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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끝기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
1786년 프랑스 리옹 근교에서 태어났다. 대단한 어려움을 극복한 후 마침내 사제품을 받았다. 벨레 교구의 아르스 마을 본당을 맡았다. 열심한 설교와 고행과 기도와 선행 등 놀라운 방법으로 본당을 쇄신하고 발전시켰다. 고해성사와 영적 지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의 영적 권고를 경건히 듣곤 하였다. 1859년에 세상을 떠났다.
기도와 사랑은 고귀한 과업이다
자녀들이여, 그리스도인의 보화는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따라서 우리 생각을 우리 보화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사람의 고귀한 과업이요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은 이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또 하느님과 일치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위안을 받고 감미로움으로 충만해지며 놀라운 빛으로 눈부시게 됩니다. 이 긴밀한 유대 안에서 하느님과 영혼은 녹아 합치된 두 자루의 초와 같아 아무도 그것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미소한 피조물과 하느님의 이 결합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행복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1)
박재만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1. 생애
'성체의 성인', '고해소의 성인', '본당신부들의 수호 성인' 등으로 불리는 성 요한 비안네는 모든 본당사제들의 귀감이다. 그는 사목업무의 활력을 매일의 미사성제와 성체 대전에서 머무는 긴 시간의 기도를 통해 얻었으며 그 활력의 은총을 통해 본당 공동체의 쇄신과 신자들의 재복음화, 순례자들의 성화에 투신하며 기여할 수 있었다.
그의 모든 사도직의 중심인 사랑의 성사 성체성사에 참여 하기 위한 준비는 회심과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임을 강조하면서 그에 인내로이 초대했던 비안네 신부는 본당 공동체를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에서 가까운 마을 다르딜리에서 아버지 마태오 비안네와 어머니 마리아 벨루제의 일곱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1789)과 그 여파로 인해 사회가 혼란하고 교회가 박해를 받아 곤경에 처해있던 시대에 청소년기를 지낸 요한 비안네는 학교 교육이나 본당의 교리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여건 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는 가정에서 일찍 기도하는 것을 배워 혼자 조용히 기도하길 좋아했다.
그는 13살 되던 1799년 이웃마을 에퀼리에 보내져 교리 공부를 한 후 첫 영성체를 하였다. 박해의 상황이었기에 첫 영성체 날 미사는 건초로 창문을 가려 놓은 한 농가에서 그로보즈 신부에 의해 집전되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사목활동하던 그 신부의 담대한 용기는 비안네 소년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때부터 그의 마음 안에 사제 성소의 싹이 텄다.
마을에 공립학교가 세워지면서 비안네는 늦은 나이지만 어린이들과 함께 기초 공부를 하였다. 그는 부모를 도와 밭일을 해야 했으므로 학교에 자주 결석했지만 두 해에 걸쳐 프랑스어 읽기와 쓰기 등을 배워 그 지역 사투리만 알던 그가 이제 표준어인 프랑스어로 어느 정도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는 푸루니에 신부로부터 교리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 신부와 친해지면서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그 안에 더욱 커갔다.
1806년 그가 스무 살 되던 해 신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에퀼리에 있는 발레 신부를 찾아갔다. 기초교육도 제대로 안 된 시골 젊은이를 면담한 그 신부는 의외로 흔쾌히 예비 신학생으로 받아 들였다. 그곳에서 비안네는 주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근 3년 공부하던 그는 군복무 관계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1811년 3월 발레 신부에게 돌아왔다.
3개월 후 발레 신부는 쿠르봉 부주교에게 비안네를 사제 지망자로 추천했고 다음해 그는 리옹 교구의 신학생으로서 베리에르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기초 교육의 미흡과 라틴어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철학 신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는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없어 발레 신부에게 돌아가 언어와 신학 공부를 보충해야 했다.
1813년 비안네는 리옹의 성 이레네오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라틴어로 진행된 수업 때문에 다시 어려움을 겪던 그는 시험 결과가 좋지 못해 학업능력 결격자로 판정되었고 결국 추천 신부에게 되돌려보내졌다. 그 결정은 최종 탈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추천 신부가 그에게 사제가 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신학을 가르친다면 그의 사제 성소를 재검토 할 수 있다는 특례 조항이 첨부되었다.
발레 신부는 라틴어 아닌 프랑스어로 그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한 그는 시험관 앞에서 프랑스어로 시험을 쳤고 드디어 무난한 평가를 받으며 통과되었다. 그리고 1814년 7월 2일 그는 감격스럽게 차부제품을 받았다.
발레 신부한테서 계속 공부한 그는 다음 해 6월 23일 부제품을 받았다. 비공개로 진행된 마지막 시험을 친 후 같은 해 8월 13일 사제성품을 받았다. 그러나 고해성사 집전권이 유보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발레 신부는 비안네를 자신의 보좌로 맡겨 주길 요청함으로써 사목실습을 도울 수 있었고, 한편 새 사제가 고해성사 집전권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 일년이 채 안되어 문제를 해결했다.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는 그의 스승이며 아버지이고 주임인 발레 신부였다. 1817년 12월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비안네는 다음 해 2월 11일 아르스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이틀 후 부임했다. 주민이 230명에 불과한 아르스의 교우들은 대다수가 세상사에 쫓기면서 신앙엔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
비안네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공동체의 회심을 위해 자주 금식 고행을 했고 매일 긴 시간동안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에 대한 친절과 자비심은 그에게 있어서 언제나 금식이나 어떤 고행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 봉헌, 고해 성사 등으로 하루 중 10시간 이상 성당과 고해소에서 지냈으며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 강론 및 교리 강좌 준비를 하였다. 몇 년 후 아르스 본당은 그가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공동체가 되었다.
1824년에 그는 '섭리'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것은 소녀들을 위한 무료학교였는데 장래 어머니 역할을 수행해야 할 소녀들이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교육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선 교사들을 양성하여 그들에게 쓰기, 읽기, 셈하기 뿐 아니라 요리, 집안 살림, 정원 가꾸기, 바느질 등을 가르쳤다. 곧 기숙사 시설도 갖추었고 고아원도 함께 운영하면서 교육시켰다. 그는 이러한 시설들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곤경 중에 기적 같은 일들을 가끔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섭리를 뜨겁게 느꼈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비안네 신부의 단순하면서도 감명을 주는 신앙강좌를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1838년에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성가정 수도회에 맡겨 교육하도록 했다.
1823년 1월에 샤르트르회 신부들이 아르스에서 멀지 않은 트레부라는 곳에 피정 선교단을 보냈는데 비안네 신부도 그 일원이 되어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 활동을 마치고 돌아 온 후 그의 성덕과 카리스마에 대한 평판은 그 주변 뿐 아니라 점차 리옹에까지 퍼졌으며, 1826년부터 순례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아르스를 찾아왔다.
비안네 신부는 그 후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씩 봉사해야 했다. 아르스의 시장 프로스페르 데 가레 백작에 의하면 183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순례자가 3만에 달했다.
