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헌법이 공포됐다. 국민의 주권과 자유, 평등을 기본으로 하여 총 10장 103조항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 제헌헌법이 제정. 공포된 후, 1987년까지 총 9차례 개정이 이루어진 대한민국 헌법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의 든든한 뿌리인 헌법! 과연 대한민국 헌법은 어떻게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제헌헌법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1948년 7월에 제정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헌법으로 통치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헌법의 핵심 개념인 국민주권, 국민기본권, 권력분립, 대통령제 혹은 내각책임제와 같은 정부 형태는 국민들에게 생소한 단어였다. 그런데, 어떻게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헌법을 준비하여 제정할 수 있었을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제헌헌법이 해방 후부터 준비되고 제정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헌정사를 돌아보면 해방 전부터 입헌주의 도입, 즉 헌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사에서 헌법이라는 국가의 최고법이 등장한 건 근대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절대 왕정국가로 이행한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시민 계급은 구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사회 개혁을 요구했다.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 재산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이런 움직임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1689년 12월, 영국의회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을 만들어 왕의 서명을 받았다. 이것은 영국 입헌주의 기초가 되는 법률이었다. 그러나 국민 기본권, 정부형태, 권력분립을 규정한 성문 헌법을 최초로 제정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각 주에서 시행 중이던 주요 헌법들을 통합하여 1787년 연방헌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근거로 미국 연방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미국의 사례처럼 먼저 헌법을 제정했다. 그 기반 위에서 국민기본권을 보장하고, 정부를 비롯한 통치기구를 수립했다. 근대적인 입헌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입헌주의는 개항과 함께 아시아에도 전파됐다. 이 결과 일본은 1889년에, 중국은 1908년에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우리도 일본, 중국처럼 개항을 계기로 입헌주의가 소개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성리학의 정치원리로 통치되고 있었고 시민계급의 성장은 미약했다. 따라서 우리의 헌정사는 서구의 입헌주의 사상을 수입·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은 그동안 조선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제도인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등의 정치제도를 소개했다. 1883년 보빙사 일원으로 미국에 파견된 유길준은 서양이 동양보다 부강한 이유를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입헌주의에서 찾았다. 언론 또한 입헌주의 소개에 앞장섰다. 정부는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에 민권, 정부 형태, 정치제도 등을 소개했다. 1896년 4월에 창간한 <독립신문>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주권과 자유 민권 사상 등을 소개했다.
독립협회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1898년에 열린 관민공동회에서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으로 하여금 개막 연설을 하게 하여 국민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입헌주의가 명확하게 결정되지 않았다. 가령 1895년 <홍범 14조>, 1898년 <헌의 6조> 제정을 주도한 개화세력은 국민기본권과 정부 기구의 법제화를 주장했다. 반면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를 제정하여 군민공치를 부정하고 전제 군주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서도 입헌주의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갔다. 이때부터 전제 군주제는 부정되고 민주공화제로 이행해 갔고 이에 따른 헌법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05년에 설립된 헌정연구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정 연구 단체로 국민의 정치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창설됐다. 회원인 양한묵은 <헌정요의>를 황성신문에 연재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국가는 군주의 사유물이 아닌 국민 공동체의 것이며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황실이 아닌 정부가 필요하다.”
고종이 폐위된 1907년은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중요한 전기였다. 고종 폐위 이전에 개화세력들은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 폐위 이후 입헌군주제는 설득력을 잃어갔고, 민주공화제가 새로운 정치체제로 대두됐다. 민주공화정의 이념을 최초로 제시한 단체는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세울 새 나라의 체제로 입헌 군주제 대신 민주공화정을 제시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자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은 더욱 활발히 전개됐고 입헌주의 사상은 헌법 제정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1917년,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상하이에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서는 한일병합조약은 순종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주권을 이양한 것이라 주장하며 국민주권, 즉 민주공화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양에서 시작된 입헌주의는 개항과 함께 아시아에도 전파됐다. 이 결과 일본은 1889년에, 중국은 1908년에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우리도 일본, 중국처럼 개항을 계기로 입헌주의가 소개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성리학의 정치원리로 통치되고 있었고 시민계급의 성장은 미약했다.
첫댓글 대한민국 헌법이 걸어온 길(1)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헌법이 공포됐다.
