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들 중에는 아주 큰 것도 있고, 아주 작은 것도 있다. 물론 중간치의 것도 있다. 똑같은 크기의 섬은 하나도 없다.
서해안 바닷가에 여자상업고등학교의 분교가 하나 있었다. 박 선생은 국어 교사였고, 무슨 시인으로 활동도 하고 있었다. 비록 불복의 나이를 넘기긴 했으나, 역시 여고 독신선생이라 자칫하면 무슨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는 그였다.
이런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여자고등학교의 분교가 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한 숫자의 학생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있을 자리에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박 선생이었다.
다만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낮으막한 모래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지나면 뜻하지 않게 자그마한 공장 굴뚝들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는 제법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골목도 있다. 중국으로 수출할 무슨 전자제품의 부품 공장들이라 하지만 그는 잘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박 선생이 독신이라 하지만 그가 여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나이는 이미 아니다. 그는 분명 독신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여고 총각 선생은 아니다. 그는 적어도 쉰을 넘긴 나이를 짐작케 한다.
그는 분명 여학생들의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다만 몇몇 학생들이 홀로 외롭게 사는 그에게 동정적인 관점에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공장 마을을 지나면 서해를 향하는 얕으막한 야산이 겹을 이루며 들어서 있고, 그 바로 바닷가 야산 중턱에는 최근에 거대한 건물이 들어섰는데, 무슨 전문대학이라는 것이었다. 그 거대한 대학 건축물 뒷 켠으로는 멀리서 보아도 분명 아파트임에 틀림이 없는 조금 이색적인 건물동이 들어서고 있었다. 대학 교수들의 가족들이 들어와 살 아파트인 듯했다. 여기 바닷가 마을에 그들 교수들의 이주를 받을만한 주택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 잊혀진 듯한 바닷가에 중국붐을 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이 마련되고 있었다.
박명호는 그런 거창한 힘을 가진 직장의 피고용인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그런 혜택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는 오래 비어 있던 집을 전세 내어 혼자 살고 있었다. 이 바닷가 인근 마을들이 어떻게 바뀌던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지금 이 나이에 무슨 꿈과 희망을 가지겠는가. 이제 몇 년 남지 않은 정년을 기다리면서 숨죽이고 살아갈 뿐이다. 여생이 얼마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평균 생존 나이를 기준 삼아 지금의 나이부터 계산하여 여생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평균 생존 나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도 사실 부정확하다.
여생에 작은 바램이 있다면 시집 몇권을 엮어내는 것 뿐이다. 한 점 혈육인 딸년마저 데리고 떠나간 옛 아내를 그리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녀는 울면서 남편을 떠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떠나가는 것이 남편을 위하는 것만같다는 말만을 남겼다.
명호는 떠나가는 아내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와 별다른 불화도 없었건만 그녀가 떠나겠다고 하니 보내주는 도리밖에 없었다.
공장 마을에는 시외뻐스 터미널도 있었고 인근 마을로 주민들을 실어 나르는 택시도 있었으며 호프집도 있었고, 기이하게도 모텔도 있었다. 그리고 목욕탕도 있었다.
박명호는 이 공장마을로 잘 나가지 않는다. 자신이 재직하는 학교가 있는 마을에도 생필품을 살만한 가게들이 있고,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욕탕만은 공장마을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가끔 공장이 들어서 있는 마을로 내려가곤 했다.
오래간만에 박명호는 평상복을 입고 공장마을로 내려갔다. 목욕탕에 가기 위해서 였다. 이 바닷가 마을은, 공장마을이건 학교마을이건 대학마을이건, 자주 안개가 낀다. 야산이 여기 이 지역을 동편에서 감싸고 있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날도 유난히 안개가 심해 시야가 아주 흐렸다. 목욕탕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던 명호는 시외뻐스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버스 한 대가 막 도착한 모양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전자제품 부품 공장들과 새롭게 일어나는 대학 때문에 한적한 도시 치고는 외지인의 발길이 잦은 편이다.
명호는 무심코 걸음을 옮겨놓다가 설핏 아는 듯한 얼굴과 마주쳤다. 그 사람은 꽤 큰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어서 여행자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안개가 워낙 두텁게 서려 있어서 그 사람의 얼굴은 분명하지가 않았다.
안개의 짙은 켜 저 너머에서 발길음을 멈칫거리는 사람도 명호를 분명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은 짙게 드리워진 안개의 켜 속으로 먹혀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에 퍼져 나가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신호의 구실은 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명호는 불현듯 이 걸음 하나 하나에 적어도 5년 내지 10년의 세월은 허물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파삭 늙어버린 여인을 만난지가 적어도 3, 40년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얼핏 머리에 떠오른 숫자개념이지 아무것도 정확한 것은 없었다.
아니면 사람의 일생은 참으로 질기기도 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생을 다하기 전에 두 번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사람을 또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 사, 사...모...님..."
명호의 입술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마저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같았다.
"박, 박, 박선생...."
노파의 입술도 안개 저 너머에서 달삭여졌다. 적어도 3, 40 여년은 될만한 세월은 꽉 막혀 있던 망각의 휘장을 걷어 버리고, 결국 두 사람에게 완전한 회상의 길을 터주고 말았다. 둘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글어 잡았다. 그 순간 명호는 이 노인이 적어도 90살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갈퀴처럼 험하게 말라버린 노파의 손이 자신의 손 안으로 쥐어져 들어왔다.
먹어가는 자신의 나이에 짓눌린 나머지 남의 나이도 과하게 보는 버릇이 생긴 탓일까. 자신도 모르게 이 노파가 얼마의 나이를 먹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으나 구체적인 숫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일로...이 궁벽한 곳에...사모님이...?"
"사위가...사위가... 저기 대학교에..."
"아 네..."
노파는 저기 새로 들어서는 대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하는 사위와 딸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안개를 뚫고.
"박 선생은?"
"나는 저기 보이는 학교에서 선생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국어 선생을 하고 있습니다."
"국어 선생은..."
