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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흔적의 아카이브
- 「강변호텔」을 중심으로 한 홍상수 영화언어의 탐색 -
서은주
1974년 경남 진주 출생, 영화평론가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당선), 『셰익스피어 헤어스타일』 공저, 『뫼비우스 장진영, 그 참을 수 없는 그리움』 공저
「강변호텔」에서 영환과 상희, 연주가 강변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
모든 것이 막막하다. 더 이상 갈 곳 없이 무력하기만 한 사람들이어서. 사랑을 잃어 마음 갈 곳 없는 ‘영환’과 ‘상희’가 대표적이지만 주변 인물들이라고 어디 다를까. 영환의 두 아들도 이혼을 했거나 ‘여자가 무서워’ 사랑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자세한 사연을 알 수 없는 ‘연주’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는‘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로 보인다. 모두 상처받고 좌절당한 사람들. 말하자면 「강변호텔」(2019)의 인물들은 얼마간의 낙담 속에 목적 없이 견디고 있다. 따라서 호텔과 강변, 그리고 식당을 어슬렁거리는 그들의 행동이 어떤 완결되거나 충일한 지점에 이르기 위한 것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분명하지 않은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들은 무료하게 지속될 뿐 어떤 성취도 나은 결실도 없다. 무용하다. 다만 목적 없는 대화만 부스러기처럼 흩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일찍이 들뢰즈는 한 편의 영화에서 일정한 동기 하에 움직이던 인물들이 어느 순간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게 되는 상태가 되면 행위 이미지가 동요하게 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행위 이미지가 동요하게 된다는 것은 인물의 행위를 드러내던 이미지가 인과적인 서사의 흐름이나 특정한 의미 관계의 맥락 안으로 수렴되지 못하게 됨을 뜻한다. 그 결과 의미는 증발되고 시각적이며 청각적인 이미지의 순수한 물성만 소금처럼 남는다. 의미관계로 구축되는 허구적 공간의 규정된 위치들이 혼란스러워지는, 이른바 ‘무 규정적 공간’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바로 그 무 규정적 공간에서 낙담과 끝없는 기다림, 그리고 유예의 감정이 전개되고 발전하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좌절과 막연한 기다림의 공간, 그 목적 없고 갈 곳 없이 어슬렁거리는 인물들의 임시 처인 ‘강변호텔’, 이 잠정적인 곳을 ‘무 규정적 공간’이라 이름 부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촬영과 편집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들 또한 그 무 규정적 공간의 도입을 적극 유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의 행위 이미지도 일관된 내러티브 전개과정이나 특정한 의미 도출을 위해 복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영화에 대해 통일적 이해를 하려하면 할수록 도리 없이 무력감에 빠져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마디로 「강변호텔」은 의미 관계로 상상되고 추론되는 현실, 그 허구적 공간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놓여 있는 영화다.
그런데 ‘규정할 수 없음’이란 동시에 ‘모든 규정이 가능함’이란 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 규정적 공간, 즉 ‘규정할 수 없을’공간이란 사실은 ‘모든 규정이 가능할’ 공간이란 말과 이음동의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직 실의로 가득한 인물들의 아무것도 아닌 삶은 다시 무엇이든 가능할 수 있을 현실과 동전의 양면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충만한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는 「강변호텔」은 무궁한 가능성이 잠재된 시간을 열어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공도 실패도 모르는 시간, 소유할 수 없는 공허한 형식으로서의 시간, 그래서 아직 없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는 것으로 발산되는 무형의 시간, 말하자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새로운 시간. 의미 관계로 환원되던 질서로서의 시간이 무효화되는 곳이 바로 「강변호텔」의 장소이니 말이다.
따라서 이 글은 「강변호텔」의 무 규정적인 공간과 새로운 시간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구축되고 도입되고 있는지를 밝히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여러 표현방식 중 특히 촬영 부분에 초점을 맞춰 구체적인 이미지 분석을 시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상수는 다른 일반적인 영화들에서 누락되고 배제되어 왔던 세부적 이미지들을 불러들여 무 규정적 공간 구축과 새로운 시간 형성에 동참시키고 있다. 이 글은 그 복권의 기록이다. 보고 있으나 스스로 놓치고 있는 것에 관한 열려진 논의이다.
