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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강: 다시 개벽 開闢
1. ‘근대’가 빠진 역사
여러분의 밝은 표정을 보니까 개벽된 세상을 보는 것 같다. 본 강의는 내 주로 6개월간의 긴 항해를 마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근대의 사상으로서 우리가 실학을 말하고, 실학 이전의 조선 사상은 전근대사상인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동학을 얘기할 적에도 동학으로서 비로소 역사학에서 말하는 본격적인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럼 우리가 왜 동학을 추구하느냐? 동학이 우리 근대사의 출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이 굉장히 그럴듯하고 좋은 거 같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면, 동학부터 시작해서 여태까지 150년간, 우리 역사의 처절한 노력은 겨우 서양의 근대를 따라가는 그런 역사밖에 안 된다.
실학을 조선 근대의 맹아로 보고, 동학을 근대의 본격적 시작으로 보는 사관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서구중심적 근대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근대라는 말을 하지 않고, 우리 역사를 볼 수 있을까?
전근대 ← 실학 → 탈근대?
(Pre-modern) 동학 (Post-Modern)
(Modern)
조선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근대라는 개념 없이 볼 수 있을까? 근대라는 개념이 없이 역사를 본다는 것은, 중세도 없어지고 고대도 없어져야 한다. 현대도 없어져야 한다.
이렇게 고대, 중세, 근대의 개념 없이 역사를 볼 수 있을까? Why Not? 왜 볼 수 없나?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역사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벽의 역사이다.
개벽의 역사는 서양의 단계발전사관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 인식이다.
2. 개벽이란?
그럼 무엇이 개벽의 역사인가? 동학에서 말하는 개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논학문(論學文)에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라는 말이 있다. 원래 기(氣)라고 하는 것은 두리뭉실하게 구분이 안 되는 혼원(渾元)의 한 기(氣)이다.
渾元之一氣. -논학문-
구분이 안 되는 원초적인 하나 된 기
나와 책과 생수는 모두 기인데, 서로 뚜렷이 구분이 된다. 그런데 이것들을 미세하게 갈아 놓으면 구분이 안 된다. 그게 혼원지일기라는 말이다. 구분이 안 되는 것이다. 우주를 다 갈아서 뿌옇게 해 놓으면 그런 게 혼원지일기이다.
그런데 기기(氣)도 입자가 있다. 기기(氣)도 물체다. 그것 중에서 탁하고 무거운 놈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아주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뜬다.
淸輕者上爲天(청경자상위천), 濁重者下爲地.(탁중자하위지)
한나라때의 우주설 <易緯 乾鑿度>
청경자(淸輕者)는 올라가서 하늘이 되고, 탁중자(濁重者)는 밑으로 내려가서 땅이 된다고 했다. 쌀뜨물 같은 것을 휘저어 놓으면, 앙금이 앉고 뜨는 것처럼 위아래가 갈아지는데, 그게 바로 개벽이다. 갈라진다는 말이다.
@開闢(갈라짐)
하늘의 기와 땅의 기가 갈라지는 원초적 현상
맑은 것은 올라가고 탁한 것은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밑에 있는 땅은 형체를 갖게 된다.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 ― 개벽(開闢) → 상(上) 유형: 하늘: 형이상자(形而上者)
→ 하(下) 무형: 땅: 형이하자(形而下者)
그런데 수운 선생은 ‘천지개벽’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수운은 천지개벽(천지창조)을 말하지 않았다. 선천개벽, 후천개벽이라는 도식적 용어도 쓰지 않았다. 수운은 문명의 시작을 말했을 뿐이다.
야뢰 선생이 선천개벽, 후천개벽이라고 하는데, 수운은 그런 말을 절대 쓰지 않았다. 선천개벽, 후천개벽은 수운의 말이 아니라, 전부 20세기 종교가들의 이야기다.
수운 선생은 천지개벽에는 관심이 없고, 그건 그대로 있는 거라고 한다. 개벽은 말할 게 없다고 한다.