노파는 그나마 조금은 덜 혼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핏 느끼기로 거의 허물어져버린 여인이었으나 목소리만은 약간의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살만큼 살고 나면 이제 할 일은 없어지고 회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일까. 명호는 이 노파와의 뜻하지 않은 만남이 알 수 없는 무슨 어둠의 계시쯤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서로에게 아마도,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려 하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른 무슨 말을 더 연장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들 긴장되어 있었고, 비록 세월의 짙은 더께가 잠시 길을 열어주었으나 역시 그것은 금방 다시금 닫혀 버린 듯했다.
죽었으면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랬구나 하고 지나쳐 버렸을 사람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기에 만났을 뿐인 사람인가. 명호는 애써 노파를 만난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치부하고 싶었다. 교수 사위를 보았으면 잘 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도대체 감동이란 것이 없어진다. 다들 시들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인생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지는데, 인간사의 자질구레한 삶의 편린들이 뭐가 그리 감동스러울 것인가.
명호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이 노파가 무슨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별 것도 아닌 것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그 순간 명호가 분명히 느낀 감정은, 이 노파는 바로 무덤 가에 가 있고, 명호 자신은 이제 바로 무덤이 시야에 분명히 보이는 곳까지 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
노파와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무진장 많은 것 같았으나 막상 할 말이 없었다. 핵심은 벌써 말해 버렸다. 사위가 사는 저기 대학의 아파트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 이상을 알아서 뭘 하겠는가. 알 필요도 없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 의미를 잃어버린 자질구레한 인생사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교수라고 하는 사위의 부인, 즉 노파의 딸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명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런 것을 알아서 무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 귀찮은 일이었다.
"그럼 다시 만나시죠뭐..."
"그래요...이제 한 동네에 사니까요..."
"그럼 딸네 집에 다니려 온 것이 아니고 여기에 살고 계십니까?"
명호는 필요도 없는 질문을 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질책하면서도 자신의 입이 무슨 음성을 쏟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자신은 죽은 목숨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 다니러 다니러... 나는 서울에 살기도 하고 저기 섬에도 살아요..."
"섬에도...며칠간 머물다가 가십니까?"
명호는 정말 시시한 말이라면서도 무슨 말을 자꾸만 지껄이고 있었다.
"한 일주일간은 있을 거예요...."
노파는 그래도 발음이 정확했다. 분명 적어도 여든은 넘은 노인이었으나 그녀에게는 무슨 고결함이랄까 정정함이랄까 하는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바로 생명감이었다. 그녀는 죽음 속에 침전되어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명호는 자신이 지금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목욕용구가 든 작은 손가방이 거추장스러웠다. 빨리 이 여인과 헤어지고 싶었다.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노파에게 내어보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 안녕히..."
"참 오래간 만이네요...별고는 없으셨죠? 잘 가세요... 박선생님..."
역시 여자가 언제나 남자보다 더 침착한 법이다. 그래도 그녀는 명호의 안부를 묻지 않았나.
명호는 노파와 헤어지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어쩐 일인지 다리가 마구 흔들렸다. 아득한 옛날에 헤어졌던 노파 하나를 만났을 뿐인데 자신의 내면 동요는 너무나 심각한 듯했다.
뜨거운 물이 가득 해워진 욕탕 안으로 들어가니 한결 더한 심적 흔들림을 느꼈다. 그것은 전혀 낯설음의 감각이었다. 피부에 닿는 뜨거운 물의 감각이 그렇게도 비인간적이고 그러기에 낯설음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사후의 세계가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노파가 여기에 왔다면, 즉 사위 집에 왔다면, 그 사위는 큰 딸의 남편인가, 작은 딸의 남편일까...젊은 날의 노파에게는 남희와 남분이라는 쌍둥이 딸들이 있었고, 명호는 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었다. 당시는 사회풍조가 지금과는 달라서 대부분의 대학생 가정교사는 그 학생들의 집에 입주를 해서 침식을 같이 하면서 가르쳤다.
이들 두 쌍둥이 자매에게는 남철이와 남식이라는 두 오빠가 있었다. 명호는 독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둘째인 남식이와 한 방을 사용하였다. 당시 고시공부를 하던 남철이는 독방을 썼다.
남철이와 명호는 대학생이었고, 남식은 고등학생이었으며, 남희와 남분이는 중학생이었다. 명호와 두 쌍둥이 자매는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으나, 사실 나이 차이는 네 살 뿐이었다.
명호는 주로 남희와 남분의 방에 가서 가르쳤다. 남희와 남분은 전혀 구별이 안되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두 아이 다 머리가 비상하게 좋았다. 무슨 과목이든지 설명을 하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정확히 이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명문 여고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아이는 겉 모양은 거의 구별할 수 정도로 같았지만, 성격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남희는 조금 외향적이고 밝은 편이고 머리가 아주 명석했다. 남분이는 곱고 내성적이고 말 수가 적었다. 두 아이가 일란성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격의 탓으로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차이가 났다.
뭔지는 모르지만 남희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실 외모에 관심을 가지고 화장을 하기도 하고 집에서는 교복 아닌 사복 이것 저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분이는 자신의 외모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 옷맵시를 낸다거나 무슨 화장품같은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자니 모든 식구들은 남희만을 찾았다. 하물며 일가친척이나 동네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남희만을 찾았다. 그렇게 되니 남분이는 집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쌍둥이 자매의 집은 인왕산 밑에 있었다. 여름에는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겨울에는 적설이 녹지 않는 곳이었다. 서울의 도심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 이런 호젓하고 후진 곳이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명호는 당시 어느 역사서에서, 조선시대 젊은 학자들이 여름철에 더위가 극심해지면 여기 인왕산 아래 계곡으로 모여 탁족하며 시를 지어 읊음으로써 더위를 이겼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있다. 그래서 그 시절 남식이와 함께 여기 인왕산 계곡을 헤매면서 그럴만한 데를 가늠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바로 우리 집 아래가 그 계곡인 것같아요."
"나도 그런 것같아. 한번 사학과 선배들을 불러와 감정을 해 보아야겠구나."
"저기 계곡물이 모인 웅덩이에서 우리들은 어린시절 멱을 감곤했죠."
"남희와 남분이도?"
"그럼요! 계집애들이 더 했다니까요. 온종일 멱을 감고 놀아 햇볕에 타서 깜동이 계집애가 되 버리곤 했죠. 우리가 얼마나 놀려 먹었던지. 야 깜동이 계집애야 하면서. 특히 남희가 그랬어요. 온종일 저 웅덩이와 계곡에서 놀았어요. 작은 팬티 하나만 입구서요."