균열의 공간
「강변호텔」의 공간은 균열이 있다. 이 영화는 원근감으로 허구적 공간이 구성되면서 동시에 다시 그 원근감이 해체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구축되는 원근감이 다른 한편으로는 불연속과 이질성의 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원근법은 현실에 대한 지배적 시각을 재현하고 또 규정하는 일종의 틀이다. 따라서 원근법으로 구축되는 시각적 재현에 대한 확신은 일종의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 일정한 규칙이란 결국 소실점이라는 관객의 특권적 시선을 중심으로 한 닫힌 체계 속의 지각방식이니 말이다. 따라서 원근감을 제한하고 또 균열하는 모종의 방식이 있다면 아마도 도식적이고도 상투적인 현실을 넘어 어떤 새로운 미지의 장소로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으리라.
이 영화에서 배경으로 자주 배치되는 수평선, 하늘이 바로 그 새로운 공간의 도입을 돕는다. 수평선, 하늘, 구름 등은 초기 원근법의 역사에서부터 원근법의 코드 구축에 대해 이질적인 대상이었다. 명확한 형태를 갖지 않은 모호함으로 공간적 좌표 설정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영환이 호텔방에서 내려다보거나, 영환을 기다리던 두 아들이 호텔 커피숍 창밖으로 바라보던 강변의 수평선에는 소실점이 없다. 시선의 중심이 설정되지 않음에 따라 원근감도 조성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장면들에 있어 하늘과 강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특히 눈으로 덮인 하얀 강변을 상희와 연주가 거니는 장면(아래 삽입 이미지)에 이르러서는 아예 소실점이나 하늘과 강의 경계라 하는 것이 의도적으로 무효화되는 것 같다.
「강변호텔」에서 눈으로 덮인 하얀 강변을 상희와 연주가 거니는 장면
사실 「강변호텔」에서 감지되는 막연하고도 불투명한 느낌은 그 모호한 배경들의 협조로 조성되는 감이 없지 않다. 여기에 빈번하게 배치되는 하늘 또한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영환이 산책하는 장면에서 하늘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자주 포착된다. 시각 예술의 영역에서 하늘이나 구름과 같은 소재는 화면의 깊이 감을 저해하는 것으로 이미지의 평면감과 불투명함을 가져다주는 원인이 되어 왔다. 그 결과 소실점 없는 수평선과 더불어 하늘 이미지는 우리를 모호함의 심연, 정한 목적 없는 불확정적인 세계 한가운데에 밀어 넣는다. 영화 속 인물들의 막막하고도 모호한 정서 구축 과정에 우리 또한 시나브로 연루되는 것이다.
물론 막막함이나 모호함이라는 감정은 원래 영화 속 인물, 즉 영환과 상희의 것이다. 특히 영환이 겪는 모호함이란 감정에는 어떤 비장함마저 감돈다. 강변호텔은 집에도 가고 싶지 않은 영환이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결국 거기서도 곧 쫓겨날 신세에 놓인다. 그렇다면 돌아갈 곳도 놓일 공간도 없는, 오직 막막함과 불투명함만이 가득한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어쩌면 너무도 필연적인 귀소의 공간이 아닐까. 아니 그 죽음만이 반복적으로 맴도는 상투적인 현실을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지 않을까.
