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간(洗手間)의 사탕비누
강성희(리디아)
따뜻한 햇살이 드는 앞마당 세수간에 여섯살짜리 계집아이는 몇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있다. 따뜻하다고는 하나 담장 밑의 풀들이 이제 막 어미야 애비야 하며 새싹을 내미는 초봄이다. 아직은 손이 시린 찬 물에다 빨래 같지 않은 작은 양말 한 켤레를 하루 종일 헹구었다가 비비고, 또 헹구었다가 비비고 있다. 빨갛게 시린 조막만한 손에는 조막만한 유리알 같은 물체가 잡혀져 있다. 그 물체를 양말에 대고 문지르고 비빌 때 마다 빨래에서는 하얀 거품이 작은 뭉게구름처럼 일어난다. 사탕비누다. 계집아이는 사탕비누를 한번 쳐다보고 눈송이 같은 햐얀 거품을 한번 바라보며 신기한 듯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비누 거품에 푹 빠져버린 이 계집아이의 모습은 60년 쯤 전의 내 그림이다.
그 사탕비누는 내가 비누와의 인연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최초의 비누이다. 그 날 내가 반쯤은 닳게 했던 그 비누는 아래채에 세들어 사는 새댁네의 비누였다. (외출에서 돌아오신 엄마한테 야단을 맞으면서 그 비누가 우리 비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윳빛 우리집 비누와는 어딘가 색달랐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동글납작한 모습이 꼭 빨간 드롭프스 사탕을 커다랗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커다란 보석 같기도 했다. 모양도 예쁘고 냄새도 향기로운 사탕비누, 그리고 부드럽게 일어나는 하얀 거품은 내 마음을 빼앗았다. 그 날 이 후 아래채 새댁은 비누곽을 세수간에 흘려 두지 않고 아래채 툇마루에다 챙겨 두었다.
비누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우리집 세수간에는 빨래비누와 세수비누를 챙겨 두는 선반이 있었다. 그 무렵 얼마전 앞마당에 수도가 들어오던 날, 아버지께서는 낡은 세수간을 정비하시며 한 쪽에 선반을 만드셨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비누가 비에 젖지 않도록 두 단으로 설계하셔서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나무로 만든 작은 선반이었다. 우리 남매들은 비누를 쓰고 그 선반 윗쪽에 비누 그릇을 올려 두지 않으면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다. 세수간에서는 빨래와 세수만 하는 것이 아니고 쌀도 씻고 푸성귀도 씻으며 물을 쓰는 모든 일은 그 세수간에서 했다. 그러다 보면 물이 튀어 비누가 물에 불어 쉽게 닳아 없어진다고 엄마는 늘 비누를 마른 자리로 챙기셨다. 덕분에 우리집 비누는 언제나 쨍쨍하게 말라 단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에도 아래채 새댁네의 사탕비누에 대한 미련이 있었지만 어릴 때는 한 번도 그 사탕비누를 써보지는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1,2학년 쯤 되었을 성 싶은 어느 방학 때 나는 시골 큰집에서 다시 그 사탕 비누를 보았다. 몇 달에 한 번씩 들른다는 방물장수가 지고 온 보따리 속에는 사탕 비누며 세탁비누, 동동 구리모, 불란사 색실 등 여자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혼기를 앞두고 집에서 규방 수업을 하고 있던 사촌언니는 할머니 몰래 광에서 쌀을 한됫박 퍼다 주고 사탕비누며 구리모를 바꾸는 것을 보았다. 언니는 그 비누를 자신의 방에다 감추어 두고 혼자서 썼다. 그 당시 시골에는 우리집에서 쓰는 우윳빛 세수 비누는 아예 없었다. 그냥 빨래 비누가 세수 비누였다. 정작 빨래 비누는 비린내가 많이 나고 잘 물러져 마치 밀가루 반죽을 뭉쳐 놓은 것처럼 두리뭉실한 누런 색깔의 비누였다. 시골 친구들은 그 비누를 X 비누라고 불렀다. 시골 사람들은 그 비누도 아껴가며 썼다. 내가 우물가에서 걸레라도 빨라치면 할머니께서는 ‘사분칠은 그만하고 방매이로 탕탕 두드리라, 그라마 땟국물이 잘 빠진다.’하고 참견을 하셨다. 비린내가 나는 그 사분이라는 빨래비누는 정말 때를 잘 지웠다. 어지간한 땟자국은 비누칠을 슬쩍만 하고 손으로 비벼서 거품을 만들어 주면 흰 빨래는 더 하얗게, 물색빨래는 더 고운 물색이 되며 천이 가진 본 바닥의 맑음을 찾아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감동적이었다. 내가 좀 더 자라 여고생이 되었을 때는 하얀 교복과 운동화를 빨며 자신을 닳게 해서 상대의 오염을 지워주는 비누의 기능을 자기 희생,해탈의 경지다. 하고 비약하여 찬양했다.
