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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48
12월19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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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루카 1,7)
<견뎌내기 힘들 때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의 이미지는 꽤나 경직된 분위기입니다. 징벌의 하느님,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 그래서 다가서기 힘든 엄한 아버지의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인들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악인들은 엄중하게 벌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늘 풀지 못하는 숙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죄한 이들의 고통, 의인들이 겪는 시련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의인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조금의 흠도 없이 살아가던 완벽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참된 ‘의인’인 두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형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머리 위해 얹어진 면류관’이란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들어가실수록 느끼실 것입니다. 잘 장성한 자식들, 제 갈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자식들은 부모의 가장 큰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자식 없이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어언 60이 넘어 70이 다되어 갑니다. 친구들은 수많은 손자손녀들을 품에 안고 ‘이제 다 이루었다. 더 이상 여한이 없다’며 감격해했습니다. 큰 소리로 많은 후손을 번성케 하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반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어떻습니까? 손자손녀는커녕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상황 앞에 서있다면 하느님 원망 엄청 했을 것입니다. 대놓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건 내리지 않건 상관없이 자신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제직에 충실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성전에 나아가 봉사했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인이란 손가락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런 두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늦었지만 아주 큰 축복을 내리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축복의 몇 백배, 몇 천배나 되는 축복을 내리시는데, 바로 구약 시대 마지막을 장식할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잉태입니다.
칠흑같이 어둔 밤을 견뎌내고 계시는 분들,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신 분들, 하느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탄식이 절로 나오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의 일생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도 낙관적인 신앙입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분, 우리의 불행을 못 본 척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행복에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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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벙어리가 되어야 말씀이 믿어진다>
부자가 될 것을 원하고 무언가를 원하면 꼭 이루어질 것임을 믿기만 한다면 꼭 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성공을 위한 책들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내용은 성경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9,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원하기만 하고 믿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믿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을 방해하는 요인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백만장자 시크릿’의 저자 하브 에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고 싶으십니까?”라고 물으면 모두가 “당연히 되고 싶죠.”라고 대답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적어보라고 하면 또한 엄청나게 많은 내용을 적는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적는 것들을 예로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부자는 탐욕스럽잖아요.” “돈이 전부는 아니죠.”
“벌었다가 다 잃게 되면 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하죠?”
“내가 돈을 많이 갖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내가 가진 돈 때문에 나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고소득자로 등록되면 나라에 엄청난 세금을 내야해요.”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뼈 빠지게 일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고생해서 돈을 벌었는데 건강이 나빠지면 어떻게 하죠?”
“내가 부자가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여기저기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달려들어 귀찮을 거예요.”
“강도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 자녀가 유괴범들에게 납치될 수도 있어요.”
“책임질 게 너무 많아져요. 그 돈을 다 어떻게 관리하겠습니까? 어휴, 골치 아파.” 그 외에도 줄줄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만 바란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 안에서는 그 믿음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그 바람이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만들며 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가고는 싶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갈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을 생산하며 삽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오는 이유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인데 자기 자신은 항상 생존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선 고생은 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대화하면 생존의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더 큰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에이, 몰라!”라며 생각이 주는 메시지를 끊어야합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가 될 즈카르야 사제가 등장합니다. 천사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라고 말하듯 즈카르야는 무언가 끊임없이 원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원했을까요? 자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이어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라고 말해줍니다. 이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즈카르야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우리와 같이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희망하는 것을 믿음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는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벙어리가 되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제발 자아와 대화 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와의 대화가 생각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어린이들은 우울증이 없을까요?
부모를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믿으니 부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굳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을 안 하니 삶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배는 사춘기 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 이후로는 자녀들이 생각이 다시 많아지고 그것은 부모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춘기를 기쁘게 보내는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새로운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춘기는 지속됩니다. 그것이 우울증입니다. 새로운 부모인 하느님을 믿어 그분의 소명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게 될 때까지는 누구도 그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해줍니다. 이 기쁨은 벙어리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을 때에만 오는 상급입니다.