이 영화의 흑백 이미지 또한 허구적 공간을 와해시키고 있다. 흑백 이미지는 천연색 화면보다 현실에 대한 추상성이 강하다. 흰색과 검은 색의 화면은 천연색의 현실에 비해 도식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마치 영화사의 초기 영화에서처럼 스크린이라는 이미지의 평면성과 파편성이 노출된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수평선과 하늘같이 일정한 현실감이 옹호되자마자 다시 부정되는 형국이다. 페테리코 펠리니 감독도 흑백 영화 안에는 현실에 대한 일정한 비판적 해석이 존재한다는 말을 한 바 있다. 흑백 이미지가 관객으로 하여금 촬영된 대상에 대해 관객 자신이 원래 기억하고 있던 천연색으로서의 대상을 생각하게 놓아둔다면서 말이다.
이제 모호한 수평선과 하늘, 그리고 흑백 이미지로 인해 영화적으로 구성되는 허구적 현실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강변호텔」은 그러한 방식을 통해 결정되고 실체적으로 접근 가능한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 스스로 지각하고 체험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규정 가능한 허구적 현실과 그를 균열하고 붕괴시키면서 도입되는 무 규정적 공간, 두 경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실이 하나의 경향으로 굳어지고 실체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방식이 「강변호텔」의 척추일지도 모른다. 합리적 설명으로 구하려 해도 뚜렷하게 현실화되지 않는 곳, 말하자면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나타났다 이내 곧 사라지는 유령의 공간, 바로 그 새로운 공간이 「강변호텔」의 장소이니 말이다.
이미지의 두 얼굴
「강변호텔」에서 유리창을 후경으로 영환과 두 아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
「강변호텔」의 공간에 대한 언급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소재가 ‘유리창’이다. 유리창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박적으로 쓰인 배경(위 삽입 이미지)이다. 호텔 방과 커피숍, 호텔 카운터에서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 영화는 공간의 후경(한 화면의 후반부 이미지)에 거의 유리창을 배치하고 있다. 물론 이 유리창 이미지 또한 삼차원적인 공간감을 제약하여 허구적인 공간을 분할하고 파편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후경에 유리창을 배치하여 이질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창으로 인해 전경(한 화면의 전반부 이미지)의 내부공간과 후경의 외부 공간이 분리됨으로써 원근법적 공간 깊이 감이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경의 일차적 화면 내부에 후경의 유리창으로 이차적 화면을 만드는, 말하자면 이미지의 이중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후경의 유리창이라는 이차적 화면이 전경이라는 일차적 화면과 만나 충돌함으로써 원근감이 붕괴되고 동시에 영화의 허구적 공간이 위태로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유리창이 지배적인 배경인 이 영화의 공간이 비 균질적이고 불연속적인 것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결과 입체적이면서 깊이 감 있던 삼차원의 내러티브 공간은 이차원의 평면적인 스크린으로 회귀한다. 유리창을 통해 하나의 장면 내부에 이질성과 긴장이 조성되는 과정은 이런 식이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전경과 후경의 두 화면은 통합되기를 계속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 해독, 즉 허구적 공간 구축을 도모하는 의미 코드화의 의도와 노력 때문인데, 이들 없이 감상을 계속 진행하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이미지의 영화라 하더라도 일정한 중심적 의미의 내러티브 관계로 환원시키려는 우리의 관성적 관람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란 쉽지 않다.
결국 「강변호텔」은 입체성과 평면성, 이러한 왕복 작용 자체로 허구적이고도 통일적인 공간 형성이 지연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환영적인 공간감을 잃지는 않지만 동시에 제시되는 파편적 이미지로 영화 외부가 환기됨으로써 이미지의 평면성이 폭로된다. 이 영화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작품의 의도성이 노출되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다시 말해 유기적이면서 동시에 분산적인 작품의 허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강변호텔」은 삼차원적 입체감이 조성되다가도 동시에 잔존하는 이미지의 이차원 평면성으로 입체감이 지속적으로 위협 당하고 있는 영화다. 여기서 이중적으로 교환되는 입체감과 평면성은 이 영화만의 현실감을 조성하는 이미지의 두 얼굴이다.
