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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관심
2007년 12월 27일 / 대예배 / 사도행전 1:1-11
어떤 목사님이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바짝 다가가서 보니까 그 오토바이에 스티커 하나가 붙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고 합니다. "죄의식 따위는 뭉개버려라." 무엇 때문에 죄의식을 가지고 사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을 가만히 보면 죄의식은 점점 실종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죄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을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취급하는 그런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죄의식이 생길 텐 데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죄의식도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과연 죄의식이 불필요한 것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은 죄로부터 안전한가요? 지금까지 지은 죄와 앞으로도 지을 죄에서 자유롭습니까? 아니 지금도 짓는 죄는 어떻게 합니까?
벨트앙스트(Weltangst)라는 사람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죽어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두려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공포를 던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편안하고 자유스럽고 모든 것이 자신만만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다른 것이 하나 자기 마음에 와 앉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가 자기 마음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몸에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빨리 죽으면 어떻게 하나?’ ‘아이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우리 가정이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별의별 걱정 때문에 오는 공포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다 둘러보아도 이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 과연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계속하면 여러분은 아마 마음속으로 ‘아니야, 나는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하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분은 이 세상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사십니까? 왜 일주일 내내 세상일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사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 열 명중의 여덟 명은 일주일 내내 마음이 완전히 세상에 가 있습니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만 그렇게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세상에다 온통 마음과 뜻을 쏟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고 기대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하면서 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느냐? 말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날 교회도 많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영혼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교회 있는 사람들끼리만 좋아하고, 친교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우리 하다가 결국에는 우리 안에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운영되는 것도 영혼을 구원하느냐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교회 운영 자체에 모든 것을 다 허비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과 은혜와 복음대신에 물질이 와 있고 세상의 명예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이 변질되어 가지 않나 하는 우려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너무 많은 교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세상에 온통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장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쏟고 살아야 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다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때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1:3절 / 십자가에서 해를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고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세상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주님의 관심사였고 주님의 대화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1장 1-11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그 과정과 결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는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기록하였노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하고 외치며 가르치기를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② 그러면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전개되어 갑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지상에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그 전도 활동을 통해서 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를 왜 세우셨느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그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지상 교회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③ 그 나라는 언제 완성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제자들을 보고 천사 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운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 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관심, 예수님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여러분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십시오.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 안에 세상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세상 나라에 대한 청사진이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어떤 목표가 없습니다.
성경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백성들을 보면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위해 생명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생 목표도 하나님 나라에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가 많아지니까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뛰어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 나갔지 않습니까? 그들이 퍼져 나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 수가 더 많아지니라." 나중에는 국경을 넘어서 안디옥에까지, 그 다음에 터키가 있는 이고니온까지,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까지 바울이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마음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에 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처럼 눈만 뜨면 건강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벌벌 떠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한번 찾아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더 많이 벌어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아이고. 내 자식, 아이고 내 딸, 내 아들 저 놈들 어떻게 잘 되어야 하는데?’라며 밤낮으로 아들, 딸 생각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보십시오.
베드로는 자기 아내를 데리고 다녔고 자식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베드로가 자기 아내를 걱정했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을 걱정하느라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정을 알뜰히 돌봤습니다. 남편으로서 자기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업에 충실했습니다. 비록 그렇게 살았지만 그들에게 다른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온통 마음이 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그들은 종종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실제로 생명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끌려가서 돌멩이에 맞아 죽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니까 집도 빼앗기고, 생업도 잃어버리고 온 가족이 온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을 살았던 사람이지, 세상 나라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이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하고 그들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똑같습니까? “주님, 나도 밤낮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비록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고 정신없이 몰입하지만, 나는 왜 내가 그 일을 하며 사는지 압니다. 하나님 나라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야 정상입니다. 만일 스스로 생각하기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과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된다면 이단이든지 아니면 사이비 기독교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 양심적으로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세상 나라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앙로 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는 예수님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힘을 써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3가지 중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고 세 가지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 이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인지 아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누구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까? '내'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할렐루야! '내'가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손에 쥐고 계시는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1장 21절을 보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온 만물을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권세가 있었는지 베드로가 이 이름을 가지고 한 30분 설교를 하자 예수를 십자가 앞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폭도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리니 기록되었으되 너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하신 말씀처럼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자 그 말씀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수많은 사람들이 "형제여, 우리가 어떻게 할꼬, 어떻게 할꼬."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진짜 가져야 할 중요한 관심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8절을 함께 보십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관심을 바꾸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관심 가질 것은 바로 성령님에 대한 것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성령이 임하면 다 됩니다.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과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문제인 것처럼 보였지만 성령이 임하면 문제와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성령의 능력으로 핍박도 이기고 어려움도 이겼습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히고 수없이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지만 다 이겼습니다. 오히려 "이 기쁨을 주체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능력, 이런 힘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바로 성령의 권능입니다.
