승은 대낮부터 주접이다. 얄밉다 못해서 가자
미처럼 눈을 흘기며 승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한번 봐주려고 했더니 이 인간은 정말 개선의 여지가 없군.
너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여름방학 내내 연수를 받았
다고, 이 망할 인간아. 승빈은 뻔뻔한 말을 잘도 나불대는 그의 입을 한번 후려쳐 주
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휘린이 어림없지! 하는 얼굴로 휘두르는 승빈의 손을 움켜
잡았다.
"울 엄마가 그랬는데 나가서 여자한테 절대로 맞고는 살지 말랬어. 그래서 안되겠
어."
그러나 승빈은 휘린과 똑같이 달콤하게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흠.. 그래요? 나가서 맞지는 말라. 그 말은 안에서는 맞아도 된다는 거잖아. 여긴
차안이니까 괜찮아."
그가 두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승빈은 그의 얼굴을 후려쳐 주는 대신, 선명하고 멋
진 그 남자의 입술을 단단한 이로 물어 뜯어놓았다. 까불면 혼난다 이런 경고로.
교외의 시원한 도로를 달려 북한강이 발 밑에 찰랑거리는 강변의 좁은 길로 차가
접어들었다. 서울을 떠난 지 한시간 반 만이다. 그리고 다시 산길을 십여 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치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멋진 별장이었다.
삼면이 짙은 숲으로 둘러싸이고 정원 앞에는 노을에 젖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강물만 유유히 흐르는 하얀 목조 집. 휘린이 차에서 내려 낮은 목조 대문을 열었다.
"멋진데요?"
맑은 청남빛 하늘. 청보라색 산 그림자로 물드는 강. 그리고 숲의 내음. 그리고 그
멋진 풍경에 조금도 모자람이나 더함이 없이 꼭 알맞게 눌러앉은 작은 집. 승빈은 차
에서 내려 정신없이 감탄을 연발하며 소리쳤다.
"고마워. 내 칭찬으로 듣겠어."
차 트렁크에서 식료품 상자를 꺼내던 휘린이 윙크했다.
"내 졸업 작품이야. 마음에 든다고 형이 이백 만원에 사줬지. 그리고 형은 형수에게
이 집을 뇌물로 줬어. 결혼해 달라고 말이지. 형수가 귀국하면 조용하게 쉬거나 그림
그리러 오는 곳이야. 물론 나도 종종 쉬러 오는 곳이고. 우리 집 별장 중에 서울에서
제일 가깝거든."
승빈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건축설계를 전공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
이다.
"휘린씨, 건축 전공했어요?"
"한때는 나도 멋진 꿈이 있었어요, 아가씨. 잘 나가는 건축가가 되어 도시 설계를
하고 싶었다구요. 드럼치다가 학점 못 받아 쫓겨날 뻔해서 이런 슬픈 월급장이 신세
가 되었지만 말야. 손을 놓은 지은 좀 됐지만 아직도 설계도면 쯤은 읽을 실력 돼. 나
중에 회사에서 쫓겨나면 설계사무실에 취직
안 굶길 테니 나에게 시집와라. 강승빈."
식료품 상자를 집안으로 옮겨 냉장고에 물건을 정리하고 가구를 덮은 하얀 천을 벗
기고 거실 통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서 마치 농담을 하듯이 휘린이 승빈에게 소리쳤
다.
그가 어디 소풍이라도 가자는 듯이 가볍게, 우스개처럼 내뱉은 그 말을 그러나 승
빈도 일부러 못 들은 척 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
실 테라스에 나가 어두워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결혼하자는 말. 그거 나에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아요?
인간의 복잡하고 쓸쓸한 감정과 누추한 인생과는 다르게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강
물을 아스라히 바라보며 승빈은 비오는 날 하늘처럼 혼자 웃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고아출신 중학교 도덕선생님하고 거대한 다국적 기업을
끌고 가는 남자하고는 절대로 결혼 같은 것은 할 수가 없답니다. 윤휘린씨. 우리 둘
다 현실에 신데렐라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성인 아닌가요?'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아닌 것을....
손도 빨라 어느새 커피를 내려 머그 잔 가득히 부어서 내미는 휘린의 하얀 손을 바
라보며 승빈은 가능한 한 밝게 웃었다.
누구하고도 결혼 같은 것, 사랑 같은 것은 할 수가 없다. 욕심 내지도 못한다. 그래
서 아예 기대하지도 않고 욕망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가슴속에 감추어진 처참한 기억
의 고통. 육신에 새겨진 형극의 낙인 때문에...
그 날밤 이후, 강승빈이라는 여자는 살아가는 일을. 삶의 희망 전부를 박탈당한 절
망과 어둠의 노예라는 것을 제발 이 남자는 가능한 한 나중에 알게 되었으면....
"왜 대답 안 해? 결혼하자고ㅡ 이 여자야."
테라스 난간 등받이에 몸을 걸치고 선 휘린이 강물을 보고있는 승빈의 정강이를 장
난치듯이 발로 툭하고 걷어차며 다시 말했다. 승빈 역시 그의 얼굴처럼 장난스런 웃
음을 피우며 혀를 내밀었다.
"못해요, 아저씨. 딴 데 가서 알아보슈. 난 신데렐라 생활 취미 없수."
"집 지어줄게. 이 집보다 더 큰 집. 너 닮은 루비 반지도 사줄게. 밥하는 아줌마도
고용해 줄 거고, 널 닮은 아기도 낳게 해 줄게. 결혼하자."
그녀 말은 듣지도 못한 듯, 여전히 빙글빙글 웃으며 장난처럼 맨발로 그녀의 종아
리를 툭툭 건들면서 휘린이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말을 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참지 못할 정도로 마음속에서 아우성치는 고통과 절망 혹은 들끓는 분노와 증오를 눌
러 담으며 승빈은 다시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가벼운 장난처럼, 기분좋은 농담처
럼... 아니... 죽도록 아픈 슬픔처럼 그녀는 유쾌하게 소리쳤다.
