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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회. 함석헌
1.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종교다. 하나님의 계시라 함은 반드시 어떤 천래(天來)의 음성이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들리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런 것은 기독교가 아니고라도 어떤 종교에든지 있다. 그보다도 인간의 사유범역을 뛰어난, 거기서는 지어낼 수 없는 생명적인 진리가 사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우발적으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말함이다.
사람의 사유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부분적으로 분석적으로 모사(模寫)적으로 될 뿐이요, 전적으로 인격적으로 생명적으로 하지 못한다. 기독교는 그러한 사람의 사유적 산물이 아니요, 생명적으로 인격적으로 나타난 진리에 근거한 종교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가 사상적으로 다루어질 때는 항상 모순이 있다. 교회문제 같은 것도 그 중의 하나다.
한편으로 보면 기독교는 확실히 교회적이다. 그리스도도 사도도 전파한 것은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였고, 그 ‘하늘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렸다. 이 점은 불교 같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보면 더 명료해진다. 불교도 인간제도를 말하기는 하나 어디까지 개인적이요 ‘불(佛)의 나라’라는 것이 없다. 즉 개인이 자기의 신앙 혹은 공덕으로 자신을 구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요 또 종국이다. 기독교도는 그렇지 않다. 저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로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로 끝난다. 그렇듯 기독교는 교회종교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을 보면 기독교는 개인적이다. 그 진리의 말씀적인 까닭으로, 그 신앙의 생명적인 까닭으로 개인적이지 않을 수 없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각개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그 손에 바치기를 요구한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그리스도는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라도 신앙의 개인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하기 때문에 만일 변론으로써 한다면 교회 절대 필요론자와 교회 무용론자는 다 같이 한 성경과 한 역사에서 자기네의 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고로 비록 성경을 근거로 하여가지고라도 일방이 타방을 논증으로써 설복하려는 일은 무용이다. 쌍방이 다 각각 자기의 신학체계를 세울 것이다. 그리하여 이론과 역사 양방면의 지식의 군세를 총동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세계대전과 같이 혼란과 비참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 기독교는 변론할 것이 아니요, 생활할 것이다. 교회문제도 학문적인 태도로가 아니요, 실천적인 태도로 임해야 한다.
실천적 태도로써 임할 때 교회문제는 지극히 중대하여 신앙의 근본에 관계되는 것이 된다. 이 문제에 관하여 좌 혹은 우의 태도를 취함에 따라, 우리의 사상이 아니라 신앙이 옳을 수 있고 그를 수 있다. 교회문제의 중심은 교회명부에 이름을 두느냐 안 두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제로 신앙의 성질이 갈린다는 데 있다. 기독교는 지금 무교회 문제를 과제로 한 성장의 과정에 달(達)하였다. 무교회주의는 지금 그 주장하는 자의 수가 어떻게 적고 통일이 어떻게 없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한 외침이다. 교회주의자가 아무리 변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하여도 또 하였다 가정하여도 그는 자본주의자가 사회주의자에 대하는 것같이 자신 안에는 보수적인 것을 상대자 안에는 진보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2.
문제의 맺히는 곳은 교회가 절대 필요하냐 아니하냐 즉, 교회 없이는 신앙이 불가능하냐 없이도 가능하냐 하는 데 있으나, 쓸데없는 어구(語句)의 싸움을 피하기 위하여 먼저 ‘교회’의 어의(語義)를 밝히 할 필요가 있다.
‘교회’라는 말이 표시하는 내용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우주간에 오직 하나만 있는 신령한 인격적인 단체니, 성경에 그리스도의 신부라 한 것으로서 이를 불러 신령한 교회 혹 천상(天上)교회라 하는 것이요, 둘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현실의 인간이 일정한 조직 하에 모여 있는 단체니, 현실 교회 혹은 지상교회라는 것이요, 셋째는 장소적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그 중 제3의 것은 문제될 것 없고 교회문제를 논하는 데서 문제되는 것은 제1, 제2의 양자인데, 제1의 신성한 교회는 하나님 자신이 절대통치를 하는 나라 곧 하늘나라임에 그것을 부인할 자는 없다. 거기는 의심이 있을 여지가 없다. 이 교회는 개개의 신자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적인 단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 나라에 부르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은 이 나라에 입참(入叅)함이다. 마치 자연인이 모태에서 떨어질 때 이미, 아니다 그보다도 그의 성생(成生) 그 자체부터 자기 의지를 초절하여 존재하는 민족의 일인(一人)인 것같이, 신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으로 날 때 이미 교회의 일원이다. 부모가 조선사람이면 영국에 가서 낳거나 아프리카에 가서 낳거나 조선사람인데 변동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영으로 난 이상은 어떤 시대 어떤 문화 속에 낳든지 불관(不關)하고 하나님 교회의 백성이요, 유랑의 애국자의 가슴 안에도 조국이 있고 저 자신이 그 조국의 품에 안겨있는 것같이, 아무리 무교회주의자라도 하늘나라를 사모(思慕) 않고 그 적(籍)외에 있을 수는 없다.
