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에서 태어 났으나 어린 시절 몇년간을 소양로에서 보내 었는데 지금도 어렴풋히 기억나는 것은 저의 집앞에 미군부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6,7세때 서울로 올라온 이후 현재까지 단 한번도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는데 제가 춘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역시 독립운동가와 관련이 있으니 저의 삶에 있어서 독립운동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하여 보면 그동안 자유게시판에 가끔 칼럼만 올렸던 제가 며칠전부터 "한줄메모장"에 글을 올린 것을 신호탄으로 이렇게 자유게시판에 저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으니 이는 불과 며칠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힘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기가 지난 7월 31일 김남덕 선생님께서 '한줄메모장"에 올려주신 잊혀진 독립운동가 서병찬 선생님의 사연을 보고 글을 올리게 된 것이니 이런 것을 통하여 볼 때 저의 의식에 독립운동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당숙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원로 독립운동가 김종설 박사님은 재당숙의 경기중학교 동창생으로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재학중에 '건국동맹"과 '조선민족해방혐동당"이 제휴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시며, 이러한 행적을 바탕으로 하여 독립유공자 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으나 안타깝게도 추서되지 못하셨는데 현재 90세의 고령이십니다.
이러한 김 박사님이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박선생에게 독립운동가 유전자"가 있는 거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나라 의학계의 권위자인 김 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통하여 볼 때 제 자신에게 이런 요소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잊혀진 독립운동가 발굴활동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춘천의 독립운동가와 관련하여 소개를 한다면 춘천농고에 재학중에 독서회 사건에 연류되어 투옥되셨던 박찬하 선생님에 대한 사연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박찬하 선생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재당숙의 판결문을 발견하던 1993년 4월 27일 전후이니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의 일입니다.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하시다다 행방불명되신 종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재당숙의 판결문을 찾게 되었으며, 결국 그로 인하여 박찬하 선생님의 판결문을 찾게 된 것인데 그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은 박 선생님이 저의 먼 일가 아저씨가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랜동안 판결문만 가지고 있다가 몇년전에 본격적으로 행적발굴을 시작하여 춘천농고 동창회를 직접 방문하여 판결문을 직접 전달한 바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춘천농고 독서회를 지도하셨던 유한익 목사님의 행적을 발굴하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춘천제일고보 "상록회" 사건에 대하여도 자료조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박찬하 선생님에 대하여 수소문을 하여 결국 그 동생되시는 분을 뵙게 되어 그 판결문을 직접 전해 드렸던 점을 매우 보람있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서병찬 선생님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에 김남덕 선생님이 올려주시는 서병찬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어떤 내용일지 벌써부터 궁금하게 생각되며 그동안 춘천농고 독서회, 유한익 목사님, 춘천제일고보 상록회 사건을 추적했던 심정으로 서병찬 선생님의 행적을 추적하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강원일보에 기고한 칼럼이 우리카페 " 독립운동 및 현대의 인물 " 에 게재되어 있는데 제목은 " 춘천독립운동가 유한익 목사 재조명해야 " 입니다.
2012년 8월 5일(일) 국제칼럼니스트 문 암 박 관 우 올 림.
첫댓글 감사합니다.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누군가는 해야할 일인데 문암 선생이 서병찬 선생에 관하여
조사를 하시겠다니 관심은 있으나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저에게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모쪼록 부탁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올려 주신 귀한 덧글을 읽으면서 평소에 서병찬 선생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랜동안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데 있어서 공통점은 대부분이 저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 졌다는 점인데 이번 서병찬 선생님 같은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자발적인 의지에서 시작하는 것인 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겠으며, 앞으로 선생님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해방후 미국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억지로 심는 과정을 거치느라 좌익계열 인사들은 행적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1940년대에 활동하신 분들은 직접 전한 기록 말고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지요. 건국동맹이나 협동단 이야기를 하시니, 당시 의학공부를 하면서 활동을 하다 북으로 가셨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 옥고를 치른 뒤 한학을 가르치시다 돌아가신 노촌 이구영 선생님의 일대기인 <산정에 배를 매고>(재간행 =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소나무)의 일독을 권합니다. 40년대 국내 정세는 물론, 당시 사셨던 시대의 남북한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올려주신 귀한 덧글 잘읽었습니다. 아울러 추천하여 주신 이구영 선생님의 일대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의 행적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참고가 되었던 책입니다.
제가 그동안 신청한 독립운동가중에서 협동당 사건과 관련하여 신청한 분이 이미 말씀드린 김종설 박사님과 더불어 한분이 더 있으니 그분은 협동당 당수로 활동하신 김종백 선생님이신데 제가 이 분에 대하여 김박사님으로부터 처음 증언을 들으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작년에 보훈처에 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
김종백 선생님은 1944년 포천에서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신 이후
안타깝게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장렬히 순국하셨는데 이 분 같은 경우는 정식으로 재판을 받지 않으셨기에 판결문도 존재하지 않으며 순국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서 결국은 추서가 되지 못하였으니 생각할 수록 비통한 심정 금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보훈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엄연히 계훈제 선생님이나 이구영 선생님이 책에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단지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고 하여 추서가 되지 못하신 점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김종백 선생님은 함경북도 길주,명천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족관계를
전혀 알수가 없어서 작년에 제 이름으로 신청한 바 있습니다.
저로서는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시다가 일제의 고문에 의하여 순국하신 김종백 선생님이 단지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국가에서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한 현실에 착잡한 심정 감출 수 없으며 더군다나 유족들과의 연락이 전혀 안된다는 대목에서도 안타까운 심정 금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추서되신 것은 아니었으나 제가 이런 분에 대한 독립유공자 신청서를 제출한 점을 참으로 보람있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서병찬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어떤 사연이 있으신 것인지 매우 궁금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셨군요! 이미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관심보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