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병 물고 있는 아이, 목 잘린 쥐, 톱니바퀴, 겸상 / 김달성목사
젖병 물고 있는 아이
내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자 작정하시고 새롭게 임하신 주님께서 한번은 자존심 상하는 말씀을 던지셨다.
그것은 누운 채 젖병을 입에 물고 있는 아이의 환상을 통해서이다.
처음 나는 반발심이 생겼다.30년 이상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또한 목회를 해 온
내가 어찌 젖병이나 물고 있는 아이 수준이란 말인가?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닌 주님으로부터 그런 평을 들을 때 슬펐다.
하지만 지혜의 주님은 그 이유를 여느 때와 같이 성경 말씀을 갖고 부드럽게 알려주셨다.
고린도전서 3장1절~9절이다.
"형제들아,내가 신령한 자를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교인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젖먹는 아이의 수준이라는 평을 들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시기와 다툼만 있었던 게 아니다.그들에겐 자기 자랑,음행,우상숭배등도 있었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자존심을 세우던 나의 얼굴이 붉어지며 저절로 숙여졌다.겉모습과는 달리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요일2:16)을 따라 살아온 나의 실상이 드러나도록 빛으로 역사하셨기에, 입이 다물어졌다.
다만 '하나님, 잘 못했습니다"
목 잘린 쥐
나의 사촌 동생이 얼마전 갑자기 세상을 하직했다.나이 마흔 세살로 아
직은 한창 때인데 어린 남매를 남겨 두고 그만 떠난 것이다.불현듯 찾
아온 폐암과 그 합병증으로,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채 그렇게 되어 안
타까움은 더했다.인생의 덧없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조문을 다녀오면서 다른 생각을 더 했다.그 사촌이 많은 재
산을 남겨 놓았기때문이다.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수 백억대의 재산
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 그 많은 돈 내게 있다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잘 사용할텐데...."
나는 그 많은 돈을 속으로 떠올리며 그 생각의 뒤를 좇아다니기 시작했다.
조문을 다녀 오면서, 내내 그 생각을 했다.문상에서 밤늦게 집에 돌아온 뒤
에는 입을 열어, 가족 앞에서 그 생각을 표현했다.가족들은 건성으로 들었
으나 나는 내심 욕심을 품고 한 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평온하던 나의 마음에는 어느덧 바람이 일어 탐심의 물결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어느새, 검약으로 살고자 애써온 그동안의 삶이 초라해보이는 지경까지 달려갔다.
그 탐욕어린 생각은 나의 삶을 조롱하고 비웃기도 했다.
잠복해 있던 돈 탐욕이 일제히 일어나 내 영혼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막탄을 뿌리며 내 이성과 생활규범들을 순식간에 허물고 내속에 침투한 그 탐욕은 내 영혼을 순식간에
어지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영성 훈련을 많이 받아도, 마음의 흔들림은 순식간에 올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면서,나는 늦은 잠을 청했다.
새벽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나는 새벽녘에 꿈을 꾸다 종종 잠에서 벌떡 일어나곤 한다.
몇년 전,주님과의 산 교제가 깊어지기 시작하면서 새로 생긴 일이다.
일반 꿈이 아닌 예언적인 꿈을 주님으로부터 받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도 그 새벽의 꿈은 생생하다.
내 손에 쥐어진 삽의 날카로운 삼각 끝날로 땅에 있는 큰쥐의 목을 쳐, 두 동강 내는 모습이었다.
내가 위로부터 힘껏 내리 찍은 날에 의해 절단된 목은 뻘건 피를 막 머금고 있었다.피를 머금은
쥐의 목이 내 코앞까지 크로즈업되는 광경이 꼭 생시와 같았다.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꿈임을 나는 직감했다.
순간 나는 자동적으로 그 의미, 교훈을 성령님께 구했다.
그러자 여느때처럼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해석의 실마리를 주셨다.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출20:17)
나는 즉시 회개했다.탐심을 마음에 품은 죄를 시인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
했다.그리고 평강의 성령께서 더욱 임재하시기를 요청했다.그러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만약 내가 그 탐욕을 마음에 계속 품고 키웠다면 필히 그 열매를 맺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마음의 운전대를 탐욕이 쥐면 그것이 날 어디로
끌고 가겠는가?가령 교인을 볼 때 그의 재산에따라 판단하고 대우하게 되
는 짓을 하게 될 것은 뻔하다.