"남분이는?"
"그때부터 남분이는 좀 달랐죠. 물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죠. 바위 위에 올라 앉아서 웅덩이 속에서 물장구치고 노는 남희를 내려다보면서 혼자 놀곤 하더라고요. 쌍둥이도 참 너무 다릅디다."
비단 어린 아이 시절에만 두 아이의 성격과 행동의 차이가 들어난 것이 아니었다. 명호 자신이 이들 남매를 가르칠 바로 그 때에도 두 아이는 판연히 달랐다.
언젠가 명호는 두 여학생을 데리고 영화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남희는 선생인 명호 바로 옆 자리에 붙어 앉아 영화에 대해 이것 저것 묻기도 하고 그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묻기도 했다.
그러나 남분이는 명호와 남희가 앉은 의자에서 몇 칸 뒤에 혼자 자리를 잡았다. 명호가 자기 옆으로 오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남분이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거절의 뜻을 표했다.
"영화 잘 봤니? 재미 있데?"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이 배우와 감독에 대해서 얘기해 줬어요."
남희가 박여사에게 대답했다.
"남분이는?"
"..."
남분이는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남분이는 선생님이 하신 설명을 못들었어요."
"왜?"
"혼자 멀리 떨어져 앉았거든요. 선생님 바로 옆에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
이번에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말문을 잃었다.
며칠 후 저녁 공부시간에 명호는 님희가 남분에게 하는 말 속에서
"병신아, 그러니까 엄마한테 혼나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극장에 가서 멀리 떨어져 앉은 일로 해서 남분이가 어머니한테서 꾸중을 심하게 들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별 말이 없는 사람들이라 집안은 절간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다들 별 말이 없었다. 그러자니 자연 명호도 별 말이 없었다. 그들은 다들 서로들 느끼면서 조용히 살아갈 뿐이었다.
영등포에 있는 무슨 제조공장의 부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집의 주인 김씨 역시 별 말이 없었다. 아침 일찍 검은 세단이 와서 이분을 테워선 떠나곤 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문간방에 거처하는 할머니는 거의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아 이 집 안에서 살고 있는지 조차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고입시가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그 해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남희와 남분이는 밤을 새울 때가 있었다. 당시는 고입시가 대입시보다 더 치열한 경우도 있었다. 하물며 중입시도 어려웠다. 모든 학생들이 상급학교의 입시 때문에 죽어나던 시절이었다.
눈이 장막처럼 내리던 날 밤, 남식이는 형인 남철의 방으로 자러 갔다. 남희와 남분이가 그녀들의 선생인 명호의 방으로 공부를 하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기이하게도 자신들의 방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선생님의 방에서 공부를 하면 공부가 더 잘 된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선생님 방에서 공부하겠어요."
"남식이가 뭐라 할 텐데..."
"내가 큰 오빠 방에서 자라고 할께요."
"그래, 그렇게 하렴."
"선생님 방에서 공부해야만 정신이 바짝 든다구요. 남분이도 마찬가지예요."
주로 남희가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오곤 했다. 이 집안에서 남희는 누구든 거역하지 못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무슨 장녀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만사에 실수가 없고 말을 무겁게 하는 그녀의 처신과 아울러 그녀의 남다른 미모 때문일 것이었다.
하기야 미모로야 남희는 남분이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일란성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맵시에서 남희는 남분이를 앞서고 있었다. 남희에게는 어린 그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서슬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후 남희가 커피를 타 가지고 명호의 방으로 건너왔다. 그리고선 금방 자신의 방으로 가서 책을 챙겨왔다. 남분이도 책을 준비해 가지고 왔다.
"커피에 눈 송이가 떨어져 어느듯 차가워 졌어요."
"으응, 그래, 너희들도 차를 마시거라."
두 소녀들은 각기 들고온 찻잔을 조용히 자신들의 입으로 가져갔다. 소녀들은 넓은 방유리문으로 시선을 가져가곤 했다. 희게 그어지는 눈발을 바라보기 위해서 였다. 주변이 어두워지니 검은 하늘이 눈발의 배경이 되어갔고, 그리하여 눈발은 한결 선명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선생님, 커피 마시는 모습이 제일 아름다워요."
"'그래! 좋은 말이군."
"시인이나 화가같은 구석이 있어요."
"그래!"
명호는 찾잔을 내려놓으면서 자신의 놀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내심으로 크게 놀랐기 때문이었다. 왜나하면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남희가 아니고 남분이었고, 게다가 그 말이 중3의 소녀가 하는 말같지 않게 성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명호는 두 쌍둥이 자매를 향한 자신의 선입관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남분이가 남희에게 조금 처진다는 생각을 그는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외모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지적 능력과 성격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명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아이 다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로구나.
그날 밤은 내리는 눈 탓으로 분위기가 꽤나 로맨틱했다. 그래서일까, 열두시를 넘기면서도 졸지 않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몇 번 하품을 하던 남분이가 자러 가겠다고 방을 나갔다.
그러나 남희는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좀 더 해도 돼죠?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실컷 공부하고 싶어요. 잠으로 떼워 비리기는 아까와요."
"마음대로 하렴. 학생이 공부하겠다는데야 선생이 무슨 수로 말리니."
"선생님과 단 둘이서만 공부하니 공부가 훨씬 더 잘되는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사실이 그래요."
명호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남희의 눈에서는 전혀 졸음기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진주처럼 빛났다.
"선생님의 두 눈은 진주처럼 빛나요."
"뭐, 뭐라구?"
명호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남희에게서 느낀 것을 그녀도 자기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명호는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책을 펼쳤다. 이제는 자율학습의 시간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눈줄기가 더욱 굵어져 갔다. 명호는 깜빡 졸았다. 그러나 눈 앞의 남희는 전혀 졸지 않고 영어책을 읽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말하거라."
"대학교 일 학년이시죠?"
"그럼."
"내가 중3이죠?"
"그럼."
"그럼 네 살 차이네요."
"그래서?"
"그럼, 선생님과 학생이 나이 차이가 너무 적어요."
"너 무슨 그런 소리를 하니? 대학생과 여중생인데!"
"나는 오랜 전부터 선생님을 나의 남자친구로 생각해왔어요."
