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귀주 이야기>를 보고
송지나
영화 <귀주 이야기>의 주인공 귀주는 얼마 전 촌장에게 남편의 거시기가 발로 걷어차였다. (안 그래도 귀주네 생계 수단이 고추뿐인데 고추를 찬다…) 남편 경래가 다음 생에도 암탉이나 기르라고 내뱉은 말이 화근이었다. 산아제한 정책 아래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딸만 넷을 둔 촌장의 자존심을 건드린 말이었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귀주는 고추를 찬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잘못되면, 지금 뱃속의 성별도 모르는 아이 하나가 달랑 끝이니까. 귀주는 사과받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촌장의 집을 찾아가니 촌장은 말한다. “어쩌라고. 찰 수도 있지.” 그리고 자신도 똑같이 거시기를 맞겠다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 말은 책임이 아니라 조롱처럼 들린다. 귀주는 촌장에게 자신의 말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자, 촌장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해줄 더 큰 권력으로 향한다.
그렇게 귀주는 읍으로, 현으로, 시로 향한다. 하지만 귀주가 더 멀리 가도가도 귀주의 언어는 권력의 언어 속에서 증발한다.
처음에는 읍의 공안국으로 찾아간다. 사과를 원한다는 귀주의 말에 리공안은 촌장에게 합의금 200위안을 명령한다. 귀주는 그 돈을 사과의 의미로 받아들여 일을 끝내고자 하지만, 촌장은 돈을 가져가려면 머리를 조아리라며 바닥에 돈을 흩뿌린다. 돈이 또 다른 무시의 수단이 되자 귀주는 돈을 줍지 않고 돌아선다. 이제 더 이상 귀주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다친 남편의 거시기가 아니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라는 감각이다.
귀주는 쉬지 않고 움직여 현의 공안국으로도 가고, 시의 공안국으로도 가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귀주가 올라가는 곳은 점점 커지지만, 합의금만 조금씩 바뀔 뿐, 사과는 오지 않는다. 귀주가 사과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요구가 권력의 해석 속에서 자꾸 증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치는 반복은 판결의 영역을 넘어 귀주의 일상으로까지 이어진다. 현에서는 고소장이 웃음거리가 되고, 귀주는 글을 안다는 척을 하며 자신을 지킨다. 시에서는 사기를 당하고, 시골 티가 나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옷을 바꾼다. 은근한 무시가 일상처럼 쌓이고, 귀주는 그 무시를 피하려고 또 스스로를 꾸민다. 노력에도 바뀌지 않는 굴레 속에서 귀주는 눈물을 흘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다시 시 공안국으로 간 귀주는 자신을 도와준 국장에게 말한다.
“저는 50위안을 더 받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촌장님은 왜 저한테 사과하지 않죠?”
이에 국장은 공안국이 아니라 법원에 가는 방법을 제안하며 변호사를 소개해준다. 귀주는 자신이 다 해결해줄 거라는 변호사에게도 묻는다. “그럼 제가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이 말을 들은 귀주는 변호사에게 오면 되는데 이때껏 헛수고했다며 허망해한다. 하지만 이때껏 했던 고통스러운 투쟁에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귀주에게 먼저 전달됐어야 할 판결문을 촌장에게 넘긴 공안이 문책받는 일도 일어난다.
변호사가 말한 해결은 또 귀주의 해결과는 달랐다. 법원 판결의 결과는 촌장의 사과가 아닌, 상해죄에 따른 구금이었다. 문제는 그 구금이, 귀주가 이미 촌장을 용서한 뒤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판결이 나오기 전, 귀주는 출산 중 아이가 나오지 않는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귀주를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이 다름 아닌 촌장이었다. 귀주는 그 일로 이전의 일을 잊고 촌장을 용서한다.
