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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
2014년 12월 7일 / 대예배 / 다니엘 4:28-37
우리 주변에 보면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한다든지, 집안이 부자든지, 배경이 좋다든지, 젊다든지, 어떤 자기생각이나 꿈이 강합니다. 그들은 이런 이유로 하나님 찾기가 힘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그런 것들을 믿고 의지하며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그 자신도 문제가 있지만, 더 문제는 그들을 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마저 그런 사람을 두고 ‘저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아니야?’라고 판단하며 정죄합니다. 아예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거나, 기도할 생각조차 안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주위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어떤 사람이 나의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집안 식구, 친한 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에 대해 ‘○○○는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 아니야! 지옥에 갈 사람이야.’라고 단정 짓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그들에 대한 시각을 바꿔 긍휼과 온유로 대하고, 예수님이 보시는 각도에서 기도도 합시다.
▶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回心)에 관한 사건으로서, 성경에서도 독특한 사건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다니엘과 같이 믿음이 있는 자의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본문은 이방 군주인 느부갓네살의 하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신교(多神敎)를 믿는 우상숭배자요, 바벨론 제국의 왕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변화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변하여 하나님을 믿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스리는 바벨론 온 천하 만민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에게도 스스로 풀 수 없는 답답함을 주십니다(1-18).
1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조서 내용은 놀랍게도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능력의 역사를 온 백성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조서 서두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단 4:3 / 참으로 크도다. 그 놀라운 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그 일. 참으로 엄청나다. 그분이 베푸신 이적. 하나님은 영영 임금이시라. 언제나 언제까지나 다스리실지라.
느부갓네살이 누구입니까? 그는 우상 숭배자요 교만하고 포악한 이방 나라의 절대군주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 유다를 멸망시킨 정복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변화되어 조서를 내려 신앙 간증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된 일도, 한두 가지 일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한 꿈을 꾼 후 생긴 답답함과 번민 때문이었습니다.
단 4:4 / 나 느부갓네살은 지금까지 이 궁전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왔다. 온갖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온 것이다.
이 말씀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왕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줍니다. 이때는 느부갓네살이 강대국 애굽을 물리친 후를 말합니다. 이때까지 그는 정복전쟁을 하느라 마음의 여유라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정복 전쟁이 끝나고 궁궐에서 편히 쉬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국을 위협하는 모든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대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세계의 부는 그의 창고에 쌓였고, 그는 정치적ㆍ경제적으로 매우 만족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쉬울 것도, 문제될 것도 없는 세상이 주는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잊었습니다. 그가 많은 나라를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자기 백성을 연단하시는 도구로 쓰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해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만국에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재위한지 얼마 안 되어 신상(神像)의 꿈을 통해 세상 나라를 그 뜻대로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느부갓네살을 포함한 세상 왕들은 그의 뜻을 이루는 도구에 불과함을 계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단 2장).
그렇습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정의를 실천하고, 가진 것 없어 서러움 당하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들을 쓰시기 원하셨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제국을 건설했다고 생각하며 자만심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금 신상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져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쓰레기와 같은 퇴물로 변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되었기 때문에 회개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은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번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그의 내면에 두려워하며 번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는 즉시 바벨론의 모든 박사, 술객들을 불러 꿈의 해석을 듣고자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능히 해몽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과거에 자기의 꿈을 해몽해 주었던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왕은 다니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니엘이라면 자기 꿈을 알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했습니다(단 4:9).
단 4:10-17은 왕이 꾼 꿈의 내용인데, 그 꿈은 2부로 되어 있습니다.