"..."
명호는 이 순간 할 말이 없었다.
"그것도 아주 친한 친구로요. 아니 애인으로요."
"..."
"싫으세요? 싫지 않으실거예요.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고 있어요. 책상 이편으로 건너와서 저를 안아 주세요. 가볍게요. 아주 부드럽게요. 눈이 내리잖아요."
"..."
"주저하지 마세요. 노처녀가 노총각에게 떼를 쓰는 게 아니니까요. 전혀 부담스러워하실 필요가 없어요. 아이들끼리 추억을 만드는거니까요."
명호는 도저히 남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 아무런 부담감을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바라던 바였다.
그는 소리없이 일어서서 책상을 돌아가 그녀의 상체를 뒤에서 안았다. 열에 들뜬 여자아이의 몸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흘러들었다. 그들은 오래 오래 그렇게 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유리창문을 바라보면서. 그냥 무한히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명호는 여자를 않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 남희가 중학생이라는 사실과 자기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학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가 너무나 마른 아이라 아직 여성다운 신체적 특징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사실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눈이 너무나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은 작용하였으리라.
그런데 그 다음 명호의 귓속으로 흘러드는 음성이 그를 적이 놀라게 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남희의 말이었다. 그것은 꿈꾸듯이 아득히 들려왔다.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무엇이 되고 싶으세요?"
"..."
"의사나 판검사가 되세요."
"그런 것이 되기 위한 대학에 다니고 있지 않다."
"그럼 무슨 대학에 다니세요?"
"시인이 되는 대학에 다니고 있지 않니..."
"시인..."
남희의 목소리는 가만히 잦아들었다. 시인도 괜찮다는 뜻인 듯했다. 그러나 명호는 남희라는 작은 소녀를 그 순간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안아달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내리는 눈 때문이었을까.
둘은 떨어졌다.
"선생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겠어요. 이건 사랑이 아니예요."
"그럼 뭐니?"
"추억 만들기죠."
"나도 추억으로 간직하겠다.
그 순간 너무나 명석하고 주저가 없고 투명한 남희의 모습이 자신의 눈 앞에 뚜렷이 투영되었다.
남희가 책을 챙겨서 문을 열고 나갔다. 눈 송이를 휘감은 바람 한 줄기가 방안으로 흘러 들었다.
기이하게도 새벽 한 시가 훨씬 넘긴 시간이었으나 안채 사랑방 불이 꺼지지 않았다. 딸들이 대학생 선생 방에서 한밤중까지 공부하고 있으니, 부모가 불을 끄고 세상 모르게 잠 들 수 없단 말인가.
남희와 남분의 어머니는 동경까지 가서 공부한 신여성 출신인데, 전공이 피아노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방에는 낡은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고, 가끔 피아노곡들이 흘러나오곤 했다. 남의 얼굴을 직시하는 법이 없는 조금은 베일에 가린 부인이었다.
요즈음은 피아노 치는 사람이 흔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피아노 치는 여인은 정말 만나보기 어려웠다.
남희가 물러간 자리에 어쩐 일인지 허전함이 서렸다. 남희가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되었으나 그녀는 역시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여성적인 풍만함이라고는 찾을 길이 없는 깡마른아이였으나, 그 총명함과 깨끗함 속에 고요한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녹아 있었다.
명호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리는 눈발 속에 자신의 청년다운 꿈을 흩뿌리면서 행복감과 알 수 없는 환희를 느꼈다.
새벽녘에 잠이 깬 명호는 자신의 한쪽 팔이 무엇인가에 짓눌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잠시 의식을 가다듬은 명호는 남식이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잠을 자다가 명호 자기의 팔을 짓누르는 것으로 알았다.
"남식이냐? 언제 돌아왔어?"
"..."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보니까 자기의 왼팔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어쩐지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그럼 남식이가 아니란 말인가.
"선생님, 눈 뜨지 마세요. 저 남분이예요."
"..."
명호는 적이 놀랐다. 그러나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억눌렀다. 소녀를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으나 조용히 처리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일란성 쌍둥이 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분아, 어쩐 일이냐?"
명호는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바로 잡았다.
"선생님,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잠만 자니 내가 깨워드릴려구 왔다가...""
"그럼 눈을 떠야 내리는 눈을 볼 게 아니냐...눈을 떠도 돼니?"
"원하시면 눈을 뜨세요. 그리고 저 유리문을 보세요. 온 세상이 눈이예요. 세상이 전부 눈이예요.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뭐냐?"
"첫째 눈을 뜨시기 전에 저를 한 번 안아주실 것, 둘째 눈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구서 시를 한 편 지어 주실 것 두 가지예요.,"
"그렇게 하자꾸나."
명호는 남분의 어깨를 조금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마른 줄기를 모아 묶은 나뭇단을 안는 듯한 건조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남희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아 참, 아름다운 아이들이다, 이런 탄성이 일었다. 그녀들은 명호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일었다.
"하지만 남분아, 나는 아직 시인이 아니다. 시를 잘 못 써. 내가 약속을 하마. 내가 시인이 되면 멋진 시를 써주마."
명호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말했다. 어쩐지 시를 쓰면 이 순간의 감정이 흐려질 것만 같았다. 말은 어쩐지 자기의 감정과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그러세요."
남분은 방을 나갔다. 그녀가 가는 길을 눈으로 배웅하던 명호는 사랑채의 불이 여전히 꺼져 있지 않음을 보고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를 강하게 시사하는 불빛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일상에서 별로 말을 하지 않는 이들 두 소녀였으나, 그녀들의 영혼은 여름 한철 바닷가의거역할 수 없는 안개처럼 마구 떠돌고 있은 듯했다.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근 한 시간 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내처 잠을 잤다. 그가 잠을 깼을 때는 집은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유리문으로 올려다보이는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두텁게 내려와 있었다. 아래채와 윗채, 이중으로 되어 있는 큰 집에서는 사람 소리라고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명호는 마당으로 내려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온 집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수도가 눈 속에 파묻혀 있어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 하나 명호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명호는 자신을 가다듬으며 지난 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정말 꿈결같이만 생각되었다. 어쩌면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인기척이 일었다. 이 집의 식모아주머니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선생님, 아침상을 차릴까요, 점심상을 차릴까요?"
