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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를 전망한다 -197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이정환(시조시인)
1. 열며
지난 2006년은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최초의 현대시조「혈죽가」가 발표된 지 100년을 맞은 뜻 깊은 해였다. 박철희)는「혈죽가」의 내용을 두고 “각성과 저항의 시조로서 출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시절가요로서 시대와 역사에 대한 투철한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말일 것이다. 2006년을 전후로 해서 현대시조 100년을 기리는 행사가 경향각지에서 성황리에 이루어진 바 있다.『문학․선』의 이번 시조 특집도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러한 행사나 기획들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현대시조의 발전과 내실을 기하는 역동적인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이 글에서는 현대시조의 미래지향적 전망을 조심스레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부제에서도 밝혔듯이 197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중심으로 개관해보고자 한다.
2. 펴며
먼저 1970년대를 살펴보기 전에 잠시 그 이전 시기의 활동상은 참고로 각주에 넣어둔다.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미래를 예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 역동적인 움직임의 발현 1) 1970년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시조문단은 튼실한 기초를 다지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지엽은 이 시기를 두고 “현대시조의 격변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신인들이 등단하여 융성해진 때라고 본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시조문단이 시단과 활발한 교섭을 지니면서도 독자성을 확보하고, 질적으로 한층 원숙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할 시인들과 그 활동상은 다음과 같다. 류제하는「변조」연작들을 통해 “시적 사유와 상상력에 관한 탐색”과 더불어「광인일기」연작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영혼의 들림”에 천착하였고, 이론적인 면에서도 적잖은 공헌을 남겼다. 실험정신을 끝까지 올곧게 견지하면서 시조의 새로운 변화를 부단히 모색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박시교는 “존재의 근원적 허무의식과 상실의 시대를 향한 역동적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겨울 강」은 억압된 현실과 시대 앞에서 결연히 대항하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를 표출한 시 세계로 시사적으로 큰 의미를 있는 작품이다. 정재익은 “전통 서정” 한분순은 한결같이 “신서정의 고적한 울림과 정결한 그리움의 지순함”을 보여주고 있고, 선정주의 시 세계는 “존재에 대한 종교적 상상력과 문명에 대한 비판 또는 속죄”가 주조를 이룬다. 류상덕은 “인생을 관조하고 존재의 허무의식의 육화”를, 김상묵은 “거침없는 실감의 시어, 소시민적 애환의 해학적 카타르시스”를 사설시조를 통해 질펀하게 풀어내고 있는 점이 특장이다. 유자효는 “전쟁의 아픔에서 투명한 삶의 질서와 균형”을 이끌어내는 일에 힘썼고, 김남환은 “비애 속 피워 올린 슬픔의 정서와 담금질로 빚어낸 환한 서정”의 육화에 힘을 기울였다. 김원각은 “버리고서 얻은 안온과 선적 깨달음”을 단시조로 집약한 점이, 이한성은 “어둠 속 삶의 역동성과 시대에 대한 비판․부활 의지”를 드러낸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유재영은「햇빛 시간」등의 시편들을 통해 “물빛 순수와 햇빛 따사로움의 선명한 이미지”의 형상화에 힘썼고, 특히 시조의 정형미학에 충실한 그의 작품들은 典範으로서 후학들에게 읽히고 있다. 서우승은「카메라 탐방」연작들을 통해 “사물에 대한 엄정한 응시, 삶의 화두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보였고, 이우걸은 “섬세하고 유연한 신서정과 불확실성 세계에 대한 자아 성찰”의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개성적인 시 세계를 지속적으로 견인해왔고, 특히 시조 이론서와 젊은 시인들을 조명하는 일, 다수의 평론가들이 시조 평론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힘쓴 점은 특기할 일이다. 임종찬은 “한국 정서의 은은함과 풋풋함, 자연에의 귀의와 합일”에 주안점을 둔 작품을 썼다. 시조에 대한 연구서를 다수 발간하였다. 김영재는 “현대인의 우울한 심상과 고뇌, 조화로운 삶의 깨달음”에 천착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박영교는 “우직하고 정직한 울림의 미학”을, 조영일은 “낮은 곳으로의 따뜻한 애정과 진리의 경계에 대한 성찰”을, 김정희는 “초록 생명의 뜨거운 울림, 묵상과 성찰의 담백미”로 한 경지를 일구고 있고, 민병도는 “정좌한 삶의 고독, 오도와 일탈의 시학”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아픔을 조명하고, 새로운 언어 미학을 창출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김몽선은“전통서정의 세계를 친밀감 있게 구현”을, 김종은 “더운 눈으로 바라본 역사, 은유적 직관과 비판”을, 백이운은 “욕망을 비워낸 여백의 향기와 여름의 부신 상상력”을, 조주환은 “공동체의 해체와 상실의식, 굵은 선의 힘으로 형상화한 장편서사”창작에 힘썼다. 정해송의 시 세계를 “세계에 대한 치열한 정신과 맑은 정수리의 생명성”으로 요약할 수 있듯이 남다른 시각과 개성으로 생명미학을 구현하고 있고, 조동화는“세계에 대한 非意와 존재론적 성찰에 대한 잠언”을 전통 율격에 잘 녹인 세계를, 김영수는 “자연의 생명력과 따스한 인간애”를 노래하고 있다. 김영수는 오래 전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로도 그곳에서 시조의 세계화를 위해 부지런히 활동 중이다. 이승은 “감각적 이미지와 세련된 수사, 속죄양 의식”을 시화하는 일에 그의 능력을 보이고 있다. 2) 1980년대 1980년대는 “현대시조의 혁신기”라 이를만하다. 