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함에 살아난 단맛…술술 넘어가네
아황주, 밀가루 넣어 구수함 높여 3일 발효 뒤 저온에서 한달 더 숙성
짧은 시간 내 온도 조절하는 게 관건
발효 잘되면 진한 황금색·단맛 자랑 해산물로 국물 낸 두부전골과 ‘딱’
‘몽롱하게 취하여 돌아갈 길은 멀기만 하구나. 나는 아황주(鴉黃酒)만 부질없이 마시는데.’
고려말기 문인 이규보가 윤공(尹公)이라는 벗에게 보내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규보가 즐겼던 <아황주>는 고려와 조선 왕실에서 사시사철 빚어 마셨던 명주다. 갈까마귀(鴉)가 노랗게(黃) 보일 정도로 진한 노란색이 특징인데 그동안 <역주방문(歷酒方文)> <수운잡방(需雲雜方)> 같은 오래된 문헌으로만 전해져왔다. 그러다 2010년 농촌진흥청이 제조법을 복원했고 2012년 시판되면서 왕실의 술을 맛볼 수 있게 됐다.
< 아황주>는 경기 파주의 최행숙전통주가에서 만든다. 인삼농사를 짓는 최행숙 대표(64)는 2002년부터 판로확대를 위해 인삼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농진청에서 인삼주 빚는 법을 배웠고 그게 인연이 돼 <아황주> 제조법을 전수받았다.
“농진청 직원들이 우리 양조장에서 <아황주>를 시범적으로 제조했는데 향이 아주 좋은 거예요. 마침 양조장이 수해를 당하고 새로 문을 연 지 얼마 안된 시기라 재기를 위해 <아황주>를 만들었지요.”
<아황주>는 1차로 빚은 밑술에 덧술을 한번 더하는 이양주(二釀酒)다. 우선 파주에서 생산한 멥쌀로 만든 쌀가루에 끓는 물을 부어 익반죽을 만들고 국내산 밀로 빚은 누룩과 섞어 밑술을 만든다. 20℃ 정도에서 3일동안 발효시키고 나서 찹쌀로 지은 고두밥을 섞어 덧술을 한다. 일반적으로 이양주를 빚을 때 덧술의 양을 밑술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하는 데 비해 <아황주>는 밑술의 절반 정도만 덧술을 한다. 대신 볶은 밀로 만든 밀가루를 조금 넣어 구수한 맛을 더한다. 이렇게 만든 술을 3일 정도 더 발효시키고 저온에서 한달 가량 더 숙성한 뒤 걸러내면 알코올 도수 17도의 약주가 완성된다.
잘된 <아황주>는 진한 황금색을 띤다. 빛깔이 진한 이유는 발효가 잘됐기 때문이다. 색은 진하지만 끈적이지 않고 맛은 부드럽다. 비결은 온도조절에 있다. 최 대표는 “덧술 양이 적어 발효시간이 짧은 편이라 맛이 깔끔하다”며 “짧은 시간에 발효시키기 위해 그때그때 온도를 적당하게 조절하는 것이 노하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이 좋고 은은하게 단맛이 돌아 담백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고 추천했다.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위치한 파주시 장단면은 예로부터 콩으로 유명하다. 청정지역에서 나는 장단콩은 쌀·인삼과 함께 ‘장단삼백(長湍三白)’이라 불리며 임금 수라상에 올랐을 정도라고 한다. 파주 곳곳에는 장단콩으로 만든 음식을 파는 식당이 성업 중이다. 대표 메뉴는 장단콩 두부와 미나리·느타리버섯 등 각종 채소를 넣고 끓인 전골이다. 10년 넘게 광탄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미아씨(61)는 “두부전골은 두부의 맛을 살리는 게 중요하다”며 “고춧가루 외에는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는 대신 홍합 같은 제철 해산물로 국물을 시원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뜨끈한 장단콩 두부전골은 훌륭한 술안주다. 탱탱한 두부는 씹히는 맛이 일품이고 개운한 국물은 술을 절로 부른다. 담백한 맛이 강해 <아황주>와 함께 먹으면 술의 단맛이 더 살아난다.
설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궁중에서 즐기던 술인 아황주는 소중한 분을 위한 선물이나 제사상에 올릴 차례주로 좋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한해의 안녕을 기원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술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