고로 문제되는 것은 제2의 현실교회다. 현실의 인간이 교황, 감독, 혹은 목사로 있어서 고정한 교회헌법 ― 그 헌법은 근거는 어디 두었든지 인간의 합의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 에 의하여 통치되는 지상교회다. 로마교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등 하는 것이다. 교회 없이 신앙은 불가능하다 할 때의 교회가 천상의 유일 공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문제없으나, 이 지상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잠잠히 있을 수 없다. 그는 분명히 진리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3.
현실교회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 교회는 신령한 교회의 영자(影子)라 그러니까 이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물론 사람이 육체적 존재를 이 물질계에 가지는 한, 천상의 교회는 지상에 투영될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무교회주의자도 교회의 지상 투영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투영은 순수한 것이어야만 한다. 현실교회를 신령한 교회의 투영이라 할 때 교회주의자가 범하는 근본적인 과오는 인간주의를 긍정하는 일이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기구를 인간적 것으로 모사하는 것으로써 지상천국인 줄 안다. 말하자면 그들의 이때의 천국이란 도리어 근본적으로 지상적인 것이 허공에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성립 요건은 인간이 자기를 죽은 것으로 선언하는 일이다. 사람이 자기를 죽을 자로 인식하고 그리스도에서 구원을 발견할 때 신앙은 생기는 것이다. 고로 천상의 교회가 지상에 투영이 된다는 것은, 제도의 모방으로 되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극복에 의한 생장적 의미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산 것이 죽을 것을,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을 삼키는 일이어야 한다. 인간적인 것에 의하여 될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을 전적으로 부정함에 의하여 천상의 영광이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로 지상의 현실교회가 진정한 의미로 천상의 그림자이고자 하면, 일체의 인간주의를 포기한 사람의 단체가 아니면 안 된다. 인간적 기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인간적 열심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빛으로 하여금 흐림 없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역사상의 현 교회는 분명히 이와 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인간주의를 가지고 거룩한 빛을 흐리었다. 교회사는 거룩한 단체 안에 인간주의 침입의 역사다. 생명 대신에 조직을, 자유 대신에 권위를, 체험 대신에 의식을 대입한 역사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치 못하고, 물질적 폭력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 현실의 교회다. 교회를 옹호하려는 자는 말한다. 시대가 지남을 따라 하나님의 진리는 이 교회를 통하여 점점 더 나타났으니, 이 교회는 신의 가납(嘉納)하는바 아니냐고. 과연 그럴 듯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남은 반드시 아들이 효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탕자 위에 아버지의 사랑은 더 잘 나타난다.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난 이유로 탕자의 행위를 긍정할 수는 없다. 교회주의자가 아무런 변명을 하더라도 자기 생활이 나갔던 악귀가 다시 돌아온 생활임을 감출 수 없다.
교회 내에 있는 인간주의, 이것을 교회주의라고 한다. 인간적 의사를 가지고 교회에 임할 때에 양심은 생명적인 신앙을 경시하고, 외적 기구를 유지함에 의하여 세속적 요구에 응합(應合)하려는 사업심을 가지게 되어 그리스도 본위에서 교회본위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교회의 특색을 표시하는 말로서 이에서 더 적당한 것이 없다. 그들에게 이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관심이 아니다. 교회라는 한 단체의 도덕적 세력에 의하여 사회구제를 하자는 피상적인 생각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이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빈다.
여기 현대교회의 바리새적 위선이 들어있다.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다. 유대교 안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던 것같이, 현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어떤 것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고르반’ 식으로인 고로, 근본태도에 있어서 인간적이다. 첫째도 교회 둘째도 교회, 교회 절대본위주의를 부르짖을 때, 외관상 매우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으나, 근본에 있어서 일개의 인간적 결사의 초개인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성단(聖壇) 위에는 지금 하나님이 아니라 일개의 ‘사회’가 앉아있는 일이 많다. 그리하여 그 초개인적 사회력을 가지고 거룩한 능력의 행사를 하려 한다. 더구나 일시 군중 심리적 흥분에 의하여 감격이 있을 때, 그는 ‘은혜’로 ‘성신의 능력’으로 가장되어 개인의 양심 위에 절대적인 세력으로 임한다.
