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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71년, 이 선거에서는 헌법까지 고쳐가며 세번째 대선에 도전한 박정희 후보와 40대 기수론으로 참신한 바람을 몰고온 김대중 후보 사이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박정희 후보: 내가 이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들에게 나를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 주시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 드립니다.
김대중 후보: 이번에 박정희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갖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약95만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3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선거엔 어마어마한 자금이 투입됐다. 이 돈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영화 <강남 1070>(2014) 中-참모役: 대영산업에서 5천, 금마건설에서 3천, 형진일보에서 2천 이상입니다, 대통령役: 액수가 많이 부족하구먼, 대선이 코 앞인데 이래가지고 이길 수 있겠어?, 참모役: 요즘 경기가 어렵다고 다들 몸을 사리는 데요, 대통령役: 영동에 땅 좀 사봐, 참모役: 땅이요?, 대통령役: 은밀히 해야 돼, 청와대에서 땅 투기한다고 소문나면 자네하고 난 조용히 죽는 거야, --------------박정희 대통령의 승부수? 강남을 개발하라!---------------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의 주제는요 항상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죠, 바로 강남입니다. 1971년 대선 자금이 강남 땅 투기에서 나왔다고 문을 열어 봤어요.
오제연/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헌법까지 고쳐서 출마한 선거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만 하죠.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습니다. 역대급 선거자금이다 이런 평가까지 나오죠. 1971년 선거 때에 공화당 부총재였던 김종필, 그리고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차장보를 했던 강창성의 증언에 따르면 한 600~700억원 정도의 돈을 선거자금으로 썼다고 그래요. 그러면 1971년도에 정부예산이 약5200억원 정도가 됐어요. 그러니까 정부예산의 10%가 넘는 비용이 선거 때 선거자금으로 쓰인 것입니다.
박상영/작가: 진짜 돈을 거의 물쓰듯이 펑펑 썼어요.
이시원/배우: 그때 선거결과를 보면은 그 차이가 아슬아슬해요. 약 95만표,
오제연: 박빙의 승부였죠. 그래서 선거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마터면 우리가 정권을 도둑맞을뻔 했다. 우리가 이 선거를 위해서 쓴 돈이 얼마인데~표차가 이거 밖에 안나느냐~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선거 못하겠다. 이래 가지고 그 다음 해에 유신체제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최원정: 엄청난 선거자금이 강남 땅 투기로 조성됐다는 얘기인데~
박상영: 아까 저희가 강남 일부 최근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장면이 황석영 작가의 소설 <강남몽>에도 땅 투기를 정부가 주도해서 권장을 했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사실 저는 이게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가요?
전강수/대구가톨릭대 경제금융부동산학과 교수: 대부분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이 무얼 기초로 하고 있느냐 하면 故손정목 교수님이라고 이때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었어요. 누구보다도 그때 사정을 잘 알고 있지요. 이분이 당시 정부가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시켜가지고 토지투기를 했다 (손정목 교수의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3권>中-박정희 정부가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시켜 투기했다).
이시원: 굉장히 충격적인데요, 이런 부동산 투기 대놓고 할 수는 없었을 텐데~
전강수: 대놓고 노골적으로 한 경우인데요.
최원정&이시원: 은밀하게 안했나요?
전강수: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시켰잖아요. 서울시 공무원을 시키고 땅을 강남지역에 대거 매입하게 해요. 그 다음에 상공부와 상공부 유관기관, 직원들의 숙소 등을 합쳐서 단지를 이전하겠다고 발표를 해버립니다. 땅을 사놓고, 그러니까, 땅값이 매입가격보다 일년 사이에 세배로 뛰어올라요. 다 팔아서 20억원을 받쳤다 라는 내용이 손정목 교수님의 책에 나오죠.
이시원: 투기를 어떻게 보면 막아야 되고 모범을 보여야 되는 정부가 이것에 직접 가담을 했다는 것에 마치 청와대가 투기꾼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건 생선을 고양이한테 맡긴 거 아닌가요?
최원정: 이제 영화에서 청와대가 주목한 곳이 영동이란 말이죠. 근데 우리가 영동은 강원도에 있는 영동지역이 거기 아닌가 해서 헷갈리는 분들이 계신데, 여기가 지금 강남 이에요. 영동=강남
오제연: 맞습니다. 당시에는 강남을 영동이라고 많이 불렀는데요. 그 이유는 1960년대까지 한강이남지역에서 뭔가 철도도 지나고 도시로서의 어떤 모습을 갖춘 지역이 영등포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준점은 영등포가 되는 거구요. 강남 이라고 하는 곳은 기껏해야 영등포의 동쪽에 있는 지역 밖에 안되는 거죠. 그래서 강남을 영동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최원정: 영동이라는 이름도 지금의 강남에 많이 있잖아요. 영동고등학교, 영동세브란스병원, 영동대로~
오제연: 사실 강남지역이 그 당시에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강남이 81년도 대선을 전후로 해서 땅값이 평당 5100원 정도에서 1만6천원 정도로 3배 이상 뛴 거예요. 바로 그 비결이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덕분입니다. 이것이 이제 경부고속도로를 1970년에 개통할 때 경부고속도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그 땅을 정부가 정리하는 사업, 그것이 바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이라고 할 수 있구요.
전강수: 구획정리사업은 무질서하게 되어 있는 자연상태의 토지를 구획을 짓고 반듯반듯 하게 만들어요(토지구획정리사업-무질서하게 존재하는 토지를 묶어서 구획, 도로, 학교, 공원 등 기반시설을 설치해 토지의 효용을 높이는 것). 도로도 내고 공원부지도 만들고 학교부지도 만들고 이렇게 하는 건데 사업비가 들잖아요. 그 사업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토지를 떼어 놓습니다. 그건 어려운 말인데요. 체비지라고 그래요 (체비지(替費地)-도시개발사업을 시행하면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남겨두는 토지). 그것을 팔아서 비용을 조달합니다. 경부고속도로에 부지를 그냥 무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 거지요.
오제연: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땅값이 많이 올랐죠. 예를 들면은 소위 말죽거리라고 불리는 양재동쪽 땅값이 공사 전에는 평당 200원정도 했던 것이 3000원으로 뛰는 거예요. 200원이 3000원으로 15배 정도로 뛰는 거죠. 그런데 정부 입장에서는 당장 고속도로를 위한 땅을 무상으로 얻는 것도 하나의 효과지만 아~ 이게 개발을 하면 땅값이 이렇게 뛰는구나 라고 하는 것도 경험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학습효과죠. 이런 학습효과 속에서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영동 2지구에 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이 돼요. 그러니까 여기도 땅값이 엄청나게 뛸 것이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러면 이 기회를 선거자금을 마련하는 기회로써 활용할 수 있다라고도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상영: 어찌보면 청와대가 의도적으로 시세차익을 얻기 위해서 개발했다고도 볼 수 있는 건가요?