제1부는 기분이 좋은 꿈으로, 그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심히 높았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하늘에 닿아 땅 끝에서도 보일 정도였습니다. 또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는 풍성하여 만민의 식물이 될 만 하였습니다. 그 나무 아래는 들짐승이 안식처를 찾았고,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 들었으며,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었습니다. 그 나무는 중앙에 있었고 크고 높고 강하였으며 아름답고 풍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영원할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 나무가 베임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2부는 아주 두려운(무서운) 꿈이었는데, 그가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는 내려와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단 4:14-17 / 그 나무를 베어 버려라. 가지를 찍고 잎사귀를 훑어 버려라. 그 열매를 모두 다 따버려라.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들짐승도 모두 다 쫓아버려라.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날짐승도 모두 다 쫓아 버려라. 15) 그러나 그 그루터기는 그대로 두어라. 그 그루터기는 쇠줄과 놋쇠줄로 꽁꽁 묶어 그대로 두어라. 그렇게 풀밭에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게 그냥 두어라. 짐승과 어울려 지내게 놔두어라. 식물과 함께 지내게 그냥 두어라. 16) 그 마음이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않고 오히려 짐승같은 마음을 지니게 하여라. 일곱해 동안 그렇게 지내게 하여라. 17) 바로 이 결정은 거룩한 분들의 결정이다. 조심성 있고 늘 정신 바짝 차리고 있는 순찰자들의 명령이다. 사람들이 다스리는 천하 모든 나라가 모두 다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 그분의 관할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이 사신을 알리려는 것이다. 하여 당신 뜻대로 그 누구에게라도 나라를 맡기실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라도 그분은 세상 나라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직관적으로 이 꿈이 자기와 관련이 있는 꿈임을 느꼈지만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너무나 답답했고, 무언가 불길한 일이 닥쳐올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으니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비록 그가 잘 나가는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요 세상에서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이 간섭하시자 견디기 힘든 두려움과 답답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다니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어떤 사람은 너무나 잘 나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처럼 무서운 꿈을 꾸게도 하시거나 집안에 생긴 어려운 일, 질병 등을 통해서 두려움과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는 일에 예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벧전 3:15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2.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위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다니엘을 예비해 두셨습니다(19-27).
왕의 꿈 이야기를 들은 다니엘은 얼마 동안은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는 그토록 큰 권세를 가진 왕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왕에게 흉한 소식을 고해야만 하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놀라고 번민하는 것을 본 왕은 다니엘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도록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충심으로 말했습니다. “차라리 임금님의 원수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원수들에게 적용될 꿈이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 첫 번째 꿈은 바벨론의 번영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 꿈은 왕 개인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해석에 의하면 나무는 곧 느부갓네살 왕이었습니다. 왕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여 하늘에 닿고, 그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권세와 그 영광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줍니다. 그 잎사귀가 아름답고 풍성한 것은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영광과 번영을 상징합니다.
고고학 발견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살던 왕궁은 가로 세로가 각각 9.6km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건축 애호가로서 바벨론 제국의 곳곳에 대 신전들을 세웠습니다. 그 중에는 8층으로 된 거대한 벨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또 유명한 공중정원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질 만큼 신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왕의 권세와 그 영광이 얼마나 엄청났는가를 보여줍니다. 그의 권세와 영광은 너무나 엄청나서 아무도 도전할 수 없고 영원할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한 순찰자로 인하여 순식간에 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한 순찰자는 천사를 의미합니다. 나무를 베도록 명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순찰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들을 감찰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반드시 낮추십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교만해진 왕에게 임할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그것은 왕으로서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박탈당하고 사람에게서 쫓겨나 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7년 동안을 하게 됩니다.
이런 무서운 훈련을 통해 느부갓네살은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7년 동안 그를 철저히 낮추심으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단 4:26 / 파수꾼이 ‘그 나무 그루터기는 그냥 놔두어라’ 하고 명령을 내린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란 사실을 임금님께서 깨달으신 후에야 비로소 임금님께서 이 제국을 다스리실 수 있게 하신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그를 뿌리째 뽑아 버리지 않으시고 그루터기를 남겨 두셨습니다. 이는 그를 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를 낮추시는 회개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다니엘은 그에게 꿈을 해석해 주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니엘이 왕의 안위를 위해 진심으로 간언(諫言)하는 것입니다.