이 경우에 여기 반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곧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로 몰기 때문이다. 스테판이 죽은 것은 이러한 정세에서였다. 인간주의는 하나님에 충실하려는 개인을 유대인의 교당(敎堂)에서 몰아내어 그리스도에 보냈던 것같이, 그리고 그들에게 “머리 둘 곳이 없이” 하였던 것같이, 현대의 교회에서도 가련한 소수자를 저들이 그리스도에 직속하려는 죄로 축출하여 세리와 죄인의 사회로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한다. 그리스도는 그들과 같이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공교회는 이 가증한 개인주의자들 간에 투영되어 있다고.
4.
하나님의 교회는 송이(松栮)같이 외대 기둥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스도만으로 서는 것이 참 교회다. 복잡한 조직이 필요치 않다. 조직은 인간주의의 표현이다. 사과(絲瓜)가 썩어져서 수세미가 남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이 죽은 때에 조직이 드러난다. 생명의 불도가니 안에는 결정(結晶)이 없다. 결정은 냉각한 후가 아니고는 없다. 현 교회에 긴밀한 조직이 있다면 그는 생명이 식은 증거다. 이것은 역사상에 드러난 일이다. 생명이 넘쳐흐르는 사도시대에 신도 사이에는 하등의 조직이 없었다. 현 교회의 의미로 하면 원시 기독교는 교회를 가지지 않았다. 교회헌법도, 규모도 성속(聖俗)의 구별도 아무것도 없는, 거룩한 교회를 그대로 표현하는 단순한 신앙단체였다.
그러나 단체가 점점 커져 현림(現臨)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리우고, 단체로서의 의식이 차차 인격적 생명의 약동을 능가하여 감에 따라 고정된 조직의 필요를 느끼게 되어, 드디어 로마교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사실을 지적할 때는 어떤 교회주의자라도 반대하지 못한다. “과연이오.” 하고 항복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곧 “그러나 사람은 불완전한 것이니까······.” 하고 변명이 나온다. 이는 거의 공식적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교회주의다. 그 말하는 의미는 이것이다. 즉, 이상으로 하면 사람이 그리스도에 직접 연락(連絡)되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만, 현실의 인간이란 불완전한 것인고로, 일단 단체를 이룬 다음에는 그것을 유지해 가는 규칙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현실론은 정당한 것이다.
그렇다. 과연 그렇다. 교회주의는 현실주의다. 십전(十全)을 기하는 매우 친절한 주의다.
그러나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할 때 그리스도는 현실주의는 아니었다. 잔혹한 이상주의자였다. 조직을 시인하려는 사람은 그 역사적 필연성을 말한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직접 그의 인격적 감화에 의하여 되지만, 한번 단체가 성립되면 개인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단체 자신의 가지는 사회적 법칙성에 의하여 일정한 조직에 들어갈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개 역사적 사회적 관찰로 보면 이는 옳은 말이라 하겠으나 대체 그 필연성을 지어놓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주의밖에 다른 것 없다. 교회가 만일 인간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의 모임이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까. 조직의 필요를 말함은 죽었을 인간이 아직 채 죽지 못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지금에 있어 조직적 교회의 필요를 말하는 사람의 맘을 심리적으로 해부하면 무엇이 있나? 조직이 없으면 교회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의 혼란에 빠질 것이요, 혼란하면 무력하고, 교회가 무력하면 기독교는 쇠멸(衰滅)하고 말 것이다. 조직이야말로 힘이다. 기독교로 하여금 유력한 종교가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로 이러한 생각이 들어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분명히 배척한 물질적인 생각이다.