순례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비안네 신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그들이 아르스에 오는 목적이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자기를 보러 온다는 부담감이었다. 그러던 중 아르스가 순례지가 되도록 하는 공적인 이유를 마련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찾아냈다.
그가 평소 공경하던 성녀 필로메나 순교자의 경당을 지어 그곳에서 순례자들이 성녀의 중재 기도를 청하며 회개하여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는 은총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안네 신부는 튼튼한 몸을 타고났지만 엄격한 수덕생활과 충실한 사도직 업무 그리고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과로하게 되어 점점 쇠약해졌다. 그러나 그가 움직일 수 있던 날까지 일상적 본당 업무, 소년, 소녀들을 위한 학교 운영, 교리교육, 환자 방문, 고해성사, 상담 등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73세이던 1859년 8월 2일 병자성사를 받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렸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된 그를 비오 11세는 1928년 4월 23일 시성했으며 1929년엔 '본당신부의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8월 20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2)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2. 영성사 안에서의 기여
1) 비안네 신부는 수도자가 아닌 교구 사제 즉 본당 주임 신부로서 시성된 첫 사제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그토록 많은 수도자, 주교, 교황들이 시성 되었는데 왜 재속(교구) 사제 혹은 본당 사제들이 시성 되지 못했을까? 교구 사제들이 그만큼 거룩하게 살지 못해서였을까? 그것은 영성의 다양성과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에 대한 인식부족과 성성을 재는 규준의 역사적 한계성 때문이 었을 것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오랜 동안 성인의 특성(聖性) 이란 종말적 상황 안에서 소수의 예외적 인물이 실천할 수 있는 엄격한 수덕 행위와 연계되어 이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성은 순교자들이나 종말 영성을 사는 관상 수덕자들에게 가능한 특전처럼 제한적으로 이해되면서 세상사에 관여하는 평신도나 교구 사제의 생활 방식에서 성인의 길 추구란 어려운 것이라 여겨졌다. 교구 사제들의 고유한 영성과 완덕관이 제시될 수 없었기에 적절한 성성의 척도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성에 불렸다는 '성성에의 보편적 소명' 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신분과 생활 상태에 따라 고유한 방법 으로 은총과 협력하여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거룩하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의 목표는 하나이고 모두에게 공통적이지만 거기에 나아가는 삶의 방식은 다양 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성소에 따라 생활의 모습이 다양하므로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표현도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성사를 생활화 하는데 공통적 요소를 지니지만 신분과 생활의 양태에 따라 완덕에 나아가는 방법엔 고유성을 지닌다. 이를테면 수도자가 철저한 복음 권고덕을 살면서 성화된다면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 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한편 사제는 백성들을 가르치고 성화시키며 헌신적으로 봉사하면서 성화되는 것이다. 비안네 신부가 성인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엄격한 수덕 생활을 했기 때문일까? 실제로 그는 금식, 수면 단축, 청빈, 절제 등 엄격한 수덕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성인 되게 한 것이 아니다. 교회 생활 안에서 때론 고행을 성성과 동일시되면서 고행적 수덕이 비인간적일 만큼 엄격할 수록 완덕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잘 못 생각하기도 하였다. 수덕은 성성이나 완덕에 나아가는 생활의 기초이고 방편이긴 하지만 성성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인간 안에 활동 하시도록 준비하는 자세이며 또한 그분의 효율적 도구가 되기 위한 훈련이다. 그러나 성성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받는 은총인 것이다. 비안네가 성인인 이유는 무엇 보다 본당신부로서 성실히 살며 사랑으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가르친 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사제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인 신자들을 일생 동안 온 몸을 바쳐 사랑하고 봉사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상이며 목표인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일상생활 이나 그 과제에서 떠난 특수한 수덕생활 방식에 있다고 제한적 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인이 되는 지름길은 비안네가 그러했 듯이 자신의 소명 안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맡은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그러했듯이 오늘도 잘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훌륭한 성인으로 살며 봉사하고 있는 본당사제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2) 비안네 신부는 고해사제 및 영적 지도자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귀감이다. 비안네 신부가 훌륭한 사제 및 영적 지도자로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 카리스마도 타고났지만 기도와 훈련을 통한 은총의 결실로서 필요한 덕과 맑은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그러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요청되는 통찰력과 식별력, 적절한 훈계를 위한 말씀, 용기와 위로를 북돋아 주는 내적 치유력 등 카리스마들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가 부성애를 지닌 고해 사제 및 영적 지도자가 되기까지엔 은총에 협력하면서 사랑, 인내, 자비로움의 덕을 갖추어야 하는 성숙의 시간이 요청되었다.
사목 생활 중 초반기엔 그가 얀세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의문이 제기될 만큼 고해자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차차 엄격함에서 벗어나 용서와 자비의 봉사자로 변화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 내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인내 그리고 사랑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매일 찾아오는 사람들의 고뇌와 죄 고백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인간 실존의 한계성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주변의 현명한 조언을 겸손되이 받아 들였으며 무엇보다 기도와 묵상, 성체 조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가까이 나아 갈 수 있는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할 만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선량하신 하느님께서 제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당신께 큰 기쁨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물에 빠진 자기 아기를 구해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선량하신 하느님께서 뉘우치는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3) 비안네 신부는 생활한 신학을 일생동안 끊임없이 공부한 사제였다. 가끔 비안네는 학문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한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마치 지성적 측면이 영성적 측면에 있어 성장하는 데 방해하거나 지장을 주는 것처럼 잘 못 생각하는 것이다. 사제 양성과 지속적 교육 과정에서 지적 교육은 인성 및 영성 교육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교육 들이 잘 이루어지는 데 필요하다. 실로 지적 교육과 영성생활은 연결되어 서로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이지 결코 서로간에 장애가 되면서 학문 연구의 견실함을 떨어뜨리거나 기도의 영성적인 풍미를 잃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앙을 체계화한다. 한 측면은 하느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은 하느님과 대화 하는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비안네는 그와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학을 조화 있게 공부한 사제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시대적 사회 불안과 가정 형편상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소신학교 및 대신학교 과정을 제대로 이수할 수 없었지만 학교 당국의 배려로 발레 신부로부터 개인 지도를 받으며 부족하긴 했지만 필수적인 신학 과목들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사제성품 후 일생동안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철저히 검소했던 그가 아르스 본당에 부임할 때 스승 신부로부터 물려받은 300 여권의 책만은 모두 챙겨 올 만큼 독서와 공부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한편 그의 참된 신학 공부는 사목 생활의 체험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기도 중에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그분으로부터 직접 배웠으며 그분의 모상을 지닌 인간들과의 만남 중에 배운 것이다. 그의 참된 공부의 강좌와 교재는 기도와 미사, 성체 조배였고, 그 보조 교재는 그가 만나고 봉사한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기에 사람은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성서와 함께 주요한 원천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8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3)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3. 영성
비안네 신부는 성체께 대한 신심과 성체성사의 생활화 그리고 고해성사의 은총에 대한 인식 부족을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으며 실천하도록 이끌어 준 모범 이며 스승이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그는 '고해소의 성인', '성체의 성인' 이란 강한 이미지로 여전히 살아 있으며 언제나 호소력 있는 모범이다.