또 이 성령의 권능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마가복음 16:17-1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놀라운 역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에게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모든 문제를 이길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이 생기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가치관 삶의 방향이 바뀌어 질 것입니다. 어떻게 바뀝니까? 바로 예수 증인의 삶이 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되는 삶이 되게 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보십시오 누가 억지로 선교사로 내보내면 갈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억지로 목사되게 하겠습니까? 선교사로 나가는 것은 듣고 보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증인되는 것이 가장 놀라운 삶, 가장 가치있는 삶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병원도 그만두고 교수자리도 그만두고 사업도 그만두고 예수 증거하며 살겠다고 나섭니다. 또 어떤 이는 내 학문을 통해, 내 사업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어합니다. 스스로 학원 선교사, 직장 선교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아무도 못 말립니다.
진실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의 구별은 바로 이 증인되는데 차이가 납니다. 전도하지 않고 선교하지 않으면 가짜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그친 교회입니다. 그만큼 단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선교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러시아와 미국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19세기 초에 똑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동안 러시아는 얼마있지 않아 공산주의가 되고 완전히 실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요? 미국은 19세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복음을 위해 세계 방방곡곡에 선교사를 보내는 동안 러시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러시아가 공산화되기 직전 당시 러시아 국민의 98%가 다 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으면 취직도 안되었고 증명서 발급도 되지 않습니다. 거리도 성경지명을 따라 이름을 지었고 간판도 성경의 이름으로 심지어 음식이름도 성경에 나오는 식물이름으로 따서 지었습니다. 기독교 황금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축복의 시기에 복음증거할 생각은 안하고 교회 지붕위에 십자가를 금으로 만들고 예배당을 금으로 장식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성직자들은 모여서 회의한다며 교리 싸움을 했습니다. 축도를 하는데 축도하는 손은 60도를 할것이냐 70도로 할것이냐 라는 문제로 싸움을 했습니다. 성찬식을 하는데 떡을 자르는데 5센치냐 6센치냐, 포도주 양도 적게 하느냐 많게 하느냐 가지고도 싸웠습니다. 그들은 복음증거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역사도 그쳤지요. 보십시오 결국 그 나라는 공산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되게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복음증거에 대한 열정입니다.
약속한 것을 기다려라
사도행전1:1-8
“하나님의 약속 800선”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데이빗 위커슨(David Wilkerson) 이라는 분이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정리한 책인데, 869가지의 구절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여러 가지의 항목별로 정리해 놓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은 자상하게도 약속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수지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고 해도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약시대에 구세주를 이 땅에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이사야 9장 1절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두움이 걷힐 날이 올 것이라고 하시면서 한 아기가 태어나서 통치자가 될 것이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삼일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사람들은 약속한 것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가끔 저희 아이들이 그럽니다. “어른들은 약속도 안 지켜”그게 무슨 말이냐? 하고 물으면 그래요. 교회에서 어른들이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안 지킨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그럽니다. 어른들은 하는 일이 많아서 잠시 잊은 거야. 조금 더 기다려봐. 그렇게 하곤 넘어갑니다. 여러분,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른들의 신용이 말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집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그 사람과 약속하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이들과 약속한 것이나, 친구들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들과 약속을 잘 지켜야 아이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은 약속한 것을 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한번도 약속을 해 놓으시고 지키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짓을 모르는 분이고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약속을 하십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며 약속을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4-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시니라”아멘.
예수님의 약속은 이렇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을 하여 주셨고 그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사도행전 서두에 기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그 약속을 받아야만이 사도행전이 시작되는 것이고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도행전도 시작이 되지 않고 교회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 될 수 있고 성도가 성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받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성령세례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면 신앙이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언제나 성령세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받는 것에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6절 말씀에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그것은 나에게 맡기고 성령을 기다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하나님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세례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기를 바랍니다.
찬송가를 보면 페니 크로스비(F. J. Crosby, 1820-1915)라는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의 대부분은 이 분이 작사한 찬송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분은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소경이 되어 시력을 잃었어요. 시력을 잃기는 했지만 아주 뛰어난 달란트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는 무력해졌고 삶의 회의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세월을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30세가 되었을 때,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성령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뉴욕의 어떤 전도집회에 참석해서 찬송가를 듣게 됩니다. 찬송가 141장이었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찬양을 듣다가 찬양의 가사가 이 여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복음이 어디 있나? 주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고요, 전에는 안 믿어졌는데, 이제는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순간 눈물이 흘렀습니다. 과거의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모르고 지내던 시절을 회개하는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이 몸밖에 바칠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할 때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면 내가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시상이에요.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거예요. 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늘의 문이 열리고 구원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 작사했던 것이 321장입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할렐루야.
이 분은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000곡의 찬송가를 작사합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는 22곡이 들어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예수께로 가면(300장),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434장(나의 갈 길 다가도록), 480장(기도하는 이 시간), 492장(나의 영원하신 기업) 그 외에도 많은 찬송가를 작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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