그러한 필연이라면 그리스도 당시에도 충분히 있었다. 4천명, 5천명이 목자 없는 양같이 따라다닐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면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바리새교인들이 죽일 생각은 많으되, “호산나”라고 전후 옹위하는 군중을 두려워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한 것을 볼 때, 인간으로 한다면 저는 어떤 암시를 못 얻었을까, 더구나 각각으로 위급해 오는 형세를 보면서 어떤 처지의 필요를 안 느꼈을까? 그만한 파문을 일으킨 그가 다소라도 조직적인 방법을 강구했다면, 그렇게 적막한 최후를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업으로 본다면 저는 완전한 실패다. 겟세마네 동산의 장면 같은 것은 정치적 안목으로 보면 거의 추태요, 생전에 같이하던 핵심단체인 사도단 조차 사회적 세력으로 하면 그가 죽은 후는 완전히 소산(消散)되었다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새 교회의 일어난 것을 곧 보기는 하나, 그는 따로 새 생명에 의한 것이요 생전의 계속이 아니라. 그의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그의 사업도 죽어 다시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은 그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일체의 인간적인 것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에는 교회 아직 없었다고 하지만, 그는 그가 교회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들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은 다른 모든 종교의 교조의 생애를 보아 증명할 수 있다. 사회적 필연성의 소이로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려 함은 분명히 비 그리스도적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현실의 교회는 교권의 주장을 가진다. 개개의 신자를 초월한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명령적인 권위를 가지고 개인 위에 임한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생활에 있어서 신자는 교회의 제정하는 데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은 어찌 되었든지 사실에 있어서 신자와 교회원은 하나이다. 고로 신앙에 들어간다 함은 일정한 조건을 수락하고 교회의 통치권 하에 들어간다는 말이요, 처음부터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일이 아니다. 전도자로 순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원을 만들기 위하여 한다. 구도자가 단순한 진리를 위하여 찾아갔다 할지라도 교회당 문 안에 들어서면, 밖에서는 예기치 못했던 일개 사회가 위압하는 공기로써 그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후 여러 가지 환영과 권면 교훈의 말을 들으나 요약하면 “그대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는 이 교회에 들어옴이 절대 필요한 일이요,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먼저 이 교직자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교직자로 대표되는 교회라는 일개 권위와 복종관계를 맺고 서게 될 때 그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일일까? 교회의 주장으로 하면 신앙이란 복종이다. 교회의 명령에 복종치 않고 성경을 정해(正解)할 수도 없고 합당한 생활을 할 수도 없다. 교회의 의견으로 하면 신앙은 공포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종교학자들은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신앙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신앙은 공포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요 사랑으로써 생긴다. 하나님의 교회는 인신공봉(人身供奉)을 하던 이방종교와 같이 전율에 의하여 서는 것이 아니요 사랑의 연결로써 된다. 교권에 복종함에 의하여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요,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그리스도가 친히 가르친다 신앙에 의하여 지상의 교회가 성립된다. 교회주의자들은 이 점에 대하여 거꾸로 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거꾸로 된 생각이 사랑이어야 할 신앙을 복종으로 오해하는 이 거꾸로 된 생각이 교회로 하여금 여러 가지 거꾸로 된 논(論)을 하게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교권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요 그를 대표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을 속이는 시대착오의 말이다. 그리스도에게는 대표자가 있을 수 없고 그가 세상에 온 후로는 하나님을 전하는 일체의 대표자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오기 전에 있어서 인류는 인간적 대표자, 중개자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그가 온 후는 무용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도덕도 아니요 율법도 아니요 복음인 이유는 과거시대 승려의 손에 전유되어 있었던 천국 문을 빼앗아 자유 개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이대로, 이 죄인의 몸대로, 승려도 교회도 기타 아무것도 필요 없이 직접 신 앞에 나가게 하는 데 있다. 고로 이제 또 그리스도의 대표 운운하는 것은 유대주의로 역행하는 일이다. 대체 교회의 신자는 예수가 무엇을 위하여 뉘 손에 죽었는가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저는 이방 불신자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요 교직자의 손에 죽었다. 오늘로 하면 교황, 신부, 감독, 목사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무엇을 위하여 죽었나? 그 교권을 깨치기 위하여, 신자는 습관처럼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위하여 죽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추상적인 일개명사 하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를 죽인 죄를 구체적으로 제사장, 바리새교인 하는 교권자에 대표되었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폭격하기 위하여 자기가 육탄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주의하지 못하는 이 사실, 즉 그리스도에 맞섰던 죄의 세력은 불신자로가 아니오 교권자로 표시되었다는 이 사실은 신앙의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적대관계에 두는 것이 곧 죄요 죄는 곧 인간주의인데, 이 인간주의의 최고부는 궁전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군영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은행이나 연구소에 있었던 것도 아니요, 도리어 신에게 드리는 제단 밑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있다.
고로 예수가 전도를 하되 이방에 별로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 먼저 한 것은 단순히 인간적 애국심으로가 아니요 세계구원 싸움에서 적의 본영을 우선 폭격하자는 작전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자기가 죽기까지 하여 목적대로 이루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승려근성을 발(發)하여 가지고 우리가 신에 직접 가는 길을 막고 대신해주마, 중개해 주마하는 것은 원치 않는 친절이라기보다 역사의 역전이요 우리 생명의 약탈이다.