단 4:27 / 그러하오니 임금님, 소인이 이르는 말씀을 따르십시오. 이제는 그만 죄 지으십시오. 정의를 실천하셔야 합니다. 가진 것 없어 서러움 당하는 이들을 돌보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셔야 임금님이 다스리시는 이 제국이 죽죽 뻗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임금님도 평안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느부갓네살 왕이 공의롭지 못하고 포악한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그는 왕궁과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악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파괴했습니다. 또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오거나 죽였습니다. 그는 모든 불의와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왕에게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공의와 긍휼을 베풀어 의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 이를 보면 느부갓네살에게 다니엘은 어떤 존재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다니엘은 비록 포로출신이요, 왕의 신하에 지나지 않았으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왕들의 고문(顧問)으로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간 신세였지만 신앙을 회복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한 결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처럼 다니엘은 왕의 답답함을 풀어주며, 왕의 영적인 방향도 잡아 주었습니다.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회개의 메시지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볼 때에는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의 곁에 우리를 두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를 그 사람 곁에 두신 것에는 반드시 우리를 쓰실 일이 있고, 쓰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준비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고자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은 결정적인 때에 친히 훈련하시고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다(28-37).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다니엘로부터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또 동시에 그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복음의 메시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죄를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교만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장에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12달 동안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내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어느 날 그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때에 바벨론 성을 내다보며 자신이 이룬 업적으로 인해 자만심에 빠져 독백(獨白 - 혼자 중얼거림, 무대에서 배우가 상대역 없이 혼자 말하는 행위)을 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여기서 주어(主語)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내가, 나의 도성, 내 위엄의 영광’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신이 영광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궤계가 바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되게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시험문제는 우리들에게도 항상 출제되는 문제입니다.
마 4:2-11 /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이나 금식을 한 뒤였으므로 몹시 시장하셨다. 3) 그때 마귀가 와서 돌을 떡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하며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될 게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친다.” 5)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지붕 위에 세워 놓고 6) 말하였다. “뛰어내리시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주께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천사를 보내 보호하게 하시니 그들이 두 손으로 너를 꽉 붙잡으리라. 혹시나 돌부리에라도 채이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소?” 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도 성경에 있다.” 8) 마귀는 다시 예수를 이끌고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9) “만일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성경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이르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11) 그러자 마귀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은 이 시험에서 탈락했고, 죄인이었던 세리는 합격했습니다.
눅 18:9-14 /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이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12)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130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 느부갓네살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만심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여지없이 낮추셨습니다. 왕의 자만심에 찬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느부갓네살아,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네 제국도 그 힘도 이제는 모두 다 끝장났다.” 그리고 왕은 백성들로부터 쫓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었고, 몸은 하늘 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털은 독수리 털과 같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 이상의 무엇이 되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짐승보다 못하게 낮추시매 땅바닥까지 굴러 떨어졌습니다. 왕은 심한 정신 이상에 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 어떤 목사님이 레스트(rest) 홈에서 일하면서 치매에 걸린 노인들을 돌보는데, 어떻게 한 인간이 이렇게 변해버릴 수 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치매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과거의 인생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한 할아버지는 전직이 고등법원 판사입니다. 그 위세가 당당하고 근엄했을 고등법원 판사가 지금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주는 음식이나 먹고 기저귀에 똥오줌을 싸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80세, 90세가 넘은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발톱을 깎지 않았는지 발톱이 아주 두툼하고 또 흉측하게 오그라들었습니다. 보다 못해서 한번은 제가 손톱깎이로 한 할아버지의 발톱을 깎았더니 발톱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한 할머니는 방에다 처녀시절의 사진을 갖다 놓았는데 영화배우 뺨치게 예쁜 모습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손이 오그라들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늘 침을 흘리는 비참한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이처럼 비참하고 슬픈 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이 상실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느부갓네살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레스트 홈에서는 매일 씻기고 샤워시키고 돌보니까 냄새도 안 나고 보기에도 말쑥하잖아요? 그렇다면 들판에서 하늘 이슬에 젖으며 살아야 했던 느부갓네살의 몰골은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거기다가 그는 짐승의 영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상실함으로 인한 비극이었지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교만으로 하나님께 대항한 죗값이었습니다.
4. 고통의 7년이 지났을 때에 회개하는 느부갓네살
단 4:34a / 왕이 말하였다. `일곱 해가 지났을 때 내가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다. 주께서는 이 세상을 영영토록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하나님께 절실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었을 때, 그의 훈련은 끝나고 그의 이성이 회복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왕권도 회복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 4:34b-35 / … 그래서 나는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다. 주께서는 이 세상을 영영토록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35) 주께서는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게 내려다보시지요. 하늘에 날아다니는 독수리도 땅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도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 그 누가 감히 주님의 뜻을 거스르랴! 주께서 하시는 일 그 누가 감히 이러실 수 있느냐고 입을 뗄 수 있으랴!