우리를 성전 삼고 내주하시어,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성령께서는 매우 민감하시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당신의 성전을 죄에 조금도 양보하시지 않으시는 강력한 의지를 그는 갖고 계시다.죄의 모양,허물의 싹부터 자르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당신을 거스리는 육체의 소욕이 내 안에서 둥지 트는 것을 아예 원천적으로 막으시는 활동을
하신다.그는 우리가 지은 죄를 처리하시는 일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죄 자체를 이기도록 견인해
가신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행위(doing)의 변화만이 아니라
존재(Being)의 변화까지 이루어가시는 구원자이시다. 매우 섬세하시면서
도 강력하게..
내안의 쥐를 잡아주신 성령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나는 오늘 '쥐잡는 날'을
떠올렸다.한국교회가 쥐 잡는 날을 선포하고 쥐 잡기 운동을 하면 좋겠다
는 생각이다. 개인,가정,직장,학교,군대,나라의 쥐들을 잡으면 얼마나 좋을
까!
그러면 쥐 잡는 날은 언제가 좋을까?
주일,안식년,희년?
아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바울을 따라 날마다 하는 게 좋겠지.
그래, 쥐는 날마다 잡아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쥐잡기가 우선이라야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그 운동을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5-6)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
이니,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
니라.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약1:14-16)
톱니바퀴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그림은 성령께서 나를 위해 종종 주셨던 것이다.나를 위해 그것을
보여주실 적에는 대개 내가 주님과 조화를 이루며 일치된 생활을 하고있다는 표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주님과 불일치한 점이 있음을 알려주거나 깨닫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두 톱니바퀴의 그림에서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았다.물론 큰 것은 주님을 상징하고 작은 것은
나를 상징한다.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모습은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지향점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그렇게 주님과 조화,일치,연합되어 있지 못한 점이 있으니,
그 점을 발견하는대로 회개하고 고치라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은 하나님과의 불일치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행한 사건이었다.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는 절대 따먹지말라,만약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히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었다.그들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헤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생각하며 선악과를 따먹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속 깊은 곳에 박혀있는 하나님과의 불일치 속성,기질,성질을 본다.
이 속성은 까마득히 먼 옛조상에게만 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속에 뿌리 깊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톱니바퀴 그림이 나에게 처음 주어졌을 때,
매우 당황스러웠고 마음 한편에 반발심이 없지 않았다.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여주신 뒤 점짐적으로 내가 주님과 불일치되어 있는 점이 무엇인지를
성령께서 말씀으로 하나하나 깨닫게 해 주심으로 반발심대신 부끄러움이 앞서게 되었다.
가령, 성령의 조명 아래서 내 마음을 강타한 말씀 중엔 이것이 있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115-16)
이 말씀은 익숙한 말씀이었지만, 머리로만 익숙할뿐 가슴에 스며들어 진작 내 영혼의 양식은 되지
못하였음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고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실상은 착각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여기며 선악과를 과감히 따먹은
것처럼 나도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좇아 용감히 살고있는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속에 부어지지 못하도록, 내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의 정체를 보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내 마음의 주인은 나도 ,하나님도 아니라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큰 톱니바퀴는 하나님,작은 톱니바퀴는 내가 되어 잘 맞물려 돌아가야하는 데 말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불일치로 떨어진 아담과 하와를 몸소 찾아가셔서 주셨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불일치를 깨닫고 회개하도록하기 위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의 음성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그 음성을 듣고도 어둠 속으로 더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불일치를 깨닫고 돌이켜 회개함으로 회복의 은혜를 받도록 하시는 은총의 시대에 살고
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던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이다.
피흘리는 희생을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기에,
우리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빠른 회개를 해야한다.
물론 성령께서 회개를 도우신다.
하지만 말씀과 성령의 감동 안에서 회개를 해야하는 장본인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바로 '나'의 일이다.
우리는 항상 불일치로 떨어질 연약함과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겸손히 두렵고 떨리는 심령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하리라.
