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 영국과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독립을 지켜낸 사람, 그가 존 녹스이다. 그가 땅에 눕혀질 때, 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이 여기에 누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초기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514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다. 1540년에 그는 사제직에 있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고위 당국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불러내어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게 하셨다. 그가 언제 개혁 신앙으로 회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와 관계를 맺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위셔트는 곳곳에서 개혁 신앙을 외쳤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그는 1546년 3월에 비튼 추기경에 의해 화형을 당하게 된다. 녹스는 위셔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세인트 앤드류성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곳에서의 3개월이 그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었다. 마치 칼뱅이 제네바에서 파렐에 의하여 하나님의 손에 길들여진 것처럼, 녹스 자신은 조용한 학문 연구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스코틀랜드를 위한 영적 전쟁터로 내보내셨다.
녹스는 그 이후 자신을 복음을 위해 설교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1547년 6월 프랑스 지원병의 도움으로 총독의 군대가 세인트 앤드류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녹스는 갤리선의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게 하신 것처럼, 그를 갤리선에서 건지셨다. 노예에서 해방된 녹스는 에드워드 6세가 다스리던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영국에서 설교하면서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과 예식 법규 제정에 공헌했고 영국 청교도들이 영국국교회 안에 남아있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상황도 가톨릭 신앙을 가진 메리 여왕이 등장한 후 바뀌었다. 녹스는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에 머무르면서 칼뱅, 불링거, 베자 등과 교제하였다. 이 때 녹스는 신앙을 위협하는 군주에 맞서 대항할 권리와 의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칼뱅의 요청에 따라 영국 피란민 교회의 목사가 되어,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까지 담당하였다.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녹스는 신자들의 예배를 돕는 문서를 만들어주었고(Letter of Wholesome Counsel),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 하여금 ‘회중의 수호자들’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들은 당시 섭정 여왕인 프랑스 태생의 기즈의 메리에 맞서서 투쟁하였고 녹스는 이들과 합류하였다. 이 때 스코틀랜드의 국제 정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프랑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를 몰아내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는 나라를 세울 꿈을 꾸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후원자인 프랑스가 승리한다면 나라의 독립과 함께 개혁 신앙도 날아갈 판이었다. 이것은 영국에게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녹스는 이런 사실을 영국 왕실에 설득하여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를 돕기 위하여 출병하게 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들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개혁 신앙에 입각한 국가 건설을 할 수 있었다.
녹스는 이와 함께 신앙 증진을 위하여 힘썼는데 온건한 칼뱅주의에 입각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제정했고 예배 의식을 위해 소위 ‘낙스 전례서’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었다. 교회의 치리와 교구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는 교육방안을 담은 이 문서들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문서가 의회에 의해 거부되어 교회는 경제적으로 귀족들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가난해졌으나 귀족들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독립성을 키워나가게 되었고 이것은 교회의 독립을 보장하는 방편이 되었다.
1561년 프랑스로 시집갔던 메리 여왕이 돌아온 후 개혁파는 어려운 시절을 맞기도 했으나 녹스는 의연히 대처하였다.1567년 메리 여왕이 실정을 거듭한 끝에 몰락하였고 녹스의 친구인 모레이의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가 섭정이 되어 개혁교회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녹스는 60세가 되던 1572년 11월24일 정오에 아내가 읽어주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들으며 부활의 소망 중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후, 오후에는 “내가 처음으로 닻을 내린 곳을 읽어주시오”라고 부탁하여 요한복음 17장을 들으면서 잠들었다. 이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잠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뿌리내린 녹스의 신앙은 약 300여년 후,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인 존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의 가슴속에 살아있었다.
그들은 황해도 송천 출신의 서상륜 등에게 그 신앙을 전하였고, 그 결과 송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진리에 대한 확신 하나로 민족과 교회를 위해 자신을 던진 녹스의 신앙과 삶을 오늘 우리 상황에서 다시 한번 음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