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에는 교회
구약시대에는 교회라는 조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의 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만 나오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에돔이나 시돈, 두로, 앗수르, 바벨론 같은 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오늘날 중동 분쟁의 화근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은 같은 나라입니까, 다른 나라입니까?
힌트를 드릴까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애굽은 지금의 이집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애굽과 지금의 이집트는 어떻습니까?
지리적인 위치도 같고, 나라를 이루는 인종도 같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도 같습니다.
하지만 애굽과 이집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홍해를 건너서 탈출한 것은 이 세상에 속해 있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집트는 지구상에 있는 한 나라일 뿐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중동지방에 있는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지리적인 위치도 같고 나라를 이루는 민족도 같지만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단절되었습니다.
요컨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교회의 예표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을 삼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된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면 할례를 받아야 했고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혈통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해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지금 중동지방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같은 병폐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표지였습니다.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 제도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하나님께서 어느 만큼 싫어하시는지 알아서 이 세상 풍조와 철저하게 단절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할례도 받았고 율법도 지켰고 제사도 지냈으면서 정작 자기들은 가나안 원주민과 똑같이 살아갔습니다.
바알 우상을 섬겼고 가나안 원주민과 혼인도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려는 의지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 폐단이 우리한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매주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설교도 듣고,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봤을 때 우리한테서 예수님이 연상되어야 합니다.”라고 하면, 그 얘기가 우리를 향한 성경의 요구인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못 산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을 한심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안 되는데 우상을 섬깁니다.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이방 민족이 쳐들어오면 그때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합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입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여호와를 전쟁의 신으로 얘기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바알 섬기고, 전쟁이 벌어지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배당에 모였을 적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 같은데 세상에서는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교회에서는 교회 식대로 처신하고 세상에서는 세상 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괜히 신앙 잣대를 세상에 가지고 나갔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다가 망한 것을 알면서도 그렇습니다.라는 조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의 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만 나오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에돔이나 시돈, 두로, 앗수르, 바벨론 같은 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이스라엘은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오늘날 중동 분쟁의 화근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은 같은 나라입니까, 다른 나라입니까?
힌트를 드릴까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애굽은 지금의 이집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애굽과 지금의 이집트는 어떻습니까?
지리적인 위치도 같고, 나라를 이루는 인종도 같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도 같습니다.
하지만 애굽과 이집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홍해를 건너서 탈출한 것은 이 세상에 속해 있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지금의 이집트는 지구상에 있는 한 나라일 뿐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중동지방에 있는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지리적인 위치도 같고 나라를 이루는 민족도 같지만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단절되었습니다.
요컨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교회의 예표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을 삼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된 모습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면 할례를 받아야 했고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혈통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해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지금 중동지방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같은 병폐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표지였습니다.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 제도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하나님께서 어느 만큼 싫어하시는지 알아서 이 세상 풍조와 철저하게 단절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할례도 받았고 율법도 지켰고 제사도 지냈으면서 정작 자기들은 가나안 원주민과 똑같이 살아갔습니다.
바알 우상을 섬겼고 가나안 원주민과 혼인도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려는 의지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 폐단이 우리한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매주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설교도 듣고,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봤을 때 우리한테서 예수님이 연상되어야 합니다.”라고 하면, 그 얘기가 우리를 향한 성경의 요구인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합니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못 산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을 한심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안 되는데 우상을 섬깁니다.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이방 민족이 쳐들어오면 그때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합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입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여호와를 전쟁의 신으로 얘기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바알 섬기고, 전쟁이 벌어지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배당에 모였을 적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 같은데 세상에서는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교회에서는 교회 식대로 처신하고 세상에서는 세상 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괜히 신앙 잣대를 세상에 가지고 나갔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다가 망한 것을 알면서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