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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 제 10장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9장을 마지막으로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끝이 나고 본장부터 19장까지는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여기저기를 순회하시며 베푸신 교훈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동쪽 베레아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는 예수께서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를 여러 번 오갔다고 밝힌다. 즉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거쳐 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계시기도 하고 갈릴리 지방을 통치하던 헤롯의 영내에 계시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 부근에서 모습을 보이셨다가 그 후 다시 사마리아 지경 가까이 계셨고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마태는 이 기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19-20장에 걸쳐 기록하였고 마가는 불과 한 장 즉 10장에 기록하였으나 누가는 10여장에 걸쳐 상세히 기록했다. 마태와 마가는 갈릴리 사역 이후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주의 고난 사건에 관심을 둔 반면에 누가는 예수의 후기 유대 사역과 베레아 사역까지 상세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본장에는 칠십인 전도 대원의 파송, 율법사와의 대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예수를 따르는 자나 저해하는 자 모두 영적 무지한 상태에 있음을 지적한다.
1. 칠십 제자의 파송 (10:1-24절)
오직 본서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마태 역시 이와 중복되는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적 사역을 마무리 짓기 위해 아직 방문하지 못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실 목적으로 칠십 명에 달하는 전도대를 구성하여 파송하셨다. 이는 복음 전파의 긴급성과 보편성을 보여 준다. ‘제자’라는 말 ‘마데테스’는 ‘배우다’라는 의미로서 선생의 교훈과 행실, 생활 방법을 따르는 직분을 말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열두 제자이며 둘째는 예수를 믿고 따르며 증거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따로 구분하여 칠십 인의 제자들을 세우셨는데 70인을 세우신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던 장로들이 70인이었다.
둘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70인이다.
셋째, 7은 완전 숫자이며 여기에 10을 곱하여 나온 숫자이다. 이는 세계 모든 민족을 대변하는 숫자로 보는 것이다.
‘세우사’라는 말 ‘아네데이크’는 공식적으로 임명하고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12제자와 동일한 권위로 보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둘씩 짝을 지어 떠나게 하셨다. 이는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유효한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며, 이것은 후일 선교의 모델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기에 앞서 ‘추수할 일꾼들을 주인에게 청하여 보내 달라.’하라고 하셨다. 마태는 이 말씀을 12제자를 파송할 때에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으나 누가는 70인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구약적 의미로 볼 때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며 일꾼은 천사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추수는 심판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의미하며 그 임무가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파할 제자들이 부족하다는 말씀과 함께 일꾼들의 책임이 막중함을 일깨우시고 일꾼들은 주인에게 증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세계 복음 전파를 위하여 수많은 복음 전도자들을 세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내시는 70인의 제자들은 어린 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태는 ‘양’이라고 했으나 누가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강조하기 위해 ‘어린 양’이라고 하였다. 양은 용감하고 능력 있는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당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은 세상의 악한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며, 이럴 때 절대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방심해서도 안 되며 절망감을 가지고 나약해서도 안 된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확인하여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선교의 방법에 대해 교훈하셨는데 세 가지 내용이다.
첫째,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마태는 금이나 은이나 돈을 넣어 다니는 허리띠 즉 ‘조네’를 전대라 했고, 누가는 지갑을 의미하는 ‘발란티온’을 전대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허리띠에 돈을 넣어 묶는 방법을 사용했고 이방인 도시 사람들은 지갑에 돈을 넣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조차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 길에서 그 누구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사람들과 대화하는 중에 복음이 세속과 희석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자는 세상 사람들과 불필요한 친밀감이나 교제를 삼가고 오로지 복음 사명만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안을 빌라고 하셨다. 위의 두 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이고 여기서는 행해야 할 것을 지시하셨다. 물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인사 내용은 당시의 일반적인 인사법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먼저 인사를 하라고 하여 제자들이 친절하고 공송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들이 받은 권위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 인사는 단순한 의미의 바램이나 기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함을 뜻하는 차원의 ‘평안’을 의미하며 하나님께 기원을 둔 하나의 선물인 것이다.