"네, 지금 열한시니까, 조금 있다가 점심을 먹지요뭐.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갔지요? 집안에 사람이 누가 있어요?"
"선생님과 저 둘 뿐이예요. 학생들은 다들 학교에 갔고, 사장님은 출근하시고..."
"사모님은?"
"사모님은 머리가 아프시다고 골짜기 침쟁이 집에 가셨어요. 밤새 눈이 하도 쏟아지니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나봐요. 길이 너무 미끄러운데 걱정이예요. 보통날도 보행이 불편하시잖아요."
"..."
명호는 밤새 내내 자신의 방안에 불을 밝혀 놓았던 부인을 생각했다. 그녀는 밤새 가정교수의 방을 찾아간 두 딸의 행위를 알고 있었을까. 부인은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소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명호는 식모아주머가 차려주는 이른 점심을 먹었다. 명호는 아무래도 보행이 불편한 부인을 부축하러 침쟁이 집으로 가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눈이 내린 날이 아닌데도 부인이 몇 차례나 길거리에서 실족하여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점쟁이 집은 골목이 끝난 데서 야산으로 조금 오른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주 미끄러울 터였다. 그 오르막을 부인이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점심을 먹은 후 명호는 부인을 찾아 나섰다. 점쟁이 집으로 갔더니, 부인은 다른 부인네 환자들과 함께 방 한 칸에 누워 있었다.
"어지럽다고 해서 잡시 쉬시라고 했습니다. 어지름증이 심해서 보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침쟁이가 설명을 했다. 부인은 방안으로 들어오는 명호를 보고 적이 놀랐다.
"학교는 안가시고..."
부인은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난 밤에 두 딸과 사건 아닌 사건이 있었기에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던 명호는 전혀 내색하지 않는 부인에게 미안함이 일었다. 부인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일까. 웬지 부인은 그것을 알고만 있을 것 같았다.
부인이 쉽게 회복되지 않아 근 한시간 가량 침구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무작정 시간을 끌 수도 없어서 그 집을 나섰다.
그러나 명호가 부인을 업지 않는다면 그 오르막길을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손을 잡고 부축한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다리에 힘이 있을 때였다. 너무 미끄러운 데다가 다리가 허약하니 이런 내리막길에서는 불가능했다.
"사모님,저의 등에 업히시지요."
"누구 등에 업히기는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이야...보는 사람이 없어요?"
"하늘에 구름이 하도 두텁게 끼어서 골목을 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눈이 아직 녹지도 않았구요."
"하는 수 없군요."
부인은 명호의 등에 업혔다. 명호 자신 아주 조심하였다. 담벼락을 두 손으로 짚으며 간신히 내리막길을 걸어 내렸다. 별로 긴 거리가 아니였으나, 근 십분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야 그 내리막길을 겨우 다 걸어내릴 수 있었다.
이제는 부인을 길바닥에 내려놓을 차례였다. 그러나 명호는 그녀를 눈바닥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너무나 늘어진 채로 자기의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인이 잠이 들었거나 아니면 잠시 혼절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등을 잠시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사모님, 내려서시지요."
"..."
그러나 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인은 혼절을 한 듯했다.
이제 명호는 부인을 들쳐 업은 채 빨리 집으로 가서 응급조처를 취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집까지가 먼 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눈이 많이 내렸고 하늘에 구름이 짙어서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지 않았다. 눈 쌓인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명호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집에 당도하니 이 모양을 본 식모아주머니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인을 방바닥에 눕혔다. 식모아주머니는 찬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고 없었다. 부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부인은 자신의 얼굴을 옆으로만 두어 정면 응시 자세를 피했다.
이럴 경우, 혼절한 사람을 그늘에 눕히고 찬물을 입으로 흘려 보내고, 허리 띠를 풀어주어 호흡을 도우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응급조처도 모르는 명호였다. 그는 부인의 코로 귀를 가져가 대어 보았다. 부인은 곱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명호는 수건을 찾아 부인의 이마의 땀을 닦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명호는 웬 가느다란 손이 명호 자신의 손을 가만히 글어 쥐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그 손을 바라보았더니, 아니 바로 혼절한 부인의 손이 아닌가.
그럼, 부인은 혼절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명호는 혼미 속으로 빠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식모아주머니가 이 방으로 찬물을 가지고 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머니, 찬물을 가져 오지 말구 어서 약방으로 가서 활명수를 두 병만 사오세요."
"네-"
멀리서 아주머니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짙게 내린 눈 탓으로 모든 것이 둔탁하기만 느껴졌다.
부인의 창호지처럼 파리한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뺀 명호는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부인의 몸에서는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부인의 새하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어 주었다.
명호는 자신도 모르게 부인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추측해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부인의 맏아들이 남철이고 그가 명호 자기와 동갑내기이니 부인은 많아도 마흔 중반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여러해 병고에 시달린 탓일까, 쉰은 훨씬 넘어 보였다.
명호는 지난 밤에 부인의 두 딸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과 지금 부인과 자신과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미루어 보건데, 역시 어머니와 딸 사이에는 비슷한 인간성정의 강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피를 딸들이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어쩐지 인간이 한없이 고귀하고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그 순간 지상에 두 발로 걸어다니는 여자가 아니라 하늘에 떠 있는 무슨 별처럼 느껴졌다. 평소에 별 말이 없는 이들 세 여자, 아니 세 모녀는 사실 가장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내린 녹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녹을 줄 모르던 눈은 이제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 이 집에서 명호의 존재가치는 없어져 갔다. 남희와 남분이가 희망하는 여고에 합격을 했던 것이다.
짐을 싸던 날 아무도 명호를 도와주지 않았다. 마침 남철이와 남식이는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여자 셋은 누구든 명호의 방으로 와서 짐 꾸리는 것을 도아주지 않았다.
그의 짐이라야 책보따리 하나 이불 보따리 하니 단 두 개였다. 두 개의 보따리를 마당 한가운데로 옮겨놓은 명호는 작별인사를 했다.