1) 사도적 영성
사제직은 본래 사제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기 보다 세상의 복음화 사명을 위한 헌신적 봉사를 요구한다. 사제직에 불리우는 동기는 사제 개인의 성화보다 인류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사도적 사명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가 성성(거룩함)에 이르는 고유한 길은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사제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 하는 것"('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13항)이며 그는 "수행하는 직무 전체를 통하여 완덕 생활에 진보하는 것"(같은 교령 12항)이라고 가르친다.
실로 비안네 신부는 그가 맡은 사도직에 온 몸을 바쳐 수행 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인 완성의 단계에 나가게 되었고 성화되었다. 그는 일상적 사목 업무로서 환자및 가정방문, 교리 교육, 고해성사 집전, 상담뿐 아니라 공부할 여건이 못된 그 지역의 소년 소녀들을 위한 학교 및 고아원 운영 등을 통해 복음화 활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의 성덕과 카리스마가 널리 알려지면서 수 없이 몰려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매일 12시간 이상씩 고해성사를 집전 하고 상담을 해주었다.
다른 한편 공의회는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제에게 맞갖은 영성이 요청된다고 강조한다. "사제의 성성 자체는 그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크게 이바지한다"(같은 교령, 12항).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백성에게 그분의 은총을 전달해 주며 성화 시키는 도구로서 선택된 이가 사제라면 그의 직무는 그에게 당연히 성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가르침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매일 영적 양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마음에 새기며 묵상한 후 가르쳤다. 그는 성화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매일 미사 중에 목자적 애덕을 배웠으며 성체 대전에서 사목적 활력을 얻었다. 그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를 하면서 미사 성제를 준비하였다. 성체성사는 그의 영성생활, 수덕 및 사도직 활동의 원천이고 중심 이며 정점이었다. 그는 다스림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봉사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봉사하러 오신 주님의 모범(마태 20, 28 참조)을 따르며 봉사에 아낌없이 투신하였다.
2) 성체 신심
비안네는 '성체의 성인'이었다. 그는 첫영성체 중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 안에 사제 성소가 싹이 텄다. 그가 아르스 본당에 부임했을 때 다수의 교우들이 신앙에 무관심하며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음을 보면서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감실 안에 계신 주님 앞에서 매일 여러 시간씩 열성으로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성체 대전에서 주님께로부터 활력을 얻지 못했다면 매일 그가 자신을 아낌없이 준 그러한 사도직 수행을 결코 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감실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생생히 느끼는 특은을 받은 비안네는 성체성사의 신심을 끊임없이 강조했으며 그것이 그의 강론과 교리 강좌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그는 영성체를 통해 받는 놀라운 은총에 대해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시키고자 애썼다. "우리가 자주 영성체를 하면 우리 영혼은 꿀벌이 꽃향기로 목욕하는 것처럼 사랑의 향기로 목욕합니다" "영성체 하는 사람은 한 방울의 물이 대양에 파묻히듯이 하느님 안에 자기 모습을 감춥니다" "이 성사를 멀리 하는 사람은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물이 흘러 넘치는 샘 가에서 갈증으로 죽는 사람과 같습 니다. 또한 팔을 내밀지 않아서 보물을 앞에 놓고도 가난하게 지내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영성체 후 무엇을 집으로 나르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하늘 나라를 옮긴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매일 영성체를 하기 위하여 미사에 참례 하도록 신자들을 적극 초대하였다. 그리고 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기 위해 일상에서 잘 준비해야 함을 강조했다. 성체를 직접 모시지 못할 경우엔 영적 영성체라도 하길 권했다. 비안네 신부는 교우들에게 성체 조배를 자주 하도록 권면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사랑으로 성사 안에 계시며 아버지께 우리 죄인을 위해 끊임없이 용서를 빌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머무시기엔 우리가 얼마나 합당치 못합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로 하시기 위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분을 자주 방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방문하고 그분께 경배 드리며 그분이 겪는 온갖 모욕을 위로하기 위하여 15분을 쓰는 것을 그분은 참으로 반기십니다. 우리가 감실 앞에서 그분 발치에 있을 때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맛보는 행복은 얼마나 큽니까?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을 배가시키십시오!"
비안네 신부는 성체 조배의 자세와 방법이 참으로 단순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에게 감명을 주었던 노인 농부 샤팡의 모범을 소개하곤 했다. "제가 아르스에 처음 왔을 때 성당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하러 나갈 때나 저녁에 돌아 올 때 성당 문앞에 괭이를 세워놓고 오랫 동안 성체 앞에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뻤던지요! 언젠가 저는 그에게 오래 머무는 동안 주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를 물었습니다.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신부님, 그분께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도 저를 보고 계십니다' "
3) 고해성사 : 사죄, 식별과 내적 치유의 봉사
비안네는 사제 성품을 받으면서 얼마 동안 고해 성사권이 유보되어 행사할 수 없었다. 거의 일생을 매일 12시간 이상씩 고해소에 앉아 봉사해야할 만큼 명망이 높게 되고 세기를 통해 유명하게 될 '고해소의 성인' 비안네 신부가 자격 미달로 판정되어 사죄권이 유보되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그에 대해 우려하던 장상들의 조심스런 관찰의 기간이 요청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얼른 판단되기도 하지만 거기엔 큰 일꾼을 키우고 굳건히 성숙시키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섭리적 배려가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사제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던 비안네 신부는 실로 사제직의 고귀한 품위와 고해성사의 놀라운 은총에 대해 어느 사제보다도 깊이 느끼고 체험하였으며 감격스러워 하였다.
비안네 신부를 만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하여 차츰 이웃 교구, 프랑스 전역 그리고 유럽 여러 지역에서 주교, 신부, 수도자들과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연간 수 만 명 씩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비안네 신부는 매일 12시간 이상을 그리고 말년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 봉사해야만 했다. 순례객들은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비안네 신부를 만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때론 세 주간을 아르스에 머물며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좋은 고해신부에게 요청되는 적절한 카리스마를 타고 난 비안네 신부는 은총에 협력하면서 더욱 큰 사랑, 인내, 자비로움의 덕을 또한 갖추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1일]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①
그의 나이 열여덟에 스승 '발레 신부'를 만나다
1786년 출생, 1859년 선종. 본당 신부들의 수호성인. 축일은 8월 4일. 아르스의 본당 신부. ‘성체의 성인’, ‘고해소의 성인’으로 불리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모든 본당사제들의 귀감이다. 그는 사목업무의 활력을 매일의 미사성제와 성체 대전에서 머무는 긴 시간의 기도를 통해 얻었으며, 그 은총을 통해 본당 공동체의 쇄신과 신자들의 재복음화를 이뤄냈다.