제자들이 빈 평안을 받을 사람이 그것을 ‘아멘’으로 화답하면 그 평안은 그에게 임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거절하면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 도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다. ‘평안을 받을 사람’이라는 말 ‘휘오스 에이레네스’는 ‘평안의 아들’이다. 히브리말에는 ‘부활의 아들’ ‘빛의 아들’ ‘지옥의 아들’ ‘멸망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어떤 사람의 성품과 태도에 따라 그가 겪게 될 운명을 말해 주는 관용적 표현이다. 예수께서도 ‘멸망의 자식’ ‘지옥의 자식’ 혹은 ‘빛의 자녀’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평안의 아들’이라는 말은 ‘그 평화에 합당한 사람’으로 해석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도 족장들의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 유산으로 여겼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축복도 수용자의 태도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되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평안의 아들의 집에 머물 경우 그가 주는 것을 먹고 마시며 다른 집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하여 옮겨서는 안 되며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고 받는 것이 상전으로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서 삯을 받는 것이다. 그들이 받는 물질적 대가는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유대인의 집이 아니라 이방인의 집에 유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럴 경우 유대인의 음식 규정 때문에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그들 앞에 차려진 음식을 먹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음식 규정에 대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70인 제자들에게도 12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병을 고치는 능력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이 주어졌는데 제자들이 각종 병을 고치는 일은 예수의 메시야 됨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 임재하는 것에 대한 표상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제자들이 전한 복음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 ‘엥기켄’은 ‘가까이 다가오다.’ ‘당도하다’라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마가는 ‘아직 당도하지 않고 가까이에 이른 상태’를 묘사한 반면 누가는 이미 당도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11:20절에 귀신 축사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표시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즉 귀신이 들린 상태에서 해방되고 병으로부터 온전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상태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보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가시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는 문법상 완료형이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당도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영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의 행동 지침에 대해서도 교훈하셨는데 ‘영접하다’라는 말 ‘데코마이’는 사신들을 환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개인의 자격이나 권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위로서 대언자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만일 어느 동네든지 집이든지 제자들을 거절하면 제자들은 거리로 나와서 외쳐야 하는데 이것은 거절하는 사람 또는 동네에 대한 제자들의 행동이 공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많은 사람들 면전에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으로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필연적 심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심판을 선언하는 중에도 복음을 계속해서 전해야 한다.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중에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고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까지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복음을 거부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임한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은 반드시 오며 그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심판이 임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유황 불비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도시였다.
제자들에게 교훈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복음을 반대하는 갈릴리 사람들을 향하여 슬픔과 유감을 표시하셨다.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보복보다는 불행을 맞이하게 될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낸 말이다. ‘고라신’은 가버나움 북쪽 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예수께서는 고라신과 벳세다에서 충분한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로와 시돈은 번영과 쾌락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심판을 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가버나움은 ‘자비의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완악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와 같은 제자들이 여기서 선택되었고 많은 이적이 베풀어졌지만 그들의 교만은 하늘에까지 높아졌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하셨다. 예수의 사역을 거부한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을 거역할 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사역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다. 제자들의 권위를 존중해 주지 않고 거역할 때 그 행위는 예수를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임을 인식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칠십 인의 제자들이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예수께 돌아와 보고하였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자기들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낸 일을 가장 경이로운 일로 여겼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였고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하셨다. 이는 제자들의 사역이 사탄을 이겼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즉 귀신 축사는 악의 세력의 패배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다.’고 하셨는데 ‘뱀과 전갈’은 사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것이며 ‘원수’ 역시 사탄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사탄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사탄의 세력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번개 같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제자들은 귀신을 제압한 사역을 크게 기뻐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 사역보다도 더 큰 기쁨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제자들의 사역의 목적이나 참 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즉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했으나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 결국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늘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 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제자들의 복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성령으로 기뻐하셨는데 마태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다. 즉 예수의 기쁨과 기도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임과 동시에 일종의 계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의 감사 기도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예수가 베푼 이적과 표적,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이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종교 지도자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 숨겨졌고, 반대로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는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인 동시에 불쌍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 하나님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아들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게 된 사실을 감사했다. 즉 예수의 선택과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감추어진 사실을 감사하셨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조용히 돌아보시며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행위와 사역과 교훈의 의미를 깨닫는 눈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행하시는 이적과 가르침을 통하여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밀을 보는 눈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많은 선지자들이나 왕들이 이를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하였으며 지금 제자들이 듣고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야를 눈으로 직접 보며, 그가 전하는 말씀을 직접 듣고 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을 육체의 눈으로 목격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창조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전 인류 역사 속에서 전무후무한 진귀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으며 예수를 단순한 한 인간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2.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 (10:25-37절)
본문은 마태와 마가에 의해서도 기록되었지만 각각 다른 관점에서 기술되었다. 마태와 마가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제목 하에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다루었지만 누가는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한 답변을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물은 율법사에게 되물으심으로 구약의 율법 조문에 정통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수비적 자세에서 답변하시지 않고 시험하려는 그의 악한 의도를 공박하시는 자세로 일관하셨다. 율법사의 질문은 교리적으로 애매모호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예수의 답변은 그의 질문을 파하시고 나아가 율법의 한계성과 인간의 율법 실천의 불가능성을 인식하게 하여 사랑과 진리의 위대함을 드러내신 것이다.