"사모님, 그리고 남희, 남분아 잘 있거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거라-"
그러나 끝내 부인이 있는 사랑방의 방문도, 두 딸이 쓰고 있는 건넌방의 방문도 열리지 않았다. 식모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명호는 일년간 정들었던 집을 떠났다. 침묵 속에 잠긴 신비의 집-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이 적막의 집을 떠나간 후 명호는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대학 4년을 재학하면서 그는 적어도 스무군데 이상의 입주가정교사를 거쳤다. 가정교사를 해서 자신의 의식주와 등록금을 마련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고향의 부모님에게도 부쳐야만 했다.
그러자니 무슨 경황이 있어서 일단 퇴거해 버린 특정의 입주가정교사집을 기억하며 다시 찾아가 본단 말인가. 그러나 알 수 없는 적막감이 안개처럼 드리워진 그 신비스러운 집에서 살고 있는 세 사람의 여성을 잊을 수는 없었다. 각기 너무나 독특한 방법으로 명호의 내면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갑나기인 남철과는 가끔 만나는 사이임으로 자연적으로 그쪽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남철이란 녀석 자체가 역시 과묵하여 무슨 말을 딱부러지게 하지 않았다.
"남희와 남분이는 어떻게 지내니?"
"잘 지내."
"사모님 건강은 어떠냐?"
"응, 괜찮아."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마나 한 대답을 했다. 하기야 녀석은 고시공부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을 때, 명호는 문득 이들 적막의 집 여인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구체적으로 남철에게 물었다. 녀석도 질문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남희와 남분이는 대학으로 진학했냐?"
"남희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남분이는 대학에 가지 못했어."
"왜?"
"그야 남희는 시험에 붙었고, 남분이는 떨어졌기 때문이지뭐. 그리고 남분이는 조금 아팠어."
"어디가?"
"아이가 헛소리를 하고 그래...로이로제라든가..."
"왜 그랬을까. 곱구 똑똑한 아인데..."
"그런 피가 있다구. 몰랐어? 일년이나 우리 집에 살았으면서..."
"..."
"사모님 건강은 어떠신가?"
"딸하고 같이 들랑날랑 하신다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그나마 남철이와도 만나지 않았다. 남철이는 여러번 고시에 떨어졌다. 그가 고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은 끝내 전해지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 젊은 남자들은, 대학 일년 재수하고, 대학생이 되어 일년 데모꾼으로 쫓기느라 휴학하고, 군에 가서 3년 썩고 나면 별수없이 서른이 되었다.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수가 있다면 빽을 써서 군복무를 빼는 것인데, 시골 출신 가난뱅이 청년들에게는 그림 속의 떡이었다.
서른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정말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데라도 찾아 다녀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직장을 잡아야했고, 장가를 들어야 했으며, 집이라도 한 칸 꾸려야 했고, 자식이 태어나면 키워야만 했다. 이런 과정에서, 청년시절에 품었던 꿈과 희망이 한낱 휴지로 변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명호의 일상사 속에서는 거의 기억되지 않던 남희와 남분이, 어린 그녀들은 이상하게도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면 그녀들의 흐려진 얼굴 윤곽이 뚜렷해지고 그 말없는 얼굴 한 복판에서 초롱초롱 빛나던 두 눈동자가 기억의 지평선 위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거의 틀림없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그녀들의 어머니의 모습이 역시 그 지평선 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남희가 자기더러 의사나 판검사나 혹시 교수가 되라고 했지만, 다 배부른 소리였다. 당장 뛰쳐나가 세끼 밥을 벌어야 하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잠 자고, 하루 세끼니 식사하고, 아내와 부부관계하고, 직장에 나가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차 타고, 그리고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월급타기 위해서 거의 똑같은 내용의 강의를 앵무새처럼 지껄이고 하는 것을 빼 놓으면 자신은 일생 한 것이 거의 없었다.
겨우 마흔이 넘어 시인으로 데뷔하여 시집 한 권을 자비로 출판한 것 밖에는 자신의 의지가 배어든 행위는 거의 없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하는 가장 평범한 행위를 하면서 시간을 지워왔을 뿐이었다.
지금 쉰 고개를 넘어선 지금, 그에게 직장은 다만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기능을 가진 곳 이외에는 아무런 뜻도 없었다. 직장이란 한 사람의 사회인이 사회 속에서 무슨 자아실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명호에게는 가당찮은 말이다.
그에게는 교장 될 꿈도 교감 될 꿈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전혀 그런 것을 위해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되는 사람들은 적어도 뽑힌 사람들이다. 그러나 명호는 자신은 뭔가 남보다 더 잘 해서 뽑힐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듯이 느껴졌다. 그러기에 그는 이 낯선 바닷가 분교로 자진해서 오지 않았나.
명호는 남의 눈을 피해가며 사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남을 만나면서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적당히 남을 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명호는 목욕을 하는둥 마는둥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노파가 다시금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얼핏 본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여성다운 구석은 전혀 없었다. 해골에 살갗을 붙여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명호는 자신도 모르게 노파의 나이를 가늠해보게 되었다. 여든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흔 가까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두 딸 중에 어느 딸이 교수한테 시집을 갔을까. 명호는 궁금증이 조금 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따위 것을 알아서 무엇에다 쓴단 말인가.
그런 일이 있고나서 며칠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명호는 노파의 존재를 서서이 잊어갔다. 그녀는 이제 연륜이라는 측면에서 인생의 벌판에 설 자리가 없었다. 너무나 딱했지만 어쩌랴. 그러나 두 딸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역시 해변에 안개가 짙었다. 장막처럼 드리워진 부품공장 지대를 바라보면 수업을 진행하던 명호에게 사환아이가 뛰어와서 노크를 했다. 수업 중에는 어떤 개인전화도 바꾸어주지 않게 되어 있었다.
"너무나 급하다고 해서 교감선생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잠시만 전화를 받으시라고요."
"무슨 전화일까? 나에게 그런 급한 전화란 있을 수 없는데..."
수업을 중단하고 교무실로 향하면서도 명호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명홉니다. 누구십니까?"
교감이 전화를 받고 있는 명호를 먼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남희 엄맙니다. 며칠 전에 만났지요."
혹시나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며칠 전 터미널에서 만났던 남희 어머니였다. 여든이 월씬 지나 아흔까지 갔을 그녀의 연치를 생각하면, 참으로 어려운 전화였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전화를 꼭 바꾸어 달라고 내가 때를 쓴 것은, 섬으로 가는 배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배가 오늘 오후에 떠나거든요. 그래서 혹시 동행이라도 할까 해서요."