오제연: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이 본질이라고 보기는 어렵고요. 당시 서울의 상황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결국 강남개발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제였다 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전강수: 당시 서울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었고 인구가 집중하고 있었고 뭔가 대책이 나와야 되는 거였어요. 한국전쟁 당시에 150만명, 60년대 후반에 300만명, 한 20년 정도도 안되었는데 한 200만명이 늘었고요. 계속 이런 속도로 팽창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어떤 형태로던지 학장을 할 필요는 있었고 그게 어디냐의 문제였죠.
오제연: 결국 정부도 서울의 영역을 대폭 확장시킵니다. 이게 1963년 서울의 영역이구요. 주로 한강 이북에 집중되어 있고 그러다가 1963년도에 서울의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건데 여기가 이제 오늘날의 노원-상계-중계 지역이구요. 그 다음에 강서쪽 이에요. 거기가 강서지역, 그 다음에 영등포 밑에 지역,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강남이 63년도에 정식으로 서울에 편입이 됩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강북에 집중되어 있는 이 370만 인구들을 어디론가 분산을 시켜야 되는 것이고 당연히 강남이 하나의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는 겁니다.
이시원: 그렇게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다 보니까 당연히 과밀화 될 수 밖에 없고 어찌보면은 이건 시민의 필요를 충족하는 시대적 과제인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을 분산도 시키고 또 이렇게 바로 아래 허허벌판에 넓은 땅이 있으니까 여기를 한번 개발해 보자는 생각을 누가나 할 수 있을 것 같애요.
박상영: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기는데 한강 이북, 원래는 기존의 도심지역 옆에도 사실은 여유 땅들이 많이 있잖아요.
최원정: (서울시 지도를 보면서) 여기 지금 엄청 여유가 있어요.
박상영: 그냥 강북을 계속 넓히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을 텐데~ 왜 강남에 개발을 했어야 했을까요?
-------------------(동영상: 헬기에서) 시청 도시개발과장 문철호: 이 일대가 전부 영동지역입니다. 여기가 강북이랑도 가깝고 입지조건은 고양이나 분당보다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정규: 금계포란형이군, 문철호: 어제 보신 연신내 쪽은 어떻습니까? 김정규: 북의 도발도 생각해야지, 아무래도 땅값 올리려면 포 사정권 밖이 낫지 않겠어? 이쪽으로 결정하지 문과장이 설계 한번 근사하게 해봐---------------------------
최원정: 북에 도발로부터 안전한 곳이다. 그래서 선정된 곳이다. 그게 바로 영동지구, 강남이었단 얘기죠.
전강수: 박 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인제 휴전선에서 40킬로미터 밖에 안떨어져 있는데 여기에다 자꾸 인구가 밀집되도록 해서는 곤란하겠다 조금 멀리 가자 멀리 가자 라는 이런 안보의 측면에서 지역을 휴전선에서 먼 쪽으로 결정하자는 요인도 작용했다고 그래요.
최원정: 휴전선이 바로 코 앞이네요.
이시원: 전쟁의 트라우마도 한 몫을 했을 것 같애요. 6.25때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피난도 못가고 또 90일 동안 북한군에 점령되어 있었잖아요. 그런 트라우마 때문에 한강 아래로 내려가자 좀 더 멀어지자 강남 쪽으로 도시를 옮겨보자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애요.
오제연; 그러니까 강남개발의 시작은 사실상 1966년 제3한강교의 건설로 시작되었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3한강교란 다리가 강남과 강북을 잇게 되면서 비로소 강남이 인구도 분산하고 도시의 기능을 흡수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얻게 되는 거죠. 이 제3한강교가 오늘날의 한남대교 이거든요. 다리를 잘 보면은 교각 사이의 간격이 좁습니다. 만약에 전시에 다리가 파괴되었을때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교각 사이의 간격을 촘촘하게 했다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원정: 제3한강교 하면 떠오르는 거 있잖아요. 혜은이 노래-제3한강교, 저희가 새로 오신 교수님에게 신고식에 노래를 한 곡 시키는데요. 신교수님~
전강수: 강물은 흘러갑니다~ 여기까지~
오제연: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흘러만 갑니다.
최원정: 가사가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천국으로 가는 계단 같은 느낌, 칭송하는 노래인 거 같애요.
오제연: 제3한강교가 이렇게 놓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은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하고 연계가 되는 것이라 제3한강교를 건너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게 된 거죠. 이 제3한강교에 얽힌 재밋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66년도에 처음 이것이 설계되고 만들어 질 때 폭이 20미터 정도됐다고 그래요. 공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갑자기 정부에서 이 공사를 중지시키고 이 폭을 본래 4차선 도로에서 6차선 도로로 대폭 확장하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이시원: 탱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더 넓게 만들려고?
오제연: 이때 북한에서도 평양 대동강에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폭이 25미터 정도였다고 해요. 우리가 북한 보다 작은 다리를 만들 수 없다. 1미터라도 더 넓게~
최원정: 26미터 갑시다.
오제연: 이러면 설계도면도 바꾸어야 돼죠. 기초공사도 다시 해야 돼죠. 실무자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황당하고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그 시절에는 시키면 해야죠. 하라면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3한강교는 실제로 26미터의 폭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최원정: 아무튼 해프닝 끝에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가 놓여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내려가나요?
박상영: 저 같으면 지금 강남 생각하면은 뒤도 안돌아보고 바로 달려갈 것 같애요.
이시원: 빨리 집 사야지~
오제연: 오늘날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어른들 말씀 들어 보면은 그때 강남에 땅을 샀어야 하는데, 아쉬워 하시고 후회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이들 계세요.
최원정: 천 번은 들은 것 같애요. 그때 강남에 땅을 샀어야 하는데~
오제연” 근데 강남으로 안갔다말입니다.
최원정: 왜 가지 못했을까요? 그 비밀을 이광용 아나운서가 풀어줍니다.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우~아~, 이광용/아나운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찾아온 신비의 강남,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행을 맡은 이광용입니다. 지금의 강남은 잊어라. 그때 그시절 강남을 낱낱이 속속들이 파헤쳐 볼텐데요. 오늘의 주제는 강남 1960이 되겠습니다. 제가 호명하는 지역에서 1960년대까지 어떤 농사를 지었는지 여러분께서 맞히시면 되겠습니다. 민족의 대명절 추석도 앞두고 있고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선물을 푸짐하게 준비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당시에 각 지역의 특산품이에요. 첫번째 퀴즈, 압구정~?
