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선우의 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사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전한의 원제 시대,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의 여성을 알씨(흉노의 말로 군주의 처)로 달라고 해, 왕소군이 선택되어 그의 장남을 낳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변방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대로 아들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둘째 딸을 낳았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여,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황량한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의 땅에서, 왕소군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땅을 그리며 시를 남겼는데, 그 시구 중에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이 시구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그리움의 인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서경잡기》에 따르면, 원제는 흉노에게 보내는 여성으로 후궁 중 가장 추한 여성으로 선택하기 위해 초상화에 그려진 가장 보기 흉한 여성을 선택한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던 장인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던, 왕소군은 가장 보기 흉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왕소군이 선택된 것이다. 황제에게 이별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원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겼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고 말았고 격노한 원제는 화상의 목을 쳤다고 한다. 그 후 호한야 선우가 죽고, 횽노의 관습대로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후한 시대의 《서경잡기》(西京雑記)에 실렸던 것이, 진나라 때 왕명군사(王明君辞), 원의 마치원의 잡극 한궁추(漢宮秋) 등으로 작품화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9%95%EC%86%8C%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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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 4대 미인 - 왕소군
2007-07-25 12:26:06
중국어에서는 용모가 출중한 여인을 침어낙안, 폐화수월(沈魚落雁 閉花羞月)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미모가 너무 뛰어나 물 위에서 놀던 물고기가 부끄러워서 물속 깊이 숨고 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가 아름다움에 반해 날개짓을 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며 이쁘게 핀 꽃이 무색하다 생각되어 다시 꽃잎을 닫고 휘영청 밝은 달이 구름뒤에 숨는 다는 뜻이다.
5천년 중국역사에 보면 많은 미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여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의 4대 대표미인으로 꼽히는 미인들이 있으니 춘추(春秋)말엽 월나라의 왕(越王) 구천(勾踐)이 미인계를 쓰고저 오나라의 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친 서시(西施)와 한(漢)나라의 원제(元帝)가 흉노와의 평화를 위해 흉노족에게 시집보냈던 궁녀 왕소군(王昭君), 삼국(三國)시기 동한(東漢)의 왕위를 넘보는 간신 동탁(董卓)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양아들 여포(呂布)와의 관계 이간에 파견되었던 초선(貂禪), 미모에 반해 당(唐)나라의 현종황제가 후궁으로 삼은 며느리 양옥환(楊玉環, 훗날 귀비에 책봉되었기에 楊貴妃로 불림)이다.
왕소군(王昭君)은 전한(前漢) 원제(元帝)때 궁녀로서, 歸州 사람 왕양(王攘)의 딸이었는데 17세때 원제(元帝)의 궁녀로 뽑혀 궁중에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많은 궁녀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황제의 은총을 받을 기회를 갖는 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구중궁궐 심처에서 황제의 얼굴 한번 바라보지 못하고 평생 늙는 궁녀들이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궁녀를 채택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절차적인 모순으로 인하여 때로는 천하절색(天下絶色)의 미녀가 간택에서 제외 되는 경우도 있었다.
폐쇄된 공간인 궁궐 안에서 수많은 궁녀들은 거울 속에서 덧없이 늙어만 가는 자신의 용모를 바라보며 앙앙불락(怏怏不樂)하며 수심과 원한으로 얼룩진 기다림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동진(東晋)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당시 미녀를 좋아하기로 유명했던 원제(元帝)에게는 수 많은 궁녀가 있었는데 천자(天子)라 일컬어지는 황제의 체모에 직접 그 많은 궁녀들을 일일이 접견하여 품평할 수 없었으므로 궁중의 화가로 하여금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올리게 하고 그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미인을 선택하여 곁에 두었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부작용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궁녀들이 화가에게 막대한 재물을 바쳐 자신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그려 달라 부탁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폐단이 얼마나 심했던지 많을 때는 십만냥이요 적어도 오만냥이었다.
그러나 왕소군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자신의 용모와 뛰어난 비파 연주 실력을 믿었는지라 누가 뭐라고 해도 뇌물을 내어 놓지 않았다. 그녀는 모연수(毛延壽)라는 화가의 붓 끝이 바쳐지는 제물에 따라 얼마나 달리 간사하고 요악하게 변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왕소군의 초상화는 뇌물을 바치지 않는데 앙심을 품은 모연수에 의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아리따운 용모가 추하게 그려져 황제에게 바쳐졌다. 이로 말미암아 왕소군은 영원히 황제의 은총을 받을 대상에서 제외 되었고, 끝없는 기다림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라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던 흉노의 왕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BC31)가 한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기를 희망하여 왔다. 황실에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변방무마책의 일환으로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원제(元帝)는 하는 수 없이 궁중의 화가들이 그려 놓은 궁녀들의 초상화를 가져오게 하여 제일 못 생긴 궁녀를 골라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 하였다.