1786년 프랑스 농촌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신심 뛰어났지만 학업에서는 ‘열등생’으로 평가 기획을 시작하며
교황청은 사제의 해 선포 취지와 관련, 사제들이 스스로의 직분에 대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하느님 백성 전체가 사제직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사제의 해 행사는 외적인 화려한 행사가 아니라 내적 쇄신을 통하여 사제직의 고유한 신원과 사제단의 형제애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특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사제의 해와 관련, “사제들의 선교 의식 회복이 절실하다”며 “사제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복음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들을 만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가톨릭신문의 사제의 해 기획은 이러한 보편교회의 요청과 한국 교회의 필요에 대한 응답으로 마련됐다.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앞서서 살아간 사제들의 사표는 사제들에게 인간적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세상의 달콤한 사상, 무비판적 감성, 따뜻함이 없는 이성, 편향된 논리, 필요를 가장한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호소한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통로로 내놓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번 사제의 해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 기념에서 출발하는 만큼 우선 비안네 성인의 삶과 영성을 다룰 예정이다. 이후 필립보네리, 돈보스코를 비롯해 까르딘 추기경으로 이어질 사제 열전은 고 최민순, 선종완, 이문근, 길홍균, 배문환 신부 등 한국 교회 선배 사제들의 삶도 함께 다루게 된다.
‘사제의 사제’ 기획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디딤돌 놓기다.
사제직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앞으로 1년간 사제직의 모든 것을 현장감 있는 취재와 연구로 접근하는 기획이다. 사제직의 정체성과 역사, 소명의 신학적 의미와 역사적 해석들 등 사제직의 이론적 차원을 사제직 현장과 연결해 다룰 계획이다.
이 기획에서는 권위의 기원과 역사, 성품성사의 모든 것, 교부들의 사제영성, 현대 사제의 영성, 심리학으로 바라본 사목자의 심리, 교구 사제와 남녀 평신도의 관계, 사제단의 친교 등 매주 1개씩 주제를 선정해 사제직을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할 예정이다. 개신교 교역자 양성과정, 한국 불교의 승려교육, 유교의 지도자 양성 등도 주요 주제들이다. 또 본당 사제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군종사제, 특수사목 사제들의 삶에도 귀 기울이기로 했다. 사제 양성에 대한 다양한 제언과 사제를 향한 가족들의 기도도 함께 다룰 계획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을 맞아, 6월 19일 예수성심대축일부터 내년 6월 19일까지 1년을 ‘사제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사제직의 고유한 신원과 사제단의 형제애를 재발견하고, 복음선포에 대한 사명을 재인식하는 이 소중한 시간을 가톨릭신문이 함께합니다. 앞으로 1년간 사제들의 사표들을 소개하고, 현장 중심의 사례를 바탕으로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논거들을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사제직의 모든 것을 탐색해 나갈 이번 기획에 많은 관심과 조언을 바랍니다.
“제가 만약 사제가 된다면 많은 영혼을 구하겠어요.”
눈이 움푹 들어간, 하지만 맑게 빛나는 파란 눈을 가진 열일곱 살 소년의 꿈은 오직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요한 마리아)는 사제가 되겠다는 아들을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용 인근의 한 농촌 마을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아들, 요한 마리아 비안네(John Mary Vianney)는 자라는 동안 여느 아이들과 특별히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심만큼은 남달랐다. 비안네가 일곱 살 때 성모상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비안네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3살 되던 해(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다. 파리에선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추방되었으며, 살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려면 몸을 숨겨야 했던 시절이었다. 비안네가 13살이 되고 나서야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첫영성체도 물론 창문을 가린 방에서 해야 했다. 이런 생활은 1799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 후 1801년 정교 협약을 거치고 나서야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성소의 꿈을 이야기한 그 이듬해, 열여덟 살의 비안네는 인근 본당 발레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늘 위대한 스승이 있듯, 비안네에게는 발레 신부가 있었다.
하지만 초창기의 비안네는 발레 신부를 당황하게 했다. 어린 시절, 농사일만 배운 비안네는 기초 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했다. 자국어였던 프랑스어의 문법조차 제대로 몰랐으니, 당시 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필수였던 라틴어는 더욱 몰랐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마티아라는 학생이 비안네의 라틴어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마티아는 속에서 불이 났다. 다른 친구들은 조금만 도와주면 번역할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을 비안네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런 멍청이~.” 결국 마티아는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비안네의 뺨을 때렸다. 마티아는 비안네보다 여덟 살이나 어렸다. 비안네의 몸은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로 다져온 건장한 몸이다. 힘도 당연히 더 셌다. 그런데 비안네는 여덟 살 어린 소년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마티아와 비안네는 이후 평생 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발레 신부는 뛰어난 성덕과 신심을 가진 비안네가 학업 때문에 성소의 꽃을 피우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런 발레 신부에게 비안네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발레 신부에게 짐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발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거야. 사제품. 영혼들의 구원도 끝나는 거지.”
하지만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안네의 공부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런 비안네가 발레 신부의 곁을 떠난다. 이제는 홀로서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하지만 공부 문제는 나폴레옹 황제의 징집으로 인한 병역 문제 이후, 1812년 소신학교 철학과정에 입학할 때까지 계속 비안네의 발목을 잡는다.
당시 신학교 시험은 교수와 학생들이 라틴어로 문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비안네는 시험 때마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학 동기들은 그를 비웃었다. 사람들은 그를 ‘열등생’으로 낙인찍었다. 역설적으로 이 시절 비안네의 성모 공경 신심이 더욱 깊어진다. 어려운 학업을 극복하기 위해 비안네는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기로 서원한 것이다. 그리고 학업의 어려움 속에서 평생의 영적 동반자, 마르첼리노를 만나게 된다. 마르첼리노 샴파냐(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교육수사회 창설자)도 역시 라틴어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현실이었다. 비안네의 고민은 깊어갔다. 공부를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당시 비안네의 학년말 생활기록부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근면 : 좋다 ▲행실 : 좋다 ▲성격 : 좋다 ▲지식 : 나쁘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28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②
“하느님 은총이 부족함을 채워줄 것”
학업 부진으로 신학교 떠나야 했던 비안네
발레 신부 직접 지도했지만 졸업시험 낙방 “공부 못해도 신심 깊다” 평가로 사제품 받아 비안네 신학생이 라틴어와의 전쟁을 치르며 끙끙대던 어느 날이었다. 신학교 영성지도 신부와 교수 신부들이 비안네 신학생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신학교를 떠나는 것이 좋겠네.”
성령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며 사제가 되기를 진심으로 갈망했던 비안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신학교 신부들은 비안네 신학생이 학업을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로선 라틴어를 모르면 철학과 신학의 정수를 접할 수 없었다. 따라서 비안네 신학생은 신학을 수학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인간적 욕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반발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래서 반드시 사제가 되어야 한다.” “당신들이 뭔데, 인간적 판단으로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떼어놓으려 하느냐.”
하지만 비안네 신학생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신학교를 떠난다. 순종한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난 정말 사제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그토록 원하던 사제의 길은 이제 포기해야 했다. 그 고통과 회한은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영적 스승인 발레 신부의 품 안에서 폭발한다. 엉엉 울었다. 발레 신부는 목 놓아 우는 비안네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넌 사제가 될 수 있어.” 눈물 가득한 눈으로 발레 신부를 올려보는 비안네의 눈이 반짝였다.