새로운 면면들이 대거 등장하여 시조문단을 윤택하게 했기 때문이다. “시조 형식에 대한 과감한 실험과 무의식과 상상력의 세계를 다양하게 담아내던 시기”로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된 때이다. 또한 이 시기에 주목을 요하는 동인활동으로 “오류동인회”와 “80년대”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지속적인 활동은 시조문단에 적잖은 파급효과와 자극을 가져다주었던 사실은 시조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점이라고 본다. 강영환은“고도의 변증법적 애환과 불편한 시대와의 대결의식”을, 박기섭은 “예리한 칼날의 서정과 충일한 실험정신”을 작품 속에 장치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박기섭은 주정과 주지의 탄력적 융합과 변용 혹은 변주에 그의 타고난 재능을 접목하여 창출한 개성적인 시 세계는 괄목을 요한다. 김일연은 “절제와 압축의 아름다움과 비워 넘치는 그리움”의 세계는 남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지성찬은 “신도시의 새로운 시적 정서와 실존의 진지한 모색”을, 이정환은 “원형의 조화와 합일, 꽃과 바람과 새의 상징적 사유”를, 전원범은 “생태적 상상력의 그리움과 자아로의 몰입 혹은 일탈”을 꿈꾸는 세계의 직조에 힘쓰고 있다. 오승철은 “생의 내면을 투시하는 섬세한 서정성과 제주 4․3의 생생한 증언”을 노래하는 일에 매진하였고, 문무학은 “경계와 일탈의 실험정신 혹은 탈속과 세속의 합일”을, 노중석은 “이타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비상하는 자유에의 신념”을, 이지엽은 “시적 대상에 대한 생명과 사랑, 하늘을 향한 자유정신”을 표상하는 세계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이지엽은 시조문단의 중흥을 위하여 헌신적인 힘을 쏟았다.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완간과 여러 시조문학의 주요 행사를 위해 앞장서서 일한 점 등이다. 이일향은 “죽음 너머의 상처 견뎌내기와 생에 대한 외로움 혹은 기원”을, 박옥위는 “자연 친화의 따사로운 포옹과 불안한 시대에 대한 자성”을, 박연신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순수한 자아의 추구”를, 정수자는 “오래된 어둠의 미학과 묵언의 절 대 고독”을 노래한다. 특히 정수자의 시 세계는 사유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생명미학이 절제된 언어와 접맥 되어 높은 성취를 이루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고독한 순례”를 보이는 정공량, “청명한 서정성”의 이요섭, “도시 소시민의 길찾기와 자연과의 대결을 통한 자아 성찰”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김복근, “겸허와 무욕의 시적 변용”을 보인 정일근, “고단한 생활의 내면적 고독과 불편한 시대에 대한 저항의식”의 오종문, “절망을 긋고 비상하는 소시민의 자화상”의 김연동, “일탈된 자아의 길 찾기”의 전병희, “사랑과 그리움의 변증법”의 이재창,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충일한 시대 정신”의 박현덕, “묘사의 치밀성과 어두운 생명들에 대한 찬미”의 홍성란, “역설과 비장미의 시학, 제주 정서의 객관화”에 힘쓴 고정국, “밝음과 어둠의 변증법적 융화, 시대의 풍자”에 힘쓴 양점숙 등의 활약은 돋보인다. 특히 홍성란은 근간에 사설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일에 꾸준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3)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시조 인구가 급속하게 팽창한 시기로 “현대시조의 확산기”이다. 문학의 한 갈래로서 정착을 한 때이다. 개인적인 지난한 어려움을 딛고 “죽음을 넘어선 생의 열망과 길이 남긴 기척의 그리움”의 천착에 힘쓰고 있는 박권숙, “독특한 시각으로 현대인들의 아픔과 고뇌의 육화”를 보이는 채천수, “도시인의 우울한 초상과 내면을 향한 자아의 길 찾기”에 몰두하고 있는 권갑하, “참신한 감각과 깊이 있는 사유의 세계”의 서숙희, “부드러운 순응의 삶, 절제된 표현의 완결미‘의 김삼환, “은유로 감싸 안은 삶의 비애와 존재의 탐색”의 하순희, “전통적 역사의식의 재현과 공감각적 이미지의 직조”에 힘쓴 박명숙, “점잖음과 희화성의 극치 혹은 재미를 동반한 실험정신”의 이종문, “의식의 내면 풍경 혹은 가치의 전복과 표류”의 전민, “고단한 삶의 내면 읽기”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정휘립, “순수의 뜰을 밝히는 등불”의 이복현, “무너진 자아의 복원과 자아성찰”의 김수엽,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정과 역사를 역류하는 자유의지”의 홍성운, “그리움의 단정한 기억과 스크린의 시적 상상력”의 강현덕, “내면의 고독한 성채와 소멸 위에 세운 찬란한 생의 의지”의 이달균, “순수 서정의 엄결성”의 이해완 등은 이 시기의 전반기를 수놓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등단하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로는 서연정, 문희숙, 전정희, 우은숙, 김세진, 김강호, 문순자, 현상언, 이구학, 김윤숙, 송진환, 정경화, 이태순, 이송희, 정혜숙, 김선희, 정용국, 박지현, 이솔희, 박희정, 이숙경, 이애자, 윤채영, 김미정, 이경임, 권영오, 박연옥 등이 있다. 이들과 이들의 뒤를 이어 나온 신인들의 활약 여부에 따라 시조문단의 향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창작에 힘을 보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나. 특집 시인들의 시 세계 여기서는 『문학․선』 봄호 특집 시인들의 작품을 한 편씩 살피면서 현대시조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보고자 한다. 대상 시인들로는 민병도, 이승은, 박기섭, 이지엽, 정수자, 오종문, 박현덕, 홍성란, 권갑하, 김삼환, 강현덕, 서숙희, 김강호, 우은숙, 박지현, 문순자, 정경화, 이태순, 권영오, 박연옥이다.
봄바람에 뿌리가 들린 보리를 밟는다 문신처럼 드러나는 온 몸의 신발자국, 때로는 혼절의 아픔도 사랑이라 일러주며.
밟으면 꺾어지고 일으키면 누워버리는, 차마 작은 돌 하나도 밀어내지 못하지만 그 속에 물결 드높고 함성 또한 뜨거워라.
꼿꼿이 일어서서 아침해를 겨누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이 땅의 슬픔을 이긴 보리밥, 민초의 힘이여! 사투리의 절개여.