지금은 우리집에 내가 어릴 때 동경했던 그 사탕비누가 귀찮을 만큼 흔하다. 피부와 건강에 좋다며 유기재료와 아로마 향을 더한 사탕비누를 직접 만들어 쓰는 사람들도 많다. 개인이 공방에서 비누를 만들기를 배우고 예쁜 비누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그렇게 선물을 받은 사탕비누는 다양한 향기와 모양과 빛깔로 개성도 제각각이다. 하물며 비누공예라고 하며 비누 꽃다발도 만들고 비누조각품도 만든다. 비누도 개성의 시대를 맞은 것 같다. 그렇지만 예전의 고형 비누의 전성시대는 지나가고 지금은 다소 사양길에 든 듯 하다. 우리집만 하더라도 선물로 받은 향비누가 여기 저기 굴러다닐 뿐 고형 비누를 사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세수는 폼클렌져라고 불리는 크림타입의 미용세제를 사용한다. 머리를 감을 때 비누 대신 샴푸가 대신 한 것도 40년이 되었다. 세탁은 가루비누나 물비누라고 불리는 세탁기 전용세제에게 자리를 내 주었고 설거지도 설거지 전용세제가 있고 과일 야채를 씻는 전용세제도 있다. 빨래비누는 한 장을 사면 걸레를 빨 때만 가끔 사용하니 비누가 말라서 갈라질 정도다.
살아있는 것만 진화하고 생명을 다하고 죽고 사라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갓 비누라는 종류의 물건 하나에도 생명이 있는 듯 하다. 양잿물을 세제로 사용하던 그 옛날 이후, 비리고 투박한 빨래비누를 거쳐 향기로운 사탕비누, 부드러운 우유비누, 그리고 온갖 전용 세제에 이르기 까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던 고형 비누는 그 자취가 사라져 가고 있다. 무엇이나 그렇듯 사라져 가는 것들은 추억을 남기고 그리움을 남긴다. 이미 사라진 것은 더 그립고,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더 애잔하다. 햇살드는 옛집 앞마당의 세수간이 그립고, 세수간에서 하루 종일 거품을 내고 헹구던 빨래놀이가 그립다. 아래채 새댁의 사탕비누가 만들어 주던 매끈매끈하던 손의 감촉과 함께 생크림처럼 부풀어 오르던 마법같은 하얀 거품, 달콤한 딸기향이 그립고 비누놀이 하나로도 하루 종일 행복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끝) 2019.09.24.
첫댓글 비누에 대한 아기자기한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엣날 할머니들은 비누보다 사분이라고 했지요. 사탕비누가 나온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것 같군요. 사탕 비누가 처음 나왔을때 어린 내가 보아도 먹음직스러울 정도로 빛갈과 향이 좋았습니다. 빆에 둔 비누를 쥐가 깕아먹어 반쪽이된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어린시절 비누에 대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날로 발전하는 세탁문화와 비누의 사용에 대하여 우리들은 뒤쳐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보물 같은 추억이내요.
어릴적의 추억을 잘 묘사했기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그 그리움들이 모여 오늘의 삶이 되고,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훗날 다시 하나의 전설처럼 변하겠지요.
그리고 한즐의 글이되어 그리움으로 돌아 오겠지요.
잿물에 빨래하던 그때 그 시절을 지금의 아이들이 상상도 못하듯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비누에 대한 옛날 일을 추억하게 됩니다. 소득 수준의 변화에 따라 그동안 비누도 여러 형태로 많이도 변신하였을 느끼게 됩니다. 아련한 옛시절 비누에 얽힌 일을 떠올리며 잘 읽었습니다.
사탕비누와의 첫 기억이 비누 향기처럼 상큼하고 아름답습니다. 비누는 너무 흔하고 세제류는 너무 다양해서 오히려 혼란스런 요즘입니다만 비누 거품과 감촉이 주는 행복감은 여전한 것도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탕비누의 추억은 머잖았던 우리들의 생활속 이야기입니다. 사분을 아껴쓰라고 하신 할머니의 말씀 우리들은 그렇게 아껴셨던 할머니들의 씀씀이로 인해 발전해왔습니다. 초등학생들 거의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와의 연락이 닿아야 되어야하고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 사줍니다. 우리아이들이 어린시절 70년 초반 열집중 한 집정도 전화가 겨우 있었습니다.온 동네 사람들이 아주 급하면 사용했던 동네 편의시설이기도 했습니다. 갖가지 지나온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사탕비누란 말은 처음들어 봅니다. 선생님을 글에서 비누의 변천사와 용도별 종류를 많이 알았습니다. 저는 비누하면 세수 비누만 생각이 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니 비누에 대한 어릴적 기억이 한편의 수채화처럼 그려집니다. 저는 냇가에서 빨래를 빨던 검정비누가 생각납니다. 걸래에 검정비누로 비벼 방망이로 두들겨주면 걸래는 깨끗하게 변신되었지요. 그리고는 동네 언니들과 냇가에서 뛰어놀다 보면 반나절지나 집에 가곤 했습니다.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