수운 선생에게 개벽의 의미는 성인(聖人)이 나와서 인간의 문명을 최초로 창조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개벽이라는 것을 수운 선생은 문명의 창조로 썼다.
인간 역사는 5만 년 전에 성인들이 나와서 인간 세상을 개벽시켰다. 그 전에는 자연과 인간의 구분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자연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옷도 입고, 가정도 꾸린다. 이런 게 다 문명이다. 5만 년 전부터 우리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5만 년 전부터 수운이 산 당시까지 하나의 개벽 세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째로 하나의 문명 단위로 보는 것이다.
3. 다시개벽
그리고 수운은 ‘다시개벽’이라는 말을 한다.
다시개벽
수운이 쓴 유일한 용어
‘다시개벽’이라고 하는 것은 5만년이 지난 후, 5만년의 운세가 다하고, 이제 새롭게 ‘다시개벽’해서 앞으로 5만년 세상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개벽후 오만년에 네가또한 첨이로다 -용담가-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안심가-
수운 선생은 어쩌다가 다시개벽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시점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살면서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21세에 장사를 나가서 31세까지 방랑을 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는데, 진짜 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이 위기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고 한다. 5만년의 인류 문명 전체가 뒤바뀌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수운이라는 분의 이런 스케일을 알아야 한다.
맑스가 말하는 5단계설에 대해서, 그것은 2단계설 아니냐? 이렇게 말하기 쉽다. 전혀 그런 개념이 아니다. 여태까지 인류가 구석기 시대로부터 문명을 창조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수운 선생은 ‘다시개벽’이라는 말만 했는데, 나중에 후대 사람들이 앞의 5만년과 뒤의 5만년을 말하기 어려우니깐, 이것을 편하게 앞을 선천 개벽, 뒤를 후천개벽이라고, 20세기에 후대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했다. 수운 선생은 그런 말을 안했다.
4. 도올의 개벽
그래서 편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나, 도올은 선천개벽 5만년의 시대를 하나로 왕정(王政)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천개벽 5만년의 시대를 민주(民主)라고 한다.
↓개벽 선천개벽 ↓다시개벽 후천개벽
왕정 민주
지난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한국의 동학혁명, 오늘날 총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선천 5만년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관이 완전히 변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고 하는 것이다.
맑스가 말하는 노예제도, 봉건제도 등은 기본적으로 모든 도식이 왕정이다. 동서역사를 막론하고 인류가 문명을 개창해서 여태까지 항상 왕이 있었고, 그 왕의 독재적 지배 하에서 인간이 살아왔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습관 때문에, 그러한 권위 구조 때문에, 종교도 그렇게 되었고, 가정 구조도 그렇게 되었고, 학교 구조도 그렇게 되었고, 기업 구조도 그렇게 되었다.
이것은 아주 명료하고 단순하고, 움직일 수 없는 새로운 역사관이다. 5만년의 이러한 세계를 이제 근원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때가 왔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동학이다.
본 주제는 새로 나온 책
<도올심득 東經大全 플레타르키아의 신세계>를 참조
오늘날 우리 역사를 많이 염려를 하실 텐데, 우리가 만들어 온 역사는 위대한 역사이다.
우리는 여태까지 이어온 5만년의 역사적 가치관이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보라. 40년 전만 해도 온돌 쓰면서, 뜨거운 물도 없이 간신히 살았다. 4, 50년 전의 한국 사람들의 삶과 고조선 시대의 삶이 똑같다. 고조선 시대에도 온돌구조가 나온다. 집 형태도 비슷하고, 그 시대와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이 같다.
그게 우리 인생에서 최초로 변한 것이다. 이게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변하는 시대에 살아야 재미있다. 가운데 토막에 살면 밋밋해서 재미가 없다. 우리는 정말 위대한 시대에 태어난 선택 받은 인간들이다.