정녕 무서운 힘은 창칼도 붓도 아닌 한 근도 못 미치는 마음 안에 있는 것 날마다 속을 비우는 저 초록, 꿈을 밟는다. -민병도,「보리밟기」전문
「보리밟기」는 시대정신을 서정으로 녹여 풀어내고 있다. 주제가 이면에 숨어 있지 않고 노출되는 것을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꼿꼿이 일어서서 아침해를 겨누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이 땅의 슬픔을 이긴/ 보리밥, 민초의 힘이여! 사투리의 절개여”에서 보듯 그만큼 직정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시대와 현실의식을 조화롭게 담기 위해 감각적인 시어와 감성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의도한 바를 잘 육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마무리되는 끝수에서 “정녕 무서운 힘은 창칼도 붓도 아닌/한 근도 못 미치는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것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골짝에 접어들수록 마음처럼 붉어진 길 눈물도 그렁그렁 꽃잎 따라 필 것 같다
고샅길 홀로된 집 한 채 숨어 우는 너도 한 채
복사꽃 그늘에서 삼키느니, 밭은기침
선홍의 내 아가미 반짝이며 떠돌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가지마다 뱉어낸 꽃
우리 한때 들끓었던 것 참말로 다 참말이던 것
날카롭게 모가 서는 언약의 유리 조각에
메마른 혀를 다친다, 오래고 먼 맹세의 봄 -이승은,「복사꽃 그늘」전문
「복사꽃 그늘」은 빼어난 감성이 훈향 높은 언어와 결합하여 쉬이 좇을 수 없는 축제의 장을 펼쳐 보인다.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끝나지 않은 데 이 작품의 진가는 있다. 어느 한 대목만 끄집어내어 일러 “거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작품은 되뇌어 읽으면 읽을수록 전편이 고혹적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구구절절이 모두 삶의 깊은 의미를 그 이면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부리는 시어들은 그만의 것이다. 그만의 경험 체계, 그만의 사유의 깊이에서 자아올린 언어의 보석들이 특별한 이미지와 진폭을 가지고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절차탁마, 그 공정의 시간이 깊고 오래임을 읽게 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천분이 넉넉히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승은이 시인으로서 지금까지 축적해온 혼신의 힘이 이 작품에 온전히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온몸으로, 오감으로 느끼게 한다.
포장집 낡은 석쇠를 발갛게 달구어 놓고 마른 비린내 속에 앙상히 발기는 잔뼈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낱낱이 발기는 잔뼈
-가령 꽃이 피기 전 짧은 한때의 침묵을 -혹은 외롭고 춥고 고요한 불의 극점을 -무수한 압정에 박혀 출렁거리는 비애를
갓 딴 소주병을 정수리에 들이부어도 미망의 유리잔 속에 말갛게 고이는 주정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쓸쓸히 고이는 주정 -박기섭,「꽁치와 시」전문
석쇠 위에서 굽히고 있는 꽁치를 보면서 시를 생각한다. “대체, 시란 무엇인가? 무엇이 시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하다가 “낱낱이 발기는 잔뼈”에서 마침내 그것을 발견한다. “아, 시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 저것이야말로 시로구나!”하고. 그러나 이 시가 그 정도로 그쳐 버렸다면 평범함에 머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째 수가 그것을 뛰어넘게 한다. “꽃이 피기 전 짧은 한때의 침묵”과 “외롭고 춥고 고요한 불의 극점”과 “무수한 압정에 박혀 출렁거리는 비애”가 곧 그것이다. 어찌 이뿐이기만 하랴. 허나, 이 몇 가지의 예를 제시하면서 시에 이르는 길이 그리 간단치가 않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렇다. 동물적 상상력으로 동원된 “꽁치의 잔뼈” 이미지가 “꽃피기 전”을 말하는 식물성 이미지로 전이되다가 다시 광물적 이미지인 “불”과 “압정”의 이미지로 옮겨가고 있다. 특히 ‘압정’이라는 고정된 사물에 “출렁거리는 비애”라는 동적인 이미지를 접맥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 점은 이채롭다. 그리고 “미망의 유리잔 속에 말갛게 고이는 주정”으로 끝나지 않고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쓸쓸히 고이는 주정”이라고 시가 결코 분주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거듭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쓸쓸히 고이는 주정”을 얻기 위하여 시인은 한 평생을 순례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하늘이 있습니다 푸른 물 고여 출렁이는 산, 그 흰 이마의 새떼 흘러도 다 울어내지 못한 강물이 있습니다 때로 절정을 향해 별은 또 빛나고 번개와 우레가 외로움에 꽂히지만 누구도 스스로의 하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습니다 희끗희끗한 절망의 파도, 등 푸른 욕망 숯처럼 타오르는 한 척 배 목숨처럼 떠 있습니다 숨비소리 하나도 숨어 그대를 향하지만 부딪히고 깨어져도 잠 하나 못 이루는 섬, 누구도 스스로의 바다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이지엽,「적벽을 찾아서」전문
적벽은 이 지상에 실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전남 화순 적벽을 바라보면서 쓴 시이지만, 그것은 시인의 내면에 영혼의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는 환각의 세계일 수도 있다. 시의 화자는 “없습니다”를 두 번, “있습니다”는 네 번 말하고 있으나, “없습니다”가 주는 울림은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중간에 한번 놓이고 결구에 가서 다시 언명하듯 놓인 “없습니다” 때문일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은 “하늘, 산, 새떼, 강물, 바다, 파도, 욕망, 한 척 배” 등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하늘에 도달할 수 없”음을, 그 “누구도 스스로의 바다 가 닿을 수 없”음을 통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자아가 투영된 “부딪히고 깨어져도 잠 하나 못 이루는 섬”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한계는 시의 화자가 스스로 적벽을 찾아가서 적벽과 마주한 뒤에 절절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기실 한계의식은 그 누구도 종생토록 짊어지고 갈 업이라는 의미를 이 시편은 넌지시 일러 주는 듯하다.