나의 구원은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 연합,조화에서 완성된다.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믿음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겸상
어느 방이 보였다.
분위기는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내가 어느 사람과 마주보며 겸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막상 식사를 하고자할 때 앞에 놓여있는 상에는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다.
초라하고 빈약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한장의 그림같은 꿈이었다.
처음엔 그냥 그 의미가 어렴풋하기만 했다.
그 의미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서서히 다가왔다.
마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어가듯이.....
맨처음 다가온 것은 마주 앉은 사람의 특징적인 이미지였다.
그것이 떠오르면서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의 두드러진 이미지는 교인으로 오랜동안 살아왔지만,
아직도 이성과 합리성,육신의 생각을 의지하고 앞세우며 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리스도인이 그런 방식으로 살면 삶에 하늘의
양식이 빈약해진다는 교훈이 뒤 따라왔다.
끝으로 주어진 것은 앞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그 사람처럼
바로 네가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나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멧세지였다.
우리의 이성은 성령과 말씀의 조명을 받아야 제 기능을 발휘한다. 이성은 성령께 길들여져야한다.
한편,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가 되기에 철저히 부정되어야한다.
이성이 성령께 길들여지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살아가면 풍성한 삶이 전개될 것이다.
우리 삶의 식탁에 사랑,희락,화평,평강,온유, 절제등이 넘칠 것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
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오늘은 고린도전서13장,소위 사랑장을 읽어내려가다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멈추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5절)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무례히 행한 적이 많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이미 돌아가신 아버님께 무례히 행한 것들이 나이가 들어 가면서 더욱 떠오른다.고등학교 시절 나는 부친을 행해 나를 왜 낳았느냐고 악을 쓴 적이 있다.남은 고사하고 살아계신 노모와 형제들 그리고 아내,자식들에게 무례히 행한 것들은 일일이 나열할수가 없을 정도이다.분노하고 성내며 독사같은 혀를 놀리며 악독을 뿜은 죄가 많다.사랑으로 행치 않은 모든 언행은 하나님 앞에서 죄요 악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례히 행한다는 구절의 의미를 오늘 나는 단지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생각한다. 사람에게 무례히 행한 것도 중하지만 하나님께 무례히 행한 짓은
더 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나를 사랑하려고 임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고 이용이나 하려고 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라는 생각을 오늘 구절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예수그리스도는 죄에 종노릇하는
나를 죄에서 건져 당신과의 사랑의 교제를 이루시고자 임하시는데, 나는 나의 육신적 소원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얼마나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썼는가!
탐욕을 죽이고 그 대신 참평강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나의 탐욕을 이루려고
십자가를 의지해 왔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에게 나타내시고자 피흘리셨는데 나는 나의 영광을
위해 예수 피를 이용하였다.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내 영광을 구하며 살아온 세월이 많다.마치 사울왕처럼 말이다.
그는 하나님이 전쟁 전리품을 가져오지 말라고 이미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와 양들을 끌어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억지 논리를 핀 적이 있다(삼상15장).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무례히 행한 원조이다.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며 선악과를 따먹은 일은 무례함의 본보기이다.내속에도 그런 기질이 있어, 나는 성육신하신 예수에게까지 무례히 행하는 것이리라.
이 세상의 속성은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요일2:16)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오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나는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위해 예수를 찾고 예수를 이용하는 참으로 무례한 짓을
해온 것이다.예수님은 내속에 뿌리박고 있는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내게 오셨는데 나는 오히려 그것들을 이루려고 예수 이름을 이용해 왔으니 이보다 더 무례할 수가 있는가!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이용 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당신의 찬송을 우상에게 결코 주지 아니 하시는 분이다.(사42:8)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이제 나의 무례함을 끊으시고, 당신을 예의 바르게 사랑하며 섬기는
자로 거듭나게 하는 은총을 베푸시고 계시다!
그런데 이 은총은 아픔이 있는 사랑이다.
왜나하면 그동안 잘 못 길들여진 나를 부수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기때문이다.
무례히 행하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경거망동한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거룩한
일을 주님은 행하시면서 참은총을 부으시는 것이다.
요즈음 이런 기도를 드린다.
"주여,당신의 은총을 감당할 은혜를 주옵소서!"
김달성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