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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으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정자가 사용되지 않아 자연히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세조 때에는 후원좌우에 연못을 파게 하였다는 기록이 세조실록 5년 9월26일 기록에 보이고 또 세조 7년 11월에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열무정"은 세조 5년에 판 연못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종 때에도 후원에서 습진(적을 뒤쫓아가 공격하는 연습)이 있을 때 이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궁궐지에는 "열무정" 북쪽에 사정기를 쓴 비석을 세워둔 비각이 있다고 하였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 재위 1년(1505) 5월에는 새로 대를 쌓을 것을 명하였으니 이것이 서총대이다. 돌을 10자 높이로 쌓고 주위에 돌 양쪽 강에 배들을 띄우게 난간을 둘렀으며, 1,0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로 만들었다. 또 대 앞에는 큰 엿못을 파게 하였는데 감독만 900여명이고 일꾼들은 수 만명 이었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남으로써 공사는 중단되었고 중종 때 모두 철거되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창덕궁 후원에 일어난 일들은 이들말고도 성종 8년 (1477) 3월 3일 선공감에 명하여 후원에 채상단을 쌓게 한일도 있으니 이는 왕비가 양잠을 장려하던 일과 관계가 있으며 뒷날 1911년 후원의 주합루 서쪽 서향각에 양잠소를 만들게 한 일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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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 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 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화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2/3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부용정에 새겨진 물고기)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뒷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바치"라 불렀다. 부용정 화계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 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형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하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젖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천 떨기 고운 자태 아름다운 놀 흐르고 십리에 퍼진 맑은 향기 사향을 터트린 듯 낭원의 신선들 푸른 일산 펄친듯 대라천 일천 부처 향성에 싸여 있듯. 붉은색 푸른색 어리 비쳐 맑은 물에 드리웠고 꽃도 잎도 향기로워 발속에 스며드네 활짝 핀 꽃봉오리 삼천궁녀 취한 볼이요 연잎의 빗방울은 오백 나한 염주알이라. 거북이 놀고 고기 헤엄치는 맑디 맑은 가을 물속이요 이슬 짙고 바람 좋은 서늘한 초가을일레. 부용정 북쪽으로는 넓다란 장방형 연못이 있다. 이 방지의 크기는 세로 34,5m 가로 29.4m나 되는데 가장자리는 장대석들을 바른층 쌓기로 하여 마감하였다. 또 못 가운데에는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둥근 섬이 하나 있다. 연못이 네모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하는 천원지방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못은 대개 네모나고 또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하나씩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 무왕때 기록을 보면 "궁궐남쪽에 못을 파고,20여리 밖으로부터 물을 끌어드리고 네 가장 자리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방장 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네 가장자리라는 것을 바로 못이 네모난 방지임을 말해 주고 방장 선산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 봉래, 영주의 세 선산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사상이 일찍부터 정원 조영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해준다. 곧 부용지의 조영에는 음양론, 도가사상 등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오래된 조형 원리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용지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르고 또 서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연못 서쪽에 있는 용머리의 석루조로 들어오는데 180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는 석루조가 없고 가운데의 섬도 지금보다 훨씬 작으며 배가 2척 떠 있다. 연못의 가득찬 물은 동쪽 연못 가장자리에 뚫어 놓은 수구로 간다. 그리고 부용정 쪽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는데 한 돌에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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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문 낮은 터부터 주합루가 자리잡은 위 터까지는 중앙에 놓은 돌계단 좌우로 장대석 바른층 쌓기 한 석단들을 여러층 놓아 마무리 하였다. 이 석단에는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고 "동궐도"에서 살펴보면 어수문 좌우의 작은 협문으로 넝쿨을 말아 올리는 시설을 하여 여기에 푸른 식물들이 뒤덮여 있어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다. 