발레 신부는 이후 비안네의 개인 교수를 자처하고 직접 가르쳤다. 비안네의 눈높이에 맞춰, 라틴어가 아닌 영성 신학 중심으로 가르쳤다. 비안네도 성심껏 공부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는 이쯤에서 극적인 반전(비안네의 사제서품)으로 이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3개월 후 비안네는 발레 신부와 함께 다시 대신학교를 찾아 졸업시험을 보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발레 신부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레 신부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주교(리옹 교구장)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비안네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놓치기 아까운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비안네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꼭 사제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주교는 발레 신부의 계속되는 청에 못 이겨 감독관 2명을 비안네에게 보낸다. 사제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 오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감독관 파견은 비안네에 대해 부정적인 주교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레 신부의 정성어린 탄원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다면 별도로 감독관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교는 아마도 감독관이 “비안네는 역시 사제가 되기 힘들 것 같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발레 신부의 사제관으로 와서 비안네를 직접 만나고 시험을 치른 감독관들은 전혀 다른 보고서를 주교에게 제출했다.
“요한 마리아는 대부분의 시골본당 신부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그들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독관이 비안네에게 내어준 시험지는 라틴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된 것이었다. 신학교 시험이 라틴어로 치러지는 탓에 그동안 비안네는 한 번도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감독관의 보고서를 받고도 주교는 일단 판단을 유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즈음, 비안네에게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교구 사목 책임자가 바뀐 것이다. 쿨봉 주교였다. 비안네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비안네는 교구에서도 이미 공부 못하는 신학생으로 소문난, 유명 인사였다. 발레 신부는 다시 한 번 주교를 찾아갔다. 기대는 물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쿨봉 주교가 의외의 질문을 한다. “비안네는 신심이 깊습니까?” 발레 신부를 비롯한 교구청의 사제들은 “공부는 못하지만, 신심은 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쿨봉 주교가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 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그를 사제로 부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가 남긴 말
- 성령을 받은 영혼은 기도의 큰 신비를 맛본다. 기도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로 그에게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이 사라지지 않는다.
- 기도는 천국의 느낌, 낙원을 흐르는 샘물 또는 영혼 속을 흐르는 꿀과도 같다.
- 모든 것은 기록될 것이다. 조금이나마 눈이 즐기는 일을 포기한 것, 만족을 억제한 것, 이 모든 게 기록될 것이다. … 겨울이 되면 그들은 더욱 기뻐할 것이다. 추위에 따른 그 작은 고통까지 하느님께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5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③
열심히 기도·가난·고행 실천 신자들 ‘존경’ 한 몸에
보좌신부 시절
1815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성체의 성인’‘고해소의 성인’‘본당신부들의 수호 성인’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안네가 보좌신부가 된 것이다. 29세의 나이였다. 오늘날에는 29세 혹은 30세 사제서품이 당연해 보이지만, 비안네 시절에는 동년배들보다 3~5년 늦은 서품이었다. 그만큼 비안네의 사제수품은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비안네는 아직 미완의 사제였다. 교구가 사제품은 인정했지만 고해성사 집전권을 유보한 것이다. 교구에선 아직도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발레 신부는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 집전권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비안네 신부가 하루라도 빨리 신자들의 영혼과 마주앉아 그들을 치유해 줄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1~2년 유보될 것으로 예상됐던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 문제는 발레 신부의 노력으로 의외로 수개월 만에 해결될 수 있었다.
첫 고해자는 발레 신부였다. 발레 신부가 비안네 신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해를 하는 그 감격스런 모습은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마음을 찡하게 한다. 발레 신부는 모든 사람이 “포기하라”고 했지만, 비안네 신부의 성덕을 믿었다. 그리고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속 터지는 제자’를 끝까지 믿고 이끌었다. 발레 신부가 없었다면 비안네 신부도 없었다. 그만큼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를 자청한 발레 신부의 심정은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고해성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아마도 “이제서야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뤄졌다”고 감격해 했을 것이다. 함께 무릎을 꿇고 십자가 앞에서 오랜 시간 기도를 했을 것이다. 포옹하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비안네 신부가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했고, 또 신심이 깊다는 소문은 이미 사제가 되기 전부터 인근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비안네 신부의 고해소 앞에 줄을 지어 섰다. 비안네 신부는 소위 ‘인기짱 보좌신부’였다.
교리교육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비안네 자신이 공부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는가. 당연히 비안네 신부는 더딘 학습 진도를 보이는 학생들을 한없는 인내와 온화함으로 대했다. 강론도 짧고 명쾌했다. 말과 글은 원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모를 때, 길고 장황해지는 법이다. 완벽하게 소화한 내용은 쉽고 명쾌해 진다.
비안네는 가난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 대부분을 가난한 이들과 나눴다. 이런 일이 있었다. 비안네는 낡고 볼품없는 오래된 수단을 입고 있었다. 동료 사제들과 신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신부님, 수단이 낡았습니다. 제발 새 옷을 사서 입으세요”라고 말했다. 비안네는 주위의 강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어느 날 새 수단 하나를 장만했다. 그런데 그날 가난한 한 여인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비안네는 즉시 수단을 구입한 곳에 가서 돈을 돌려받아 여인에게 주었다. 비안네 성인 전기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비안네가 일생동안 새 수단을 입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안네는 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면서 공동체의 회심을 위해 자주 금식 고행을 했고 매일 긴 시간동안 성체 앞에서 기도했다. 이런 비안네를 신자들은 존경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단식 등 고행을 즐겨하는 비안네 신부에게 “몸을 돌보아야 한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다.
비안네는 행복했다. 사제로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늘 기쁨 뒤에는 슬픔을 주신다. 발레 신부가 하느님 품으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영적 아버지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이 비안네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1817년 겨울, 66세의 발레 신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잘 있어! 용기를 내. 제단에서 나를 꼭 기억해 줘.”
발레 신부는 비안네를 정확히 보았고, 비안네를 가르쳤고, 사제직으로 인도했다. 비안네가 좌절할 때마다 발레 신부는 옆에 있었고, 비안네와 함께 걸었다. 이후 비안네는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릴 때마다 발레 신부를 위해 기도했다.
비안네는 이제 혼자가 됐다. 3개월 후, 교구는 혼자가 된 비안네 신부를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한다. 부임지는 ‘아르스’였다. 30km를 떨어진 곳이었다. 비안네는 짐마차에 옷 몇 벌과 발레 신부가 남긴 책들을 싣고 첫 부임지로 향했다. 1818년 2월 9일 이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가 남긴 말
- 사제가 된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사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 그 놀라움 때문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 사제가 내적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 우리는 정말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응석꾸러기 자녀들입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12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④
“성체 모시고 주님 안에 사십시오” 젊은 본당 주임 신부
이탈리아를 둘러본 배낭 여행객이 프랑스 남동부를 거쳐 파리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가 있다. 바로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위치를 서울에 비유한다면, 마르세유는 부산, 리옹은 대구 쯤 있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프랑스 축구리그의 ‘올림피크 리옹’으로 유명한 리옹은 기원전 로마의 군사 주둔지가 되면서 도시화됐다. 이후 13세기에는 공의회가 두 차례나 열릴 정도로 가톨릭교회로선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도시다.