교회는 또 말한다. 진리는 개인이 자유로 해석할 것이 아니요, 성령은 교회에 임하는 것인 고로 교회에 복종함이 안전하다고. 과연 사람을 유인하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의 자유해석이 틀렸다면 예수도 틀렸다. 복음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자유롭게(교회의 전통에 구속 안 되고) 성경을 해석했던지를 알 수 있다. 또 안전이라 하지만 안전을 기하는데, 신앙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신앙이란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모험을 하는 일이다. 교회를 만드는 심리는 안전을 바라는 심리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혼자 죽는 것이다.”라고 누가 말한 것같이 천국에는 각자가 제 발로 들어가는 것밖에 도리가 없고 제 발로 걷는 한 모험이지 않을 수 없다. 천국에는 계단을 짚고 올라가는 것도 아니요 단체로 할인하여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유일의 안내자의 말을 듣고 단 걸음에 도약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쉬운 계단이 있는 것같이, 단체로 가면 값싼 것같이 말하는 것은, 성전을 변하여 상점을 만드는 교권자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묻는다. 사람 중에 누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또 여력이 있어 남의 십자가까지 져줄 자가 있느냐고.
권위는 몽학선생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던 때의 일이다. 그리스도의 옴으로 ‘아버지’인 하나님을 아는 이때에 있어서는 권위는 필요치 않다. 사랑은 자유로운 것이요 담대한 것이다. 과거시대는, 대표하는 제사가 필요하고 모든 사람은 복종하였으나, 지금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람마다 제사이다. 다 하나님과 면접할 수 있다. 품행방정한 장자와 방탕한 차자가 다 같이 아버지의 입맞춤을 받는 때다. 장자도 그 장자인 이유로 품행방정한 이유로 특권을 주장할 수 없고, 차자도 그 방탕했던 이유로 종이라 하며 멀리 서기를 허(許)치 않는다. 이편에서 못 가더라도 아버지 편에서 나와 맞는 때다. 이때에 있어서 선생인 척하고 부자의 틈에 개입하여 예의, 도리 운운하는 자는 썩어진 바리새주의자다. 자유의 생명은 그런 것을 배척한다.
6.
권위의 주장이 진리에 합(合)치 하지 않은 것인 증거는, 그것을 위하여 교회가 제정한 성속구별제도(聖俗區別制度)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권위든지 그것이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쓰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격주의요 둘째는 신비화주의다. 즉 자기와 통치 받는 자의 사이를 가급적 거리있게 하는 것과, 피차간에 있는 지배관계를 될수록 신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회의 성속구별이라는 것은 이 작용을 하는 시설이다. 평신도는 교직자를 몇 층대의 계단 밑에서 앙시(仰視)할 뿐이요 면대하지 못하며, 교단에는 운무가 서린 중에서 거룩한 태도로 모든 것을 행한다. 고로 단순한 양심들은 거기 위복(威服)되어버린다. 이것을 위하여 교회 내에 필요불가결한 것이 의식이라는 것이다. 거룩한 의식처럼 신자를 뜰 밖으로 내몰고, 아무것도 아닌 상징 안에 사실로 무엇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없다. 고로 승려의 종교는 의식의 종교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의식은 과거시대 하나님이 그 대표자를 통하여 말하던 때에 있던 것이다. 당시에는 의식이 정단한 의미대로 행사될 때 교육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교권의 횡령을 행한 승려들은, 자기네의 참칭(僭稱)하는 신성을 보장하는 기구로 이 의식을 악용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을 가르치기보다도 그 양심을 점점 더 어둡게 하였다. 바울이 유대주의를 박멸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 것을 보면 그 폐해가 얼마나 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진리에 직접 접하는 사도시대에 있어서 의식이라 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이 있었으나 모두 상징적 의미로 할 뿐이요 의식 그 자체 안에 무슨 효과가 있다는 사상은 없었다. 그런 것이 조직이 점점 복잡하여 감을 따라 단순했던 의식에 종종 마법적 의미가 붙게 되었다. 세례의 물 그것 안에 영생을 주는 능력이 있고, 축복 후의 떡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살이 된다고 하는 등이다. 지금 보면 분명히 미신이지 당시 사람들은 교회가 행하는 것인 고로 솔직히 받았고, 그것을 받는 한 교직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대표자인 것같이 알았다.