벙어리가 되어야 부정적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믿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벙어리가 되는 길은 하느님께 수다쟁이가 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 하느님과 대화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와의 대화가 끊깁니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울함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자아와 굳이 오랜 시간 대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벙어리가 되어야만 말씀이 믿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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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5-25 :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고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 관한 묘사는 그들은 구약성경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잇는 후예라는 것을 암시한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게다가 둘 다 아이를 낳기에 너무 늙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라와 레베카, 라헬, 한나에게 그러셨듯이, 아기를 못 낳는 엘리사벳의 몸에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천사의 발현은 참된 사제가 오시리라는 것을 알리는 하느님의 현현(顯現)을 암시한다. 천사는 기적적인 출생과 아이에 대한 이름에 대한 예고를 하기 전에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13절)고 한다. 요한의 경우에는 그의 생부인 즈카르야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반면, 예수의 경우에는 요셉에게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찾아온다.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지어 준 아기 이름 요한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은총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은총, 하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세상에 선포하러 왔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했고 하느님은총의 기쁜 소식을 전했던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은총의 선포를 나타냈다. 이 때문에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찬 분이다. 어머니 배 속에서 뛰어 놀아 주님의 오심을 미리 알렸다.(루카 1,44 참조) 엘리야와 요한은 둘 다 독신이었다. 두 사람은 다거친 옷을 입었고 광야에서 살았다. 두 사람 다 정의를 지키다 왕과 왕비에게 박해를 받았는데,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에게(1열왕 19,1-3 참조)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에게 받았다.(마태14,3 참조)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에 오름으로써(2열왕 2,11 참조) 사악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요한은 순교를 당해 하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사악한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17절) 백성들을 불신에서 신앙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17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나이, 백발이 된 머리카락, 힘을 잃어버린 몸을 떠올렸다. 또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장차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던 즈카르야는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는 “말씀”을 잉태하실 수 있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25절) 나이 많아서 갖게 된 아들 때문에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으나 요한을 갖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님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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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삼손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기에 남편과 함께 하느님의 개입을 간청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할 아이의 탄생을 전합니다.
삼손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 인간 역사에서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된 사람이므로 관련법에(민수 6장 참조) 따라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그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는 먼저 관련 규정을 지키고 이어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 부모의 청원은 받아들여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통하여 신앙과 연관된 희망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의인들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삶의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느님께서 그 시련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였지만, 그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어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때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하고 말합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는 천사의 말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에게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하고 말합니다. 희망이 사라진 믿음이나 믿음 없는 희망이 사라진 즈카르야는 새 시련을 맞이합니다. 말씀이 실현될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는 시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라진 희망을 돌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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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9-20)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은, 루카복음에서는 첫 번째 복음 선포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즈카르야는 루카복음에서는 첫 번째로 복음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천사가 하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에서 첫 번째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라고 말하는데, 즈카르야가 청한 것은 ‘메시아 강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아들을 청하는 기도를 했겠지만, 늙어서는 아들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셨음을, 즉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세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분보다 먼저 와서”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 뒤에 바로 메시아 강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주님’께서 곧 오신다고 예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1,6)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모범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믿음’도 ‘흠 없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인간적인 상식의 한계’에 막혀서 천사가 전해 주는 ‘기쁜 소식’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흠 없는 믿음’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믿음의 힘은 ‘상식의 힘’보다 약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는 즈카르야의 말은, 자기가 믿을 수 있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왜 즈카르야를 선택하셨을까? 