표범이 어린 누 한 마리를 꽉 끌어안고 서 있다
격렬한 헐떡임에 햇살이 부르르 떨고
잠시 후 포옹을 풀자 누가 덜컥 쓰러졌다
사랑도 저러하여 포옹을 푸는 순간
살점을 뜯어 물고 붉게 우는 밤이 있지
황홀한 질식을 찾아 길게 우는 밤이 있지 -정수자,「황홀한 질식」전문
표범은 가해자다. 누는 피해자이다. 끝없는 생존 경쟁은 초원에서 펼쳐진다. 끝내 표범에 의해 누는 그 목숨을 다 한다. 얼마간 동안 누의 격렬한 헐떡임이 있었다.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헐떡임이었기에 포옹은 포옹이라기보다 누에게는 오랏줄과 진배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숨 가쁘게 목격한 시의 화자는 역설적으로 말해 버린다. “사랑도 저러하”다고. “포옹을 푸는 순간”, “살점을 뜯어 물고/붉게 우는 밤이 있”고, “황홀한/질식을 찾아/길게 우는/밤이 있”다는 것을 아프게 떠올려 준다. 사랑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다. 물론 표범과 누의 관계는 아니지만, 이것은 애증을 생생히 상기시킨다. 언뜻 스쳐 가버릴 수 있는 짧은 장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느니,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는 것
무희의 그 춤사위 아득히 날 깨우치고
사랑도 버거운 한낮 뒤뚱거릴 뿐이다.
알지 못한다, 언제 우리 목숨 끝나는지
몇 개 탐스런 욕망 지상에 널어놓고
내 몫의 한 다발 고통 그만 버틸 일이다. -오종문,「연극 공연장에서」전문
한 편의 인생론이다. “무희의 춤사위”는 연습 없는 인생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한다. 뒤뚱거리는 자아, 목숨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 그래서 “몇 개 탐스런 욕망 지상에 널어놓고”서는 이제 “내 몫의 한 다발 고통/그만 버틸 일”임을 토로한다. 이 대목은 한참 되뇌게 만든다. “과연 그만 버틸 일인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대단한 깨우침은 아니지만, 각자 자기 몫의 “한 다발 고통”을 부둥켜안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만큼, 뒤뚱거림을 꿋꿋이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다. 「연극 공연장에서」는 그러한 깨우침을 준다. 삶의 진정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아버지 해안에 앉아 길게 눈 떴다 감는다
뻘밭 위로 하나 둘씩 드러난 김말뚝
허기진 가난이 달라붙어 얇은 꿈을 꿰맨다.
바다 한 장 넘기면 어선들이 코를 곤다
여린 바람에, 햇살에 수척한 몸 이끌고 어스름 김양식장으로 걸어간다. 아버지 -박현덕,「초분」전문
김양식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기력이 쇠하다. 길게 눈 떴다 감는 모습, 허기진 가난, 얇은 꿈을 꿰매는 장면, 수척한 몸에서 애잔함을 느낀다. 어스름 속의 김양식장으로 걸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시의 화자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읽고 있다.「초분」에서 아버지의 인생 역정을 조망하게 된다. ‘풀로 만든 무덤’ 즉 ‘초분’은 김과 관련된 이미지이다. 아버지의 평생의 일터는 곧 그의 무덤이라는 인식을 제목은 우리에게 시사한다. 그 점에서 이 시는 시종 잔잔한 호흡을 유지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독특한 묘사를 하고 있다.
한 생애 둥근 사리 깎으며 사는 건 아닐까, 아닐까
실바람 찔레꽃잎 살포시 뜨던 날도, 낙석 끝에 황톳물 울컥울컥 쏟던 날도 너울너울 흐른 강물 그 강물 가슴자리 천길 깊고 푸른 데, 속살 점점 저미는 나달은 고여서, 단단히 고여서 이마에 단 등불 얼마나 환한지 얼마나 맑은지 밝혀보는 심지 없는 불꽃이어라, 불꽃이어라
파랗게 눈뜨는 할 소리, 쟁쟁 귀에 울리네. -홍성란, 「부도)」전문
사설시조다. “아닐까, 아닐까, 너울너울 흐른 강물 그 강물 가슴자리, 나달은 고여서, 단단히 고여서, 불꽃이어라, 불꽃이어라”와 같은 대목에서 의미 있는 되풀이나 앞말 되받아 쓰기로 사설시조의 맛을 잘 살리고 있다. 부도를 보며 사리 깎으며 사는 한 생애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실바람 찔레꽃잎 살포시 뜨던 날’의 혼곤한 봄꿈 같은 서정과 ‘낙석 끝에 황톳물 울컥울컥 쏟던 날’의 ‘너울너울 흐른 강물 그 강물 가슴자리’가 천길 깊이로 푸르고 깊은 것을 일러 준다. 그리고 ‘속살 점점 저미는 나달은 고여서, 단단히 고여서 이마에 단 등불 얼마나 환한지 얼마나 맑은지 밝혀보는 심지 없는 불꽃’이라는 호흡이 긴 대목에서도 오래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부도에서 ‘파랗게 눈뜨는 할 소리, 쟁쟁 귀에 울리’는 것을 시의 화자는 듣는다. 아무나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한 생애를 둥근 사리 깎으며 사는 이의 귀에만 들리는 깨달음의 ‘할 소리’이다.
울렁이는 욕망들이 굽은 등마다 흘러나오는 지워진 먼 길 끝에선 아우성도 몰려온다 허물을 덮어주려면 몰래 별도 띄워야겠지. 은밀한 갈증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헤진 상처 감추려 지친 바람 분주하지만 실직의 허기진 강은 눈물에도 젖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굴린 공은 어디로 굴러 갔나 홀로 깬 기다림은 파도소리로 훌쩍이는데 쓸쓸한 작별의 행방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 제 가슴 속 불을 밝혀 외따로 돌아가는 어둠을 건너는 외등의 경건한 고독이여 아득한 혼잣말처럼 문득 빗방울이 환하다. -권갑하 「외등의 시간」 전문
이 시대의 우울한 한 단면을 집요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그런 까닭에 화면이 몹시 어둡다. 그러나「외등의 시간」은 ‘외등의 시간’을 견디고 있기 때문에 희망이 보인다. 절망적인 현실을 노래하고 있지만,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건강성을 견인하는 힘이다. ‘외면당한 채 쌓여가는 지상의 많은 어둠을 환기’하고 ‘세상의 허기와 상처’를 읽어내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외등의 경건한 고독’ 속에서 ‘아득한 혼잣말처럼 문득 빗방울이 환’한 정경을 바라보는 시의 화자의 시각은 건강성을 담보한다. 그 힘으로 가파른 길도 마다않고 가야할 것이다.