그러나 인간의 혼이 자각이 되고 지식이 진보된 금일에 그런 마법적 능력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다른 설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심리적 설명이다. 사람이란 선천적으로 그 신앙의 객관화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의식이란 곧 객관화된 신앙이다 라고. 그러나 무슨 설명을 붙이든지, 이것이 인심을 교권에 붙들어 매는 힘 있는 끈인 것은 사실이다. 교회적 경건은 이 숭엄한 의식의 주사(注射)로 계속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은 얼마나 가련한 신앙인가? 만일 구체적 사물을 떠나서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풍부한 자일수록 진보된 자라면 교회주의는 일개 교육사상으로라도 확실히 퇴보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들은 “볼지어다, 때가 오리니 이 산에서도 예배하지 않을 것이요 예루살렘에서도 하지 않을 것이라······.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한 말에 공연히 반대하는 자들이다.
성속의 구별도 의식도 다 진리에 반하는 일이다. 예수의 종교는 원격의 종교가 아니요 면접의 종교며, 신비의 종교가 아니요 평이의 종교다. 사람을 하나님께 접근시키는 것일수록, 진리를 수식 없이 간명하게 드러내는 것일수록 진리다. 그리스도는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승려들은 그 위에 현란한 법의를 덮으며, 그 앞에 향을 피워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을 하는 줄로 아나 그는 인간주의밖에 안 된다. 그에 의하여 그는 일개의 예술적 도취욕의 만족을 얻든지, 그렇지 않으면 관료적 자만감을 느끼든지, 또 그렇지 않으면 황홀하는 선남선녀의 주머니를 엿보는 것밖에 없다.
7.
무교회 신앙이 교권, 의식에 반대할 때, 교회주의자는 그를 비난하여 개인주의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일까? 무교회주의를 형식적으로 다루려할 때 그는 확실히 개인주의다. 저는 교회를 떠나 고립한 존재를 가진다. 그러나 무교회주의를 일편의 형식으로 보지 말고 실질적으로 볼 때 그 평은 결코 맞은 것이 아니다. 외견상으로 하면 무교회주의자는 개인 영혼의 구원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저는 결코 불교도는 아니다. 저의 제일 염원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다. 이 우주의 탄식이 끝이는 날이 오기다. 저가 독립하는 것은 임금에 충성하기 위하여 봉건군주를 버리는 일이다. 군명을 거짓 칭하던 제후의 눈으로 하면 개인주의자 같을 것이다. 절대 통치의 군주의 눈으로 하면 군국에 충성하는 자다. 저는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적으로 죽자는 자인데 그에게 개인주의가 있을 여지가 없다.
다음은 그 개성을 존중하는 이유로 개인주의라고도 한다. 이것도 무교회 신앙을 일개 사상으로 본다면 그럴 만한 비난이다. 무교회주의자가 개성의 절대가치를 부르짖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시 생각하면 아니 그렇다.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본다면 개인주의도 아니요 사회주의도 아니다. 서로 모순 하는듯한 두 주의가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특색이다. 사실에 있어서 기독교에서 강한 개성존중의 사상도 나왔고 또 사회사상도 나왔다. 이것은 기독교가 생명적 진리인 증거다. 이상적인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무시당하는 점이 없는 곳이어야 할 터인데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에서 본다.
무교회주의자로 하여금 개성의 존엄을 새로이 부르짖게 하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요 교회라는 물질적 권위 하에 인간을 굴복시키려는 교회주의다. 기독교는 개성을 몰각(沒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높이는 일이다. 교권에 반대하는 이유로 무교회주의를 개인주의라 하는 것은, 교회를 가지고 생명인 사랑에 의한 단체로 알지 않고 권력에 의한 지배관계의 단체인 것처럼 오해하는 인간주의에서 나온 말이다. 교회는 개성 위에 군림할 것이 아니요 개성 안에 있을 것이오 개성을 통해서 있을 것이다. 지상교회가 아무리 하나님의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이 아닌 일개의 ‘것’인 다음에는, 개인의 영을 종속시킨다는 것은 구원의 진리에 위반되는 일이다. 하나님나라는 임할 것이다. 그러나 금후의 세계에는 개성의 주장이 감소될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커갈 것이다. 권력적 통치를 하려는 교권은 이미 과거시대에 속하려 하고 있다.
무교회주의를 개인주의라 비난하는 데는 이상과 같은 기계적 권력관계의 입장에서 하는 외에 또 근래의 사회과학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가지고 오는 것도 있는 듯하다. 근세에 와서 사회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생관이 매우 변했다. 종래에 사람을 개인적으로만 즉 개인을 자족적인 것으로만 보던 것이 지금은 인간이란 근본에 있어서 사회적인 존재요 개인이라는 것은 단순한 추상(抽象)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성해졌다. 이 사상은 인간의 자기발견사상에서 확실히 일대 시기를 획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에 의하여 우리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일단 깊어졌다.