기쁜 소식을 전하자마자 단순하게 바로 믿을 사람을 선택하셨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한 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와 같은 조건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같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즈카르야 부부를 선택하신 것은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일 것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즈카르야를, 열심하고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지만 상식의 한계를 초월하지는 못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믿지 못한 것이 ‘죄’는 아니기 때문에,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일을 ‘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고, 그가 요구한 대로 ‘표징’을 준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도 표징이고,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뒤에 다시 말을 하게 된 것도 표징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말을 못하게 되는 것으로 표징을 주었을까? 아마도 즈카르야가 사제라는 점, 또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이 ‘회개 선포’ 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은 사제의 직무 가운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즈카르야는 기쁜 소식을 믿지 못했으니 그 소식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할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또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일과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일인데, 회개 선포는 ‘말’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리 예고하는 의미로 그런 표징을 주었을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한 것과 그래서 말을 못하게 된 일까지, 복음서 저자가 이 일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사람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상식의 한계’에 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연 법칙을 초월한 일이니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는 잘못된 표현이고, “하느님께서는 자연 법칙을 초월해서 일하신다.”가 올바른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자연 법칙도 상식도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당신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도 그것들을 존중하십니다. 그러나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경우에는 그것들을 초월해서 일하십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그런 일들을 다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이 되는 일,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이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에만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또 ‘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의 기적이다.”, 또는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의 뜻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은 올바르지 않은 말이고, “세상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 즉 사탄이 하는 일도 있고, 악한 일도 있고,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그런 악한 일들 속에서도 기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사랑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인간이 사랑으로 응답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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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나지르인>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삼손의 어머니와 세례자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천사를 만났던 장면을 소개합니다. 삼손과 세례자요한의 어머니는 모두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하룻밤 꿈만 잘 꿔도 복권을 살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천사가 나타나서 임신할 수 없는 몸임에도 잉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더욱이 그 아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엄청난 예언까지 들려주었으니 그들의 벅찬 감격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처지를 알고 있었던 그들이기에 하느님의 전능을 마음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삼손의 삶과 세례자 요한의 삶을 비교하면 너무나 판이합니다. 괜스레 애매하고 아리송하기도 한 것은 판관의 자리에 올라 민족의 원수를 갚았던 삼손, 결혼도 자기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택했던 남자,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팔레스티아인들의 코를 가는 곳마다 납작해 주었던 장사, 온 천지를 풍운아처럼, 쾌걸처럼 떠돌아 다니면서 삶을 즐기듯 살았던 삼손의 처지를 훨씬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삼손이 바친 절절한 마지막기도는 철저하게 응답받는 행운까지 있었으니까요.(판관 16, 30 참조) 솔직히 세상의 어느 부모님이 자기 자식이 바람도 피할 수 없는 들에서 생고생하는 것을 원할 것이며, 메뚜기로 허기를 때우고 꿀통을 만나야 배를 채우는 꼴을 보면서 '이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은총이다'라고 할 수 있을지요?
이리 저리 생각을 굴려보면 굳이 굳이 세례자 요한의 부모님을 연로한 노인으로 택하신 하느님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는 듯싶습니다. 늙어서 자녀를 얻은 연로한 부모님이셨던 만큼 세례자 요한이 고생하는 꼴을 보지 않고 삶을 마감하셨을 법하다는 뜻입니다.
삼손의 부모님처럼 졸라대는 자식을 말리지 못하는 맹목적인 사랑에 휩쓸려서 끌려 쫒아다니며 속을 썩는 일이 없도록(판관 14 참조)조처하신 것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알면서도 우리는 곧잘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겁을 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의심하고 ‘어찌 그렇게 까지?’라며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 의심과 이 모자란 믿음이 하느님의 일꾼이라면서도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 이라면서도 세상과 손을 잡은 악의 협력자로 살아가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은 오늘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만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갈 때 생길지 모르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무섭고 두려운 일은 악하고 나쁜 일에도 방법이 생기고 길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악을 도와주는 누군가가 꼭 있기 마련이기에 참으로 그렇습니다.
대림은 삶 속의 죄가 되는, 누룩을 제거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이 나를 위해 오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랑의 약속을 믿는 일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그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택하신 나지르인은 그분께서 이끄시는 나지르인의 삶을 살아갈 때 언제나 어디에서나 가장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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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에게 허락되는 선물>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출생에 대하여 하느님의 사자인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즈카르야가 대답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이고 제 아내는 나이가 많습니다."