산정에 오르면서 비로소 열리는 눈 직광으로 세워지는 햇살의 골조를 피해 관목숲 습기에 젖은 생각 하나 꺼낸다
누가 눈을 감아야 또 다른 눈 뜨인다면 해지는 들녘으로 숨어드는 바람처럼 내 몸을 가볍게 하여 들풀 위에 눕히리라
부지런한 봄 나무에 상처 다시 아물고 눈 감았던 어둔 구석 동면에서 깨어나면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미소 짓는 물무늬 -김삼환,「또 다른 눈」전문
사유의 깊이를 느낀다.‘누가 눈을 감아야 또 다른 눈 뜨인다면/ 해지는 들녘으로 숨어드는 바람처럼/내 몸을 가볍게 하여 들풀 위에 눕히리라’라는 진술은 생명의 비의를 환기시킨다. 순응의 삶에 대해 사뭇 긍정적이다. 톤도 시종 낮고 절제되어 있다. ‘직광으로 세워지는 햇살의 골조’와 같은 표현은 돌출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으나,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결구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미소 짓는 물무늬’가 함의하고 있는 뜻은 철학적이다. 그리고 밝고 희망적이다.
내 탄탄한 상처 쪼아 주춧돌로 놓아두고 내 검은 뼈 내리찍어 기둥으로 세우고 내 질긴 머리칼 올올 지붕으로 엮어 놓고 내 붉은 울음 뚝뚝 뜯어 단청으로 올리고 내 높고 푸른 이마 풍경으로 걸어두는 눈부신 말의 사원 한 채, 나 짓고 싶어라
무량의 맑은 율 허리 풀고 노니는 거기 햇살이며 바람 또한 한껏 들여 어우러지니 오오, 나 말은 버리겠네 마침내 버리겠네 -서숙희, 「시작」 전문
앞서 살핀 바 있는 박기섭의「꽁치와 시」와 연계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시이다. 「시작」은 시의 길이 얼마나 먼 것이며, 지난한 것이며 끝내 다 못 가닿을 길인지를 극명하게 노래하고 있다. 마무리 대목 ‘오오, 나 말은 버리겠네 마침내 버리겠네’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말을 버려서 시를 얻는 경지, 그것은 천의무봉이요, 완벽의 세계다. 누구나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지엽이「적벽을 찾아서」에서 얻고자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경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적벽’은 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어떤 장애물이자, 혹은 시 자체라고 보아도 될 법하다. 그렇다면「시작」이나,「꽁치와 시」,「적벽을 찾아서」는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춧돌이 된 탄탄한 상처, 기둥으로 세운 검은 뼈, 지붕이 된 질긴 머리칼 올올, 단청으로 올린 붉은 울음, 풍경이 된 높고 푸른 이마’로 끝내 ‘눈부신 말의 사원 한 채’를 짓고자 한다. 아주 개성적이고 명징한 이미지가 범상한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이렇듯 정신의 치열성에서 빚어진 이 시편은 자연 즉 서로 잘 어우러진 ‘햇살이며 바람’과 인공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즉 ‘무량의 맑은 율’이 허리 풀어 제치고 일체가 되고 있다. 가히 이상적인 시공간이다. 또 다른 시의 무릉도원인 셈이다.
아버지 당신 몸에서 나를 꺼내실 때는 청보리 술렁임 뒤로 늦은 봄이 가던 날 온 들판 흔들어대며 그 봄 배웅하던 날
썩어야 사람 되제 잘 썩어야 사람 되제
두엄에 날 버무리다 당신은 가버리고 몇 알의 보리씨만 남기고 너무 일찍 가버리고
흙이 된 당신이 밀어올린 보릿대에 이제는 내 아이들 올려다 앉히셨네
잘 여문 이삭 되어야제 꽉 찬 알곡 되어야제 -강현덕,「청보리밭」전문
작품 속에 삼대의 모습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아버지와 딸과 외손 사이에 끈끈한 생명의 흐름이 있고, 그 맥은 도저한 것이다. 시의 화자 즉 딸은 ‘청보리 술렁임 뒤로 늦은 봄이 가던 날/온 들판 흔들어대며 그 봄 배웅하던 날’에 태어났다. ‘아버지 당신 몸에서 나를 꺼내실 때’를 화자가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흡사 실감한 듯 적고 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들보다 딸이 아버지에 대해 더 지극정성이다.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은 표현은 가능했을 것이다. 둘째 수는 보다 구체적이다. ‘잘 썩어야 사람’ 됨을 아는 아버지는 ‘두엄에 날 버무리다’가 불현듯 가버렸다. 그것도‘몇 알의 보리씨만 남기고 너무 일찍 가버리’신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시의 화자에게는 크나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썩지 못한 나를 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셋째 수에 와서 화자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문득 본다. ‘흙이 된 당신이 밀어올린 보릿대’에‘이제는 내 아이들 올려다 앉히’신 것을. 그리하여 감격한다. ‘아,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지금 내 곁에 다시 오셔서 이제는 나를 넘어서서 내 아이들을 보릿대에 앉히시고 귀에도 생생한 정겨운 목소리로 말씀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시의 화자는 감읍하여 되뇌고 되뇐다. ‘썩어야 사람 되제/ 잘 썩어야 사람 되제’하고, 그리고 이어서 ‘잘 여문 이삭 되어야제/ 꽉 찬 알곡 되어야제’라고 아버지의 말씀을 되받아 혼자 읊조리며, 삶에 대한 부단한 희망을 떠올리게 한다.