그런데 이 사상이 기독교에도 영향을 주어 종래의 개인적 복음에 대하여 사회적 복음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무교회주의가 교회주의에 반대할 때, 그는 개인주의여서 안 되었다, 개인으로는 신앙이 불가능하다하고 비난하는 말은 직접 간접으로 그러한 사상의 영향이 있는 듯하다. 개인 대 사회관계를 개인 대 교회관계에 적용할 때에 사회를 떠나 생활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은 교회를 떠나 신앙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적용은 과연 옳은가? 사회관계에 있어서 문제의 중점은 물질적 또는 정신적으로 되는 개체 개성간의 상호관계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문제의 중점은 상호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대 인간성에 있다. 사회관계에 있어서는 부분 대 전체의 평면적 관계이나, 교회에 있어서는 신 대 인간의 상하의 관계이다. 교회에 있어서는 개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것이 총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로 여기서는 일(一) 인간사회로서의 현 교회는 사회관계에서와 같이 개인에 대하여 우월권을 주장할 무엇이 없다. 구극(究極)에 있어서 사회나 개인이나 동질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권위를 가지는 것은 천상의 교회다. 그런데 이 교회는 조직적 관계의 교회가 아니요 전체가 개체 안에 있고 개체가 전체 안에 있는 인격적인 교회다. 고로 개인이기 때문에 신앙불가능이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개인주의라는 말과 동시에 무교회주의자가 받는 비난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즉 무교회 신자는 교회를 모르는 고로 그 신앙은 객관성을 가지지 못한 저 일인(一人)의 소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맞지 않는 말이다. 객관성의 근거를 다도성(多度性)에 두는 과학적 진리에서 하는 말이라면 그는 옳은 말이다. 과학적 관찰에서는 누가 보든지 언제 보든지 항상 동일한 현상을 얻는 것이 객관적인 것이다. 자기 혼자는 아무리 그렇다고 보아도 일반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지 않으면 진리라는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소위 정저와(井底蛙)의 소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 객관성이라는 것은 그런 수적 성질의 것일 수가 없다. 과학적 객관은 법칙적인 것인데 법칙이란 결국 다도성을 근거로 하는 것인 고로 거기서는 일반의 의견이 최후적 권위를 가진다 하겠지만 신앙의 객관성은 법칙에 있는 것이 아니요 생명적인 진리에 있다. 만일 수적으로 한다면 불교도의 국(國)에서는 기독교 신앙은 주관이라 할 밖에 없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신앙에서 주관이란 ‘개인적 의사’라는 의미의 것이 아니라 ‘인간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면 안 된다. 수천명 교회의 가결이라도 인간적이면 이는 인간주관이요 단 일인의 고백이라도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신적이면 이는 억만대에 심판하는 권(權)을 가지는 객관적인 것이다. 그리고 개인인 고로 신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법은 없다. 그는 제사종교 시대의 옛 사상이요 그리스도 이후에는 무의미한 말이다. 예수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분명히 가르쳤다.
그러나 일체의 변론을 그만두고 사실로써 판단하게 하라. 무교회주의자의 좁은 주관이 어디 있는가? 저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죽은 자라 한다. 그것이 주관인가? 그러면 그리스도도 주관주의자다. 저는 사람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것이 주관인가? 그렇다면 베드로도 주관주의자다. 저는 일체의 의식은 얽매는 것뿐이요 아무 의미 없다고 한다. 그것이 주관인가? 그리하면 바울도 주관주의자다. 기독교의 근본진리에 관해서 어느 것을 무교회주의자는 곡해하던가? 성경의 진리를 말하면 교회의 신자는 그것은 좋다, 그것도 동감이다 하고 찬성하며, 교회의 폐해를 말할 때까지 과연 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러나 교회에 오지 않는 것만은······.” 한다.
그렇다, 그 교회에 들어가지 않는 것만이 주관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그 과실은 다 좋으나 그 나무만은 좋지 않다. 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비평은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다. 그 교회에 속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것은 일편의 주관이다.”라는 형식적 논법에서 나오는 것이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무교회 신자가 목사의 손을 뿌리치고 교회당에서 탈출한 것은 독단에서 연석(演釋)한 것이 아니요 양심에 향하여 도전하는 사실에 못 견뎌 결론한 일이다. 누가 알리요, 교회만능을 주장하는 그 사상이야말로 인간적 주관이 아닌가 함을.
8.