물론 앞에서 언급됐던 수평선이나 하늘, 흑백 색채 이미지, 그리고 유리창은 다른 영화에서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는 배경이고 소재다. 문제는 그 이미지들이 「강변호텔」에서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빈번하게 또 지배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다른 표현 방식들과 함께 공조함으로써 일정한 정서적 효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은 말하자면, 무 규정적 공간 생성의 세부적 절차에 함께 입회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무 규정적 공간의 출현을 확정지을 수는 없다. 또 언급했던 불투명하면서 비 균질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표현 방식들은 영화 뿐 아니라 다른 재현예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아무래도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되돌려 줄 때가 온 것 같다. 촬영이 그 본령이다. 중심을 벗어난 시점과 시간 차 간격으로 구축되는 ‘이미지의 세부’들이 바로 그 대상이다. 물론 이 이미지들도 마찬가지로 의식이 선험적으로 구축하는 허구적인 공간의 통일성과 입체감을 균열하고 붕괴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다음은 그 관찰의 기록이다.
흔적의 아카이브
「강변호텔」은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을 보여주는 설정쇼트가 없다. 따라서 공간에 대한 전체적인 조감이 어렵다. 호텔, 강변, 식당 등 인물들이 상념에 빠지거나 대화를 나누는 공간은 모두 파편적이고 국지화된 공간을 이어 붙인 느낌이다. 통일적이고 입체적인 공간을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말이다. 전면적으로 쓰인 핸드 헬드 촬영도 마찬가지 효과를 준다. 흔들리는 카메라는 영화적 현실이 가공의 산물임을 폭로하는 이미지의 평면성을 보여줌으로써 통일감과 입체감을 균열한다. 물론 카메라의 흔들림은 익숙한 현실 속으로 도리 없이 흡수된다.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라인이 불거짐에 따라 카메라의 존재감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내내 흔들리는 카메라는 이 영화를 평면성과 입체감의 갈등 속에 몰아넣는다.
게다가 공간의 깊이 감을 없애는 망원 렌즈, 또 현실과 거리두기하게 하는 줌 아웃의 촬영 방식까지 가세되면서 허구적 공간이 문득 평면으로 드러나도록 한다. 영화적 공간은 익숙하다가도 다시 낯설어지는 것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촬영의 세부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강변호텔」은 이차적 평면성과 삼차원 공간성 간의 길항을 벗어날 수 없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언어는 평면성과 입체감이라는 모순된 두 계기가 역접으로 접속되는 관계 그 자체다. 이러한 측면은 촬영의 또 다른 층위에서도 발견된다.
「강변호텔」에서 영환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
「강변호텔」의 카메라는 일상의 현실을 가감 없이 모사한다. 내러티브가 뚜렷한 영화처럼 피사체를 특별히 관리하고 통제하지 않는 한 카메라는 우연적인 것의 개입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의 손으로 제작되는 회화와 달리 ‘이미지의 세부’까지 엄밀하게 복제해내는 카메라의 기술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 관계로 수렴되지 않는 이미지의 세부가 자연히 남을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영환이 머무는 호텔방 테라스 기둥 모서리의 작은 흠, 영환이 자작시를 낭송할 때 삽입되는 외재적 장면에서 노출되는 카메라 렌즈의 먼지 자국, 또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영환과 상희의 시선(위 삽입 이미지)이 그들이다.
카메라의 매체적인 성격을 적극 사용하는, 말하자면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연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이 영화의 촬영방식에 있어 의도와 의미 생산의 관점에 흡수되지 않는 이미지의 잔여는 불가피하다. 벤야민은 우리의 일상적 감각 능력으로 주의를 미치지 못하는 그러한 이미지의 틈, 지체를 지각하는 카메라의 특별한 능력을‘시각적 무의식성’이라 불렀다. 그는 카메라가 그러한 지각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일깨워줄 수 있다고 했다.