원제(元帝)는 선우의 사신을 접견하여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초상화를 보고 미리 정해 두었던 그 못생긴 초상화의 장본인을 불러 직접 선우에게 시집을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초상화의 장본인은 초상화 속의 그 못난 용모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최고의 절세가인이었던 것이다. 그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채(美彩)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원제(元帝)는 그녀의 미색에 반해 시집보내기로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이미 사신이 보는 자리에서 시집을 가라고 명하였으므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元帝)는 급히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보았는데 왕소군의 초상화는 본래의 모습과 천양지차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사마귀 같은 점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때야 화공 모연수에게 속은 것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다르게 그려진 초상화 때문에 왕소군을 놓친 것과 황제를 기만한데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 원제는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했고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를 비롯하여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들은 모두 참수되어 저자에 버려졌고 가산을 몰수당했다.
황제가 약속한 일이고 보니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왕소군은 선우의 사신을 따라 멀고 먼 북쪽 흉노의 나라로 시집을 갈 수밖에 없었다.
흉노의 땅으로 떠나가는 말 위에서 왕소군은 비파를 타며
"명아주 푸르러 무성하기도 한데(芳葉元黃)
꽃다운 잎은 원래 누른색이었다네.(有鳥此處)
새들은 그 곳에 깃들었다가(集于苞桑)
뽕나무 숲으로 모여든다지."
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고국산천을 떠나 흉노로 시집갈제 슬프고 원망하는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 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 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가 아름다움에 반해 날개짓을 하는 것을 잊고 있다가 땅으로 떨어짐)"이라고 하게 되었고 '낙안(落雁)'은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선우(單于)는 원제(元帝)가 왕소군을 하사함에 매우 기뻐하며 흉노의 관리들인 좌우현왕(左右賢王), 좌우곡려(左右谷), 좌우대장(左右大將),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 좌우대당호(左右大當戶), 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등과 같이 삼십리 밖까지 영접을 나와 왕소군을 맞아 국도로 돌아가 연회를 베풀고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은혜에 감사했다.
이 가냘픈 한 여인의 희생 때문이었는지 왕소군의 소위 '출새화친(出塞和親)'으로 '몇 년 동안 봉화의 불이 보이지 않고, 인민은 번성하고, 소와 말도 들판에 가득했다(數世不見煙火之警 人民熾盛 牛馬在野)'는 사서의 기록처럼 한나라와 흉노 간에 80년 동안 서로 침입이 없어 평화로왔다고 한다.
왕소군이 출가하던 해에 한나라 조정에서는 연호를 경령(境寧, 竟寧)원년이라 바꾸었고 흉노 측에서도 왕소군을 '호를 편안하게 한 선우의 비(妃)'라는 의미의 영호연지(寧胡閼氏)로 봉하였다.(일설에는 원제(元帝)가 영호연지(寧胡閼氏)의 이름을 하사했다고도 함)
이러한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서(漢書)에는 왕소군이 선우(單于)에게 출가한 후의 기록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왕소군은 영호연지(寧胡閼氏-閼氏는 흉노의 왕후를 뜻함)라 불리고 '伊屠智牙師'를 낳았는데 이 아들은 나중에 우일축(右日逐)왕이 되었다. 호한야(呼韓邪)는 즉위한지 28년 후인 건시(建始) 2년(BC 31)에 죽었다"
왕소군은 호한야(呼韓邪)에게 출가하여 2년 만에 남편을 잃었는데 흉노의 관습인 수계혼(收繼婚:父死妻其後母)에 따라 호한야(呼韓邪)와 흉노의 귀족 호연씨(呼衍氏)의 여식 사이에 태어난 조도막고(雕陶莫皐)가 선우(復株累若熉單于)가 되자 다시 아들 뻘인 새 선우의 부인이 되어 그와의 사이에 두 딸을 낳았다. 새 남편과의 생활 11년 만에 또 다시 선우가 죽자 그녀는 과부가 되었는데, 나이 불과 33∼34세였다. 그 후 그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서에 언급이 없다.
왕소군의 인생을 한마디로 잘라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중국인들의 가슴으로, 붓 끝으로 세세토록 꽃(芙蓉-연꽃)과 옥(玉)에 비유 되어 머나 먼 변경의 밖, 흉노 땅에 홀로 피어난 슬픈 정절의 표상으로 찬양되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가혹한 것이 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http://korean.cri.cn/460/2007/07/25/1@101709.htm
첫댓글 중국의 전통적인 초상화는 이른바 코드로 그리기 때문에 인물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위에 실린 미인들의 얼굴만 보더라도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요. 위의 그림은 아마 현대 화가들의 그림이지 싶은데요....?
초선이 아니고, 조비연(趙飛燕)인데...-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