이런 시설물 곧 취병은 "동궐도"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곳 어수문 양쪽에서와는 달리 그 길이가 짧고 전각의 안뜰에 설치되었다. 어수문 양쪽으로 둘러친 긴취병은 어수문 위쪽 주합루의 공간과 부용정 부용지의 아래 공간을 커다란 2개의 공간으로 갈라 놓는 역할을 한다. 주합루 앞쪽 동쪽석단 위에는 운두가 놓은 장방형 기단석을 놓고 이 위에 상중하 세 부분으로 나눈 한 덩어리의 커다란 직육면체의 돌을 얹어 놓았다. 아래위는 중앙부보다 돌출되고 사면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기고 중앙에 들어<구름모양의 계단: 구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왕과 백성을 연결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간 부분은 안상을 새겨 치장하였다. 석물은 한떄 이런 석물 자체만으로서 정원의 한 장식품이 되는 수석으로 알려졌으나 과학사 분야의 연구로 낮과 밤의 시간을 알게 해주는 시계를 얹어 두던 하나의 받침돌 곧 대석임이 밝혀 졌다. 이것의 올바른 이름은 "일성정시의대"이다. 동궐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후원 곳곳에 해시계가 그려져 있는데 그만큼 당시에 궐밖의 종루와 자격루에만 의존하지 않고 생활하는 가까이에서 시각을 알게 하였던 것을 말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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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에서 28년(1828)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을 1년 앞당겨 1827년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불로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넓은 네모난 연못이 있고 이 복쪽 연못가에 애련정이 자리잡고 있다. 애련정은 숙종 19년 (1692)에 지은 것이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사모지붕 중앙에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기둥과 창방 아래에 낙양판을 붙여 정자 안에서 밖으로 내다보는 경관이나 정자를 바라볼 때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비맞은 연잎 위에 진주알 흩어지고 활짝 핀 연꽃은 단장한 고운 볼일레 정자는 여래 자리에 가깝고 못은 태을주를 띄웠네 꽃이 사랑스러워 군자라 일컫고 거북이 나이를 성상께 바치네 푸른 연대로 어주를 드리고 찬란한 놀 천화의 향기 흩도다 | |
"동궐도"를 보면 애련지와 연경당 앞쪽의 작은 연못사이에 "어수당"이라 편액을 건 | |
팔작 기와집이 한 채 있었고 또 연경당 자리에는 지금의 연경당과는 다른 "ㄷ" 자 평면의 연경당과 개금재 그리고 행랑에 우뚝 선 장락문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동궐도"와 기록을 살펴 볼때 지금의 연경당을 본래의 연경당과 개금재 자리에 지으면서 당호와 문 이름을 그대로 따론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먼저 살펴본 의두각,기오헌 등이 모두 익종의 왕세자 시절에 지은 것으로 이곳 금마문과 불로문 안쪽 넓은 영역은 주로 익종이 왕세자 시절 즐겨 생활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
불로문 앞을 지나 후원의 안쪽으로 접어들면 왼쪽 꺾인 곳에 연못과 연못가의 정자를 만나게 되니 이것이 반도지라 부르는 연못이고 정자가 관람정이다. 이 반도지는 그 모양이 한반도와 모양이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 나쁜 의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래의 연못모양은 "동궐도형"에서 보면 크고 작은 원형이 3개가 한곳에 모여든 마치 호리병과 같은 모습이었고 또 동궐도에는 아예 이 지역에 연못이나 정자가 없기 때문이다. | |
그리고 반도지의 배치가 북쪽 함경도쪽을 남쪽에 놓고 남쪽 경상 전라도 지역이 북쪽에 오도록 한 것으로 보아 고종때 호리병 모양의 연못을 의도적으로 고친 일본인들의 속셈을 알 수 있다. 곧 일본인들이 반도지를 만든 것은 한국의 옛 광대하였던 만주 일대의 고구려 땅 등을 관심 밖으로 하기 위해 한반도를 강조하면서도 거꾸로 뒤집어 좋아 저주하고자 한 것이다. 이연목의 가장자리에는 관람정이 서 있다. 그 평면이 부채꼴이기 때문에 [궁궐지]에는 "선자정"이라기록되어 있다..6개의 초석 위에 단면이 동근 기중을 세웠는데 4개의 기둥은 연못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현재 까지로는 평면이 부채꼴 모양인 정자로는 이 관람정 하나 뿐이다. 관람정 기둥에도 주련 들이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구슬 발 비단 기둥에 황곡이 에워싸고 비단 닻줄, 상아 돛대에 백구가 날아가네 원앙새 조용히 은당수를 쪼으고 새끼 제비 시원스레 전우의 바람에 날으네 무지개 다리 돌아서 비단 전각에 닿았고 그림배 물에 뜨니 봉래산에 가깝네. | |
태액지 못가에서 옥술잔 보내고 파향전 전각 위에 붉은 연 머물도다 천 그루 나무에는 용과 뱀이 휘감긴 듯 백 갈래 샘물은 패옥이 울리는 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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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 |
남원에 풀 꽃다우니 수뀡이 졸고 있고 성근 솔 물에 가리니 생황이 연주되네 숲 아래 물소리는 왁자하니 웃음소리 바위 사이 나뭇빛은 은은한 방안이네 화각의 실바람은 버들까지 스쳐가고 은당의 물굽이는 이끼 반쯤 머금었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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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언덕 아래를 굽어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정면에 돌계단을 두어 마루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면에 평난간을 둘렀는데 석계있는 정면의 중간만 난간을 두르지 않았다.정자정면 조금 떨어진 곳의 장방형 석지에는 거북이 한 마리를 놓아 정자를 바라보게 하였고 빙옥지라 새겨 놓았다. 정자이름 '청심정'과 걸맞게 서쪽 골짜기에 있는 빙천과도 잘 연계된다고 하겠다. 산앞에 늘어선 솔은 천겹이나 푸르르고 물 가운데 찍힌 달은 한 알의 진주일레 암혈의 계수나무 이슬은 선인장의 이슬이요 밭두둑에 핀 난초꽃은 옥병의 얼음일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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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모아 흘러내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리는 가장 낮은 터에까지 몇 개의단으로 나누었다. 냇물이 일단 석루조를 통하여 한 단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 이곳 천연의 넓적한 바위에 흠을 파서 일단 그곳에서 물을 모았다가 다시 아랫단으로 흘러보내게 하였다. 이런 수법은 옥류천의 물굽이와 작은 폭포를 만든 수법이나 또는 경복궁 향원정 샘터에서의 수법들과 모두 일맥 상통한다.그리고 이곳 빙천의 냇물이나 이 골짜기에 흘러내리는 물들은 작은 냇물을 이루어 연경당 서쪽 행랑 마당 밑을 통과하여, 행랑채 밑으로 흘러나와 연경당 장락문 앞으로 흐르고 있다. | |