비안네 신부가 첫 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 받은 ‘아르스’는 이곳 리옹에서 북쪽으로 직선 거리로 25~3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오늘날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에서 수원교구 서호본당(수원시 권선구 서둔동)까지 가는 거리다. 서호본당은 특히 당시 아르스의 신자 수와 본당 재정 상태 등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아르스는 가난한 농촌마을이었다. 주민 수는 240여 명에 불과했다. 성당도 오랫동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낡은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의 신심은 깊지 않았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성당에 나오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지식조차 몰랐다. 프랑스대혁명(1789년)이후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신앙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보다도 향락에 더 친숙해 있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고, 흥청거렸다. 주일미사도 어쩌다 한 번이었다. 첫영성체 이후, 영성체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남자들이 허다했다.
그러나 훗날 이 성당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유럽 전역에서 비안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기 위해 신자들이 몰려든다. 신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아르스를 찾는다. 뒤에서 자세히 나올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선 시골본당에 갓 부임한 볼품없는 외모의 한 젊은 사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사제관에 도착해 짐을 푼 비안네 신부는 마음이 무척 상했다. 낡고 초라한 성당에 비해 사제관이 화려했기 때문이다. 비안네는 사제관에 있는 가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비단으로 감싼 의자와 두 개의 화려한 침대 및 이불까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남은 것은 나무 침대와 낡은 테이블, 옷장이 전부였다.
비안네 신부는 바로 ‘사목’에 착수한다. 매일 시간을 쪼개서 신자 가정을 방문했고, 신자들과 영적 담화를 나눴다. 특히 그는 강론에도 집중했다. 문장력이 서툰 그는 30~40쪽 분량의 강론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새웠다. 게다가 그는 강론 원고를 모두 암기했다. 신자들은 길을 걸으면서 강론 원고를 중얼거리며 외우는 비안네 신부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비안네 신부가 강론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그는 이 사랑과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했다. 특히 비안네 신부는 성체를 자주 영하라고 권고했다.
“성체를 모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지친 자들을 쉬도록 초대하십니다.”
“영혼은 하느님과 함께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영혼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모든 가정에 식료품을 잘 보관하기 위한 저장실이 있습니다. 감실은 우리 모두의 저장실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잠시 저러다 말겠지”였다.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려 했는데, 꽉 막힌 신부님이 마을에 오셔서 골치 아프게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비안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절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또 사제의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식사도 줄이는 등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늘 죄를 멀리 했으며, 하느님과 기도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다.
비안네 신부의 일화를 조사하던 중, 감동적인 장면을 발견했다. 비안네 신부가 얼마나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아르스의 한 마을 이장이 새벽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멀리 비안네 신부가 보였다. ‘신부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이장이 다가갔다. 비안네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오, 나의 하느님, 저희 본당 신자들이 회개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가 남긴 말
- 기도하는 것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 저는 성체 앞에서 물어 보았습니다. “여기 누가 계십니까” 대답이 들렸습니다. “하느님!”
-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정말 무서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하느님께 버림받는 것, 이것만 생각하면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한 가지 악한 생각 때문에, 한 병의 술 때문에…. 정말 순간의 쾌락 때문에 하느님을, 영혼을, 천국을 잃어버립니다. 영원히!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19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⑤
고해자들은 그를 통해 큰 은혜 받았다 비안네 신부는 헌신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고, 강론을 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으며, 온힘을 다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할 것을 가르쳤다. 비안네 신부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지방의 온화한 기후가 나를 괴롭힙니다. 나는 일도 너무 적게 하고 편하게 지내니 지옥에 떨어질까 항상 걱정됩니다.” 그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부자였던 한 귀족 신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겸손한 사제는 진주같이 귀한 사람이다. 이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 재산의 절반이라도 내 놓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열심한 신자들만 비안네 신부에게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쉬는 신자들이 문제였다. 아르스 마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심이 깊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조차 모르는 쉬는 신자가 허다했다. 마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축제가 열렸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퇴폐적인 춤과 술에 빠져 살았다.
비안네 신부는 이 같은 풍습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얼마나 마을 사람들에게 강도 높게 하느님 사랑을 선포했는지는 다음의 미사 강론에서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님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조금 후 우리 주님(성체)을 들어 올릴 때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들의 눈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분은 은총을 누구에게 선물할지 찾고 계시지만 아무도 그 은혜를 구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비안네 신부는 새벽 4시부터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 봉헌, 고해성사 등으로 하루 중 10시간 이상 성당과 고해소에서 지내며 열성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 강론 및 교리 강좌 준비도 하였다. 주민들은 감동을 받았고, 몇 년 후 아르스본당은 그가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공동체가 되었다.
비안네 신부는 병자를 방문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꼭 방문했다. 한 번은 자신의 몸이 몹시 아픈데도 병자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병자의 고해를 들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해 성사를 집전한 것이다.
성사에 대한 비안네 신부의 이러한 열정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823년이다. 비안네 신부가 36세 되던 그 해,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 피정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만큼 고해성사를 줄 사제가 부족했다. 결국 비안네 신부에게도 고해성사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한겨울에 9km를 왕복하며 이뤄진 고해성사는 고행성사였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이때 고해자들은 비안네 신부를 통해 죄사함의 큰 은혜를 느꼈고, 그 고해자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몇 주일 동안 계속된 피정에서 비안네 신부의 고해소는 늘 신자들로 붐볐다고 한다. 밀려드는 신자들로 인해 고해소가 넘어져 부서질 정도였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소에서 나오지 못했다. 한 번은 한 신자가 비안네 신부를 쉬게 하기 위해 고해소로 갔지만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자정에 찾아가도, 새벽 2시에 다시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이 신자는 완력으로 신자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고해소 문을 열고 신부를 모시고 나올 수 있었다.
이후 비안네 신부는 선종할 때까지 14년 동안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하루 12시간 이상씩 봉사했다. 본당 신부들도 서로 비안네 신부를 모시겠다고 말다툼을 벌였을 정도였다. 아르스 마을 기록에 따르면 183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순례자가 3만명에 달했다. 비안네 신부가 고해소를 나갈 때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해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비안네 신부의 수단자락을 끌어당기고, 어떤 이들은 또 옷을 찢기까지 했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정성스럽게 고해성사에 임했다.