왕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의 정신병은 치료되고 왕으로서의 그의 지위와 명예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이전보다 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지난날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한 후 최후로 말했습니다.
단 4:37 /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노라. 그분을 드높이 기리노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올바르시다. 그분은 젠체하며 거만하게 목을 곧추세우며 살아가는 자들도 내리 꺾으실 수 있는 분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겸손 훈련을 받고 느낀 소감 한 마디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에서 이 뜻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눅 15:11-24 /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12)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제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지금 나누어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후에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가지고 먼 지방으로 떠났다. 거기서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면서 돈을 허비해 버렸다. 14) 돈은 이미 다 떨어진데다 그 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 그는 끼니조차 이을 길이 없었다. 15) 할 수 없이 그는 한 농부를 찾아가서 애원하다시피 하여 돼지를 치게 되었다. 16)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넉넉히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일꾼들까지도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여기서 나는 굶어 죽겠구나! 18) 아버지께로 돌아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 봐야겠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그러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저를 일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20) 그래서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에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빨리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내 아들에게 입혀라. 그리고 보석 반지를 끼워 주고 신을 신겨라. 23) 또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잔치를 열고 기쁨을 나눠야겠다.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그를 잃었다가 찾은 것이다.’ 그래서 잔치가 시작되었다.
5. 이 글을 읽으면서
1. 자기 의(義)에 빠지지 맙시다.
난폭하고 거칠었던 느부갓네살이 변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니엘 2장에서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던 자신의 잊어버린 꿈을 유다에서 잡혀온 다니엘이라는 젊은이가 알아내고 해석하는 것을 보고도 변하지 않았던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3장에서 자기가 불속에 던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에 타죽지 않고 살아나오는 것을 보고도 거칠고 난폭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느부갓네살을 이처럼 변하게 만들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우 강력한 처방으로 느부갓네살을 변화시키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매우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경건의 능력은 시인한다고 하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서도 거룩한 척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겠지’라는 미련한 생각에 빠져 전혀 경건을 위한 훈련을 회피하다가 일시적인 고통이 아닌 영구적인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 23:29-35 / 화가 있으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너희 조상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인들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놓고는 30) ‘우리는 조상들이 저지른 행동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31)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들을 죽인 악한 자들의 자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셈이다. 32) 그리고 너희는 그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밟아 가고 그들의 악을 다 채우고 있다.
▶ 성경에 보면 ‘자기 의(自己 義, Self-righteous)’에 빠진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가장 경건하다고 생각하고 남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난 너 같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입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8:9-14에서도 지적하셨듯이 이들은 자신을 ‘구별된 자(경건한 자)’로 인정받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자꾸 비하(卑下-상대방을 업신여겨 낮춤)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원래부터 ‘자기 義’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바리새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율법적으로 이방인들은 물론, 세속적인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많은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약 백여 년 전에 형성된 종교적인 당파인데, 처음에는 평신도 운동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이들은 서기관계층과 긴밀히 연결되어 일반 평민들과 분리되었습니다. 세속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너무 경건에 집착하다 보니까 율법의 올무에 스스로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뿐만 아니라 입으로 전해 내려온 엄격한 종교적 생활규범들, 곧 장로들의 유전도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율법 및 전통을 존중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데에 이르기까지 이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는 열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시험 기간을 거친 뒤에 십일조 및 결례규정을 아주 엄격히 지키기로 약속하는 사람들만을 자기들의 공동체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바리새인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지나쳐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형식적인 율법조항에 너무 얽매이다 보니, 율법조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엄격하고 냉혹한 정죄(定罪)를 일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비록 바리새인으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도웁기는커녕 정죄하고, 무슨 일이든지 종교적인 계율로 무거운 짐을 지우는 바리새인의 신앙행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심지어 탈무드에는 이러한 일까지 있습니다. 겸손해 보이기 위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다니거나, 여인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걷다가 부상을 자주 당하는 경우도 있고, 불결하거나 추잡한 꼴을 안 보려고 회반죽으로 만든 모자로 눈을 가리고 다니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이것은 노력의 일부분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매 교만해 져서 남을 정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계속적인 경건의 훈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더욱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막 7:1-9 /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보러 왔다가 2) 예수의 제자 몇 사람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았다. 3) 유대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옛 전통을 지켜 손을 깨끗이 씻은 뒤에야 음식 먹는 관습이 있었다. 4)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는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야 음식에 손을 댈 수 있었다. … 5)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우리의 옛 관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그냥 음식을 먹습니까?” 6-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이미 적절한 예언을 하였다. ‘이 백성이 나를 섬긴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말로만 나를 섬기고 높일 뿐 마음은 내게서 아주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하며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그들은 나를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편리한대로 생각해 내어 만든 규정에 따라서만 나를 높이고 섬기기 때문이다.’ … 8) 너희는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너희 자신의 전통만을 고집하고 있다. 9) 그러나 사실은 너희 자신의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짓밟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이에 바울도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이러한 바리새인의 영향아래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도 ‘자기 義’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의 행위(行爲)나 의(義)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언제나 푯대를 향하여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 義’는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나 반드시 무너지는 것이 ‘자기 義’입니다.