온 종일 달을 키웠다 시린 손을 말리면서
눈물을 매단 새는 좌표를 향해 날고
벌판을 걸어온 창문 꾸역꾸역 뒤따른다
지친 발에 걸린 눈썹 낮은 길로 돌아들자
내 몸을 감싸던 벽 푸른 잎 여리게 돋고
허기진 저녁의 숲엔 따스해지는 발자국들 -우은숙,「따뜻한 하루」전문
「따뜻한 하루」의 시선이 따사롭다. 동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온종일 달을 키웠다’는 진술에서 밝은 기운을 느낀다. 그러나 ‘시린 손, 눈물을 매단 새, 지친 발, 허기진 저녁’이 주는 이미지는 결코 밝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푸른 잎 여리게 돋’는 장면과 ‘따스해지는 발자국들’에서 희망의 전언은 보고 듣는다. 여성 특융의 섬세한 시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리고 지치고 허기져도 종내 우리에게 안기는 것은 ‘따뜻한 하루’이기에 또 다시 다음 날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동백꽃 가득한 산에 달빛 쌓이던 밤 오랫동안 견뎌왔던 그리움에도 피가 돌아 하늘에 파문을 내며 울고 있는 여인 -김강호,「풍경」전문
「풍경」은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비근한 소재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의미부여에 골몰한 모습이 역력하다. 단시조로서 나무랄 데가 없다. 다만 종장 끝마디가 ‘여인’으로 마무리된 것이 아쉽다. 시조는 ‘3’으로 시작하여 ‘3’으로 마치는 것이 정격이다. 가장 바람직하다. 물론 ‘여인’을 길게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각적인 느낌도 도외시할 수 없다 기실 이 작품에서 이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풍경이 ‘하늘에/ 파문을 내며/ 울’기까지의 과정이 관건이다. ‘동백꽃/ 가득한 산에/ 달빛 쌓이던 밤’이었기에 ‘오랫동안/ 견뎌왔던/ 그리움에도/ 피가 돌’게 되어 여인은 울게 된 것이다. 아니, 풍경이 한 여인으로 화하여 하늘에 파문을 내며 울게 된 것이다. ‘동백꽃’과 ‘달빛’이 ‘경’이라고 볼 때 ‘경’이 일하게 됨으로써 즉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함으로써 풍경 즉 한 여인을 울게 만든 것이다.
눈 녹는 마른 숲에 텃새 다시 날아오고 뿌리를 감싼 물이 하늘 높이 차올랐다 아득히 잊었던 얼굴 연초록 물이 든다
꽁꽁 막힌 길을 송곳으로 뚫는 소리 노랗게 물드는 그 울타리 긴 둘레로 가파른 숨결 고를 때 천지가 다 환하다 -박지현,「눈 녹는 마른 숲에」중에서
「눈 녹는 마른 숲에」는 우은숙의「따뜻한 하루」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건강한 시선으로 늦겨울 숲을 바라본다. 다시 날아오는 '텃새, 뿌리를 감싼 물이 하늘 높이 차'오르는 장면은 생명의 경이를 표상한다. 숲속에 송곳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러한 강한 느낌으로 소생의 기운을 시의 화자는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파른 숨결 고를 때/천지가 다 환’해오는 장면에서 삶의 환희와 살아 있음의 눈물겨움을 맛보게 된다. ‘눈 녹는 마른 숲’은 머잖아 무한량의 은택을 안겨주는 무성한 생명의 숲으로 변모되어 갈 것이다.
저녁이면 습관처럼 오름에 돋는 별이 있다 허술한 내 출근길 오름에 돋는 별이 있다 세끼 밥 건너 뛴 적막 하늘 본다, 개밥바라기
한라산 구백고지, 명치쯤의 이 자리 산은 왜 이곳에다 청동어 달았을까 물장올 산정 호수에 내 그리움을 방생한다
저 오름도 세상에서 탁발하고 오는 걸까 청보라 섬잔대로 빈자일등 피워놓고 때맞춰 개밥그릇에 공양하듯 별이 뜬다 -문순자,「개밥바라기」중에서
제주 정서가 물씬 묻어난다. 누구든지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늘 보고 듣고 느끼고 숨 쉬는 공간을 도외시 할 수 없는 까닭에 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시인의 노래가 된다. 별이 돋을 때 출근하는 시의 화자는 오름에 늘 돋는 별을 바라본다. 그 별은 개밥바라기이다. 언제가 한적한 시골에서 개밥바라기를 오래도록 자세히 쳐다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개가 밥을 바라는 모습과 흡사하였다.「개밥바라기」도 그런 비슷한 느낌에서 이와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 듯하다. 특히 ‘세끼 밥 건너 뛴 적막/하늘 본다, 개밥바라기’와 ‘한라산 구백고지, 명치쯤의 이 자리’라는 대목에서 숙명적인 아픔을 읽는다. 그리고 그리움을 방생하는 물장올 산정호수가 눈에 선히 그려진다. ‘세상에서 탁발하고 오는 듯한 오름’에‘때맞춰 개밥그릇에 공양하듯 별’이 뜨는 것을 시의 화자는 습관처럼 바라본다, 저 허기를 어이하랴? 저 어쩌지 못할 근원적인 생의 허기를 어찌하랴? 그런 심경을 곡진하게 담고 있다.「개밥바라기」에서 육신의 허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허기를 읽는다.