최원정: (손을 들고) 정답~ 압구정하면 우리 때는 오렌지족이 되게 유행이었어요 오렌지 생산지~
이광용: 상식을 좀 참작하세요, MC님!
오제연: 일단 압구정의 뜻을 좀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데~ 이게 압자가 가까이 지낸다는 뜻이거든요. 구는 갈매기 구요, 그러니까 갈매기를 가까이 하는 정자라는 게 압구정의 의미고~
박상영: 특산품=갈매기?
오제연: 이게 조선 세조대부터 성종대까지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했던 한명회가 자기의 호를 따가지고 이 지역에 정자를 지었다고 해서 압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된 겁니다.
이광용: 제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압구정동 H백화점이 있는 자리가 다 이 과일밭이었다고 합니다.
박상영: 과일, 웬지 이유없이 배 같애~
이광용: 정답입니다! 정답을 맞힌 박상영씨께 배(상자)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이시원: 추석이고 명절 선물로 써도 되겠어요.
최원정: 근데 저기 제작진이 진짜 배를 넣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박상영: (상자를 열어보다),
최원정; 오! 진짜 배네요.
이광용: 다음 퀴즈! 이번에 가 볼 곳은 잠원동입니다.
박상영: 예전에 서울대학교에 잠사학과 있었잖아요. 혹시 비단이나 이런 거 하던 곳 아니었어요?
이광용: 땡!
이시원: 잠 하니까 번데기!
이광용: 땡!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뽕밭이었던 잠원동은 무가 자라기 좋은 모래토질이어서 이곳에 무를 잔뜩 심었습니다. 무인데 그 무가 이시원씨 입은 옷색깔 처럼 노~래~ 아주 노~래~
이시원: 단무지?
이광용: 딩동댕~정답, 단무지, 정답입니다. 이 귀한 단무지를 상품으로 이시원씨에게 드립니다.
이시원: (포장을 뜯으면서) 진짜 단무지인가? 진짜 노란색 단무지~
이광용: 다음 퀴즈~ 도곡동입니다.
최원정: 정답! 도곡동이 내봉산 앞에 있어요. 산 아래니까 장작 같은 것으로 나무 공급을 했던 곳이 아닐까?
이광용; 진짜 MC는 아무나 하는게 아닌게! 말하는게 상당 설득력이 있어요. 그런데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도곡동의 도로 시작합니다.
이시원: 도토리!
이광용: 도토리? 땡!
이시원: 도라지!
이광용: 딩댕동~정답입니다. 축하합니다. 단무지로 만족이 안된건지~ 상품(상자) 입니다.
이시원: 제가 이번 추석에 효녀 한번 되어 볼려고 열심히 맞추었어요. 진짜 도라지예요. 이거 하나 먹어야겠어요.
최원정: 먹어봐요, 목에 좋다니까~
박상영: 맛이 어때요?
이시원: 도곡동의 맛입니다.
이광용: 여러분, 지금의 강남을 생각하시면 전혀 상상이 안되시겠지만 강남 일대는 강 건너 당시 서울, 그러니까 강북 사람들의 채소 공급지였다고 합니다. 강남에서 재배한 채소가 품질이 최상급이었다는 거죠.
이시원; 땅이 좋아서 그랬나요? 아니면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었나요?
이광용: 특별한 비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똥!!
이시원: 진짜요?
이광용: 진짜입니다. 강남의 농사꾼들은 채소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1박2일로 강북원정까지 떠났다고 합니다. 지게를 지고 강남까지 돌아오는 똥지게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인분을 써서 좋은 품질의 채소와 과일을 강남에서 재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시원: 저 이걸 씹지도 않고 먹었는데요~
이광용: 그런데 그랬던 강남이 1966년 개발바람이 불면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두개의 사진비교), 이 두 사진 사이에는 50년의 시간이 있습니다. 2011년 서울시에서 낸 통계에 따르면 강남 서초 송파 소위 강남 3구의 땅값 총액이 365조원입니다. 면적은 전국의 0.1% 밖에 안되거든요. 이 돈이면 당시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를 다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최원정: 야, 똥밭이 금밭이 됐네요.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박상영: 격세지감을 넘어서 상전벽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새 세상이 열렸으니까 천지개벽~
최원정: 아니~아니~ 아니야 후회막심~ 만시지탄~
이광용: 저도 한마디 해도 될까요? 타임머신~지금까지 퀴즈 탐험~ 신비의 강남에~이광용이었습니다----------------------------
이시원: 지금의 강남을 떠올리면, 정말 상상이 안돼요. 번화한 강남이 예전에 깡촌이었다니~
오제연: 제 개인적인 얘기를 말씀 드리면 저희 부모님이 강남이 막 개발될 즈음에 결혼을 하셨어요. 그래서 신혼집을 어디에다 구할까 해가지고 강남에 한번 가보셨다고 합니다. 강남을 쭉 둘러보신 다음에 아~ 여기서는 신혼생활을 할 수가 없다 라고 생각을 하시고 강북으로 올라오셨다고 그래요. 그때 판단하신 이유가 일단 거기 가면 신혼생활을 강남에서 하게 되면 거기서 저 같은 아기를 낳고 계속 살아가야 될텐데 병원이 없다는 거예요. 산부인과도 없고 소아과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응급상황이 생기면 강북으로 강을 건너가야 되는데 이게 엄두가 안나고 불안하셔서 신혼살림을 결국은 강북에서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최원정: 당시 했던 말이 강남에서 남편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 라는 얘기를 했었다 라고 합니다. 거기 강남길이 진창 길이고 하니까~ 완전 비포장 도로 였으니까~
오제연: 도로포장 정도가 아니고요 사실은 제3한강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강남지역에 전기도 안들어왔고 전화도 없었습니다. 제3한강교 공사과정에서 강의 남쪽과 북쪽에 당시 공사를 시행하고 있었던 현대건설에서 현장사무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강남쪽에 현장사무소를 어쨌든 운영하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10킬로와트 발전기를 들여와서 전기를 돌린 것이 강남의 최초의 전기공급이었다고 합니다. 현장사무소에서 또 전화가 필요하니까 전화를 가설해서 이것도 강남의 최초의 전화가설이었다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박상영: 흙 바닥에 전기 없고 전화도 안되고 거의 오지나 다름없잖아요. 사람이 이주를 안하는게 너무나 자연스러웠거든요.