성실하고 신심이 돈독한 노부부, 자녀가 없어 한때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던 시기도 이미 한참이 지났습니다. 자식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지만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비에 뽑혀 성소에서 분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사자인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자식에 대해 이미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나이이기에, 그래서 더 이상 간구할 수도 없었던 노부부이기에, 그 놀라움은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아기! 그것도 보통아기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아기를 주신다니......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미리 즈카르야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나 봅니다. 이렇게 묵상하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은 즈카르야 노부부의 의롭고도 돈독한 신심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연만한 이 부부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계획하셨을 거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한없이 의탁하는, 돈독한 신심의 경건한 노부부를 인정하고 복을 주시는 주님! 즈카르야 노부부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우리는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주님께 끝없이 의탁해야 하는 성실과 경건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자극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게 끝까지 의탁하는, 성실하고도 경건한 생활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축복과 선물이 있음을 명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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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곧 어제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 요셉의 이야기였고, 오늘도 역시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루카 1,6)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예고는 구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고 너무 늙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거룩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실, 성경에는 여러 거룩한 여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세 11,30),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창세 25,21), 야곱의 아내 라헬(창세 29,31),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1사무 1,2),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판관 12,2), 그리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루카 1,7)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들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소와 시간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오늘 <복음>의 장소인 성전의 ‘두 제단’은 두 계약을, 그리고 옛 계약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시간’에 벌어진 이 일은 구약 시대와 신약을 연결해줍니다. 따라서 요한의 출현은 옛 계약의 율법과 사제직이 끝났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경계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벽이 무너지고 막힌 것이 없어집니다. 이는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요한은 불임인 늙은 여인에게서 태어나고, 그리스도는 동정인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는 어떤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막시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인물인 요한은 늙은 여인의 식어버린 피에서 태어나야 했고, 장차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주님은 꽃처럼 피어나는 처녀의 몸에서 피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즈카르야는 의심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잃었고, 마리아는 곧바로 믿었기에 세상을 구하는 ‘말씀’을 잉태했습니다.”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아기의 잉태를 알려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줍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이처럼,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냅니다. 곧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루카 1,17)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안에 혹은 우리가 만나는 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탄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기뻐하며 자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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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에서 솟아난 기도.-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무능과 허약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피하고 도망쳐도 보물을 찾듯 찾아오시고 거부하고 배신해도 목숨처럼 아끼시며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 지금 지체치 마시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소서. 제가 응답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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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루카 1,5-25(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서 즈카르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즈카르야가 자기 조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할 때의 일이다. 사제직의 관례에 따라 제비를 뽑았는데, 그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기로 결정되었다. 그가 분향하는 동안에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섰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즈카르야를 기다리던 백성은 그가 성소 안에서 너무 지체하므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와서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환시를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몸짓만 할 뿐 줄곧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봉직 기간이 차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 엘리사벳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믿음>
될 수 없지만
될 수 있다하시니
되는 것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다하시니
하는 것
이룰 수 없지만
이룰 수 있다하시니
이루는 것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 있다하시니
받아들이는 것
품을 수 없지만
품을 수 있다하시니
품는 것
나아갈 수 없지만
나아갈 수 있다하시니
나아가는 것
내딛을 수 없지만
내딛을 수 있다하시니
내딛는 것
넘을 수 없지만
넘을 수 있다하시니
넘는 것
일어설 수 없지만
일어설 수 있다하시니
일어서는 것
버릴 수 없지만
버릴 수 있다하시니
버리는 것
이을 수 없지만
이을 수 있다하시니
잇는 것
나눌 수 없지만
나눌 수 있다하시니
나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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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곱게 익어가는….>