"섬으로 가다니요? 언젠가 그런 말씀은 하셨지만..."
"외딴 섬이지요. 환자들이 모여 사는 섬이지요."
"아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오후에 부둣가 선착장에서 만나지요. 몇시지요?"
"오후 세 십니다."
"가능하겠습니다. 오후 2시에 수업이 끝이 나니까요. 그 때 뵙겠습니다."
명호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엿듣고 있는 나이 어린 교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교감은 명호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더 어렸다.
"모친이신가요? 목소리로 보아 연세가 아주 높은 분인 것 같았습니다."
"아 네 어머님의 친구되는 분이지요."
명호는 적당히 돌려댔다.
누군가가 고질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외딴 섬에 거주하고 있다면 치료가망이 거의 없거나, 무서운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일까. 혹시 부인의 남편 되는 분은 아닐까. 부인의 슬하 자식들 중에서 그런 중병에 걸릴 사람은 없을텐데.
그러나 그만한 연륜을 가진 부인이고 보면 남편되는 분은 이미 고인이 되지 않았을까.
오후에 명호는 수업을 서둘러 끝내고 부둣가로 나갔다. 며칠 전 노파와의 해후는 너무나 뜻밖이었기에 인사치례도 번번히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명호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이번 만남은 대학생 시절 그 집 가정교사로 있었던 때 이후 처음이니 아무래도 30여년 만이었다. 그러나 얼핏 생각해 보니 30년은 훨씬 더 되는 듯했다. 그러나 40년은 되지 않는 듯했다.
언개 낀 부두에는 바다를 향해 여기저기 선창이 뻗어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는 선박들이 정박해 있었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어떤 배들은 서서이 선창을 떠나고도 있었다.
부두 대합실에는 한 구석에 무슨 보따리를 든 여든살 노파가 구겨지듯 앉아 있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모님>이다. 사모님은 그런대로 옷을 갖추어 입으려 애를 쓴 듯했으나 역시 노쇠와 궁기를 지을 수는 없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파에게서는 알 수 없는 고귀한 기품이 풍겼다. 젊은 시절 그녀는 미모였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명호가 가정교사로 그 인왕산 골짜기 집으로 들어가기 전이었으리라.
"아 사모님...."
"박 선생님..."
두 사람은 백년지기나 되는 것처럼 손을 잡았다. 명호는 자신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는 갈퀴같는 노파의 손을 느꼈다. 노파의 입술은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
노파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노파는 명호의 손으로부터 자신의 손을 빼내 펴 보였다. 거기에는 두 장의 승선표가 쥐어져 있었다.
"바로 저기 저 배...3시 출발이예요..."
"그럼 어서 가시지요. 5분 전입니다."
자기가 조금 일찍 오기 망정이지 어쩌자고 3시에 약속을 해놓고 그 시각에 출발하는 배의 승선표를 사놨다는 말인가.
"박선생이 일찍 올 줄 알았지요."
노파는 미안했던지 변명을 했다. 명호는 노파의 손을 다시 잡고 선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명호는 자기가 누구의 손을 잡고 어디 목적물을 향해 뛰어 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몇십년 이래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호와 노파는 바람이 심하고 안개가 짙어 갑판에 있을 수 없었다. 선실로 내려와 선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명호는 노파의 손을 계속 잡고 있는 자신이 의아했으나, 자신도 노파도 서로들 손을 놓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을 정인으로는 보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두 사람은 어떤 정인도 아니었다.
명호도 노파도 말을 잊었다. 두 사람은 멀어져 가는 안개 낀 부두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명호는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그가 궁금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뚜- 작은 연안 여객선은 오래간만에 기적 소리를 발했다. 안개에 막혀 그것은 멀리 퍼져가지 못하는 듯했다. 기적소리가 둔탁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짙게 깔린 안개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소리는 자꾸만 들려왔다. 그것에 숨어 명호는 자신의 음성을 실어보냈다.
"섬에는 누가 있습니까?"
"남분이."
노파는 짧게 대답했다.
"혹시 어른은?"
"이십년도 더 전에 죽었어요."
"남분이가 왜요? 가정은 어떡하구요?"
"남분이는 혼자야. 세상이 싫데요. 그리고 깨끗지가 못해요."
"..."
노이로제 증세가 있다는 남분이는 끝내 그것에 함몰되고 만 것일까.
"박선생은 아이가 몇이예요? 그리구 집은 어디야? 참 너무 뜻밖이예요."
"나는 가정도 집도 없습니다. 방 한 칸을 빌려 하숙을 합니다."
"...."
이번에는 노파가 말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웬지..."
명호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해도 너무한 말을 노파는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집도 절도 없이 가정마저 꾸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기를 보고 어쩌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한 시간 여 바다를 가른 후 배는 섬에 닿았다.
섬에 내리는 사람들은 몇 명되지 않았다. 배는 서너명의 하선객들을 내려놓고 금방 떠나버렸다. 다른 섬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허술한 선창에는 몇 명의 선박회사 직원들이 나와 하선객들을 맞았다. 기이한 것은 이들이 노파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점이었다. 아마도 섬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어쩌면 노파가 가장 연장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내일 새벽에 배가 있으니 뭍으로 나가시려면 일찍 오세요."
"네, 알았어요."
할머니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는 명호 쪽으로 걸어와 같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좀 걸어야 돼요."
"얼마나요?"
"반 시간"
노파와 명호는 바닷가를 따라 난 모래길을 걷기 시작했다. 파도소리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귀를 간지렸다. 인적이 끊어져 있었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왜 이런 섬에 사십니까?"
"남분이가 도망을 칠까봐서지."
"도망을! 그럼 조금 전의 배 회사 사람들은 남분이를 알고 있겠네요?"
"절대로 남분이를 배에 태우지 않아요."
"사모님이 그렇게 다 만들었습니까?"
"아니야. 이 서방이..."
"이 서방이라니요?"
"남희 남편...다시 손잡아도 돼요?"
"얼마든지.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노파는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명호의 손을 정성스럽게 글어쥐었다. 명호는 조금 감격스러웠다. 누구든 자기의 손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쥐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아주 옛날에는 나의 손을 잡고서도 말 한 마디 못하시더니..."
"호호호호...."