그러나 아기가 나온 지 한 달째 되었음을 축하하는 잔칫날, 귀주와 아이의 생명의 은인인 촌장이 구금되는 비극이 일어난다. 영화는 이를 알게 된 귀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촌장을 태우고 떠나는 차량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영화 <귀주 이야기>는 제목이 전래 동화나 설화의 구조를 띠고 있다. 대개 이런 제목의 이야기들은 지혜로운 주인공이 승리하거나, 어리석은 자가 벌을 받는 명확한 교훈으로 끝맺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기대를 배신한다. 결말에서 귀주는 승리하지도, 그렇다고 단순히 어리석음을 이유로 파멸하지도 않는다. 대신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대우(사과)를 바라는 것이 이토록 비극적인 일이 되어야 하는가?
귀주는 설화의 전형처럼 ‘지혜로운 인물’이나 ‘어리석은 인물’로 정리되지 않는다. 내부에는 서로 충돌하는 판단과 감정이 동시에 살아 있고, 바로 그 모순이 〈귀주 이야기〉를 단순한 설화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귀주는 촌장을 바라보며 자신이 무시당한 이유를 상대의 잘못에서 찾는다. 동시에 글을 아는 척 연기하고 촌티를 벗기 위해 새 옷을 사는 방식으로, 무시가 가능한 근거를 자기 안에서도 발견한다. 그는 촌장을 무너뜨릴 권력, 즉 지배의 권력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그 권력의 언어를 빌린다. 귀주가 원한 것은 지배가 아니라 최소한의 동등성이었지만, 그 과정은 자꾸 처벌이라는 가장 단순한 지배의 형태로 흘러간다. 이 엇갈림이 결국 비극적 결말을 이끈다.
그러나 나는 이 비극을 귀주의 어리석음으로만 돌리고 싶지 않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귀주와 권력 사이의 소통 실패에 있다. 귀주는 반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사과’라고 말하지만, 권력은 이를 ‘처벌’과 ‘금전’으로 번역해 처리한다. 이는 권력이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도 응답하지 않는 관심에 결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같은 요구라도 더 강한 주체(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가 말했더라면 귀주처럼 끝까지 가지 않고도 사과가 실현되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청각이 아니라, 누구의 욕망을 욕망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력의 선택성이다.
또한 영화의 결말은 단순한 비극만이 아니다. 귀주의 끝없는 투쟁은 결과적으로 그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변에 각인시킨다. 사람들은 귀주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비웃을지라도, 적어도 그를 이전처럼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게 된다. 귀주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사과는 최소 조건이라는 기준을 드러낸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귀주가 멍청해 보였고 결말도 거의 파멸로만 받아들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귀주의 선택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저번 학기에 ‘합리적 의사결정 이론’ 수업을 들으며 비용과 효용을 비교해 최선의 선택을 도출하는 방식을 배웠고, 나는 그 틀이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유용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귀주가 그냥 돈을 받고, 더는 얽히지 않고 살았더라면 비용이 적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다.
그런데 영화를 두 번째, 세 번째 보면서,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귀주는 왜 사과를 받고 싶었을까, 사과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따라가다 보니 오히려 반대로 느껴졌다. 사과를 받지 않는 쪽이 이상한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당연한 것을 받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을 들여 끝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사회가 이상했다. 귀주의 집요함이 과도한 것이 아니라, 그 집요함을 요구하는 현실이 더 비정상적이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내가 귀주를 재단할 때 들이댔던 ‘합리성’을 되짚게 되었다. 합리성은 분명 유용한 도구지만, 때로는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방패를 내세워, ‘그 정도면 됐다’며 나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얼마나 자주 접어 왔을까. 귀주처럼 끝까지 밀어붙일 용기는 없을지라도, 앞으로 “적당히 타협하자”는 판단이 너무 쉽게 나올 때, 귀주를 떠올리고 싶다. 지금 내가 놓치려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비용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존엄인가.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귀주가 되어 무언가를 포기하면서라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당연한 것을 포기한 채 침묵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