의미관계에 우연히 틈입하는 이미지의 잔여들은 영화의 의도나 중심 의미에 대해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으로 등장하는 타자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예술담론은 이러한 이미지의 세부를 경계했다. 원근법적 이미지 배치나 합리적 의미생산 등에서 벗어나는 대상의 현전에 대해 언제나 방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질성에서 배제되고 버려지는 폐허, 이미지의 잔여가 도리어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동력을 내장하고 있다.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현실의 그 흔적이 바로 일상적인 현실을 해체할 수 있을 새로운 시선의 가능성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환이 머무는 호텔방 테라스 기둥 중간에 난 작은 흠은 촬영 당시의 시간과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것이다. 영환이 자작시를 낭송하는 장면에 삽입된 뜬금없는 외재적 이미지는 또 어떤가. 내러티브와 무관한 공간인 주유소와 낯선 주유원을 피사체로 하는 그 장면은 촬영 당시 카메라의 렌즈에 우연히 묻혀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먼지들과 함께 전달된다. 게다가 그 장면은 망원렌즈로 촬영되었다. 따라서 초점이 맞다가 즉흥적으로 흐려지곤 하는 과정 중에 드러나는 순간적인 세부 이미지가 스크린에 미묘하게 남을 수밖에 없다. 더하여 영화의 초반과 중반부에는 영화 속 주인공들, 그러니까 영환과 상희가 카메라를 힐끔 쳐다보는 장면도 들어 있다. 그러한 이미지의 세부는 즉흥적이면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는 현상이다. 또 의미 관계에 수렴되지 않는 미세한 것들이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그처럼 매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인식되고 나타나자마자 사라져버리는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일시적 현상이 바로 영화만이 의식할 수 있는 물리적 현실이라 했다. 또 내러티브의 통합적 구성 요소 안으로 포섭되지 못한 그들이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세계를 열어 새로운 차원을 보여줄 수 있는, 이른바 ‘거대한 이미지’라고 했다. 이제 의도와 의미 연관 안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이미지 자체의 매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이미지의 세부로 현실에 가려졌던 잠재적 의미가 드러난다. 허구적 중심으로서의 코드 화와 무관한 관계에 있는, 순간적으로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상투적인 이해나 정형화된 개념에 닿지 않는 대상. 말하자면 현실의 파편들. 그러니까 홍상수는 의미의 전개과정에서 사라지고 탈락된 이들의 이름들을 다시 하나하나 불러들이고 있다. 「강변호텔」은 그 구원의 기도이다.
테라스 기둥의 작은 흠과 자작시 낭송 장면에 삽입된 외재적 이미지, 또 카메라를 힐끔 쳐다보는 영환과 상희를 담은 장면, 즉 순간적으로 스크린에 남는 그 이미지들은 사실은 이미 가버리고 없는 과거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느낌 때문에 그 이미지가 거기에 있음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현재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긋난 시간의 공존, 과거 및 현재라는 두 위치가 동시에 결합되어 있다는 말인데, 이는 삼차원의 공간을 이차원의 스크린의 평면으로 옮기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연한 마주침, 과거이자 동시에 현재의 느낌, 느낌은 사실이니, 이제 이미지의 세부가 기억을 도발한다. 그 이미지가 발견되는 적막의 순간, 촬영 당시 홍상수의 카메라가 바로 그 시간과 장소에 실재했음을 생생하게 전달받는다.
순간의 카메라의 터치감은 홍상수 만의 특유한 감각이다. 카메라가 작용했던 흔적으로서의 리듬이 기록될 때의 짧고도 미묘한 시간은 우리를 ‘지금, 여기’의 짧은 찰나로 접속한다. 그것은 정지된 시간,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에 대해 죽은 시간, 미라가 된 시간이다. 그 순간 정착되어버린 시간에 대한 슬픔과 멜랑콜리의 정감이 밀려온다. 일시적인 삶에 대한 허망함, 사라지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환기되는 것이다. 내러티브적 대상으로 회수되지 않는 파편적인 현실들이 공간적 상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제 익숙한 공간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붕괴된다. 무 규정적 공간은 그렇게 문득, 한 번에, 그리고 온 마음으로 온다. 어긋난 시간의 공존이라는 감각의 미묘한 접점에서 기만적 현실감이 전도된다. 잔여로서의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기존의 현실감이 걷히고 진정하고도 새로운 현실감이 창출된다. 말하자면 현실이 아닌 현실의 흔적으로 드러나는 리얼리티. 「강변호텔」은 바로 그 흔적의 아카이브다.