여기서 50대 비안네 신부의 하루 일과를 보자. 그는 대체로 자정과 새벽 1시경에 고해소로 갔다. 그리고 새벽 6시 혹은 7시에 고해소에서 나와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고해소에 들어간 비안네 신부는 오전 10시쯤 다시 나와 성무일도 기도를 바쳤다. 11시에 교리를 가르치고 성당에서 나와 사제관에 가서 각지에서 온 편지를 읽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시 고해소로 향했다. 다시 고해소에서 나오는 시간은 저녁 7시 혹은 8시. 이후 비안네 신부는 묵주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치고, 강론대로 올라가 강론을 한다. 강론을 마친 후 약 9시 경, 비안네 신부는 비로소 혼자가 된다. 이 시간을 이용해 그는 아침기도를 외우고, 영적 독서를 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그는 선종할 때까지 하루 평균 2~3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농부의 아들, 비안네 신부는 튼튼한 몸을 타고 났지만 이러한 엄격한 수덕생활과 충실한 사도직 업무 그리고 끊임없는 순례자들의 방문으로 과로하게 되어 점점 쇠약해졌다.
73세가 되던 1856년 6월, 비안네는 성체를 모시고 갈 힘도 없었지만 평소대로 고해소에서 16시간을 보냈고, 교리를 가르쳤고, 기도를 바쳤다. 사제관으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쓰러지며 말했다.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2개월 후인 8월 2일, 비안네 신부는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그날 마지막 성체를 모셨다. 마을은 울음과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마지막 길을 시원하게 해 준다며, 사제관 지붕에 계속 찬물을 길어 쏟아 부었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41년 5개월 동안 작은 시골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영원한 잠에 들었다. 그가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하늘로 오르던 날, 아르스 마을 사람 모두가 울었다.
# 비안네 신부는 이후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됐으며, 1928년 4월 23일 비오 11세가 시성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또 비안네 성인을 1929년에 ‘본당 신부의 수호자’ 로 선언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26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1.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⑥
고해자의 마음 읽는 능력 가져 초자연적 신비 체험한 뛰어난 영성가
신자들에게 “성체 자주 모셔라” 권고 비안네 신부 선종 후 1861년, 파리에서 비안네 신부의 전기가 출간된다. 비안네 신부를 늘 옆에서 지켜보았던 몬냉 신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많은 관련자 증언 및 자료들을 모은 방대한 책이다. 비안네 신부의 삶과 영성은 이 책을 통해 전 유럽과 세계로 퍼져나갔다. 몬냉 신부의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비안네 성인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알고 있어도 너무 단편적 내용들만 알고 있었다. 비안네는 단순히 ‘고해성사의 달인’이 아니었다.
초자연적 신비를 체험한 성인
비안네 신부는 뛰어난 영성가였다. 매일 밤 사탄의 목소리를 듣고, 피나는 영적 싸움을 했다. 몬냉 신부의 책에 의하면 그래서 비안네 신부는 보이지 않는 현상에 무감각한 세태에 대해 늘 아쉬워했다고 한다. 비안네가 살던 당시는 계몽주의가 유행한 시기였다. 18세기 유럽에선 신앙이 폐기되었으며 그 대안으로 이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비안네 신부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신학자들을 볼 때마다 탄식했다. “열심히, 착하게 잘 살기만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자연적 현상들을 매일 접하다 보니,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는 이들이 안타까워 보였던 것이다. 비안네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초자연적 사건에 대해서 감수성이 너무 무뎌져서, 우리는 막상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했을 때 이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기적을 직접 접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처럼, 우리도 기적을 매일 체험하면서도 막상 마음이 닫혀 그 기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안네의 신앙은 강한 체험에 바탕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 귀로 듣는 체험이 강렬하다 보니 신앙도 그만큼 강해졌고, 그 강한 신앙이 삶으로 배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비안네 신부는 평소 강론시간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탄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는 특히 “사탄은 아주 영리합니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이런 말도 했다. “그러나 사탄은 강하지 않습니다. 성호 한 번만 그으면 도망갑니다.”
신앙 체험이 강렬해지면서 비안네 신부의 기이한 영적 능력도 함께 나타났다. 성인들에게서만 보이는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고해자의 말을 다 듣지 않고도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기적이라고 불렀고, 이는 비안네 신부가 훗날 성인이 되는데 결정적 증거 자료가 된다. 어느 날 한 젊은 청년이 비안네 신부를 시험하기 위해 회개하지도 않고 거짓 고해를 했다. 눈물 연기도 동반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고해를 듣던 비안네 신부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회개하고 다시 찾아오세요.” 비안네 신부는 청년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놀란 청년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비안네 신부 앞에 무릎 꿇고 제대로 된 고해성사를 보았음은 물론이다.
자연과 가난을 사랑한 성인
비안네 신부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하루 10시간 이상의 고해성사와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강론 준비 등으로 여유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묵주를 들고 혼자 산책하면서 기도했다. 그는 그 산책 시간을 사랑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자연을 사랑했다.
비안네 신부의 자연사랑은 오늘날 우리들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늘날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의 싱그러움을 사랑한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행복해 한다. 하지만 비안네 신부는 소음 가득한 도시에서 탈출할 때 느끼는 그런 해방감으로 자연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눈만 뜨면 보이는, 어쩌면 식상할 수도 있는 그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사랑한 것이다. 비안네 신부는 그래서 신자들에게 자주 대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명상을 전했다.