전강수: 그러니까 60년대말에 강남개발이 시작됐지만 70년대 중반까지는 사람들이 안가요. 그래서 강남개발촉진책을 실시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책이 1973년에 강남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을 합니다. 하여간 부동산과 관련된 세금은 다 면제해 주는 거예요. 지금 요새하고 있는 것을 보면 투기를 잡을려고 부동산 관련세금을 가볍게 하잖아요. 그거와 정반대의 정책을 펼치고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이주해 오도록 유인을 했죠.
박상영: 그러면 예를 들어서 취득세나 등록세나 부동산세, 재산세 이런 것들을 다 안냈다구요?
전강수: 다 안냈어요! 완전 면제,
박상영: 그러면 이렇게 따지면 거의 정부가 대놓고 강남에서 투기를 하라고 권장한 거나 마찬가지네요.
전강수: 돈 내고 땅을 사라는 거지요. 집하고 땅을 사고 하라는 거예요.
오제연: 그리고 더 그것을 가속화시키기 위해서 강남과 강북 사이에 다리를 건설해야 되는데 먼저 71년도에 놓인 다리가 잠실대교, 그 다음에 그 옆으로 73년도에는 영동대교가 놓입니다. 그 다음에 76년도가 되면은 저 강동 끝 쪽으로 천호대교가 놓여집니다. 반포 쪽으로는 잠수교가 놓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9년도가 되면은 성수대교가 압구정 쪽으로 해서 놓이게 되는 거죠.
이시원: 강남 쪽으로만 다리 5개가 생겼네요.
최원정: 보통 이런 건 사람들이 몰려야지 다리를 놓는건데~ 여기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격이죠.
박상영; 당장 내려가라는 거죠.
전강수: 70년도 중반경부터 이렇게 정부정책이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그때부터 가기시작하는데요 하다하다 안되니까 전방위적인 대책이 나옵니다. 이제 강북을 개발을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펼쳐요. 그래서 농지를 택지전환시키는 것도 안된다. 어떤 사실은 예를 들면 유흥장 이라든지 백화점이라든지 이런 거 새로 세우는 것 안된다 이렇게 해서 강북개발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시원; 신도시개발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이런 혜택을 주는 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너무 강남에만 올인하는 거 아닌가요.
전강수: 이점이 중요한데요. 요즘 강북이라고 그러면 낙후된 지역이다. 이런 생각이 있는데 그게 강남이 빨리 발전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인식이 아니고 강북개발을 억제하는 정부의 인위적인 정책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제연: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강북에 있는 사람들이 강남으로 갔을까요 안갔을까요?
최원정: 그렇게 까지 해주는데 가주는게 예의아닌가요?
일동: 제발 가주어야 될 것 같은데~
오제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북에서 강남으로 가는 속도는 굉장히 더뎠습니다. 그래서 결국 정부는 70년대 후반 이후가 되면은 강남지역으로 많은 공공시설이나 주요기관들을 이전시키는 그런 정책들을 펴게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법원, 대법원 바로 옆에 검찰청, 그리고 강북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여러 버스터미널들을 한데 모아서 대규모의 버스 터미널을 만들어가지고 강남으로 보냅니다.
최원정: 교수님의 손이 지금 강남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박상영: 한번 움직일 때 마다 수천억원이 막 팍팍 써지고 있는데요.
오제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결국 사람들이 강남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전정책이 펼쳐지게 돼요.
일동: 학교?
오제연: 그렇죠, 학교가 정답입니다. 강북에 있던 학교 그것도 보통학교가 아니라 당대의 명문이라고 알려져 있던 학교, 대표적으로 경기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들, 한 15개 학교라고 하는데 그 학교들을 한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가니까 당연히 사람들은 학교를 따라서 강남으로 강남으로 몰려들게 되는 거죠.
박상영; 아니, 엄청 오래된 명문고등학교들을 쏙쏙 빼가는데 분명 반발이 있었을 것 같애요.
오제연: 반발이 컸죠. 경기고등학교 같은 경우는 거기가 원래 화동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정든 화동 언덕을 떠날 수가 없다. 그래 가지고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경기고등학교 동문들이 쟁쟁하거든요. 그 쟁쟁한 고등학교 동문들이 나서 가지고 이전을 반대하고 막을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고등학교 같은 경우는 당시가 유신시절이라 사실은 함부로 데모할 수 없는데 그 엄혹한 서슬퍼런 시절에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이전반대 시위를 벌였을 정도로 강하게 반발했죠.
최원정: 경기고등학교는 1900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거고, 휘문고등학교도 1906년 이때 세워진 학교인데 어떻게 그 자리를 떠나서 이전할 수 있었을까~
오제연: 정부에서도 결국 회유책을 씁니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교측도 뭔가 딜을 해서 이익을 얻을려고 했던 부분인데 당시 강북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들의 교사를 보면 땅은 좁고 건물들은 낡고 쇠락한 현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이전을 계기로 훨씬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시설도 최신식인 현대적인 시설들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정부도 그런 요구들을 들어주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어떻게 보면 강남 이전이 학교 입장에서도 학교가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전강수: 그런데 이제 이전을 할려면 학교로써 경비가 필요하잖아요. 당시 서울시가 개입해 가지고이전 부지를 기업체에 매각하고 이런 걸 알선해 주고 그래서 성사시킨 거죠.
오제연: 휘문고등학교 그 땅을 현대에서 사가지고 거기에 사옥을 짓게 돼죠.
이시원: 결국은 강남으로 이전 시키는 키포인트가 한국의 교육열이었네요. 어떻게 보면 8학군 학교들이 여기 강남에 자리잡으면서 교육특구가 생성이 되었구요. 지금까지도 계속 되구요.
최원정: 아직도 보면 아이 교육 때문에 강남간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교육열은 우리가 대단 하잫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여러가지 개발촉진책 때문에 70년대말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이 되기 시작하는데요.그 당시 서울시장을 하던 분이 아이디어를 내요. 지구를 지정해서 아파트 지구지정을 해버리면 거기는 아파트 밖에 못짓는다 이렇게 된거예요 (아파트지구제도-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야 할 곳을 아파트 지구로 지정, 그 안에서는 아파트 외에는 짓지 못함). 그러면 땅 주인들이 땅을 갖고 있어봐야 사용을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이 건설업자한테 매각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이제 부지를 마련하고 대단지를 짓고 이런 식으로 아파트를 건설해 갔죠.
박상영: 어떻게 보면 건설회사에 몰아주기라고 볼 수 있네요.
전강수: 몰아 주기죠.