세계의 바깥
소실점이 모호한 수평선과 하늘, 또 흑백 화면과 유리창 배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됐던 ‘이미지의 세부’는 홍상수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포착될 수 없었을 것들이다. 이들은 일정하게 환기되는 의미 관계의 중심에서 버려지고 소외받은, 말하자면 타자다. 그러나 그 사소한 이미지들이 원근법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원근감을 흐트러뜨리는 파편화 전략으로 합리적인 언어를 붕괴하고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홍상수의 영화언어는 세계의 완강함을 무너뜨린다. 아무래도 「강변호텔」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지각 행위를 벗어나는 체험인 듯싶다.
이 영화는 의미 코드화의 방향으로 원근감을 조성하다가 다시 철수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공간적 원근감이 붕괴되면서 드러나는 무 규정적 공간은 틀 지워진 현실을 계속 균열한다. 그 결과 규정할 수 없이 흘러드는 텅 빈 시간 속에 우리는 자주 놓이게 된다. 언젠가 들뢰즈는 현실적인 시간과 잠재적인 시간들의 겹침과 충돌, 어긋남에서 진정한 시간의 형태인 텅 빈 시간 그 자체가 나타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미지의 새로운 시간이다. 통상적인 이해와 감각을 넘어가는 광대한 차원, 말하자면 세계의 바깥이다. 이 영화는 무엇도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적 시간이 익숙한 일상으로서의 현실적인 시간에 포개지고 빗겨가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강변호텔」은 바로 그 어긋난 시간의 흔적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현실성으로서의 익숙한 일상 이미지와 잠재성으로서의 무 규정적 공간 이미지가 서로 빗겨가고 벗어나는 연속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과 무 규정적 공간은 대립적으로 출현하면서 동시에 잠재적으로 서로를 내포하고 있는 형국을 드러낸다. 지면서 이기는, 비워진 채로 채워지는 영화의 표정은 숭고하다. 이제 통상적인 방식의 관람태도, 현실에서 장담하던 의미 주체로서의 의식과 행위는 좌절된다. 「강변호텔」에서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란 이미지의 어긋난 간극에서 불현듯 스치는 무력함의 슬픔 뿐. 도식적인 현실이 침식되면서 불어오는 노스탤지어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허구적 세계의 틈으로 껍질뿐인 세계, 표면으로서의 현실이 만져진다. 공간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평편한 평면으로 드러난 하얀 눈밭 장면이 아름다웠던 건 왜일까. 어긋나는 시간의 흔적이 드러나는 이미지들에 왜 슬픔과 동시에 기쁨이 느껴지는 것일까. 모두 입체적이고도 허구적인 공간이 무너진 틈, 그 허망함 사이로 끼어드는 껍질 같은 현실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마치 죽음 직전 마지막 영환의 소주잔을 넘기는 소리처럼 단정하다. 현실이 표면으로서의 감각, 그러니까 스스로의 물리적이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지각은 코드적인 의미구성을 위한 최소한의 관조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대상의 표면에만 일시적으로 머문다. 이미지의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배치 안에서 사물이 있는 그 자체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고 표면이 되는 것이다. 표면 만인 이미지들이 진정한 현실감이다. 그 표면은 의미의 코드화에 지배되지 않는 순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용 없는 텅 빈 표면만이 인간 의식과 무관한 현실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홍상수의 영화언어를 따라, 이미지를 수단으로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홍상수는 그 특유의 표현방식으로 피상적이고 진부한 폐허로서의 일상, 그 파편들을 주워 모아 다시 그 일상 너머 미지의 새로운 시간을 열어 보이고 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시간으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강변호텔」은 보는 것이 사유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