비안네 신부는 또한 철저히 가난을 몸으로 살았다. 2~3일 동안 아무런 음식을 먹지 않을 때도 많았다. 편안한 잠자리를 거부하고 침대 속의 짚을 일부러 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회개와 성체성사를 강조한 성인
비안네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체를 자주 모시라고 권고했다. “성체를 모십시오. 내 형제들이여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분 덕택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신성한 구세주께서는 ‘내게로 오너라. 수고하고 지친 자들아 내게로 오너라. 내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초대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죄가 너무 커서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여러분은 합당치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죄가 너무 많아서 주님께 나아갈 용기가 없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몸이 아픈데 치료를 거부하거나 의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비안네 신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큰 장작더미를 차곡차곡 쌓으며 ‘나를 태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범하며 이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지옥에 내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 성인
비안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일, 걸음걸이, 잠 등 그 밖의 모든 것을 그분께 봉헌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까. 그분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며,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모든 일이 당신 마음에 드시도록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당신이 함께해 주십시오.’ 우리들의 영혼에게 하느님은 얼마나 많은 위로를 줍니까. 영혼과 하느님 둘은 절친한 친구와 같습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2일, 우광호 기자]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1786-1859), Jean Marie Vianney, 축일 8월 4일
사제들의 주보성인이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용 인근의 ‘다르딜리’라는 농촌 마을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마태오 비안네와 어머니 마리아 블루즈 사이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자라는 동안 여느 아이들과 특별히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 역시 장차 어떤 사람이 되리라고 추측도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강했으며, 일곱 살 때에는 직접 성모상을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자라던 시절은 프랑스대혁명으로 불안정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모든 교회 재산은 국유화 되었으며, 모든 성직자는 신앙과 교의에 앞서 헌법을 준수할 것을 강요받았고 서약을 거부하는 이는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약을 거부한 많은 성직자들이 순교하였고, 성당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려면 몸을 숨겨야 했던 시절이었고, 그로 인하여 어린 비안네는 13세가 되어서야, 그것도 창문을 가린 방에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1799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 후 1801년 교황청과 프랑스와의 정교 협약을 거치고 나서야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비안네는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17세에 되어 사제가 되고자 마음먹었을 때에도 기초적인 프랑스어 문법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제가 되는 데 필수 언어였던 라틴어는 더욱더 몰랐습니다. 다르딜리 근방 에퀼리(Ecully) 본당의 ‘발레 신부님(Abbe Balley)’은 비안네의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 감동하여 그를 받아들였으나, 농사에 익숙해 있던 비안네가 지적인 사고에 익숙해지도록 변화시키는 것은 크나큰 난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레 신부님은 인내로써 비안네를 보살폈으며 공부 때문에 좌절에 빠졌던 비안네를 격려하여 사제성소를 키워나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직을 향한 비안네의 뜻은 군대 징집으로 인한 병역문제(1809년), 그리고 라틴어의 미숙 등으로 지연되었으며, 바리에르(Varrieres)의 소신학교에서 철학을(1811년), 리용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1813년), 결국 라틴어 때문에 퇴학당하고 말았습니다(1814년). 그러나 발레신부님의 지속적인 개인교수와 특별시험 주선으로 1815년 8월 15일 그레노블(Grenoble)에서 사제서품을 받게됩니다. 당시 사목책임자인 쿨롱 주교님께서는 비안네의 사제직 결정을 앞두고 ‘머리 나쁘기로 소문난’ 비안네에 대하여 “공부는 못하지만, 신심은 깊습니다.”라는 주위의 증언을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사제직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를 사제로 부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비안네는 아직 미완의 사제였습니다. 교구는 사제의 여러 직무 중 고해성사 집전권을 유보했던 것입니다.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사제가 고해소에서 교리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발레 신부는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 집전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심깊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비안네 신부가 상처받은 신자들의 영혼을 사랑으로 치유해 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발레 신부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비안네 신부님의 첫 고해자는 발레 신부였습니다. 발레 신부는 모든 사람이 “포기하라”고 했지만, 비안네 신부의 성덕을 믿고 이끌었습니다. 그 발레 신부가 없었다면 비안네 신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를 자청한 발레 신부의 심정은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3년 동안 발레의 보좌신부로 있은 뒤 1818년에 주민 230명의 아르스(Ars-en-Dombes)의 본당신부로 부임합니다. 아르스는 가난한 농촌마을이었습니다. 성당은 오랫동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낡은 상태였고, 마을 사람들의 신심은 깊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성당에 나오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지식조차 몰랐으며, 프랑스대혁명(1789년) 이후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신앙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보다도 향락에 더 친숙해 있었고, 거의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고 흥청거렸으며 주일미사도 어쩌다 한 번이었고 첫영성체 이후 영성체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 성인은 230명의 신자가 있는 아르스에 도착하기 전에 그곳의 신앙 실천이 매우 딱한 형편일 것이라고 경고해 준 주교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본당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거의 없습니다. 바로 신부님께서 그곳에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십시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구현하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증언하러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주님, 제가 제 본당을 회개시키도록 하여 주십시오. 저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어떤 고난도 평생 감내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그는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였습니다. 1818년 2월, 인구 230명의 아르스(Ars-en-Dombes)는 점토 기와로 덮인 40채의 낮은 집들이 흩어져 있는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비록 작은 마을이었지만 비안네 신부는 자신이 책임지고 구원해야 할 영혼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초라했던 성당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꾸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매일 시간을 쪼개서 신자 가정을 방문했고, 신자들과 영적 담화를 나눴습니다.
특히 그는 강론에도 집중하여 ‘머리 나쁘기로 소문나고’ 문장력도 서툴렀지만 강론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새웠습니다. 비안네 신부가 강론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했으며, 성체성사의 은혜로움을 강조하며 자주 영성체하라고 권고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체를 모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죄가 너무 많아 주님께 나아갈 용기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픈데 치료를 거부하거나 의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비안네 신부는 병자를 방문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방문했고, 한번은 자신이 몹시 아픔에도 불구하고 병자를 방문하였다가 탈진한 상태에서 함께 침대에 누워 병자의 고해를 들으며 성사를 집전하고 결국은 수레에 실려 집에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신자들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잠시 저러다 말겠지”,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려 했는데, 꽉 막힌 신부님이 마을에 오셔서 골치 아프게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명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좌절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으며, 죄를 멀리 하고, 하느님과 기도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교리를 직접 가르쳤으며 하느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신자들을 초대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만 합니다. 일밖에 모릅니다. 여러분의 이익에만 신경 쓸 분 영혼 구원에 무관심하다면 구원되기 힘듭니다.” 그리고 강론과 설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본보기로 자신의 고행, 극기, 단식을 감수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고 절약했던 비안네 신부였지만 하느님을 위해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봉헌하길 즐겨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예쁜 것을 좋아했고, 미적 감각도 있었으며, 신자들도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당에 다니기를 좋아하리라 생각했기에 성당을 꾸미는 데에는 아낌이 없었습니다. “낡은 수단이 아름다운 미사 제의에 알맞다”라는 유명한 말은 “우리 주님께 제일 예쁘고 비싼 것을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라는 말씀과 함께 비안네 신부가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
비안네 신부의 이러한 사목열정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823년부터입니다. 비안네 신부가 36세 되던 그 해, 인근 지역에서 열린 대규모 피정에서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를 통해 많은 고해자들이 죄사함의 큰 은혜를 느꼈고, 그 고해자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 비안네 신부는 ‘고해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아르스로 찾아왔습니다. 그 후로 비안네 신부는 미사 시간과 교리 교육, 그리고 기도와 본당 업무 처리, 그리고 간단한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고해소에서 보내게 됩니다.
비안네 신부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살아있을 때에도 이미 사람들은 그를 성인 신부님, ‘아르스의 성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했으며, 수많은 사진사들이 그의 모습을 필름에 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아르스 성당 주변에서는 고해를 기다리는 이들과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사진과 그림들이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안네 신부는 극도의 겸손으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가 받았던 모든 유혹 가운데 가장 큰 유혹은 자신에 대한 실망의 유혹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고 그 직무로서 떠나고 싶어했지만 결국 순명의 정신과 신자들의 기대를 굴복하여 끝까지 사목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73세가 되던 1856년 6월, 비안네 신부는 성체를 모시고 갈 힘도 없었지만 평소대로 고해소에서 16시간을 보냈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돌아온 후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라는 말씀과 함께 쓰러지셨습니다.
2개월 후인 8월 2일, 비안네 신부는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그날 “내가 그분께로 갈 수 없게 되니까, 그분이 제게로 오시는군요.”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성체를 모셨습니다. 마을에는 울음과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마을 남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마지막 길을 시원하게 해 준다며, 지붕에 계속 찬물을 길어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41년 5개월 동안 작은 시골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쉼에 들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이후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됐으며, 1928년 4월 23일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1세는 비안네 성인을 1929년에 ‘본당 신부의 수호자’로 선언했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09년 12월 - 2010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