오제연: 사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파트 라고 하면 서민 아파트가 먼저 연상이 되고 사실 그 대표적인 것이 1970년에 붕괴사고가 일어났던 와우 아파트 이거든요 (와우아파트 붕괴참사(1970.4.8)-서울 마포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가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건). 그런데 아파트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70년대가 되면서 개발의 수단으로 아파트들을 활용하기 시작하고 그 대표적인 첫번째 사례가 1971년도에 여의도개발을 위해서 정말 제대로 된 아파트를 만들겠다 라는 일념으로 이름도 시범아파트란 이름의 고층아파트를 만들게 됩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1971년에 분양된 대한민국 최초의 단지형 고층아파트).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그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수단으로서의 아파트가 활용되기 시작하고요.그것이 가장 아주 잘 구현된 지역이 바로 강남이었다 라고 볼 수 있고 거기서 이제 아파트 지구라고 하는 정책까지 들어와서 아파트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아파트 업자들이 여러가지로 혜택을 입을 수 밖에 없는 정책들이 시행이 되는 거죠.
이시원: 아파트 하면 또 약간 새것, 그리고 그 당시에는 최신의 것, 이런 느낌도 있었어요.
오제연: 그러니까 이게 지금 시범아파트 이후로 아파트는 더 이상 시민아파트의 이미지가 아니라 온갖 중산층 이상들이 가서 살아가는 고급생활 주거공간 이런 이미지를 획득하게 됩니다. 또 그런 것들이 강남에 대규모로 들어서게 되면서 사람들은 또 그런 삶을 누리기 위해서 그런 삶들을 추구하면서 강남으로 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때 강남의 아파트에 가면은 라지에타 라고 하는 스팀으로 난방을 하는 이런 것도 있고~그리고 그때만 해도 사실 겨울에 춥고 난방도 안되는 시절에 겨울에 항상 따뜻한 난방이 되면서 겨울에도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닌다. 그리고 온수로 샤워를 한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로망이나 욕구, 동경의 대상이 되면서 더욱 더 아파트 그리고 아파트가 밀집된 강남에 이미지를 더 올려주는 효과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시원: 어떻게 보면은 도로도 막 뚫리고 여러가지 주요 시설도 옮기고 학교도 옮기고 또 고급 아파트 정책에 어떻게 보면 그 유인책이 성공을 한 거 같애요. 또 원래의 목적이었던 안보문제해결 그리고 인구분산 문제해결 거기에서 목적을 달성한 최초의 신도시 개발이 강남을 통해서 성공적인 도시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겠네요.
전강수: 그렇죠, 엄청난 대규모의 신도시개발이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외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보는 측면이 있는데요. 보통은 도시개발을 하면 땅값 상승문제나 이런 데에 대한 대책을 만들어 놓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 박정희 정부는 그런 대책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밀어부치기식으로 했기때문에 그 과정에서 지가가 폭등하고 토지투기에 가담한 사람들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고 그래서 그때부터 70년대부터 한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 역시 부동산이 최고야, 부동산 불패신화가 형성이 됐고요. 우리 한국이 예를 들면 아파트 공화국이다 무슨 부동산 공화국이다 라는 이런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계기도 이때부터다 하는 거구요. 그뿐만 아니고 인제 여러가지 개발과정에서 비리가 개입이 도고 부패문제가 제기가 되고 그렇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한강연안의 공유수면매립사업이었다.
--------------------이광용: 여러분, 흑석동, 반포, 서빙고동, 압구정동, 구의동, 잠실 이동네 공통점이 무언지 아시겠습니까?
박상영: 정답, 부자 동네~
이광용: 빙고! 맞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70년대 까지만 해도 이 동네들은 비가 오면 침수가 잘 되는 상습침수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유수면매립이란 걸 합니다.
일동: 공유수면매립, 뭐요??
이광용: 공유수면이 어려우십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공유수면은 물이 차 있는 땅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 국가소유예요. 그리고 이 물의 일부를 막거나 하천의 제방을 쌓아서 흙으로 메우는 작업이 바로 제가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공유수면매립입니다. 반포~ 압구정~ 잠실~ 지금 서울에서 가장 노른자위, 가장 비싼 땅인 이 동네들입니다. 공유수면 매립을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런데 공유수면 매립사업이 엄청난 사업입니다. 공유매립사업을 따내면 제방과 도로용지를 제외한 나머지 땅을 건설사가 통채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럼 거기다가 뭐할 수 있겠습니까?
박상영: 아파트 짓겠죠!
이광용: 그럼요!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건설사나 정부투자기관이 아파트를 짓거나 하고 싶은 걸 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그야말로 노른자위 땅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땅 집고 헤엄치면서 돈 방석에 앉는~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던 것입니다.
이시원; 그 돈방석 빨리 앉아야죠. 경쟁이 무지 치열했겠는데요?
이광용; 엄청나게 치열한게 맞습니다. 그래서 공유수면 매립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국내 굴지의 건설사는 물론이고요. 공기업인 수자원개발공사나 또 종교단체, 전직고급장성출신까지 이 사업을 따내려고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습니다.
박상영: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역사에서는 요런 치열한 경쟁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뒷돈이나 비리 같은게 항상 따라오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이광용: 당연히,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유수면 매립사업은 비리의 복마전으로 불렸습니다. 손종목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이 공유수면 매립사업권을 미끼로 엄청난 정치자금을 거두어들였다고 합니다. 때는 1969년 어느날, 김학렬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국내 굴지의 다섯 건설사 대표에게 약속한 것이 바로 잠실공유수면 매립공사였다고 합니다. 이 분들이 바라보고 있는 저 땅이 바로 잠실~, 그 결과 굴지의 다섯 개 건설사가 공동출자한 잠실개발이라는 회사가 1971년 7월 13일에 설립돼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전의 잠실은 여의도 처럼 하나의 섬이었습니다. 그랬던 잠실, 북쪽으로 물길을 크게 돌리고, 남쪽 물길을 메워서 지금 남아있는 흔적이 바로~ 무슨 호수?~
일동: 석촌호수!
이광용: 정부와 건설사의 은밀한 검은 거래는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박상영: 잠실이 섬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그 물길을 다 메워서 그냥 그걸 섬이 아니게 만들어 버린 거잖아요.
전강수: 이게 이제 공유수면 매립을 통해서 전부 메워지고 아주 넓은 면적의 집단 택지가 조성이 되는 거예요. 그럼 거기에 바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고요. 반포, 압구정동, 잠실 아파트, 우리나라 강남의 대단위 아파트들은 다 이 공유수면 매립 후에 지어진 것입니다. 이 공유수면 매립사업 인가를 받으면 그야말로 그 회사는 떼돈을 버는 거예요.
이시원: 건설사 입장에서는 공유수면 매립권을 따서 이득을 취하고 또 정치권은 그 이득을 나누어갖고 건설사나 그 당시 정부가 서로 윈-윈 전략, 기브-앤-테이크네요.