5. 수운의 자각
서양 사람들은 자기들은 꾸준히 발전해왔다고 생각할 적에, 발전은 무슨 발전이냐는 것이다.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들은 하나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정말로 수운 선생이 말하는 개벽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너희들이 무슨 얼어빠진 발전이냐는 것이다. 똑같은 하나의 가치관 속에서 잘못 살아온 놈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나 나나 모두 잘못 살아온 인류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인류역사를 바꿀 때가 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운의 자각이다.
그래서 수운은 5만 년 선천세(先天世)에서 내려온 종교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유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모든 게 다 선천개벽의 잘못된 문명 구조 속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갈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6. 서양의 민주주의
우리가 근대에서 민주라고 하는 것은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부 대의민주주의이다. 어떻게 여러분이 전부 다 직접 다스릴 수 있겠는가? 반상회 정도만 가능하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희랍의 ‘데모크라티아’라는 것은 희랍 폴리스의 반상회였다.
democratia = demos + cratia
희랍민주주의 자유민 지배한다
그것도 제대로 있어본 적이 없고, 페리클레스 시대에 잠깐 있다가 없어진 것으로 그 이름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마치 서양은 희랍 이래로 데모크라시가 있어서 계속 발전해온 것처럼 쓰고 있다. 희랍에 ‘데모크라시’가 있어본 적이 없고, ‘데모크라시’라는 것도 반상회 수준이었다. 그냥 사람이 모여서 조개껍질에다가 투표하고 그랬던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데모크라시’라고 떠벌리면서 인류사에다가 사기를 쳐온 것이다.
게다가 희랍은 전쟁 국가였기 때문에, 타운미팅이나 반상회 같은 희랍의 데모크라티아는 개인을 말살하기 위한 단체 행동을 하기 위해서 하는 민주주의였다.
데모크라티아(democratia) : 희랍의 民治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 : 우리의 民本
<도올심득 동경대전> 38~45쪽 참조
그래서 그 과정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는 사약을 받는다.
희랍 민주주의는 삼권분립이나 개인의 권리존중이 없는 반상회 수준의 타락한 직접 민주주의였다.
플라톤(Plato)은 ‘데모크라티아’라는 말을 엄청 비판했다. 그건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믿음이 상실된 아리스토크라시(귀족주의)의 변형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아주 부정적인 개념으로 본다. 현재의 민주주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믿음이 상실된 귀족주의(aristocracy)의 변형태에 불과하다.
- 플라톤의 비판 -
서양의 역사나 우리 역사나 민주라는 의미에 있어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이것을 오늘날까지 사기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 민주주의가 우리보다 굉장히 앞선 민주주의라고 여긴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 미국 독립 선언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미국 독립선언서가 말하고 있지만 거기서 말하는 ‘all men’에는 여자도 빠졌고, 흑인도 빠져 있었다.
미국 독립을 주도한 세력이, 북부에서는 흑인 노예장사를 해서 돈을 번 사람들이고, 남부사람은 노예를 거느리는 대농장주들이었다. 미국의 역사는 철저히 노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역사이다.
미국 역사에서 노예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수운 시대였다. 아브라함 링컨과 수운은 1년차로 죽었다.
수운의 참수 : 1864년 3월 10일 (음력)
링컨의 저격 : 1865년 4월 14일 (양력)
그리고 미국의 여자가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1920년이다.
Woman suffrage(여성참정권)
1920년 헌법수정안 제 19조
그 기나긴 미국의 데모크라시라는 것이 1920년 이전에는 여자가 투표도 못한 역사이다. 미국의 흑인이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운동 이후이다.
The Civil Rights Movements of the 1960's
당시에는 흑인들이 백인과 같은 변소를 가고, 같은 식당에 들어갈 수 없었다. 꿈도 못 꾸었던 이야기다. 최근에 바뀐 것이다.
7. 동양의 민주주의
우리 역사는 ‘민주’로 말해도,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전 인류에다가 내놓고 이야기해도 거짓말 한 오라기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 역사를 잘못 보아왔다.
공자의 사상으로부터 民이라는 개념은 유교무류(有敎無類)라고 했다.