2.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 대도(大盜) 조세형이라는 사람이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소년원을 안방 드나들 듯하면서 자라온 이 사람이 15년 교도소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많은 사람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세형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간증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 하나님 말씀을 깊이 공부하기로 했고, 또한 헌신적인 자매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기까지 했습니다. 선교회를 조직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전 국민을 감동시킨 참으로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조씨의 범행동기나 범행 후의 정황, 반성의 뜻을 종합해 볼 때 이전의 절도전과만으로는 재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검찰의 보호감호를 받아야 한다는 검찰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완전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세형은 2013년 4월 3일 75세의 나이로,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고급 빌라 1층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들어가 고급시계와 금반지 등 시가 3,000만~5,000만원 상당의 귀금속 33점을 훔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조세형이 변화된 척 꾸미고 쇼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뉘우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억제되어 있던 그의 죄악성과 옛습관, 옛사람이 되살아나 그의 인생을 또다시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어쨌든 한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교육의 목표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거친 성품을 부드럽게 만들고,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성품을 바꾸어서 남을 사랑하게 만들고, 욕심쟁이는 양보하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서 민주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현장의 많은 교육자들은 비관하고 실망합니다. 이론에 의하면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죄악된 성품으로 하나님을 훼방하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악하고 비열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눈먼 안내자들아, 너희는 화를 받을 것이다, 이 눈 멀고 어리석은 자들아,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라고 하셨겠습니까? 심지어는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까지 하셨겠습니까?
▶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려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며 애쓰고 계실까요? 그러나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을 믿기 힘들 것 같던 이방의 왕 느부갓네살 왕일지라도 친히 간섭하시고, 믿고 찬송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으로 한계를 느끼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 또한 예외라고 단정을 짓지 마시고 늘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다.
이왕이면 한 걸음 나아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다니엘과 같은 일꾼이 되십시다. 하나님이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음을 믿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위의 영혼들을 인내로 기도하며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가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마태복음 4장에서 시작된 제자들이 힘들고 고된 3년 동안의 훈련을 마쳤지만, 승천하시기 전에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보내실 성령을 기다려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분부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몸부림치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권능이 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행 1:3-8).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일꾼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의의 일꾼이 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3. 참고로 조언(助言)을 합니다.
1)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변화시키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변화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눈빛만 보고도 우리가 척 알아서 변화한다면 하나님이 매우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로 해도 변화가 없으면 꿀밤이든 회초리든 좀 더 강경한 방법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변화가 없을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거나 의지하는 믿음이 수준 이하로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수준을 상향조정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빼앗아 가셔야만 합니다. 글쎄 그것이 우리의 재산일 수도 있고, 개인의 기술이나 능력일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자식을 칠 것입니다. 전 재산을 잃고 겸손을 배웠다면 그래도 남는 장사입니다. 고생은 좀 될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면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점도 많겠지요. 직장은 잃었지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얻었다면 더 값진 것을 얻은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 생각에는 안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2)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목표는 느부갓네살을 왕위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이렇습니다.
단 4:17 / 사람들이 다스리는 천하 모든 나라가 모두 다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 그분의 관할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이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다. 하여 당신 뜻대로 그 누구에게라도 나라를 맡기실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라도 그분은 세상 나라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변화되어가는 것, 이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지고, 우리의 행동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떼를 쓰고 버티며 변화를 거부하다가는 느부갓네살처럼 고생을 좀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마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놀랍고 아름다운 사건들이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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