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허임 바오로(1795〜1840)
o 훈련도감의 포수로, 배교했다가 이를 뉘우치고 신앙을 증거한 뒤 순교함
◦ 고향은 미상. 장성한 뒤 서울에서 거주
o 1840년 좌포도청에서 장살로 순교
다블뤼 (A. Daveluy, 안 안토니오) 주교는 허 바오로의 이름을 ‘임’ (Im)으로 기록하였다.75) 반면에 훗날의 시복 재판정에 나온 증언자는 그 의 이름을 ‘윤’ 이라고 증언하였다.76) 이와는 달리 그의 이름을 ‘협’으로 기록한 전기도 있는데, 어느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에 서는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따라 그의 이름을 ‘임’ 으로 기록하였다.
허임 바오로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훗날 그 가 도성의 방위를 담당하던 훈련도감의 포수로 생활했던 것만은 분명하 다.77) 또 그가 언제 입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온 가족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수계생활을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도 여러 기록에서 확 인되고 있다.
바오로는 1839년의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체포되어 좌포도청으 로 압송되었다. 이내 그는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가 주뢰형을 받고 치도 곤을 70도까지 맞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옥살이와 형벌에 마음이 약 해져 배교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고, 이 말은 들은 포도대장은 형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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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순교사 비 망기』, 494쪽.
76)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41, 유 바르바라의 증언.
77) 『기해일기』(116쪽)에는 ‘도감의 군병’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나, 위의 유 바 르바라의 증언에 ‘훈련도감 포수’ 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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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지하고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바오로는 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그런 다음 스스로를 다잡고 종사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종사관 앞으로 나가 “제가 배교한 것은 잠시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죄를 뉘우치고 배교를 철회하고자 합니 다.”라고 소리쳤다. 이에 잠시 놀랐던 종사관과 형리들은 이내 비웃음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어 찌 믿으란 말이냐! 그냥은 믿을 수 없으니, 저기 대소변이 섞여 있는 오 물을 떠서 마신다면 네 말을 믿어 주겠다.”
이 말이 나오자 무섭게 바오로는 그 오물을 한 그릇 떠서 마시고는 다 시 오물을 떠서 마시기 위해 그릇을 가져갔다. 그러자 형리들은 “이제 됐 다. 그만 마셔도 된다.”고 하면서 그를 말렸다. 그런 다음 그 앞에 십자 고상을 던져주면서 “배교하지 않겠다면 이 물건에 절해 보아라.” 하고 말하였다. 이에 그는 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통회하였다.
이때부터 바오로는 어떠한 형벌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았다. 온몸이 피 투성이가 되도록 거듭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변하지 않는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그러다가 형벌 가운데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그 때가 1840년 2월2일(음력 1839년 마지막 날) 무렵으로,당시 그의 나이 45 세였다. 바오로가 포도청에서 맞은 치도곤만 도합 130도에 이르렀다고 한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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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기해일기』, 116쪽 :『순교사 비망기』, 494〜495쪽 :『기해 • 병오 재판 록』회차 5, 김 가타리나의 증언 : 회차 41, 유 바르바라의 증언 : 회차 59, 한 바울라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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