有敎無類
교육에는 인간의 유별이 있을 수 없다. -논어-
교육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에는 류(類)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계급에 의해서, 신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 인(仁)하냐 불인(不仁)하냐, 이런 것으로만 구별된다고 했다.
공자가 말한 인간의 차별이란 것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밖에 없다. 그러나 소인도 공부를 잘해서 덕을 쌓으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동양의 민(民)에 대한 개념은 서양의 민(民)에 대한 개념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개념이다. 이것을 맹자가 받아서 발전을 시켰고, 그리고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도 철저히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맹자의 민본(民本)+불교의 개인평등관→삼봉의 건국철학
우리 역사의 민본 전통은 서구 전통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있어 왔다.
그래서 ‘막연한 다중’이라는 의미에서 plethos라는 말을 빌려오고, ‘근본, 본질’이라고 해서 arche를 빌려서, 민본이라는 의미로 Pletharchia라는 말을 만들었다.
plethos(다중)+arche(본원) = Pletharchia(민본)
인류의 역사는 결국 ‘Pletharchia’를 확대하는 과정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수운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공중에서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 최수운이라는 사상가가 나온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민본 역사의 흐름이 꾸준히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8. 조선의 민본
민본 사상을 제일 먼저 구체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사람이 삼봉 정도전이었다.
그래서 왕권을 제약하였고, 어떻게 하면 민본을 바탕으로 인(仁)의 정치를 구현할지 고민하였다. 왕 너희는 천지생물지심을 가지고, 모든 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러한 정치를 하지 않으면 당장 모가지라고 하고 있다.
一有不得其心(일유부득기심), 則蓋有大可慮者存焉(칙개유대가려자존언)
삼봉 정도전의 <정보위 正寶位>
민본을 바탕으로 정보위라는 헌법을 만들었다. 인류 역사상 모든 왕정을 생각할 적에, 조선의 왕처럼 민주적인 제약을 받은 왕은 없었다. 조선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힘없는 놈들이다. 전제군주라고 해서 말 한 마디로 통하는 게 아니라, 삼사(三司)의 공론(公論)을 거치지 않으면, 발효가 되지 않았다.
@ 삼사(三司)의 공론(公論)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홍문관(弘文館)
삼사의 공론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왕은 사람을 만날 때도 그냥 만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사관 2명을 대동하고 만나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모든 것은 적었다. 그게 바로 사초(史草)가 되었다. 승정원 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을 보시면 알겠지만, 모조리 적는다. 요새 정치보다 훨씬 더 투명했다.
뿐만 아니라 왕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경연제’라고 해서, 당시 석학들의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 경연(經筵) 제도
왕이 당대의 석학의 강의를 매일 의무적으로 듣는 제도
강의내용은 항상 시론을 포함
지금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의무적으로 하루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동안, 석학의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조선의 왕들은 이렇게 어김없는 경연제도의 구속 하에 있었다. 함부로 나대는 왕이 아니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극들이 전부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왕권을 철저하게 제약한 왕조가 우리나라 조선왕조였다. 그랬기 때문에 500년이 유지된 것이다. 개판인 전제정치였다면 500년을 갈 수 없었다.
조선 역사는 왕권과 신권이 서로 투쟁하는 사이에 민권이 확대되어 가는 역사이다. 그러한 민권 확대의 정점에 동학이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균형 속에서 민권(民權)이 확대되어간 역사다. 그 민권의 확대의 정점에 동학(東學)이 있다.
9. 수운의 사상 계보
다른 맥락에서 동학을 분석하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여러분들 이퇴계라는 분을 아실 거다. 퇴계의 문인에 학봉 김성일이 있었다. 그리고 김성일의 문하에 경당 장흥효라는 사람이 있었다.