메마른 입 안 가득 침이라도 고이라고 무수한 주름 위로 가을볕을 담는다 바람의 떨리는 혀가 순례처럼 핥고 간 뒤
그리운 시간들은 왜 자꾸 노래가 되나 뜨락에 멍석 펼쳐 하얀 꽃을 꿈꾸었던 어린 날 두고 온 달빛 함께 우려 건진다
뒤틀린 상처까지 가슴 깊이 안아주마 비로소 남은 뼈마저 누굴누굴 간이 배면 찬바람 휑한 밥상에 되씹히는 가을이 깊다 -정경화,「무말랭이」전문
‘무수한 주름위로 가을볕’을 담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렇다. 때때로 ‘바람의 떨리는 혀가 순례처럼 핥고 가’기도 한다. 그럴 적마다 ‘무말랭이’는 더욱 고들고들 말라가면서 그 진득한 맛을 안으로 쟁인다. 이 대목에서 나중에 우리가 ‘가을볕’과 ‘떨리던 바람’까지 함께 먹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다. 둘째 수에서 ‘노래’가 되는 ‘그리운 시간’과 더불어 ‘뜨락에 멍석 펼쳐 하얀 꽃을 꿈꾸’던 어린 날을 떠올리며 그 때 그 달빛과 함께 우려 건지고 있다. 그리하여 ‘무말랭이’는 ‘뒤틀린 상처까지 가슴 깊이 안아’준다. ‘남은 뼈마저 누굴누굴 간’이 밸 즈음 ‘찬바람 휑한 밥상에 되씹히는 가을’이 깊어간다. 그 때 그 시절로 문득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게 한다.
벌개미취 흐드러진 간이역쯤 와 있다 흠집 나고 닳아진 나무의자 앞에서 내 모습 참 많이 닮아 편안함이 배어든다
흙 묻은 발을 털며 앉아볼까 생각하다 방금 보낸 이별이, 너무 아플 것 같아 쓸쓸히 머금고 있는 물기를 닦아 준다
내겐 아직 식지 않은, 오후 3시가 기다리고 떫은 물 삭힌 홍시 발갛게 익을 때까지 밝혀 둘 가슴 한켠으로 남몰래 비워둔다 -이태순,「오후 3시」전문
시의 화자는 ‘벌개미취 흐드러진 간이역쯤 와 있’는 중이다. 시각은 오후 세 시쯤이다. 그러한 장면 제시가 이채롭다. 점심을 먹은 지는 꽤 지난 때다. 그런 나절에 ‘흠집 나고 닳아진 나무의자’를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참 많이 닮아 편안해 보여 앉아볼까 생각하다가 ‘방금 보낸 이별이, 너무 아플 것 같아/ 쓸쓸히 머금고 있는 물기를 닦아’준다. 이러한 애정 어린 시선은 우은숙의「따뜻한 하루」의 시선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내겐 아직 식지 않은, 오후 3시가 기다리고’라는 대목은 삶의 비의를 담고 있고, 잔잔한 울림은 긴 여운을 안겨준다. ‘밝혀 둘 가슴 한켠으로 남몰래 비워’둘 줄 아는 시의 화자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은 쫓기듯 사는 현대인에게는 몹시 귀한 덕목이다. 소소한 것, 사소한 것에서 시를 빚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먼 곳의 누가 손톱을 깎는지
토란잎 같은 하늘 톡톡톡 두드리며
비 오네
소쿠리 가득 푸성귀 얹는 소리 -권영오,「이슬비」전문
여름 한철의 작달비 말고, 그렇다고 는개는 아닌 그런 비. 그런 비가 소쿠리 가득 푸성귀를 얹는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푸성귀 얹는 소리'라? 시인의 귀가 아니면 어찌 그 소리를 들으며, 들은들 또 어찌 말로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는가? '먼 곳의 누가/ 손톱을 깎는' 소리를 끌고 오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손톱 깎는 소리와 푸성귀 얹는 소리를 아우르며 오는 이슬비. 보면서 듣고 들으면서 느끼는, 이른바 공감각이다. 종장 첫 음보 '비 오네'를 따로 떼어낸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앞뒤 구절을 밀고 당기며 이미지의 전환을 꾀하는데, 그게 제대로 맞아떨어졌다는 얘기다.달리 더 부연할 것이 없을 정도로 단시조「이슬비」를 꿰고 있다. ‘먼 곳의 누가/ 손톱을 깎는지’라는 대목은 김광균이「설야」에서 ‘머언 곳의 여인이 옷벗는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이슬비’에 ‘손톱을 깎는’을 접맥시킨 것은 단순히 참신한 시각이라고 말해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만큼 치밀한 장면 설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공력을 느끼게 된다.
뿌리를 조여 오는 매서운 밤의 적막
재잘대던 나뭇잎들 발자국을 따라가면
가지 끝 걸어 두었던 꿈들이 쏟아진다.
넉넉한 마음은 보름달로 꽉 채우고
불빛 잃은 한숨도 웃음으로 끌고 와
머얼리 달빛 아래로 하얀 들이 떠 있다. -박연옥,「겨울 밤」전문
‘머얼리 달빛 아래로 떠 있는 하얀 들’은 아무래도 시의 화자 즉 시인의 정신의 한 경지 혹은 아무나 쉬이 범접치 못할 은밀한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기까지 ‘뿌리를 조여 오는 매서운 밤의 적막’이 있었다. 그리고 ‘재잘대던 나뭇잎들 발자국을 따라’ 갔었고, 거기서 ‘가지 끝 걸어 두었던 꿈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시의 화자는 그렇듯 혼자 겨울밤을 소요한 것이다. 홀로만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렇듯 정밀의 세계를 노래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름달로 꽉 채운 마음, ‘웃음으로 끌고’ 온 ‘불빛 잃은 한숨’은 달빛 아래 하얀 들 위에 있다. 이러한 장면 설정은 결국 올곧은 정신 즉 우리 생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하나의 신비로운 영역으로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그 무엇이 아니랴? 이상으로 20인 시인들의 발표 작품들을 한 편씩 살펴보았다. 당대의 역사적 현실과 생의 위의를 올곧게 지키려는 의지와 지향점을 담은 작품들에서 조심스레 우리 시조의 미래를 밝게 예단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이들의 세계가 현재 우리 시조문단의 전모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1970년대 등단 시인으로부터 2000년대 등단 시인까지 두루 망라하고 있으므로 시조문단의 현재와 미래를 웬만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 말고도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많은 역동적인 시인들이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등단한 이들이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등단의 관문을 뚫기 위하여 절차탁마하고 있는 예비 시조시인들의 잠재력은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저변 확대가 가능한 것은 경향각지의 각종 일간지에서 신춘문예 분야에 시조를 모집하고 있는 것도 적잖은 기반이 되고 있다. 특히 중앙일보와 같은 곳에서 매달 지상 시조백일장을 열고 있고, 중앙시조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과 같은 비중 있는 시조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는 것도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각 지역에서 시조시인협회가 발족되어 연간지를 발간하고, 전국 시조백일장이나 현상모집과 같은 연례행사를 통해 신인 발굴에 힘쓰고 있는 것도 보탬이 되고 있다.