그러나 그렇게 말함은 무교회주의자가 자기를 의롭다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는 깨진 토기다. 결점 투성이의 인간이다. 자기주장을 할 아무것도 없다. 오직 그 안에 담기는 무교회적인 진리가 역사적 중대성을 띠기 때문이다. 한 말로써 하면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주의’를 배척한다. 거룩한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요 그 지상의 투영까지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현 교회 안에 들어있는 ‘교회주의’를 미워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발생할 것이요 만들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 교회 안에는 교회본위로 인간적 노력으로 교회를 만들자는 주의가 들어있는 고로 그것을 미워한다. 그리고 교회주의를 미워함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교회주의에 고정하려는 선천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교회주의는 인간부정주의다. 단체이거나 개인이거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단체인 까닭으로 불가하다는 것이 아니요 개인인고로 옳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함은 무교회의 진의를 알지 못한 것이다. 교회를 판단하려는 오만에서가 아니라 인간주의를 물리치고 겸손하기 위해서다. 비사교적인 개인적 성격에 의해서가 아니다. 인간본위를 싫어하는 진리로 인해서다. 고독을 좋아하는 자같이 생각하나 어찌 고독을 자취(自取)하리요. 누구보다 더 교회를 원한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연결되는 형제자매의 교회, 그는 얼마나 부러운 것인가? 그러나 허위를 범해서까지 향락을 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 어찌 고독이 좋아서 최후에 겟세마네에서까지 홀로 기도했으리오. 인간이 들어와서 아니 되겠는 고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철학자는 말한다. 그렇다. 그는 진리다. 인간은 사회적이다. 고로 참 인간적인 것은 즉 인간의 강점은 개인적인 데보다 사회적인 데 더 들어있다. 자유신자보다 교회신자에 인간적인 것이 더 들어있다. 그런고로 인간주의를 미워하는 무교회주의는 ‘교회주의’를 미워한다.
무교회주의는 부정주의다. 언제든지 부정적이자. 라는 주의다. 청년성을 영원히 가지자는 것이다. 전통에 대하여 반항적ㆍ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던 청년 사상가도 노숙하면 보수적이 되는 것같이 어떤 신앙도 그 나타날 때는 프로테스트적이나 마침내는 일개 체계를 이루어 고정하고 마는 것이다. 무교회 신앙은 영원히 체계를 이루지 말자는 것이다.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으며 인간수업이 부족한 편협한(偏狹漢), 조야한(粗野漢)이라는 욕을 들으면서라도 고정화하려는 시류에 반항하자는 것이다.
그런 고로 저는 극단으로 나간다는 말도 듣고, 내용이 빈약하다는 평도 듣고, 심하면 유희기분으로 시기심으로 남의 일에 반대하는 자라는 말도 들을 수 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 인기 없는 일을 한다. 그는 수천 명의 회원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다. 다른 무엇이 다 되더라도 무교회파가 사회적 대세력으로는 되지 못할 것이다. 될 만하게 되면 저는 재 반항을 하고 탈출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원은 광야의 예언자와 같이 침체하는 교계에 향하여 한 개 외침을 보내면 족하다.
그러나 저를 소극론자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저는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진리가 있어서 반항을 하는 자다. 저는 신 절대 중심주의자다. 인간주의를 배척함도 하나님 절대중심이기 위해서요, 교권을 반대함도 그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귀족주의이기 때문이다. 저는 하나님의 절대통치 하에 성립되는 신앙의 데모크라시를 주장한다. 사상적으로 볼 때 데모크라시는 시대에 뒤졌는지 앞섰는지 그는 모른다. 그러나 영혼의 요구로 볼 때, 예수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자녀요 다 같이 제자요 일수(一首)의 가치가 아흔 아홉 수(首)의 가치에서 경(輕)치 않다는 성서의 데모크라시는 천래(天來)의 복음이다.
고로 저는 자기 신앙에 오는 일체의 간섭 구속을 배척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데모크라시가 아니요 사랑의 데모크라시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복종에 의하여 되는 절대평등, 절대자유의 나라다. 나라라기보다 집이다. 교회는 국가적이기보다 가정적이어야 할 것이다. 법권이 지배하는 데가 아니라 사랑이 화합하게 하는 곳이다. 고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복종이라 함은 곧 하나님에 향하여 온전한 사랑을 드리는 일이다. 무교회주의는 하나님만을 사랑하자는 노력이다. 그를 위하여 교회를 버린다. 그러나 진리는 역리적(逆理的)이다. 생명을 아끼는 자가 잃고 버리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같이, 교회에 고착(固着)하는 자는 도리어 잃을 것이다. 이 지상에서 교회를 버리는 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교회를 가진다.
성서조선 1936. 3월, 4월 86호, 87호
저작집30; 18-199
전집20; 3-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