도올심득 동경대전 제 177쪽 수운 사상계보표
퇴계, 학봉으로부터 근암, 수운에 이르기까지
退溪 李滉(퇴계 이황)→ 鶴峯 金誠一(학봉 김성일)→ 敬堂 張興孝(경당 장흥효)→ 敬堂(경당)의 外孫(외손)인 葛庵 李玄逸(갈암 이현일)→ 密庵 李裁(밀암 이재)→ 大山 李象靖(대산 이상정)→ 埼窩 李象遠(기와 이상원)→ 近庵 崔(근암 최옥)→ 水雲 崔濟愚(수운 최제우) <근암집:近庵集>에 나오는 계보
학경(鶴敬)이라는 말은 학봉 김성일과 경당 장흥효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경당의 외손이 갈암 이현일이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갈암의 아들이 밀암이다. 그리고 밀암의 외손이 대산 이상정이라는 분이다. 그리고 대산의 문하에서 기와 이상원이라는 분이 배웠다. 그리고 기와 이상원 밑에서 근암 최옥이 배운 것이다.
수운선생의 아버지 근암공이라는 분은 퇴계정통의 계보가 있는 분이다. 퇴계적통(退溪嫡統)의 계보가 있는 분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양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 양반의 묘갈명(墓碣銘)이라는 게 있다. 묘석을 세우는데, 그것을 누가 썼냐 하면, 진성(眞成) 이휘녕(李彙寧) 근찬(謹撰)으로 되어 있다.
진성(眞成) 이휘녕(李彙寧) 근찬(謹撰)
놀랍게도 이 사람이 바로 퇴계 종손이다.
퇴계가 진성(眞成) 이씨였다. 이휘녕(李彙寧)은 호가 고개라는 사람인데, 퇴계의 종손(宗孫)이다.
그러니깐 근암공의 묘갈명을 퇴계의 종손이 썼다. 이건 권위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수운의 아버지 근암공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 종손 古溪 李彙寧이 수운 아버지 근암공의 자세한 묘갈명을 썼다는 사실은 영남유림(남인계열)에서 수운집안의 정통적 위상을 입증하는 대사건이다.
어떤 면에서 수운에게 이것은 엄청난 패러독스다.
근암이라는 분은 아주 어마어마한 대산 선생 문하에서 정통으로, 영남 최고 유림의 맥을 이은 분이었다.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
대과 급제하여, 연일 현감, 영남유림의 총수
수운의 아버지 근암이 14세 때 만나 배움을 얻음.
그러니깐 영남 유림들이 볼 적에, 그 물에서 수운 같은 놈이 나왔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가 없는 반역이었다.
수운의 삶은 영남 유림에 대한 전승(傳承)과 반역(反逆)의 패러독스다.
<도올심득 동경대전> 160~191쪽 참조
여태까지 우리가 수운이라는 사람을 생각할 적에 이러한 조선 사상사의 맥락을 이해 못했다.
근암공은 수운을 63살 때 낳았다. 다 늙어서 낳았다. 삼취(三娶)에다가 재가녀의 손이니깐 그 동리에서는 실제로 서손 취급을 했다. 용담이라는 동네를 가보면, 아주 평온하게 아름다운 동네로 보인다.
경주 현곡면 가정리(稼亭)
수운이 태어난 곳
그러나 수운이라는 사람은 거기서 불행했다. 서자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근암은 63세에 자기가 얻은 아들을 손에 흙 때 하나 못 묻히게 하면서, 수운이 17살 돌아가실 때까지 그냥 공부만 가르쳤다. 그리고 딱 돌아가셨다. 그러니깐 수운이라는 사람은 17살 때까지 근암을 통해서 주자학, 퇴계학의 정통이론을 엄청나게 배웠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수운 선생은 하늘에서 계시를 받고, 상제(上帝)를 만난다. 몸이 떨렸으며, 영부를 받는다. 그리고 영부를 먹여보니깐 어떤 자는 낫고, 어떤 자는 안 낫고 하여, 결국 알고 보니, 영부를 받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딸린 것이라고 한다. 그 사람의 성경(誠敬)에 딸린 거라고 말한다.
此非受人之誠 敬耶?(차비수인지성교야)
이 성(誠)과 경(敬)이라는 말이 바로 주자 정통 퇴계학을 하신 대산 이상정 선생의 핵심적 글자이다. 이해가 되는가?
