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 신영미
꿈 속에 지나쳐버린 인연들이 간혹 나타나 심난하면 이어서 잔다. 몸이 침대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간섭할 사람이 없다는 게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세탁소에 다녀와 겨울 옷들을 정리하고 빨래와 청소를 했다. 단장하고 다녀올 곳이 있어야 좀 더 가꾸고, 약속이 있어야 주말에 활기가 있을 텐데 심심하다.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은 언제였을까. 행복한 시절이 다시 오리라 믿고 싶다.
왕가위 감독의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오랜만에 해지기 전에 퇴근한 금요일 저녁이다. <화양연화>와 <2046> 두 영화의 주인공이 양조위다. 남자 주인공 이름도 ‘차우’이고 글을 쓰며 옛 여인과의 추억이 2046에서도 나와 속편인 듯한 느낌도 들었다.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은 치파오의 자태를 뽐내며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으로 국수를 사들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자주 마주치는 남자 주인공이 반할만하다. 그들의 시작은 복수가 아니다.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두 사람은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사다준 가방과 넥타이가 서로의 배우자와 같음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게 된다.
비밀리에 만나면서 여자는 둘이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지 궁금해 한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며 반문하는 남자, 하지만 배우자에게 따지고들 용기는 없다. 양조위가 남편 역할을 해주면서 다른 여자가 있지않느냐고 남편을 추궁하는 장면을 연습한다. 몇 번을 반복하다 남편이 인정하자 이렇게 슬플지 몰랐다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현실이 아니라며 남편은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다독이는 남자, 두 사람은 점점 빠져들게 된다. 당시는 한 건물에서 이웃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여서 가족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남자 집에 놀러갔다가 이웃들이 밤새 마작을 하는 통에 들킬까봐 못 나오고 다음 날 출근을 못하기도 했다. 위태로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여자는 그들과는 다르다며 감정을 억누른다.
남편을 떠나지 못할 것을 아는 남자는 여기서 벗어나려고 싱가포르로 가려 한다. 이번에는 이별 연습을 요청한다. 현실이 아니라지만 여자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남자의 품에 안겨 혼란스러워 한다. 처음으로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상을 모두 버리고 새 삶을 선택할 용기도 없다. 그렇게 싱가포르로 떠났지만 여자는 회사에 전화해 말 못하고 끊기도 하고 호텔로 몰래 찾아와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함께였던 홍콩 아파트에 각자 다녀간다. 여자는 아이와 함께 정착하였고 남자는 앙코르와트에 추억을 묻는다. 언제까지 감정에 휩쓸려 떼쓸 수만은 없는 어른인 것이다.
2046은 호텔방 호수이자 주인공이 쓰는 미래 소설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공리, 장쯔이, 왕페이 등 여배우들이 매혹적인, 그러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아린 과거를 간직한 비운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양조위는 2047호 호텔에 투숙하면서 2046호 장쯔이를 열심히 꼬드겨 관계를 가지지만 진정한 사랑을 주지 않는다. 차 안에서 장쯔이에 기대어 옛 여인인 장만옥을 그리워한다. 허망했던 시기 싱가포르에 와서 도박을 하면서 공리를 만나게 된다. 우연히 옛 여인과 같은 이름인 수리첸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또다시 장만옥을 느낀다.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것 같던 이 남자는 호텔 사장이 일본인이라고 반대하던 사장 딸(왕페이)의 오작교가 된다. 남자는 일본인 애인의 편지를 몰래 받아 전해주고 호텔 사장 딸은 글쓰는 일을 도와준다.
두 사람은 미래소설 2046을 함께 구상하면서 가까워진다. 남자는 크리스마스에 일본으로 국제 전화를 할 수 있게 도와주고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미래 소설에 점점 몰입하면서 2046호에 탑승해 인조 인간을 사랑하게 된 기무라 타쿠야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색감이 돋보이고 감각적인 2046호 열차 안에서 호텔 사장 딸인 왕페이가 인조 인간으로 등장한다. 인조 인간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묻는 남자, 답하지 않는 여자. 인조 인간은 뱃터리 방전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연인이 있었다. 일본으로 떠난 사장 딸에게 소설을 보낸다. 그녀는 결말이 너무 슬프다고 바꿀 수 없냐고 전한다.
일회성으로 여자를 만나는 남자도 결국 사랑에 빠졌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남자도 그럴 수 있구나 생각했다.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표현하기 힘들고 숨은 마음을 제대로 읽지도 못한다. 하물며 허락없이 들여다보면서 제 3자가 감정을 읽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옳지도 않다. 대화하지 않고 무엇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자느라 끼니를 걸렀더니 0.95kg이 빠졌다. 이것으로 이번 주 즐거움을 찾아야겠다.
첫댓글 신영미 선생님, 시간이 있으니 줄거리를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친절하게 소개해 주세요.
네, 지도해주시니 훨씬 낫네요. 수정하고 있어요.
선생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