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흥무로 71 (충효동)
김유신장군묘 Tomb of General Kim YuShin
054-750-8614
운영시간 : 하절기 09:00-18:00 동절기 09:00-17:00 연중무휴
입장요금 : 성인 2,000원 / 청소년 1,000원 / 어린이 500원 (경북투어패스로 무료로 이용)
무료주차
673년 79세의 나이로 죽은 김유신은 후대에 그 업적을 기려 '흥무대왕' 또는 '흥호대왕'으로 추존되었다.
그런데 사실 흥무로는 요즘 김유신장군보다는 벚꽃길로 더 유명한 듯하다.
금관가야의 왕손이었던 김유신은 법흥왕때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면서 인생의 굴곡을 맛보게 된다.
김춘추와의 끈끈한 인연으로 진덕여왕이 후사없이 죽자, 본래 왕으로 추대되었던 알천과 사의한 끝에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고 660년 신라의 최고 관직 상대등이 되었고 그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동반자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문무왕과 함께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정문인 흥무문을 지나 잘 가꾸어진 산책로를 지나면 김유신장군묘와 만난다.
김유신장군은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송화산 기슭의 야트막한 구릉 위의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잠들어 있다.
무덤은 신하의 묘 치고는 거대하고 화려하다.
왼쪽 묘비에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 쓰인 비석이 보인다.
조선 숙종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운 것이다.
오른쪽 1970년대 세워진 묘비에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라 쓰여있다.
이 비문의 마지막글자 릉(陵)자가 비가오면 묘(墓)자로 바뀐다고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970년에 비석을 세울 당시 처음엔 김유신이 어쨌든 왕족이 아닌 일반인이므로 흥무왕묘(墓)라고 새겨 놨으나,
추존이긴 하나 '왕'이 되었으므로 왕에게는 능(陵) 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에
처음엔 묘(墓)라고 써있던 것을 메우고 능(陵)이라고 다시 새겼다고 한다.
글자를 고친 것이므로 옛날 묘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어서 두 글자가 겹친데다가,
원래 비석에 쓰인 석재와 글자를 메울 때 쓴 석재의 색과 질감이 미묘하게 달라서
물을 뿌리면 글자가 바뀌는 듯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봉분의 지름이 30m에 달하고, 봉분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둘레돌(호석)과 돌난간을 둘렀다.
무덤둘레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왕릉의 무덤양식이다.
따라서 후대에 흥무대황(혹은 흘호대왕)으로 추존되었기에 김유신장군의 묘도 왕릉의 양식을 갖춰 꾸민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장군묘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둘레돌 호석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보통 십이지신상들이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으나,
김유신장군묘의 십이지신상들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모습도 이색적이다.
왕릉으로 보이게는 했으나 그렇다고 왕은 아니니까... 최소한의 구분은 해 놓은 것인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나치게 큰 규모이며 화려한 것은 사실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21호 경주 김유신묘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문화재청]
신도비도 둘러본다. 김유신장군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한국사 문제 하나를 짚어본다.
삼국통일의 완성과 김유신의 죽음은 뭐가 먼저일까? 676년 vs. 673년
그래서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긴 해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고 하면 틀린 지문이 된다는 사실
유념하세요! 한국사가 만만치가 않죠?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전쟁(羅唐戰爭)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이어졌다.
670년 3월 신라의 오골성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었고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크게 패하였다.
나당전쟁의 분수령은 673년 김유신장군이 죽고 2년뒤 675년 9월 매소성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전세는 신라로 기울었다. 이후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위 설명에서 틀린 부분이 뭔지 아셨는가?
이런 글을 남길 때는 기본적인 역사적 팩트는 체크를 해야 하지 않을까?
뻔히 한국사 시험에도 출제되는 내용인데... 역사투어 왔다가 한국사 시험을 망칠수도...
주변에 있는 경주 흥무공원도 벚꽃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김유신장군묘 아래쪽에 묘를 지키는 금산재(金山齋)가 있다.
출출하면 금산재 옆에 금산재칼국수라고 유명한 식당이 있다. 금산재와 더불어 함께 묶어 방문해 보는 것도...
솔직히 맛집은 아닌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굴다리 터널 지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고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관심있으면 흥무공원에 주차하고 굴다리터널을 지나면 금산재나 금산재칼국수를 만나볼 수 있다.
이제 주차장으로 내려가 이동한다. 특이하게 돌어온 길과 나가는 길이 따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