마가는 ‘서기관’이라 했고 마태와 누가는 ‘율법사’라고 한다. 마가는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한 나머지 진지한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율법사의 시험은 강한 악의적 의미라기보다는 예수가 올바른 답변을 하는지 물어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율법사가 질문한 영생은 내세의 생명을 말하는데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은 부자 청년의 질문과 동일하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서만 가능하다. 이는 율법의 자구적 해석에만 몰두했던 그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마가는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고 질문했고 이에 대해 예수께서 두 가지로 대답하셨는데 누가는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반문하시고 율법사가 대답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에 정통한 것을 아시고 율법으로 인도하셨는데 이는 율법사의 이해 범주에서 설명하시기 위함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경문을 손목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녔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경문을 가리키며 질문하신 것이다. 율법사는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대답했다. 대신관계는 유대교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과 사랑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동족과 이방인들을 구별시켜 같은 종교권에 속한 유대인에게만 한정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의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웃에 대한 유대교적 관점을 파기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다. ‘이를 행하라.’는 말 ‘투토 포이에이’는 현재 명령형으로 행위의 계속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사가 말한 두 가지 내용을 계속 행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살리라.’고 하셨다. 율법사가 요약한 율법의 핵심은 옳은 것이라고 인정하신 후에 그것을 행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다. 이 대답은 예수께서 율법사의 지식을 수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위선을 아시고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가 없으며 따라서 율법의 준수를 위해서는 당연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자가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자 그 다음 단계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로 ‘이웃’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아마 그는 가기가 주장하는 이웃의 개념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예루살렘보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해저 250m의 저지대이다. 두 도시의 거리는 36km이며 길이 가파르고 암석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여리고로 내려가는데 도중에 강도를 만났고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만들었다. 강도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그곳에 우연히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았지만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제사장의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그 임무를 마치고 자기 집이 있는 여리고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을 피했는데 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나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레위인이었다. 이 사람도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으나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앞의 두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과 동족인 유대인들이었고 세 번째 지나가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꺼리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유대인들은 평민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사마리아인은 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평민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을 구별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먼저 응급조치를 취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것이다.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에 약품이 없어도 상처를 소독하고 통증을 식혀 주었던 것이다. 환자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주막까지 갔다고 하는 것은 그의 봉사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이튿날 사마리아인은 주막의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환자를 돌보아주기를 청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주리라고 약속하였다. 그가 아침에 일찍 떠난 것을 보면 그 사람도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며, 당시 하루 숙박비는 1/32 데나리온이기 때문에 이 금액은 약 두 달 치의 숙박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부족하면 돌아올 때 갚으리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한 것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일시적이거나 충동적인 동기가 아니라 완전하게 책임을 지는 의식을 가지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는데 이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으로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율법사는 당연이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했으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말하여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핵심을 회피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심으로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어버리셨다. 즉 율법에 대하여 지식으로, 입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라 영육 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 당장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웃은 인종의 차별을 떠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하신 것이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다니 마을로 가셨는데 이 마을은 감람산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마르다의 집은 나사로가 사는 집이며 나사로는 예수의 친한 친구였다. ‘마르다’라는 이름의 뜻은 ‘여주인’으로 학자들은 그녀가 문둥이 시몬의 아내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한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마리아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마르다가 음식을 분주하게 만들고 있을 때에 마리아는 마치 학생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 같이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는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예수의 말씀만 경청했던 것이다. 마리아를 ‘발 아래 여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녀는 예수의 발 아래에서 말씀을 들었고, 죽은 오라비를 위해 예수의 발 아래에서 간구했고, 예수의 발 아래에서 그에게 향유를 부었기 때문이다. 마르다는 예수의 일행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몹시 분주했다. 그녀 역시 예수의 말씀이 듣고 싶었지만 먼 길을 오신 예수를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생인 마리아는 언니의 마음을 모른 채 예수의 말씀에만 너무나 열중하고 있었다. 이에 마르다는 자기의 말을 무시하는 마리아를 예수께 고발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는 마리아에 대한 책망도 들어 있지만 동시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예수에 대한 원망도 들어 있었고 나아가 자기의 수고에 대한 과시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부르셨는데 이는 그녀의 정성스러운 행위에 대해 동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을 나타낸다.
‘염려하고 근심했다.’라는 말은 마음이 분산되고 과도한 욕구로 인해 분열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열심을 말하면 마르다나 마리아나 일반이었다. 즉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고 마리아는 영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중에 영적인 배고픔 즉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다 역시 많은 음식을 장만하려 할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해결할 정도의 음식만 만들고 남은 시간을 예수께 나아가 말씀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었고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대답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를 섬기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지나친 봉사나 수고로 말미암아 말씀의 은혜를 방해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도 봉사하는 일에 치중한 나머지 말씀의 은혜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배 시간에 봉사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듣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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