박상영: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전강수: 그런데 국민경제는 망하고~
최원정: 정부와 건설사와 투기 세력들의 욕망이 지금의 강남특구를 만든 건데~ 당시 70년, 80년대에 강남의 세태를 표현해 주는 단어들을 저희가 모아 봤습니다. 이게 지금 실제로 당시 신문에 나왔던 신조어들이거든요.
--------------빨간바지-고자아파트-짠돌이-------
--------------내시-복부인-복덕방-프리미엄시대-말죽거리신화-
오제연: 이 말죽거리는 강남개발과정에서 가장 먼저 뜨겁게 달아올랐던 투기의 현장이었고, 그때 당시에 복덕방이 얼마나 많았느냐 하면 도곡동 쪽에는 400개가 있었다고, 투기에 의한 시세차익, 이런 것을 노리는 거죠(1978년 영동지구 복덕방 약1450개, 도곡동에선 약400개), 그래서 그때 서울에 처음 강남이 편입될 때, 1963년이죠. 신사동의 땅값이 평당 400원 그때 짜장면 한 그릇이 40원이었다고 하는데~ 땅값이 짜장면 100그릇 밖에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15년이 지나서 1979년 강남개발이 한참 무르익을 때가 되면은 그게 40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1000배로 오른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거기서 어떻게 보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거죠.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나중에 말죽거리신화라고 부르는 거죠.
이시원: 말죽거리 상승율이 참 당혹하네요,
박상영: 그리고 판돌이는 도대체 뭔가요? 꿈돌이도 아니고~
오제연: 복덕방에서 판촉사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바로 판돌이에요. 기업형으로 하는 데는 한 30~40명의 판돌이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1982년에 통계를 보면은 전체적으로 2만명 정도의 판돌이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판돌이들은 일단 뭘 잘해야지요?
이시원: 영업!
오제연: 그렇죠, 일단 화술이 능하고요. 외모가 출중해야 되고 또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그리고 금으로 번쩍번쩍 하는 시계라든지 명품으로 몸을 두르고 그렇게 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유인했다.
이시원: 그러다 보니까 여기 또 나오네요. 복부인, 만화에서 본 것 같애요. 복부인하면 웬지 이미지도 안좋고 사치스럽고 졸부의 이미지도 그래서 생긴 것 같거든요.
박상영: 복부인의 대표적인 상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기 있는 빨간바지~ 어떤 사람들이 이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히 선망하면서도 멸시하는 2중적인 감정을 가지면서 빨간바지를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거죠.
이시원: 이런 문화 자체가 현대 사회의 부자를 존경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는 것 같애요.
최원정: 천박한 천민 자본주의 모습이죠.
이시원; 뭔가 가치를 창출해서 부를 이루는게 아니라 돈이 있어야만 돈을 버는 그런 느낌을 지금 복부인과 빨간 바지에서 느끼거든요.
전강수: 돈이 있어서 돈을 버는 건 그래도 괜찮은데요, 돈이 아니고 정보죠, 예를 들면 권력자나 권력자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이 개발정보를 먼저 캐치하고 빨간 바지 입고가서 그 주변에서 참외밭, 오이밭, 배밭 이런 걸 사들이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건 돈이 돈을 버는 정도보다도 훨씬 악성이죠.
이시원: 내부자 거래 그런 거네요.
최원정: 그런데 씁쓸한 것은 이미 그런 사람들은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만 계속 땅을 모우고 부자가 되고 구조가 침 씁쓸하네요.
이시원: 그러구 이거 입에 담을 수가 없는데~ 설마?
최원정: (내시 아파트, 고자 아파트) 이것 말이죠?
오제연: 이게 당시 다 신문에 실린 용어들이거든요. 이 말을 이해할려면 1977년도에 만들어진 주택청약제도를 이해해야 돼요. 주택청약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청약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꿈은 다 내집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내집 마련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우선순위를 얻어야 되는데 근데 정부가 인구억제를 명분으로 해 가지고 불임시술자에게 청약의 우선순위를 주었어요.
박상영: 정관수술을 한 사람들에게~
오제연: 아무래도 남성들이 세대주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일단 불임수술을 많이 받게 되는 거죠. 이 불임수술건수가 갑자기 두배 이상으로 폭증했다는 기록이 있고~
최원정: 약간 조롱하는 표현이네요(내시아파트, 고자아파트)
오제연: 그렇게 하다보니까 77년도에 당시 강남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분양하게 됐는데 정관수술로 대표되는 불임수술로 청약을 받으신 분들이 많이 나온거예요. 그러니까 세간에서 그 아파트 단지를 내시 아파트, 고자 아파트, 심지어는 씨없는 수박촌 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지요.
최원정: 프리미엄이 요즘 많이 붙잖아요. 이것도 이때 생긴 단어네요.
전강수: 그러니까 원하는 사람들이 다 아파트 분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분양을 받으면 그 순간 값이 확 뛰게 되어 있어요. 그때 차액을 프리미엄이라고 부르는데요. 당시 1977년에 공무원 월급이 6만원 이었는데 아파트 분양권 한장 프리미엄 150만원을 넘었다고 하니까 엄청난 금액인 거죠. 그러니까 누구든 가서 분양만 받으면 갑자기 이런 큰 목돈이 생기니까 아파트 분양제도는 시기에 따라서는 많이 변해 왔지만 어떤 때는 선착순으로 그냥 줄서기 했어요. 그러니까 분양 받을려고 그 전날부터 가서 줄서고 거기서 밤을 새고 이런 일들이 이러난 적도 있어요.
최원정: 오늘날 까지도 최고의 난제라고 하는 부동산 문제, 많이들 걱정을 하고 있고 고민들하고 있는데 그것의 어떤 근원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애요. 약간 충격적인 사실들을 많이 알았거든요.
이시원: 진짜 강남 불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동산 재테크는 정말 너무나 매력적인 재테크로 자리를 잡은 거 같애요. 얼마나 그게 심하면 저희 나이 때까지 영끌이라고 해서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아파트를 산다는 이런 말까지 있거든요. 근데 이런 문화가 어떻게 보면 최초의 신도시개발이었던 강남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여러가지 정책들이 앞으로 계속 나올텐데~ 많은 비리와 부정적인 면들이 사라져 있는 깨끗한 정책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전강수: 우리 한국 사람들이 너무 투기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주식을 살 때도 이게 일종의 국민적 특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국민적 특성을 만들어낸 계기가 강남개발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십시오. 한나라가 생산을 안하고 땀 흘려서 소득을 얻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불로소득을 얻을려고 하는 사람이 국민들 가운데 다수가 되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그게 정해진 운명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부동산 문제가 이 정부에 들어와서 다시 심각해졌는데 우리가 좀 각성을 하고 정부도 제대로 정책을 마련을 하고 어떤 국민적 공감대가 있어야 우리 한국의 미래가 그래도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선망의 땅이자 욕망의 땅이라고 불리는 강남의 민낯을 마주한 시간이었습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면 이 강남이라는 도시도 건강하고 품위있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우리가 머리를 맞대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 함께 해주신 전강수 교수님 감사 드리고요. 역사저널 그날 오늘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81회에서 정리).