국민의 주권과 자유, 평등을 기본으로 하여 총 10장 103조항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
제헌헌법이 제정. 공포된 후, 1987년까지 총 9차례 개정이 이루어진 대한민국 헌법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의 든든한 뿌리인 헌법!
과연 대한민국 헌법은 어떻게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제헌헌법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1948년 7월에 제정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헌법으로 통치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헌법의 핵심 개념인 국민주권, 국민기본권, 권력분립, 대통령제 혹은 내각책임제와 같은 정부 형태는 국민들에게 생소한 단어였다.
그런데, 어떻게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헌법을 준비하여 제정할 수 있었을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제헌헌법이 해방 후부터 준비되고 제정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헌정사를 돌아보면 해방 전부터 입헌주의 도입, 즉 헌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사에서 헌법이라는 국가의 최고법이 등장한 건 근대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절대 왕정국가로 이행한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시민 계급은 구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사회 개혁을 요구했다.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 재산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이런 움직임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1689년 12월, 영국의회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을 만들어 왕의 서명을 받았다.
이것은 영국 입헌주의 기초가 되는 법률이었다.
그러나 국민 기본권, 정부형태, 권력분립을 규정한 성문 헌법을 최초로 제정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각 주에서 시행 중이던 주요 헌법들을 통합하여 1787년 연방헌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근거로 미국 연방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미국의 사례처럼 먼저 헌법을 제정했다.
그 기반 위에서 국민기본권을 보장하고, 정부를 비롯한 통치기구를 수립했다.
근대적인 입헌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계속됩니다.
서양에서 시작된 입헌주의는 개항과 함께 아시아에도 전파됐다.
이 결과 일본은 1889년에, 중국은 1908년에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우리도 일본, 중국처럼 개항을 계기로 입헌주의가 소개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성리학의 정치원리로 통치되고 있었고 시민계급의 성장은 미약했다.
따라서 우리의 헌정사는 서구의 입헌주의 사상을 수입·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은 그동안 조선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제도인 입헌군주제와 공화제 등의 정치제도를 소개했다.
1883년 보빙사 일원으로 미국에 파견된 유길준은 서양이 동양보다 부강한 이유를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입헌주의에서 찾았다.
언론 또한 입헌주의 소개에 앞장섰다.
정부는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에 민권, 정부 형태, 정치제도 등을 소개했다.
1896년 4월에 창간한 <독립신문>에서는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주권과 자유 민권 사상 등을 소개했다.
새로운 정치사상에 눈 뜬 일부 시민들은 여론을 형성하며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계속됩니다
독립협회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1898년에 열린 관민공동회에서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으로 하여금 개막 연설을 하게 하여 국민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입헌주의가 명확하게 결정되지 않았다. 가령 1895년 <홍범 14조>, 1898년 <헌의 6조> 제정을 주도한 개화세력은 국민기본권과 정부 기구의 법제화를 주장했다.
반면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를 제정하여 군민공치를 부정하고 전제 군주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춰 우리나라에서도 입헌주의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갔다.
이때부터 전제 군주제는 부정되고 민주공화제로 이행해 갔고 이에 따른 헌법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05년에 설립된 헌정연구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정 연구 단체로 국민의 정치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창설됐다.
회원인 양한묵은 <헌정요의>를 황성신문에 연재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국가는 군주의 사유물이 아닌 국민 공동체의 것이며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황실이 아닌 정부가 필요하다.”
고종이 폐위된 1907년은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중요한 전기였다.
고종 폐위 이전에 개화세력들은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 폐위 이후 입헌군주제는 설득력을 잃어갔고, 민주공화제가 새로운 정치체제로 대두됐다.
민주공화정의 이념을 최초로 제시한 단체는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세울 새 나라의 체제로 입헌 군주제 대신 민주공화정을 제시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자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은 더욱 활발히 전개됐고 입헌주의 사상은 헌법 제정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1917년,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상하이에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서는 한일병합조약은 순종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주권을 이양한 것이라 주장하며
국민주권, 즉 민주공화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양에서 시작된 입헌주의는 개항과 함께 아시아에도 전파됐다.
이 결과 일본은 1889년에, 중국은 1908년에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우리도 일본, 중국처럼 개항을 계기로 입헌주의가 소개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성리학의 정치원리로 통치되고 있었고 시민계급의 성장은 미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