誠敬二字 지켜내니
차차차차 닦아내면
無極大道 아닐런가?
- 도수사-
이건 확실한 것이다. 동학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결국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서 꾸준히 우리 민족이 닦아온 플레타르키아, 민본의 합정리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 = 민본(民本), 서양의 근대성을 대치하는 개념
<도올심득 동경대전> 44쪽
서구적으로 말한다면 근대적 인간을 추구하려고 노력한 것의 몇 배가 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수운의 사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가? 나도 어머님이 돌아가시니깐 천지간의 탯줄이 딱 끊어져서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난 그런 느낌을 처음 느껴보았다.
그런데 수운은 17살 때 그것을 느낀다.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동리에서는 서자취급을 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귀하게 기르고, 학문을 가르쳐 주고, 아들을 대접받게 만들어 주고, 보호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용담가 등을 보면, 우리부친 가엽다 등 자기 아버지 이야기만 하지, 어머니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는다.
가련하다 이내부친 餘慶인들 없을소냐 -용담가-
수운의 용담유사를 보면, 전부 아버지 이야기만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딸깍 돌아가셨다는 것이 수운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만약에 아버지가 서른 살까지 살았다면, 수운은 별 볼일 없는 놈이 되었을 것이다.
17살에 딱 돌아가시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영남 유림의 썩어빠진 병호시비(屛虎是非)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 병호시비(屛虎是非)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의 병산서원(河回)과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호계서원(安東)간의 기나긴 족벌싸움.
‘리기(理氣)? 웃기지 말라! 리기(理氣)가 뭐냐 이거야! 우리 아버지는 이기(理氣)를 가지고 평생 살았지만, 나는 퇴계 정통이고, 주자 정통이고 다 싫다!’ 이거였다.
‘지금 세계가 개벽될 판인데, 이런 거 가지고 영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움질이나 하고 있다니!’ 이런 생각이었다.
여러분들이 내 말을 깊게 아셔야 한다. 동학은 영남에서 나왔지만 영남의 유림이 수운을 죽였다.
영남의 폐쇄적인 보수성이 오늘날까지 150년 동안 그대로 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TK가 거저 TK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모든 현상은 이렇게 역사적인 연원(淵源)이 있는 것이다. 거저 되는 게 아니다. TK가 좋다, 나쁘다가 아니다.
영남의 보수성은 왜 생기느냐? 영(嶺)의 남쪽을 영남이라 한다. 그 영(嶺)이 바로 조령이다. 문경새재라고 한다.
@ 조령(鳥嶺)
새재. 사람은 못 넘고 새만 넘는 높은 령이라는 뜻
이태백의 시에서 왔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영남 지역은 조령으로 가려져 있다. 영남 지역은 폐쇄되어 있다. 호남은 서울서부터 툭 터져 있다. 거기는 평평한 평야이다. 그래서 기호(畿湖)라고 한다. 사실 전라도는 폐쇄적인 곳이 아니다. 그래서 그곳은 더 당했고, 지주새끼들이 호남에 살지 않았다. 부재자 지주가 많다. 서울에 살면서 곡창에서 나오는 것을 빼다가 쳐 먹고 살았다.
그런데 영남은 토호들이 영남에 살았다. 그래서 영남이라는 곳은 지금도 그 폐쇄성이 있다. 어마어마한 폐쇄성과 보수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역자인 수운이 나온 것이다.
영남에서는 자기들의 최 핵심 본산에서 반역도가 나오니깐 살려둘 수가 없었다. 수운은 절대 관(官)에서 죽이려 하지 않았다. 서울로 호송되었다가, 다시 내려 보냈다. 그러나 영남유림들은 끝까지 죽이려했다. 그런 반역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학으로 몰아 죽였다.