저도 지금 안식년을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어느 신부님 한 분이 안식년을 맞이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청소부 일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한번 경험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늦가을이니 꽤 쌀쌀한 날씨에 휴게소 마당에서 빗질하며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더욱더 추웠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님을 더욱 춥게 한 것은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컵을 아무 데나 버리고 먹다 만 음식들을 탁자에 놓고 떠나는 이들에게 주의하라고 하면 ‘청소부 주제에 누굴 가르치느냐?’는 식의 핀잔과 질책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는 묵주 반지와 팔찌가 있었고요. 이런 모습은 사제를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도 슬프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을 기쁘게 섬기며 평화롭게 고운 모습으로 익어가신 두 어른(즈카리아야와 엘리사벳)을 보게 됩니다. 이 두 어른은 젊은 시절 아기를 얻지 못했던 일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걱정이 컸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두 어른에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어른은 그럴수록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즉, 두 어른은 하느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느님의 때(하느님의 섭리)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결국, 즈카리야와 엘리사벳 안에서 구세주를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이 라이라는 아이의 탄생하는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받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한 마디로 세례자 요한 탄생의 은총은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 믿음 때문이었고, 하느님의 때를 기쁘게 기다리고 희망하는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도는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향주삼덕, 즉 믿음 희망 사랑으로 이루어진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제가 본당에서 사목할 때, 가끔 본당 어르신들에게 우스갯소리로 “곱게 익어가는 은총”에 대해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한 마디로 “입은 닫고 지갑을 열자.”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웃으십니다. 그리고 미사 후에 성당 앞에 줄을 서십니다. 제일 먼저 지갑을 열어 본당 신부에게 밥을 사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순번을 정해서 밥을 얻어먹은 것이 있습니다. ㅋㅋㅋ
그런데 즈카리야와 엘리사벳, 두 어른이 남기신 발자취는 “곱게 익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곱게 익는다.”라는 말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산다.”라는 말이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욕심을 내려놓으며 산다.”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두 어른이 받았던 ‘곱게 익어가는’ 하느님의 축복을 먼 훗날에, 고운님 모두가 하느님 앞에 설 때까지 곱게 익어가는 복된 은총으로 살아가 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두 어른이 남기신 ‘곱게 익어가는 축복’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입은 닫고 지갑을 열자.”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때를 기다리며 곱게 익어가는 하느님의 복된 은총 안에서, 고운님들이 희망하는 기도가 하느님의 뜻대로 선하고 기쁘게 잘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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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50)
♧♧ 시편 68편 2절….
"하느님께서 일어나시니 그분의 적들이 흩어지고 원수들이 그 앞에서 도망친다."
이는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행하던 전형적인 기도문입니다.(민수기 10장 35절. 참조) 여기서 ‘하느님께서 일어나시니...’라는 말은 당신의 백성이 고난과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아시고 신속히 그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달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흩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푸츠’라는 말은 ‘뿌리다.’ ‘쫓아버리다.’라는 의미로 ‘완전한 멸망’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적군과의 싸움에 있어 군사의 숫자나 우수한 무기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전쟁의 승패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는 다윗이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 시편 68편 3절….
"연기가 흩날리듯 그들은 흩날려 가고 초가 불 앞에서 녹아내리듯 악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멸망해 간다."
하느님이 악인들을 징벌하시기를 마치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연기나 불에 녹아 없어지는 초처럼 이 땅에서 신속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멸망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시편 22편 15절, 37편 20절. 미카서 1장 4절. 참조) 이는 하느님을 거슬려 악한 행위를 하며 또한, 하느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권능의 주 하느님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을 뿐임을 믿는 다윗의 신앙을 잘 표현해 줍니다.
♧♧ 시편 68편 4절….
"그러나 의인들은 기뻐하며 뛰리라. 하느님 앞에서 기쁨 속에 즐거워하리라."
이처럼 의인들이 기뻐하며 뛰는 이유는 단순히 악인이 멸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신 이는 의인들이 악인들에 의해 핍박당하는 것을 끝까지 침묵하지 않으시고 보살펴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정의로우심과 역사하심이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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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을 만났는데, 마침 식사 때가 되어서 가까운 백반집에 함께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에 식사가 나왔는데, 이 형제님께서는 식사하면서 밥에서 콩을 하나하나 골라내는 것입니다. 제가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다고 느꼈는지, “제 어머니께서 콩을 싫어하셨거든요.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콩을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지 저도 싫더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제게 식성이 참 좋다고 합니다. 도대체 싫어하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 신부님 어머니께서 음식을 골고루 해 주셨나 봐요. 그러니 편식을 전혀 하지 않으시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제 어머니께서 드시지 않는 음식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고, 그래서 편식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심각한 마약중독자인 아버지를 둔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마약에 찌들어 있는 아버지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훌륭한 법조인이 되었고, 작은아들은 아버지처럼 마약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자신도 마약중독자가 되었다면서 아버지를 탓합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마약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아서 마약을 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결과는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 탓, 환경 탓은 스스로 못났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어려울 때 더 많이 성장하는 반면, 누구는 그 순간에 좌절하면서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라, 레베카와 같은 많은 거룩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사랑한 라헬도 아이를 낳지 못했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 역시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습니다. 이 모든 예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거룩한 인물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손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커다란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하느님의 손길을 봐야 하지만, 우리는 즈카르야처럼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또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부끄러워 다섯 달 동안 숨어지낸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늘 부끄러워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의심과 부끄러움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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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이유>
많은 이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렇다면 이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1) 내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강해서.
