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5일 성령 강림 대축일>
“오소서 성령님”
나자렛 사람, 젊은 예수의 죽음으로 유대 사회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이 무성한데다 ‘부활’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오는 상황에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혼란에 휩싸인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많은 사람이 갈등에 빠졌으리라. 그분의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제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고, 몇몇은 유다인이 무서워 다락방에 숨어있는 처지였다. 예수님 홀로 이리 번쩍 저리 번쩍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을 다독이기 바쁘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오순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50일이 되는 날이다. 성경에서 50이라는 숫자는 매우 의미 있다.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난 다음 날이 50일째 되는 오순절이며,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가 희년인 50년째가 되는 해이다. 해방과 기쁨의 날을 상징하는 50이라는 숫자 속에 오순절 성령 강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예수님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해방’이다. 이 ‘해방’은 옛날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억압으로부터 히브리인들의 ‘해방’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5)라는 예수님의 부활은 곧 인류의 ‘해방’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구원은이렇게 이루어지며 이렇게 시작된다. 구원은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세상을 산다. 동시대의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저마다 자기 세상을 살아간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세상은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태 10,38; 루카 14,27))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 세상을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이끌어준다. 세상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세상은 우리가 충분히 극복하며 자신의 삶을 이루어가는 곳으로 재인식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불안과 두려움의 저주가 아니라, 자신을 실현하고 자신만의 열매를 맺는 축복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며, 오히려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루어가는 하늘나라이다. 성령은 바로 이러한 우리 삶의 협조자로 오신다.
사람들 사이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서로 태어난 고향이 다르고 서로의 언어가 다른데도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사도 2,8) 세상을 이긴 예수님의 부활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사도 2,9) 등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사도 2,11ㄴ) 있는 것처럼 하나의 진리가 되었다. 진리 앞에서는 어느 것도 장벽이 될 수 없다. 성령은 부활의 신비, 구원의 진리 안에서 우리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요한 17,11;21;22;23) 하신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4-7)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모두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지만 모두 성령 안에서 ‘공동선’을 위해 살아간다. 내가 어떤 공동선을 위해 살아가는지에 대한 자각이 약하다 해도 ‘자기 십자가’라는 자각 속에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동선’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세상은 우리 사이의 차별과 계급으로 구분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받아”(1코린 12,13ㄴ) 모두 한 몸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성령은 세상을 극복하여 이겨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협조자, 그들 사이의 중재자이시다.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세상에는 분열과 일치가 있다. 세상에 붙잡혀 세상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치하고 분열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로서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코린 12,12) 그리스도인의 과제 중 하나는 ‘일치’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하는 것은 머리이신 주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의 이해관계는 서로 다를지라도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2ㄴ-23) 성령의 은사 중에 용서를 통한 일치의 은사는 ‘교회’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은사다. 나의 용서 여하에 따라 하늘에서도 그 용서가 결정된다는 것은 마냥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용서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일치’가 훼손된 채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용서’ 또한 세상을 이기는 또 다른 길인지도 모르겠다.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그냥 용서하고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라고 노래했던 푸시킨이 참으로 위대해 보인다.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도우심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결국 다시금 내 ‘자신’에게로 돌아온 느낌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자신을 이기는 것’과 같다는 느낌, 또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을 돌고 돌아 ‘그 자리’에 다시 선 느낌이다. 성령 칠은, ‘하느님의 계시를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통달’,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올바른 것을 지키도록 용기를 주는 굳셈’,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게 해주는 지식’,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하는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의견’,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분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은사’, ‘하느님의 뜻대로 판단하게 하고 구원에 필요한 일에 이끌리게 하는 슬기’,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과 연관된 사람들이나 사물을 존중하게 해주는 효경’, 이 모두가 ‘자신과 세상 그리고 하느님’에 대하여 빛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준다.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부속가, ‘성령 송가’ 첫 구절에서)
첫댓글 아멘
효경..
일치..
존중하는 지혜와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하는 마음입니다
물리적으로 함께 할수는 없지만
성령을 통해서 일치하는 삶!
오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도록 도와주는 은사를 받았네요. ^ ^
삼위일체이신 성부,성자,성령을 신앙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지요.
그러나 저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 우리들의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이제것 아는 척 하고 살아 왔을 뿐 신앙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모르는 것 투성이임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내려주시는 주님께 저는 오늘도 이 무지한 자신을 깨우쳐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