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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대구·경북의 국보와 보물'2000년 전의 대구 비산동과 1500년 전의 고령 지산동’
국립대구박물관은 2024년 7월 9일부터 특별전시실에서 고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국보와 보물을 선보입니다.
전시품은 국보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투겁창 및 꺾창>과 보물 <전 고령 일괄 유물>입니다. 이들은 2021년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21,693점의 일부입니다.
국보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투겁창 및 꺾창>
1956년에 대구광역시 서구 와룡산 북쪽 자락을 지나가던 주민이 발견한 청동기로 창과 꺾창을 비롯해 칼과 칼집 부속구, 양산살 끝 꾸미개 등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창과 꺾창은 무기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의례용儀禮用으로 크고 위엄이 있는 모습이 특징입니다. 이들은 원삼국시대 대구지역 국읍國邑의 위치와 위상을 알려주는 주요 자료로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71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칼은 세형동검으로도 불리며 날이 좁고 직선 형태를 띠며 자루를 따로 만들어 결합한다. 검은 후기로 갈수록 마디가 뚜렸해진다. 검은 무기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특별한 개인이 지닌 정치. 사회적 힘을 과시하는 데에도 쓰였다. 칼집은 대부분나무 같은 유기물질로 만들여졌기 때문에 쉽게 썩어 사라진다. 반면 칼집의 양 끝 부분과 중간의 결합 부분은 청동과 같은 금속이라 대체로 잘 남아있다.
창 : 적을 찌르는무기로 창의 아래에 나무 자루를 끼우고 식물의 줄기 등으로 묶어 조정한다. 나무자루 입구의 측면에 반월형 고리가 내부가 막힌 채 흔적만 남아있다. 고리는 원래 자루를 고정하거나 수실 등을 매달아 장식하기 위한 것이다.
꺾창 : 적을 걸어 당기거나 찍어서 끌어내리는 데 쓰는 무기다. 꺾창과 자루는 수직으로 장착되며 자루를 고정하기 위해 하단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 이 꺾창은 무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몸체가 지나치게 넓고 날이 날카롭지 않은 점으로 보아, 개인의 위세를 드러내거나 모종의 의례를 위해 사용한 도구로도 보인다.
목걸이 : 남색의 유리구슬 500개를 엮어서 만든 목걸이이다. 구슬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유리구슬 속에 기포가 보인다. 남색 유리구슬 목걸이는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한 장신구이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 75호 무덤을 비롯해 김해 대성동, 양동리 유적, 함안 도항리 유적 등지에서도 출퇴되었다. 고대에 복식품으로 사용한 유리구슬은 현대의 것과 비교해도 사용 원료나 제작 기술이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숫돌 : 숫돌 위에 맞새김한 은제장식을 씌웠다. 이는 원래 허리띠에 매달아 늘어뜨리는 장식이다. 삼국시대 숫돌은 철기 제작할 때 필요한 물건으로 철기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허리띠에 숫돌을 매단 살례는 경주 첨마총, 경산 임당, 창녕 교동 등지의 삼국시대 고분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숫돌이 무거워서 탈락하고 은제 장식만 남아있다.
큰칼 : 삼국시대의 칼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실용무기이며 여러 가지 장식을 더해 소유자의 위세를 드러내기도 한다. 금과 은으로 칼을 장식하며 특히 손잡이의 끝을 짐승얼굴, 세고리, 세잎으로 장식했다.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 투겁창 및 꺾창(大邱 飛山洞 靑銅器 一括 - 鉾 및 戈.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대구시 북부 비산동에 소재한 초기철기시대 무덤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투겁창(동모)은 창의 일종으로 끝에 나무자루를 끼우고 창 끝에 달려있는 반원형의 고리에 고정시켜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3점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길이 67.1㎝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투겁창 중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한다.
길이 57.2㎝의 투겁창은 몸통이 넓어 광형투겁창(광형동모)이라 하고 옆에 달려있는 고리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용품이라기 보다는 의기용(儀器用)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하나는 40.0㎝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일반적으로 출토되는 투겁창은 중국의 것을 본 뜬 것이 많지만 이것은 완전히 한국화된 형태인 점이 주목된다.(출처 : 국가유산청)
보물 <전 고령 일괄 유물>
경상북도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고령은 삼국시대 대가야의 중심지로, 특히 지산동 고분군은 삼국시대 대가야 왕과 왕족의 묘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시품은 유리구슬 목걸이頸飾, 큰 칼大刀, 말갖춤馬具 등으로 대가야 지배계층의 장신구와 복식문화 그리고 무기와 말을 화려하게 장식한 당시의 물질문화를 잘 살필 수 있는 자료입니다. 197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발걸이와 종방울 : 발걸이는 말을 타는 사람이 말에 오를 때와 달릴 때 양발을 끼워 안정을 유지하는 도구이다. 발걸이는 윤부輪部와 병부柄部로 구성된다. 윤부는 타원형으로 발을 딛는 부분이다. 병부는 윤부 위에 연결되어 끈으로 안장에 발걸이를 단다. 발걸리를 달기 위해 병부 맨 위에 구멍을 내는데 이 발걸이는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종방울은 원래 비어있는 몸통을 만들고 꼭대기에 막대 모양의 혀를 달아 흔들면 소리가 나도록 만든 도구이다. 맨 위에 달린 둥근 고리를 이용해 끈으로 연결했다. 한 무덤에서 마구와 함께 출초될 때 말의 목에 달던 마탁으로 보기도 한다.
말띠꾸미개 : 가죽끈이 교차하는 지점에 부착해 끈을 고정하는 실용성과 더불어 장식효과를 더하는 마구이다. 현재 끈이 통과하는 부분이 4개인 것과 최대 8개였던 것으로 구선된다. 철제 바닥판에 아래에 가죽의 흔적이 남아있다. 상부에 잎이 8개인 꽃 모양 장식을 덧대고 그 위에 다시 꽃 모양 금동 못을 박아 장식을 한층 부각시켰다.
말띠꾸미개와 말띠드리개 : 말띠꾸미개는 말의 굴레, 가슴걸이, 후걸이 등의 가줏끈들이 교차하는 곳에 박아 이들을 서로 조정하는 도구다. 말띠드리개와 같은 장식을 늘어뜨린 가죽끈을 묶기도 하고 교차하지 않는 가죽끈에도 쓰여 말을 장식한다. 말띠드리개는 말의 가슴걸이나 후걸이와 같은 가죽끈에 매달려 말을 장식하는 도구다. 말띠꾸미개와 말띠드리개가 금동띠로 연결된 사례로 보아 이 형태의 말띠꾸미개와 말띠드리개는 서로 관계를 이루며 말을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 고령 일괄 유물(傳 高靈 一括 遺物. 보물. 국립중앙박물관 )
전 고령 일괄 유물(傳 高靈 一括遺物)은 경상북도 고령지방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2종류의 일괄유물이다. 고령지방은 삼국시대에 대가야국의 근거지였으며, 신라 진흥왕 23년(562) 신라의 침입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화려한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오늘날 고령읍 지산동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 가야의 무덤이 많이 모여있다. 이 일괄유물은 당시 가야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품이라 하겠다.(출처 : 국가유산청)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