그 첫 번째 만나는 정자가 취한정인데, 정자 앞쪽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안쪽에 몇 채의 정자들이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취한정은 동궐도에 그려진 것으로 보아 1827년 이전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정자는 임금님이 옥류천 어정에서 약수를 들고 다시 돌아 나올때 쉴 수 있게끔 세운 소박한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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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정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온뜨락의 꽃그림자는 봄 밤에 머문 달이요 정원 가득한 솔 소리는 밤에 듣는 파도일레 구천의 이슬 고여 금반에 무겁고 오색구름 드리워 푸른 일산에 엉기었네 화려한 부채 처음 펄쳐 옥좌로 옮기고 꽃등 번갈아 들어 주진에 비치네 천자 어가는 아득히 천문 버들길로 나오고 각도에서 머리 돌려 상림원의 꽃 보누나 이슬 젖은 복숭아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하늘 높이 나는 학떼 들에게 빌려 주리. 물에 스치는 버들개지 천 만 점네. | |
온 궁원꽃이 피니 봄날이 길고 팔당이 일없으니 소서가 드물 도다 이슬 기운은 새벽에 청계궁 달과 연했고 패옥소리 아스라히 자미천에 들려오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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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정 과 취한정 앞쪽을 흐르는 옥류천은 북악산 동쪽산줄기의 하나인 응봉 산록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류와 어정을 파서 흘러나오는 물로 작은 시내가 되어 흐르게 하였다. 특히 어정 옆 본래부터 있던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 앞쪽에는 물이 돌아 흐르게 둥그런 홈을 팠으며, 돌아 흐른 물은 다시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이것을 만든 때는 인조 14년(1636)이다. 바위에는 옥류천 이라고 인조임금이 쓴 글씨를 새겨 놓았고 또한 숙종의 시를 1670년에 새겨 놓았는데, 이시를 풀이하면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길은 300자나 되고 저 높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네/ 이를 보노라면 흰 무지개가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 번개를 치네" 라는 뜻이 된다. |
어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옥류천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는데 이 다리 아래 물 속에는 작은 디딤돌 하나와 돌확이 하나 있다. 돌확은 네모났는데 가운데 물 괴는 곳은 둥근 원형으로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디딤돌은 닫고 이 돌확에 가득찬 물로 손을 씻으면 그 시원한 맛은 한여름 무더위를 잊게 해준다. 어정은 돌난간을 두르고 정갈하게 꾸몄는데 "동궐도"에는 옥류천과 오언시만 있고 어정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동궐도형"에도 어정은 보이지 않고 이 먼 거리에 못으로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떄 분명 고종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어정 안쪽으로 청의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궁궐 안에서 초가 지붕을 한 오직 하나뿐인 특이한 정자이다. 정자의 꾸밈새는 지붕 아래는 극히 아기자기하여 공예적이고 또 단청을 하여 화사하기 그지없는데 지붕만은 초가로 하여 소박하기 그지없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임금님은 이 정자 앞쪽에 만든 논에 손수 모를 내어 벼를 심고 또 그 수확으로 얻은 볏짚으로 이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여 농사의 막중함을 행동으로써,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청의정 주련의 시는 다음과 같다. 신선 이슬은 길이 요초에 엉켜 푸르르고 채색 구름은 깊은 숲에 머물러 오래 배회하네 | |
지붕 가운데에는 절병통을 놓아 마무리하였고 바닥 기둥 밖으로는 아자살로 궁창부를 꾸민 평난간을 둘렀다 | |
태극정 아래쪽의 농산정은 정면 5간, 측면 1간의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룬 특이한 정자인데 2간이 대청이고 2간이 온돌방 1간이 부엌으로 되어있다. 이정자의 용도는 임금께서 청의정을 비롯한 옥류천 지역에 나왔을 때 다과상 등을 마련하던 곳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집 모양도 일반 행랑채 모양으로 소박하게 구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벌대 낮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창을 통해 보니 운무는 옷 위에서 피어나고 휘장 거두니 산천은 거울 속에 들어오네 버들가 새벽 누각에 꾀꼬리 소리 들여오고 꽃속의 비 갠 처마 끝에 제비가 날으네 | |
신선원전은 1927년 일제가 원래의 선원전에 있던 왕들의 어진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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