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 특강 2023.05.21
허유 하기락의 기록 ・ 2023. 5.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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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김성국교수
김성국 교수의
낙동강 문학관 인문학
강의가
2023.05.21 있었습니다
주제는
아나키즘으로 주제로 하였고
아래로 보이는 대로
낙강 인문학잔치
두번째 시간
이었습니다
강의 후 단체 사진
김성국
지은이 김성국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있다.
그동안 영국
글라스고우대학교,
에섹스대학교의 방문 교수,
한국아나키즘학회,
한국이론사회학회,
한국사회학회 회장,
부산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지금은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공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사회이론(특히 시민사회론),
사회운동 및 사회불평등이며,
저서로는 아나키·환경·공동체』(공저),
『21세기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동』,
논문으로는
「역동적 시민사회와 균형적 국가 발전」,
「아나키스트 자유공동체 사회론」등
여러 편이 있다.
“시적 혹은 사회학적 상상력으로서
아나키즘: 하나의 마음세계"
허유하기락 선생을 기리며 -
김성국
(부산대 명예교수,
아나키스트 허유 하기락 기념사업회)
"벌판에는 바람이"
(김주완, 1990년 3월 1일 작시,
1998년 2월 철학연구 추모특집 재계)
벌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뜬구름이 몰려다니고 있어요
소리의 물줄기가 어지러이 흐르고
몸과 몸을 부딪혀 명목의 수목들이
사생결단을 하고 있어요
갈대밭에서 나온 미풍이 숨죽여 자진하고
부서지는 흙들의 노래가
산읍 옮겨가고 있어요
쓰러지는 꿈들은 쓰러지는 슬기로
바람을 피하고
온전한 뿌리를 지키고 있어요
벌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번뜩이는 눈물이 공중을 떠 다녀요
자꾸 서두르고 있어요
바다인 듯한 바다가 정작은
바다가 아니어요
낙강 인문학 잔치 제2강 • 3
시인은 말한다.
"영원한 자유인 하기락은 가고,
하기락이 그처럼 간구했던
"인간의 해방과 "실존의 자유'는
이제 후세대의 과제로 남겨졌다.
20세기가 끝나가는
지금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벌판에는 아직 바람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
(김주완, 1998: 46).
시간은 흘러
이제 21세기 2023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황량한 바람은 불고 있다.
나에게는
더욱 음산하고 구슬프게 들린다.
벌판에는 온통 하늘과 땅을 가리는
아파트가 바빌론의 오만한
탑처럼 솟아 있다.
바람은 혼탁한 공기를 몰고와
내일의 자식들을 질식시키기에
음산하고 원래의 나 바람은
이런 바람이 아니었다"고
항변하는
이 바람의 소리는
애처로울 뿐이다.
그때 1998년,
나도 시인의 바람 소리를
함께 들었는지,
"이제 그대의 껍질을 깨고
그것을 해방시켜라,
그대가 아나키스트요,
자주인이라면 그대 자신
부터 창조적으로 파괴하라"며
"존재의 부름"(하이데거)을 받고,
'한 층 더 높은 결정"(하르트만)
을 찾은 자유와 해방의 선구자(하락)를
따르리라 결심하였다.
하, 하, 하. 천하의 삼하가 모였으니
필히 하늘을 이루어
영원히 우리를 인도하고 있으리.
오늘, 다시 25년이 지난 2023년,
나는 그 하늘 가까이 가보고자
[하나논리]를 만들었다.
하나와 하늘은 상통한다.
하기락의 순수를 존경하여
나는 잡(종화)속에서나마
하나를 향한 순(純 혹은 잡순을 발견하고 싶다.
순일()과 잡일(一)이 하나 가운데서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보고 싶다.
이 자리의 발제를 위하여
김주완의 글, "하기락과 자유를 네 번째 읽었다.
읽을 때마다 느꼈지만,
감히 내가 허유 선생의 아나키즘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다.
이번에는 특히 심하다.
하기락은 철학자로서
아나키스트였지
아나키스트로서
철학자는
아니었다"는
그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간 나는 하룻강아지처럼
덤벼든 꼴이다.
0/1. "살아 있는 시인의 사회"
: 문언일심(心)시대의 박찬선과 김주완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연유는
허유 선생을 위하여
그의 수제자
(대한철학회의)
김주완이 가교를 만들고
낙동강 문학관 박찬선 관장이
개통을 하였기 때문이다.
