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 일기
2017년 8월 30일(수) 흐림.
김해에 사시는 회원 한 분이 전날 밤 늦게 하루지킴이를 하러 마을에 들어왔다. 그 동안 집안 일 때문에 오지 못하여 마음이 무거웠단다.
아침 식탁에 그 분이 가져오신 빵을 곁들여놓았다. 초전 주민이 평통사 식구들 먹으라고 가져온 참외도 깎아서 내었다.
늘 오전 10시에 하는 지킴이회의에 모두 모여앉아 오늘 일정을 공유하는데, 오후 1시 반에 "사드 추가배치 저지를 위한 국민비상행동 선포 기자회견"이, 오후 2시에는 40차 소성리 수요집회가 열린다.
문재인 정부가 사드 추가배치를 강행하겠다고 나선 지 한 달째. 주민들의 하루하루는 말 그대로 전쟁전야, 초긴장의 연속이다. 소성리의 시간은 "사드가 추가배치될 그 날"에 멈추어 있다.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4월 26일은 일상적인 생활을 위협할 정도다. 사드 발사대와 레이다를 실은 차량이 들어가는 걸, 경찰에 봉쇄된 채 뻔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날의 기억이 "공포감"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시는 되풀이하고싶지 않은 기억. 그런데 또 그런 날이 다가오고 있는 거다.
"우리는 다시 똑같이 당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정부도 우리가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준비하겠지."
4월 26일 경찰의 팔꿈치에 맞아 이가 부서져 아직도 마스크를 하고 있는 임순분 부녀회장은 정부가 하루 전에 통고한다는 말에 더 기가 막히다. 사드 막아주고 있는 사드도 빼줄 줄 알았던 대통령이 한다는 소리가 겨우 배치 일정을 미리 알려주겠다는 것이라니.
지금으로선 가능한 모든 역량이 미리 마을에 들어와 온 몸으로 막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법으로 점철된 사드배치를 법으로 막자니 너무 길이 멀고 정치권이 나서주기를 기대하는 건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믿을 건 촛불의 힘. 정부가 무모하고 부당하게 사드를 추가배치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알려 70%에 이르는 찬성 여론을 돌려세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8월 30일부터 9월 6일까지를 1차 비상행동으로 선포한 기자회견에는 김천시 농소면과 남면, 성주군 초전면에서 6개 마을의 이장들과 초전, 김천, 원불교 투쟁위원회를 비롯한 이른바 6주체들이 참가했다. 주민들도 많이 나오셔서, 마을회관 앞 마당은 기자회견 참가자들과 기자들, 아니, 주민들의 절박함으로 가득 찼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일어나 팔뚝질을 하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온다.
이젠 늙어 허리가 꼬부라지고
힘이 다 빠져나가 약해진 몸뚱아리
무릎을 펴 서있는 것조차 힘이 드는데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쉬어야 하는데
마을을 지켜야 한다.
경찰의 곤봉과 방패 앞에
미군의 시커멓고 커다란 트럭 앞에 나서야 한다.
지금이라도
제발
멈추면 좋겠다.
사드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자회견을 마치자마자 사드저지 대구경북대책위원회가 주관한 40차 수요집회가 이어졌다.
부녀회장이 "사드 배치가 소성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임을 알고 함께 해주시는 국민 여러분이 계시기에 결코 이 투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사드 추가 배치 소식이 알려지면 소성리로 달려오시라! 우리가 앞장서겠으니 함께 해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김천 주민이 환경영향평가에 매달려있는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우리가 전자파 때문에 사드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살림하고 애키우는 아녀자지만 대통령보다 사드에 대해 더 많이 안다. 우리를 기만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민주노총 대구경북본부 소속 노동자들이 많이 참가한 이 날 집회 발언자들은 모두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소성리로 달려오겠다. 소성리를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집회 후 평통사 지킴이들은 평소처럼 마을회관 앞과 월명리에서 당번서기를 이어갔다. 헬기는 평소보다 너무 낮게, 자주 드나들고, 경찰이 탄 차들도 유난히 많이 다닌다. 모두 주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인턴을 하고 있는 영찬군과 세 시간동안 월명리 당번을 서고 돌아오니 마을회관 앞이 시끌시끌하다. 역사적인,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고 밤이 되어 다시 마을회관 앞에 모인 부녀회원들은 둥글이가 만든 영상을 보며 오랜만에 마음껏 웃었다. 강정마을 지킴이였던 둥글이의 영상제작 솜씨는 강정투쟁 때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다.
기자회견과 집회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할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미국의 압력과 그에 굴종하여 자기 국민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정부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사람들! 언제라도 다시 촛불을 들겠다는 사람들!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한단다!!
요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입안이 타들어가는 것같은 불안감과 초조감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여유를 드리기 위해 평통사 지킴이들은 밤마다 주민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는데, "이 와중에 무슨 노래냐"며 외면했던 분들도 수심을 거두고 박수치며 함께 웃었다.(노래 지도하던 대구회원은 목이 다 쉬었답니다.)
한미국방장관회담에서 송영무 국방장관은 미국 매티스 장관 등에게 "사드 배치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는 환경부의 소규모환경영향평가를 정당한 절차로 보고, 그 결과에 목을 걸고 있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게 해서 사드배치 찬성여론을 굳혀 강행하면 마음이 편할까?
문재인 정부가 사드 추가배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절차에 따르면 디데이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국방부가 지난 8월 24일 환경부에 소규모환경영향평가서를 제출했고, 환경부의 협의기간은 30일 종료되었다. 열흘 정도 평가를 연장할 수 있다니 9월 초순 안에 일이 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부, 그리고 이 나라 전체의 미래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사드 배치가 원천적으로 법적 근거가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게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이다.
소성리에 사람이 살고있다. 소성리도 문재인 정부가 책임져야 할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