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씨가 헌법까지 고쳐가며 도전한 세번째 대선이었다. 상대는 40대 기수론으로 참신한 바람을 몰고온 김대중 후보였다. 박정희 후보는 600~700억원 정도의 돈을 선거자금으로 썼다고 하는데 이는 1971년도 정부예산 약5200억원의 10%가 넘는 비용이었다. 표차이는 약95만표 치열한 접전이었다. 이 선거자금이 강남개발에서 나왔다고 한다.
② 강남땅 투기를 정부가 주도해서 권장을 했다는 대목이 황석영 작가의 소설 <강남몽>에 나오고, 이는 故손정목 교수를 당시 정부가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시켜가지고 토지투기를 했다. 손정목 교수의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3권>에, 방법은 서울시 공무원을 시키고 땅을 강남지역에 대거 매입하게 하고, 땅값이 매입가격보다 일년 사이에 세배로 뛰어올랐을 때 다 팔아서 20억원을 받쳤다 라는 내용이 손교수의 책에 나온다고, 당시는 강남을 영동이라고 불렀다고, 1960년대까지 한강이남지역에서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춘 지역이 영등포 밖에 없었다. 기준점은 영등포가 되는데 강남은 영등포의 동쪽에 있는 지역이었으므로 강남을 영동이라고 불렀다고, 지금도 강남에 영동이라는 이름이, 영동고등학교, 영동세브란스병원, 영동대로 등,
③ 한국전쟁 당시에 서울시 인구는 150만명, 60년대 후반에 350만명, 20년도 안되었는데 200만명이 급속도로 늘었고요. 이런 속도로 인구가 서울로 집중하고 계속 팽창하니까 어떤 형태로던지 학장을 할 필요는 있었고 그게 어디냐의 문제였죠. 당시 서울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뭔가 대책이 나와야 되었는데 그래서 강남개발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제였다.
④ 정부도 서울의 영역을 대폭 확장시킵니다. 주로 한강 이북에 집중되어 있고 그러다가 1963년도에 서울의 영역을 확장시키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건데 오늘날의 노원-상계-중계 지역편입에다, 그 다음에 강서지역, 그 다음에 영등포 지역, 오늘날의 강남이 63년도에 정식으로 서울에 편입이 된다. 중요한 것은 강북에 집중되어 있는 이 370만 인구들을 어디론가 분산을 시켜야 되는 것이고 당연히 강남이 하나의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박 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강북은 휴전선에서 40킬로미터 밖에 안떨어져 있는데 여기에다 자꾸 인구가 밀집되도록 해서는 곤란하겠다. 안보 측면에서 지역을 휴전선에서 먼 쪽으로 결정하자는 요인도 작용했다고, 6.25때 한강다리가 폭파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피난도 못가고 한강 아래로 내려가자 강남 쪽으로 도시를 옮겨보자.
⑤ 강남개발의 시작은 1966년 제3한강교의 건설로 시작,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강남과 강북을 잇게 되면서 강북의 인구도 분산하고 도시의 기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제3한강교가 놓일 수 있었던 것은 경부고속도로하고 연계가 되어 제3한강교를 건너서 바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다. 이 제3한강교에 얽힌 재밋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1966년도에 처음 이것이 설계되고 만들어 질 때 폭이 20미터 정도됐다고 그래요. 공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갑자기 정부에서 이 공사를 중지시키고 이 폭을 본래 4차선 도로에서 6차선 도로로 대폭 확장하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이때 북한에서도 평양 대동강에 다리를 그 폭이 25미터 정도였다고, 우리가 북한 보다 작은 다리를 만들 수 없다. 1미터라도 더 넓게~ 그래서 기초공사도 다시 해야 하고 그 시절에는 시키면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제3한강교는 실제로 26미터의 폭으로 만들어졌다.
⑥ 당시 강남은 서울, 그러니까 강북 사람들의 채소 공급지였다고, 강남에서 재배한 채소가 품질이 최상급이었다고 비결은. 바로 똥 인분을 사용해 채소농사를 지었다고, 강남의 농사꾼들은 채소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1박2일로 강북원정까지 가서 지게를 지고 강남까지 돌아오는 똥지게꾼이 있을 정도였다고 인분을 써서 좋은 품질의 채소와 과일을 강남에서 재배할 수 있었다. 그랬던 강남이 1966년 개발바람이 불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50년 후에 2011년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강남 서초 송파 소위 강남 3구의 땅값 총액이 365조원이었다. 면적은 전국의 0.1% 밖에 안되는데 당시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를 다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똥밭이 금밭이 됐으니 격세지감을 느꼈고 그걸 넘어서 상전벽해라고 볼 수 있겠고 새 세상이 열렸으니까 천지개벽이 되었다고, 얘기를 하고 50년전에 강남에 땅 못사논 게 후회막심하다고.
⑦ 사실 제3한강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강남지역에 전기도 안들어왔고 전화도 없었다. 제3한강교 공사를 시행하고 있었던 현대건설에서 현장사무소를 운영하기 위해서 전기가 필요해서 10킬로와트 발전기를 돌린 게 강남 최초의 전기공급이었고 전화를 가설한게 강남 최초의 전화가설이었다. 전기와 전화도 없는 거의 오지에 사람들이 이주를 안하는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60년대말에 강남개발이 시작됐지만 70년대 중반까지는 사람들이 안갔다. 그래서 정부는 강남개발 촉진책을 실시한다. 그 대표적인 대책이 1973년에 강남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을 해서 부동산과 관련된 세금을 다 면제해 주었다.
⑧ 더 그것을 가속화시키기 위해서 강남과 강북 사이에 다리를 건설한다. 71년도에 잠실대교, 73년도에는 영동대교, 76년도가 천호대교가, 반포 쪽으로 잠수교가 놓였다. 마지막으로 79년도에 성수대교가 놓여서 강남 쪽으로만 5개의 다리가 생겼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주를 안하니까 70년도 중반경부터 정부정책이 적극적으로 바뀌고 전방위적인 대책이 나온다. 강북개발 억제정책을 펼친다. 농지 택지전환불허, 유흥장 이나 백화점건설 불허 등 이렇게 강북개발을 억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까지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강북에서 강남으로 가는 속도는 굉장히 더뎠다. 결국 정부는 70년대 후반 이후에 강남지역으로 많은 공공시설이나 주요기관 이전정책들을 펼친다. 대표적인 것이 대법원, 검찰청, 그리고 강북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여러 버스터미널들을 한데 모아서 대규모 버스 터미널을 만들어가지고 강남으로 보낸다.