시와 철학, 아나키즘과 사회학이
서로 연결되는 드물고도
소중한 자리인 만큼 기쁘면서도 두렵다.
어설프나마 "상상력'이라는
화두로 우리의 끈
혹은 인연을 맺어 보겠다.
챗GPT가 일반인의 관심을 끈 이후
관련 업계에서는 구글의 'Bard',
아마존의 'Bedrock',
중국바이두의 '心'이나
알리바바의 '''을 포함하여
각종 AI 관련 프로그램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예술가 시인,
지식인 철학자와
사회학자는
이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야 할까?
주지하듯,
이미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의
위력은
예술 영역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에 대한 찬반 우열의
시비를 비롯하여
인공지능의 한계성과
인간지능의 지속적 고도화,
혹은 인간의 무력화(실직과 정체성 혼란)와
인간의 자유해방 고양
(신직종 창출과 여가시간의 증대) 등이
거론된다.
이와 같은 사태는
이미 40여 년 전 정보혁명이라는
소위 제 3의 물결
이 온 세상을 휩쓸기
시작할 무렵에도 발생하였다.
아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 초 산업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한편으로는 러다이트와 같은
기계파괴운동의 저항이 있었던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적 질곡과 대대손손의
계급적 빈곤을 타파하는 유일한 희망으로
공장노동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정든 시골 고향을 떠나
공순이/공돌이로 도시의 주변부로
옮겨온 우리의 부모 형제를
한없이 슬피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의 무심한 혹은 필연적 운행에
승차할 수밖에 없던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찾았던
고달픈 시대의 가난한 도전자이었던가?
누가 이 천지불인이요,
모순과 비합리 투성이요
예측불허의 역사를 단칼로 정리하리오.
역사는 무심히 흐른다.
세상도 별로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은 아우성을 지른다.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압박감과 스트레스 속에서
나를 꺼내 달라고
(Under Pressure... Let me out!).
유일한 희망 혹은 저주는 자유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주받은 자유를 희망의 자유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각자도생이다.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다.
가족이나 친구는
내가도울 대상이다.
물론 서로 협력하는
상호부조의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내 문제
는 내가 처리한다는
기본 원칙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아나키스트 자유인,
자신이 자신의 주인되는
자주인의 자세이다.
다만 그대 자유의 길을 걸으며
반자유의 유혹이나 샛길에 빠지지 말라.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말라.
쉽게 말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도록 노력하라.
특히 약자를 강제하지 말라.
강제는 폭력이고,
폭력은 자유의 적, 반자유이다.
노자는 무위자연을 설하였다.
인위적인 것,
억지로 강제하거나 꾸미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런데 영어로 예술은 "art()"이다.
자연에 대비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기술적 활동을
말한다.
문학을 예로 들어 얘기하자면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정교한 혹은
특수한 언어게임이라는 점에서
인위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인위는
일상적 의미의 작위나
강제 혹은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기성적인 것,
기존의 권위를 폭로하고,
조롱한다는 점에서 폭력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창조적 파괴이다.
이상의 다소 거치르고
단순한 전제를 기준으로 삼으면,
인위의 산물인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
혹은 문학가들은 인공지능을
이단으로 부정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
둘 다 멋지게 최고의 인위적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가?
여기서 나는 과연 노자의
무위자연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가?
감히,
이 점에서 노자를 넘어서 보자.
보다 겸손한 표현으로
노자를 새롭게 바라보자.
인위와 자연은 영원히 소통 불가능
한 철천지 원수 같은 사이인가?
천지불인을 말한 노자가
이 현실 세상의
질곡과 속박을 모를리
있었겠는가?
인위적-강제적 유위가 세상과
시대를 짓누르고 있기에
이를 개선하자면
그 반대 방향인 무위자연의 가치를
내세워 최소한 균형이라도
얻어 보고자
최소국가, 반전부쟁,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낙기속
일상적 즐거움 등을 강조한
것이다.
무위가 있어야 유위가 유효하고,
유위가 있어야 무위를
무한 가치로 우르러 보게 된다.
노자는 유위 = 절대악,
무위 = 절대선이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유위의 무위화와 무위의 유위화
역설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위와 무위의 통일성을
알려 주고자 하지 않았을까?
인공지능을 우리 편으로 만들자.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이윤 확대의 논리에 따라
인공지능이........
박찬선 낙동강문학관 관장님
강사 소개를 하고 계세요
[출처]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 특강 2023.05.21|작성자 허유 하기락의 기록
[출처] 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 특강 2023.05.21|작성자 허유 하기락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