라. 시조의 세계화 무릇 생명체는 종족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시조창작에 10년 이상을 전력투구한 이라면 시조 보존의 본능을 강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거창하게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랜 개인적인 창작 경험에서 본다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시조란 무엇인가.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다시피하고 있는 이 궁핍한 시대에 3장 6구 12음보라는 시조의 양식은 과연 어떤 의미를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시조는 오랜 세월을 우리 민족의 호흡과 정서, 사상과 감정을 모자람 없이 담아온 우리 겨레만이 가진 정신의 한 양식이요, 뼈대이다. 정형의 틀을 가진 시로서 그 몫을 넉넉히 감당해온 시조는 가사문학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21세기에 이른 이즈음도 ‘현대시조’라는 이름 아래 문학의 한 갈래로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그만한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만사범대학교 교수 문행복에 따르면 중국의 전통시 인구는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 시조 인구는 1000여명을 헤아린다. 인구비율로 따져 보아도 한참 쳐진다. 그리고 그는, 공자는 시가 낡은 풍속과 습관을 고치고 사회 폭력을 없앤다고 생각해서 시가교육을 중시했다고 말하면서 경제 발전에 따른 사회 병리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시를 짓도록 격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카니시 스스무는 일본의 와카는 일본의 자부심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인은 와카를 통해서 언어유희를 즐겨왔고, 그것이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연쇄, 중복, 배제, 통합이라는 문화의 제반 현상으로의 발전을 촉진시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와카가 일본어를 척박하게 만들지 않는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인간의 의식이 처음 사물에 접했을 때의 감동 즉 원초적 감동이 와카라는 그릇으로 퍼 올려진 것으로 본다. 그 반면 하이쿠(俳句)는 서술보다는 단절적이고, 즉물적이며 사색적으로서 양쪽 수레바퀴처럼 노래와 구가 일본 시가를 지탱해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웃나라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시조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어떤 위상에 놓여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제침략기를 거쳐 광복 이후 독립된 나라를 세워오는 동안 문단의 일각에서 이따금 시조는 이제 그 존재가치를 상실한 갈래로서 폐기되어야 마땅한 ‘헌 부대’로 치부된 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초창기 최남선, 이병기, 정인보, 이은상, 조운, 김상옥, 이호우 등과 해방 이후 이영도, 박재삼, 장순하, 정완영 등과 같은 시인들이 꾸준히 우수한 작품들을 생산함으로써 그런 주장들을 불식시키는 일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그와 같은 든든한 기초 위에 지난 196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역량 있는 신인들이 여러 지지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배출되면서 시조문단은 융성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몇 해 전 완간된《태학사》간행 현대시조 100인선 101권이 ‘현대시조 100년의 해’를 맞이하여 완간된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한눈에 현대시조 전모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물론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 가운데에도 중요한 작품들을 생산한 시인들은 적잖을 것이다. 그리고 2006년 8월에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에서 ‘현대시조 100년과 21세기 시조의 담론’, ‘현대시조의 재인식과 세계화’, ‘현대시조 100년 세계 민족시 포럼’, ‘사회발전과 문화기반으로서의 시조문학’ 등과 같은 주제로 다양한 세미나가 열리면서 우리 시조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아울러 ‘시조의 세계화’에 대한 기대지평을 넓히게 된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현대시조의 재인식과 세계화’라는 주제로 개최된 세미나에서 장경렬이 캐나다 시인 엘리자베스 세인트 자크의 시조시집『빛의 나무 주변에서』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 시조의 세계화에 대한 가능성 즉 이 시조시집이 시조의 세계 내 현주소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확실한 지표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외국인이 처음으로 ‘한국 시조’라는 이름으로 펴낸 시조시집이기에 이러한 논의는 크게 주목할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부단한 외연의 확대와 더불어 내실을 기해야 할 것이다. 즉 창작을 하는 이들이 우수한 작품들을 꾸준히 생산해야 한다. 계획적인 저변 확대와 더불어 초․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시조 작품의 체계적인 반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 못한 측면이 있지만 여전히 공교육의 수업 현장에서 얼마나 다루어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성장기의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 바 있는 세대들은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만 해도 6차 교육과정까지는 고시조와 현대시조가 적잖게 수록된 바 있다. 이에 비해 지난 7차 때에는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 역시 시에 비해 시조 반영률이 현저히 낮았다. 이 점은 앞으로 개편될 때에는 반드시 보완․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3. 맺으며
시조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는“시조는 이 겨레의 대표적 서정이자, 자기동일적인 포에지다.”라는 박철희의 견해는 명쾌하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제 시조는 우리 민족의 것으로만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 내실을 다져 시조문학을 기름지게 하는 일과 함께 세계 속의 정형시로서 북미대륙과 같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조 창작 운동을 원격 지원하여 명실상부한 시조문학의 모국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요,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면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시조’라는 말도 결코 꿈같은 일이 아님을 예견하게 된다. 현대시조가 1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어느 정도 기반은 조성되어 있다. 이제 이 터 위에 저마다의 개성을 발휘해 집을 지을 때다. 이 일은 분명히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는 데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이미 추동할 수 있는 탄력은 내장하고 있으므로 공적인 지원의 확보와 더불어 각자 개인적으로, 지역 공동체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면 시조는 이 시대에 거듭난 시의 한 갈래로서 만방에 빛을 발하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한 뼈대요, 양식으로서도 부족함이 없지만 ‘세계 속의 정형시’로서도 무한히 뻗어나갈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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