2) 열심히 해야 하는 건 아는데 열심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3)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게 보고 있어서.
4) 자신의 마음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기에.
5) 집중할 게 없거나 싫어하는 것만 하게 되어서, 내가 의욕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불안의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이유를 없앨 방법도 스스로 찾을 수 있습니다. 불안감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 안에 늘 머무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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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외신 기자 협회에 등록되어 있어서, 가끔 문화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습니다. 카네기 홀에서 ‘세종 솔리스트(Sejong Soloists)’ 공연이 있었습니다.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곡이 연주되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곡은 ‘여민락(與民樂)’이었습니다. 작곡가인 이신우의 작품이었습니다. 여민락의 의미는 ‘백성과 함께 즐기자.’라고 합니다. 세종 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백성과 함께 즐기는 마음으로 ‘여민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여민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삼손’이며 태양의 힘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그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망과 좌절 중인 여인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즈카리야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질 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많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준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라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주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성탄 무렵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세례명을 참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때로 날개 잃은 천사가 되어서 방황하기도 하지만 저의 세례명처럼 주님의 뜻을 전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의 일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저의 세례명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이룬 일로 정해지는 이름도 있습니다. ‘독재자’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서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독재자의 폭력에 의해서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선구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입니다. 밤을 새워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런 사람들이 밝힌 길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적은 세상의 명예와 세상의 성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울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또한 ‘여민락’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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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선물>
-의로운 삶-
대림 2부 셋째날 12월19일 오늘 ‘오 후렴’ 역시 고무적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 요약된 후렴 역시 은혜롭고 고무적입니다. 메시아 예수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기도입니다.
“오 이사이의 뿌리, 민족들의 깃발로 우뚝 서신 분, 지체 없이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시는 탄생하실 메시아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우선적인 것이 기도입니다.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눈이 열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행복기도 전반부 고백 내용이 생각납니다.
-“주님/사랑합니다/찬미합니다/감사합니다/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눈이 열리니/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하느님의 선물이란 자각에서 저절로 샘솟는 감사와 찬미,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선물을 깨달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도 이런 진리를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이고 제1독서 판관기의 주제는 ‘삼손의 탄생 예고’입니다.
참 고마운 탄생 예고의 하느님 선물입니다. 제가 볼 때는 흡사 태몽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의 천사를 통해 내밀히 탄생 예고의 선물을 받은 삼손의 부모와 세례자 요한의 부모입니다. 예전에는 태몽 일화도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예전 분들의 삶이 경건했음을 뜻합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느님은 참으로 적절한 때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하루하루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둘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은 나이가 많았다.”
이런 객관적 불리한 여건중에도 두 노부부는 ‘하느님 앞에서’ 불평 불만 없이 찬미와 감사의 자세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앞에서’의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떳떳이, 당당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요셉에 이어 복음 사가는 이 부부 역시 의로운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람인 우리 믿는 사람 역시 의로운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이런 부부에게 때가 되자 하느님의 은혜로운 개입이 시작됩니다.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직무에 충실할 때 하느님은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즈카르야를 찾아 오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즈카르야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 요한 아들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주님 앞에서’ 큰 인물 요한이란 말마디를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의 히브리어 이름 뜻은 ‘주님은 자비로우시다’란 뜻인데 얼마나 은혜로운 이름인지요. 즈카르야는 잠시동안 불신으로 인해 벙어리로 지내지만 이어지는 주님의 천사를 통한 내밀한 신비체험을 통해 참으로 깊이 많이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더불어 즈카르야 역시 얼마나 깊은 들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어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의 감사의 고백입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엘리사벳은 잉태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참으로 깊이 체험했을 것이고, 태교는 물론 요한을 키울 때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또 이런 체험의 추억은 평생 삶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하고 신비롭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예표와 같은 삼손의 탄생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구원 섭리를 깊이 체험합니다. 예나 이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무디어진 마음이요 영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생략됐지만 판관기 삼손의 부모 역시 얼마나 경건하고 거룩한 기도의 사람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의 천사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의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보라, 너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 될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내기 시작할 것이다.”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명명하였으며,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고 마침내 주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 삼손을 아들로 받은 마노아 부부입니다. 삼손은 ‘태양’을 뜻하는 히브리 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삼손뿐 아니라 우리 역시 ‘영적 나지르인’이요 ‘태양’같은 존재라는 자부심을 지녀도 좋을 것입니다.