그러나 최수운은 평생을 통해서 서학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서학의 죄목으로 죽는다. 영남의 유림에게는 서학이라는 죄목이야말로 가장 반역적이라 덮어씌우기 좋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동학의 역사이다. 수운이 살다가 죽은 삶의 아이러니와 비극 속에 오늘 우리나라의 비극이 그대로 있다. 우리 역사의 보수성에는 뿌리 깊은 이유가 있고, 아주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조선조 500년을 통해 형성되어 온 것인데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다 있다.
이퇴계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퇴계의 학풍이 어떻게 내려왔고, 지금 수운의 인생이 이퇴계의 학풍에 어떻게 걸려있는가? 이걸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문제까지 다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이러한 보수성의 틀을 깨고,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가려 하고 있다. 그런 변화를 국민 대중이 만들어 가고 있는 역사이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 민중이 얼마나 위대한가? 오늘날 우리 역사를 생각할 적에 이러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수운으로 끝난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의 미완성 교향곡을 우리는 지금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10. 충고
저는 마지막으로, 현 정국을 주도해 가고 계시는 노무현대통령에게 세 가지만 충고의 말을 드리겠다. 오늘의 역사는 개벽의 역사를 우리 민중이 만들어가고 있고, 갈구하고 있다.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 노무현대통령이 있다.
첫 째로 내가 권해드리고 싶은 말은 말을 적게 하라는 것이다.(少言)
지금은 말로써 역사를 만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 분은 대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대권을 정당하게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 없고, 행동으로만 자기의 바른 가치관을 국민에게 보여주면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말은 하지 마시고, 직접적으로 국민들과 부딪치는 기회는 피하라. 그리고 정확한 행동으로써 역사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이 되어 주었으면 싶다. 이 말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호문(好問)이다. 계속 자기 생각으로 정치하려 하지 말고 계속 물으시라. 물어서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많은 전문가들이 있고, 각 분야에서 배울 것이 많다. 밑의 직원들이나 부하들한테 브리핑 받아서는 세상을 알 수 없다. 정말, 정말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 물어서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위대한 정치가가 된다.
예를 들어 국무회의를 해도, 자기 스타일로 국무회의를 끝내면, 그 다음부터 장관들이 자기 말은 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저 사람 스타일로 회의가 끝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진정한 자기 내면의 이야기는 안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정치는 점점 국민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갈 수 있다. 그러니까 항상 물으라. 호문(好問), 묻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치대(治大)이다. 작은 것에 신경 쓰지 말고, 큰 것만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개벽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틀을 잡아가는 데만 전념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한테 호문해 가면서 작은 데 신경 쓰지 않는 대통령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역사의 진정한 큰 틀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새로운 역사 패러다임이 형성되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제가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간절히 호소한다. 우리 역사는 희망이 있다.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관과 비난과 조소로 역사를 바라보지 말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참여해서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너무도 우리의 역사를 평가하는 데만 익숙해 있다. 이제는 우리가 참여해서 만들어 가고 ,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분명히 우리 역사는 희망이 있다. 경제 문제도 해결 될 것이고, 북핵 문제도 해결될 것이고, 미국과의 관계도 재조정될 것이다. 모든 것이 주체적으로 우리의 삶이 개벽되어, 모든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 역사는 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절호의 기회에 우리 국민들은 깨여서, 단합해서, 하나가 되어 만들어 가야 한다.
수운 선생이 말씀하기를, ‘衰運이 지극하면 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 하였던가?”라고, 권학가에서 말씀하셨다.
衰運이 지극하면 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 하였던가 - 권학가-
결국 역사는 쇠운이 다하면 성운이 오게 되어 있다. 우리 역사도 얼마나 2세기 동안 시달렸는가? 쇠운이 다했기 때문에 성운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현숙한 모든 군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동귀일체, 한 몸이 되는 데로 돌아가야만 그 성운이 온다.
同歸一體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필연적인 법칙이 있거나, 하나님이 주관해 가는 역사가 아니라 꿈을 가진 인간들이 창조해가는 역사이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는 시민들이 모두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역사이다. 그리고 시민의 제일 덕성은 자유가 아니라 협동이라는 것을 말씀드린다.
The prime virtue of a citizen is not freedom but cooperation. -도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