⑨ 본격적으로 결국 사람들이 강남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전정책이 펼쳐진다. 강북에 있던 명문 고등학교인, 경기, 휘문, 서울 등 15개 고등학교들을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이전시키니까 당연히 사람들은 학교를 따라서 강남으로 강남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당시 유신시절 엄혹한 서슬퍼런 시절에도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서 이전반대 시위를 강하게 벌였다. 정부에서는 결국 회유책을 쓴다. 당시 강북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들의 교사를 보면 땅은 좁고 건물들은 낡고 쇠락한 상태였다. 이전을 계기로 훨씬 넓은 부지와 시설도 현대적인 시설들을 요구한다. 정부도 그런 요구들을 다 들어준다. 이렇게 해서 강남 이전은 학교가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은 그 유인책은 성공을 한 것이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안보문제와 인구분산문제 해결은 목적을 달성하여 강남을 통해서 최초의 신도시 개발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⑩ 엄청난 대규모 신도시개발이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외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보통은 도시개발을 하면 땅값 상승문제에 대한 대책을 만들어 놓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박정희 정부는 그런 대책이 전혀 없었다. 그냥 밀어부치기식으로 했기때문에 그 과정에서 지가가 폭등하고 토지투기에 가담한 사람들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고 그래서 그때 70년대부터 한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 역시 부동산이 최고야, 부동산 불패신화가 형성이 됐다. 우리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다 부동산 공화국이다 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계기도 이때부터다. 그뿐만 아니고 여러가지 개발과정에서 비리가 개입이 되고 부패문제가 제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한강연안의 공유수면매립사업이었다.
⑪ 흑석동, 반포, 서빙고동, 압구정동, 구의동, 잠실 지역은 1960년대, 70년대 까지만 해도 비가 오면 침수가 잘 되는 상습침수지역이었다. 그래서 공유수면매립이란 걸 했다. 공유수면매립은 물이 차있는 땅을 뜻하는 말이다. 이게 다 국가소유다. 이 물의 일부를 막거나 하천에 제방을 쌓아서 흙으로 메우는 작업이 바로 공유수면매립이다. 반포, 압구정, 잠실, 지금 서울에서 가장 노른자위, 가장 비싼 땅이 이 동네들이다. 공유수면 매립사업은 엄청난 사업이다. 공유매립사업을 따내면 제방과 도로용지를 제외한 나머지 땅을 건설사가 통채로 먹을 수 있다. 그러니까 건설사나 정부투자기관이 아파트를 짓거나 하고 싶은 걸 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그야말로 노른자위 땅이었다. 그러니까 땅 집고 헤엄치면서 돈 방석에 앉는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이었다.
⑫ 손종목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이 공유수면 매립사업권을 미끼로 엄청난 정치자금을 거두어들였다, 때는 1969년 어느날, 김학렬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국내 굴지의 다섯 건설사 대표에게 약속한 것이 바로 잠실공유수면 매립공사였다, 국내 굴지의 다섯 개 건설사가 공동출자한 잠실개발회사가 1971년 7월 13일에 설립돼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시작되었다. 예전의 잠실은 여의도 처럼 하나의 섬이었다. 그랬던 잠실, 북쪽으로 물길을 크게 돌리고, 남쪽 물길을 메워서 지금 남아있는 흔적이 바로~석촌호수~ 공유수면 매립을 통해서 아주 넓은 면적의 집단 택지가 조성되었다. 그럼 거기에 바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반포, 압구정동, 잠실 아파트 등 강남의 대단위 아파트들은 다 이 공유수면 매립 후에 지어진 것이다. 이 공유수면 매립사업 인가를 받으면 그 회사는 그야말로 떼돈을 버는 거였다.
⑬ 강남개발과정에서 말죽거리는 가장 먼저 뜨겁게 달아올랐던 투기의 현장, 그때 당시 1978년 영동지구 복덕방이 약1450개, 도곡동 쪽에는 400개가 있었다, 투기에 의한 시세차익, 이런 것을 노리는 거다, 1963년 강남이 처음 서울에 편입될 때, 신사동의 땅값이 평당 400원 그때 짜장면 한 그릇이 40원, 땅값이 짜장면 10그릇 값 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그게 15년이 지나서 1979년 강남개발이 한참 무르익을 때가 되면은 그게 40만원이 되었다. 1000배로 올랐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거기서 일확천금을 노렸디. 이런 것들을 나중에 사람들이 말죽거리신화라고 불렀다.
⑭ 프리미엄이란 뭐냐, 원하는 사람들이 다 아파트 분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분양을 받으면 그 순간 값이 확 뛰었다. 그때 차액을 프리미엄이라고 부른다. 1977년 공무원 월급이 6만원 이었는데 아파트 분양권 한장 프리미엄 150만원을 넘었다. 엄청난 금액이다. 그러니까 누구든 가서 분양만 받으면 갑자기 큰 목돈이 생겼다. 아파트 분양제도는 시기에 따라서 많이 변해 왔지만 어떤 때는 선착순으로 그냥 줄서기 했다. 분양 받을려고 그 전날부터 줄서고 거기서 밤을 새고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부동산 문제는 오늘날 까지도 최고의 난제고, 많이들 걱정을 하고 있고 고민들하고 있는데 그것의 근원은 강남개발에서 비롯되었다.
⑮ 진짜 강남 부동산 재테크는 정말 너무나 매력적인 재테크로 자리 잡았다. 그게 얼마나 심하면 30대 나이에 영끌이라고 해서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아파트를 산다는 말까지 있다. 이런 문화가 최초의 신도시개발이었던 강남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많은 비리와 부정적인 면들이 사라져서 깨끗한 정책들이 나와야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너무 투기적인 성향이 강하다. 주식을 살 때도 이게 일종의 국민적 특성이 되어 버렸다. 이런 국민적 특성을 만들어낸 계기가 강남개발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한나라가 생산을 안하고 땀 흘려서 소득을 얻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불로소득을 얻을려고 하는 사람이 국민들 가운데 다수가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그건 정해진 운명이다. 지금 부동산 문제가 이 정부에 들어와서 다시 심각해졌는데 우리가 각성을 하고 정부도 제대로 된 정책을 마련하고 어떤 국민적 공감대가 있어야 우리 한국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