진인사 대천명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부모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삼손의 부모인 마노아 부부가 우리 영적 삶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깨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하느님의 선물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도록 합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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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름만 많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즈카르야와 엘리자벳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어쩌다가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를 갖곤 하였습니다. 마침 즈카르야가 제비에 뽑혀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드리고 밖에서는 온 백성의 무리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분향제단 오른쪽에 섰습니다. 즈카르야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13-14) 그러나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받게 될 이름,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습니다. 결국 즈카르야는 이 불신 때문에 천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된 것이 곧 하느님께서 개입하셨다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즈카리야의 의심, 그리고 유다인들이 표징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구원의 다가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불신 따위에 구애 받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조건 없이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말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에는 인간의 자발적인 협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미 자유의지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는 구원이나 멸망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의심함으로써 은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니 그 자체가 멸망이 되고,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근원이 됩니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요한20,29)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한 주간의 사제직무를 끝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표징을 간직한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었고 그가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일을 해 주셨구나.”(루카1,25)
즈카르야에게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주신 분, 엘리사벳에게 주님께서 굽어보셨다는 믿음과 감사를 고백하게 하신 분,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혹 ‘밀운불우’(=하늘에 구름만 빽빽하게 끼어 있을 뿐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건이 조성되어 징조는 나타나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하고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비유한 말입니다.) 일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은총의 비를 기다려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오늘 이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시편25,4-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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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두 쌍의 부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던 차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주 특별한 아들을 갖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우리는 먼저 아이 못 낳는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여인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만납니다. 자손의 수가 곧 재산이고 힘이던 시대에 생산자 역할에서 소외된 여성의 설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지요. 그 기다림이 주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어 가련했던 그 손으로 아기를 안게 되지요. 오랜 눈물과 기다림 끝에 그녀들이 누린 이 기쁨과 환희가 곧 성탄의 전조일 겁니다.
"모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판관 13,23)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온 아기들이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일러준 아들은 나지르인, 즉 주님께 봉헌된 존재이고 또 이스라엘 구원에 일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당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억압과 괴롭힘을 당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할 미래의 판관인 이 아기가 바로 삼손이지요. 사랑과 배신 등 극적인 요소가 듬뿍 담긴 삼손 이야기는 세간에서도 쉽게 회자될만큼 유명합니다.
"아이는 자라나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판관 13,24)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하신 아기는 '봉헌된 이'로서 주님께서 내리신 복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그는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에서 판관으로 일하며 필리스타인들과 거친 싸움을 벌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줍니다.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십 년간의 구원과 평화를 누리지요.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1,15)
복음에서도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잉태를 전하는데 그 아기는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아기의 부모 역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루카 1,6)이라고 소개했지요. 사실 사람들 눈에 큰 인물로 보이기보다 주님 앞에 큰 인물이 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위대해 보이는 이면의 약함을 잘 모르지만 주님은 모든 걸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평생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절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임에도 즈카르야는 이미 늙어버린 나이를 이유로 이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시적이나마 혀가 묶이게 되지요.