"아, 싫다니까! 난 독신으로 살 거야. 아저씨. 당신하고 연애응 할 수 있는데 결혼은
못해. 결혼하고 싶으면 다른 여자 찾아보라고. 하지만, 헷헤. 기분 좋은데? 농담이라도
당신처럼 멋진 남자에게서 청혼을 들었는데 에잇! 기분이다! 오늘저녁은 내가 할게.
멋진 김치볶음밥을 먹자구요! 나 그거 잘하는데.... 냉장고에 버터 있죠? 김치 볶음밥
은 역시 버터로 볶아야 맛나거든."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 지도 모르면서, 그냥 방긋방긋 웃으면서 승빈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인 휘린에게서 도망가고자 거실과 테라스를 가르
는 문을 열었다.
"내게서 도망가지 말라 그랬지?"
등뒤에서 들려온 휘린의 나직한 한마디. 그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선 승빈의 발이
본드라도 뿌린 듯이 바닥에 딱 붙었다.
바람이 나무 우듬지를 쓸어 가는 소리. 어둠이 대지를 적시며 내려오는 소리. 속 깊
은 강물이 흐느끼며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 검고 푸른 강물
근처에 선 두 사람의 사이에는 침묵이 흐르고 승빈의 심장은 거친 천둥소리처럼 처절
한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휘린이 조용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잔잔하나 명료하게. 그러
나 더 이상 심장을 다치기 싫어 두터운 마음의 돌 문을 쾅하고 내려버린 승빈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
"내 청혼, 네가 어떤 얼굴로 거절했는지 알아?"
승빈은 휘린을 향해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불길을 뿜는 승빈의 눈은 그에 대한 적
나라한 적의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는, 다시는 나에게 결혼하자는 그런 말 따윈 하지마. 그런 말 다시 하면... 그날
로 우리 사이 끝장이야"
"나하고 결혼하지 못할 이유. 세 가지만 대. 그러면 단념해 줄게."
어째서 이 남자는 이 정도로 해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까? 칼날로 내려치듯이 그
의 말을 잘라버리려는 승빈의 발악 같은 고함 소리를 헤치고 그 남자가 싱긋 웃으며
승빈에게로 한발자국 다가왔다. 흠칫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승빈을 그는 용서하지
않는다. 막다른 구석에 몰린 채 두려움과 공포로 바들거리는 어린 짐승처럼 거친 숨
을 들이쉬며 그를 밀어내려 하는 승빈의 어깨를 그가 두 손으로 짚었다.
"말해봐, 강승빈. 왜 나랑 결혼하기 싫은지 나에게 이해시켜 보라고. 내가 납득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 다시는 네가 줄 수 없는 것을 보채지 않겠다
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해답이다. 그런 것쯤은.
승빈은 휘린의- 조만간 그녀의 초라한 손에서 놓아야할... 더럽혀진 몸과 만신창이
가 된 그녀의 초라함으로는 절대로 욕심낼 수 없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남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망설이지 않고 내뱉았다.
"첫째. 난 당신 사랑하지 않으니까. 둘째 난 당신같이 엄청난 남자 만나 당신 집안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어 죄인처럼 살기 싫으니까. 셋째, 난 사랑타령 결혼 타령하는
남자 지독하게 혐오하니까."
그가 싱긋 웃었다.
"틀렸어. 강승빈. 그런 건 결혼의 거절 이유가 안돼."
휘린이 한 손을 들어 승빈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기 위하
여, 수치심과 극한의 절망으로 죽어버리기 전에 절대적으로 그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가련한 강승빈의 영혼을 다시 덫으로 몰아넣는 온기. 부드러움..
"내가 널 사랑할 거야. 우리 집안 사람들도 널 사랑할 거야. 어차피 삶은 도박 아
냐? 나랑 결혼해서 한번 살아보자. 너의 지독한 결혼 혐오증이 사라지게 될 지 어떻
게 알아? 난 너에게 인생의 가장 좋은 것만을 줄 생각이거든. 강승빈. 결혼하자."
윤휘린 당신, 잔인해.
승빈은 격렬한 분노와 처참함으로 파들거리는 눈빛을 들어 휘린의 눈을 노려보았
다.
결국 이 남자.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최악의 모습을 보여 주게 하는 것이다. 승빈은
지긋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말하는 그 잘난 사랑이라는 거. 그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인색하고 우스운 것
인지 결국 확인하고 싶단 것이다. 그래. 윤희린 당신. 승빈은 하얗게 웃었다. 결국 이
남자도 다른 사람하고 똑같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에게 찍힌 부정의 낙인, 무참한 상
처를 알고나면 그녀를 경멸하고 침 뱉고 돌아설 거면서.... 어째서 그는 이렇듯이 그녀
의 모든 것을 받아줄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기만하려하는가 어째서 그녀를 작은 희망
에 들뜨게 하는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려 하는가?
"...위선자."
승빈은 마치 휘린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듯이 이 사이로 나직히 씹어뱉었다. 휘린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에 스민 생생한 날것의 적의와 분노를
느낀 것이리라. 승빈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웃음을 창백하게 흘려 내면서 차분
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 정말... 역겨워! 잘난 척, 다정한 척, 다 이해하고 감싸주는 척 하면서도 결국
날 알고나면 날 경멸하고 침 뱉고 모르는 척 날 버리고 떠날 거면서... 다시 한번 내
목을 그 잘난 손으로 졸라죽여 절망의 쓰레기통에 내버릴 거면서... 그따위 달콤한 말
로 날 꿈꾸게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