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웅요셉 신부님 강론 글입니다.
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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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 = 황금 입
성 요한은 349년경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외교인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고,
안티오키아 학파의 거두인 타르소의 디오도루스로부터는 신학을 배웠습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 369년에 멜레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374년경에 성 바실리오의 지도아래 은수자가 되어 수덕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386년에 사제가 되어 12년 동안 안티오키아에서 성 플라비안 주교를 도왔으며,
설교 직에 헌신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390년부터는 신약 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 관습을 개혁하는 데 힘씀으로써 참된 목자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특별 기부금 제도를 마련하였고,
교회의 사치와 남용을 단죄하였으며, 동방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우상숭배와 비윤리적인 행락과 사회의 사회 부조리에도 단호히 대처한 만큼, 원수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엄격한 자신의 삶을 삶으로써 원수들에게 대항하였습니다.
왕실의 증오와 원수들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두 차례나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403년, 그를 미워하던 테오피로를 비롯한 36명의 주교들이 오크 시노드에서 29개 조항을 들어 단죄하고, 유배시켰는데, 내란과 지진이 일어나자 황제는 그의 명을 취소시켰습니다.
그러나 404년에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재차 그를 귀양 보냈습니다. 이때 그는 238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콘스탄니노플의 신자와 교황 성 이노첸시오 1세 및 서방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로 인해 "황금의 입" 즉 크리소스또모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개인적 성성뿐만 아니라 설교와 주석학 그리고 전례적 개혁등으로 유명한 그는
특히 설교에 있어 반복과 비약으로 구조가 허술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지성과
그리스적 균형 감각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과 청중에 대한 제어력들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설교는 박수와 눈물로 자주 중단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의 희랍계 박사 4분 가운데의 한분으로 공경 받습니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의 서한들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그는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비오 10세에 의하여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