사실 믿지 않는 이는 침묵해야 옳습니다. 그의 불안한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적 동요가 하느님의 단순한 진리를 가리거나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혀가 묶이는 침묵은 자신에게는 정화의 기회가 되고 타인에게는 두려움을 일깨웁니다.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아이 못 낳는 여인의 출산'이라는 구약의 기적이 '처녀의 잉태와 출산'이라는 신약 초입의 기적으로 이어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약 여인들이 겪어온 개인적인 기다림은 마리아에게서 민족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구원의 기다림으로 건너갑니다. 그 통로의 끝에 진정한 구세주께서 태어나십니다.
꼭 생물학적으로 출산의 능력을 받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해 양육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접하고 성체를 영하는 매일 매 순간 우리에게서 성탄이 이루어집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에게서 탄생하신 말씀께서는 나의 미소와 격려, 사랑과 배려, 용서와 동행의 발걸음으로 육화됩니다. 거기서 흘러나온 구원의 파장은 개인과 이웃, 친지와 지인의 울타리를 넘어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구원에 작은 빛을 보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간절히 아기를 기다리는 마노아의 아내이고 엘리사벳입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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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모든 것이 은총이고, 지까지도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모든 것이 은총이고, 죄까지도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 받아들고 나누기 위해 성적인 상처와 신경증까지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다. 이 과정에서 상처들을 경멸하는잘못을 범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처들을 잘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모두가 성화를 이루기 위한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를 통해 탕자처럼 살았던 경험으로 성적인 상처와 신경증까지도 은총으로 변화 될 수 있음을 체험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는 성령을 거슬리는 죄 말고는 사하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탕자의”비유는 ‘하느님의 자비의 비유’라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죄가 충일한 곳에 하느님의 은총도 충만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 부활 전야 예식에 “오 복된 죄여!”하고 노래합니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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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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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말하자, 천사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가브리엘인데, 너에게 이야기하여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파견되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18-20)
<불임과 동정>
교회는 요한의 출생을 거룩한 사건으로 기립니다. … 요한의 출생을 기릴 때면 아울러 그리스도의 탄생도 기립니다.
요한은 불임인 늙은 여인한태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는 동정인 젊은 여인한테서 태어나시지요. 불임이 요한을 낳고 동정이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펑범하고 연령이 적당한 부모들은 요한을 낳기에는 자격이 모자랐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남녀 간의 동침은 없었습니다. 요한의 출생은 천사의 예고로 알려집니다. 그리스도는 천사의 예고로 잉태됩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아들의 출생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말을 못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태어나리라는 말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영태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이 동정녀의 가슴에 들어갔고, 그 결과 어머니의 태에 아기가 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천사가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을 때, 즈카르야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한 말은 천사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고 한 말과 거의 같습니다. 사실상 같은 말이지요.
끝으로, 요한은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에 태어나고, 그리스도께서는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에 태어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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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이성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즈카르야는 늦은 나이에다
아내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인데
아기를 낳을거라는 천사의 예고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아기 낳을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게 됩니다.
참 이해가 안가는데 신앙의 신비로 보면
모든것이 가능하고 선을 뛰어넘게 됩니다.
머리로는 어찌 그럴 수가 ~
그리 되겠나? 싶지만 믿음으로는 그리 됩니다.
'신비는 이성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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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루카 1, 14)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출생이길
기도드립니다.
삶의 기쁨과
삶의 슬픔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하나로
끌어 안게 하는
신앙의 탄생이
있습니다.
가장 큰 기쁨은
삶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삶을 바꾸어 놓는
생명이 있습니다.
삶은 삶을
바꿉니다.
생명은 생명을
바꿉니다.
삶의 첫 시작인
출생 안에
하느님의 기쁨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생명을 통한
기쁨의 참된
방식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 기쁨은 우리의
마음을 닦아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기쁨이
가장 행복한
기쁨입니다.
하느님께 맡겨야
기쁠 수 있고
새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생명으로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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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우리의 청원을 들어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믿음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모두를 살게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믿음으로 기쁨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기댈 곳은 오직 하느님뿐 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하느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함께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앞장서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존재방식이고믿음은 결단의 방식입니다. 말씀을 소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다시금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여줍니다. 큰 믿음은 큰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우리의 아픔과 치욕까지도 없애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탄생하실 것임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실 일과 주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위대하신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우리의 간절한 청원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자비하심과 그 사랑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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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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