노파는 명호의 말귀를 알았들었는지 어깨를 흔들면서 웃었다.
"이 서방이 부두 너머 대학의 교수라는 사람인가요?"
"그래요"
"남희는 소원을 성취했내요. 나보구서 의사나 판검사나 혹은 교수가 되라고 하더니만..."
"두 아이 다 죽었어요. 연탄 가스로...두 아이를 잃고 나서 남희가 더 했어. 원래 이 섬이 남희가 있던 데야. 다행히 남희는 나아서 뭍으로 나갔지요..."
이제서야 뭔가가 뚜렷이 잡히는 듯했다. 그 인왕산 집을 맴돌던 그 가라앉은 분위기는 이집안 사람들의 미래에 닥칠 어떤 비극을 예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명호는 무슨 소리가 나올지 겁이 나서 남철과 남식의 근황에 대해서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남희씨와 남분씨가 올해 몇살쯤 되었지요?"
"박선생과 네 살 차이예요. 그것도 몰랐어요? 박선생은 올해 쉰 다섯이고! 그러니 아이들은 쉰 하나지요."
"아니 벌써 그렇게나! 나는 두 분이 아직도 중학생인 줄 알고 있는데..."
나는 나 자신의 나이를 노파가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는데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은 우 회전하여 야산과 야산 사이로 뚫린 계곡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곡에는 두 채의 집이 있었다. 앞 쪽으로 한 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듯했다.
"이 집 사람들은 달포 전에 뭍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래서 더 무섭다구요. 누군가가 이사를 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30년 넘는 세월은 사람의 여건을 너무나 다르게 변화시켜 놓았다. 부인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몰락한 것일까, 두 딸의 신병 치료를 위해서 섬으로 온 것일까. 이런 의구심이 일었으나 그는 물어볼 수 없었다. 서울에서도 산다고 하였으니 아무래도 두 딸의 신병 치료 차 내려온 듯했다.
명호는 마당구석에 마련된 토키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초로의 노파와 맞닥뜨렸다.
"...."
"...."
두 사람 다 아무런 말 없이 상대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명호는 우선 남분이가 생각했던만큼 황폐화되어 있지 않는데 놀랐다. 그는 노파의 말을 듣고 그녀가 폐인이 되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깨끗했고 눈동자도 맑았다.
"어머머머...박명호 선생님!"
"남분씨..."
두 사람은 상대방의 이름을 불렀다. 일견 남분이는 전혀 병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내가 시를 써 달랬더니 시도 써주시지 않구서는...이제 시인이 되셨나요?"
".... 시인이..."
명호는 자기를 시인으로 불러주는 사람을 정말 오래간만에 만났다. 넘쳐나는 물질과 번쩍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갂이고 치어 숨죽이고 살아가는 자기더러 시인이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니.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런 병자라고 하니, 명호는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같은 감정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단번에 사태의 추이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가 이승이고 저기가 저승같기도 하고, 반대로 저기가 이승이고 여기가 저승같기도 했다.
"네, 시를 써드릴 수 있습니다."
쉰 살 노파는 안개 너머에서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마당에는 감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고, 나무들 아래에는 나무등걸을 짜맞춘 어설픈 평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쪽으로는 짙은 안개를 뚫고 넘어가는 해의 황금빛 햇살이 길고 긴 보료처럼 수평선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박 선생, 여기 앉으세요. 저기 수평선이 아름다워요. 한번 보시구려."
어느 틈엔가 노파가 미숫가루를 타왔다. 명호와 노파는 평상 위에 미숫가루 그릇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온종일 안개가...한낮이 지냈건만 걷히지도 않아요..."
"네 그러네요. 그러니까 안개 너머로 바라보는 오후의 바다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래요. 인천과 목포를 오가는 배들이 저기 저 수평선 위에서 흘러가는데 그걸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그런데 남분씨는 왜 여기 평상으로 오지 않을까요."
"미워한다고, 박선생을!"
"네? 나를 왜요?"
"남희만 좋아한다구. 요즈음도 계속 그 얘기만 해요. 그러니까..."
"박선생이, 남희보다 남분이 당신을 더 좋아합니다 해보세요. 금방 달려올 거예요."
"허 참!"
명호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30년도 더 긴 그 세월이 전혀 흘러가지 않고 이 두 사람의 여인들과 자신 사이에 그대로 고여 있는 것이었다. 남분이는 계속해서 토끼장 앞에서 작은 동물들과 놀고 있었다.
"남분씨,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오래간만에 뵈오니 정말 반갑습니다. 별로 늙지도 않으시구 정말 아름답습니다. 시를 지어 드리러 왔습니다."
명호는 그녀 곁으로 가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쉰살 노파의 눈이 황금햇살에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가 명호를 향해 얼굴을 돌린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다시 거두고는 쓰다달다 아무런 말도 없이 평상께로 걸어갔다.
저녁을 얻어 먹은 명호는 약속대로 남분에게 시 한 편을 써주기 위해 시상을 가다듬으면서 혼자서 섬을 돌아다녔다. 명호는 고의적으로 노파나 남분이를 떼어 놓았다.. 그녀들의 입에서 무슨 다른 이야기가 쏟어져 나올지 겁이 났던 것이다. 이들의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김 사장이라든가, 남철이와 남식의 근황같은 것을 정말 그는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낯선 섬에서 잠을 잤는데, 자신의 품으로 기어드는 여인도 없었고, 자신의 손을 글어잡는 여인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없이 잠을 잤다. 온종일 섬을 돌아다닌 탓으로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새벽에 배를 타고 뭍으로 돌아와 출근을 했다. 뭍에는 역시 어제의 안개가 가시지 않고 그대로, 아니 오히려 더욱 두텁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너달이 흘렀으나 노파에게서도 남분에게서도 어떤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겨울이 되어 부두에는 안개가 걷히고 눈이 쌓였다. 남도의 눈은 북도의 눈보다 더욱 지독할 때가 있었다.
바다에 흩어져 있는 섬들에도 눈이 지독히 많이 쌓였던지 아이들이 등교를 하지 않았다.선창까지의 길이 막혀 버린 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는데 뜻밖에도 남분의 목소리였다.
"선생님, 엄마가 어제 밤에 돌아가셨어요. 내 혼자 어떻게 해요..."
"네, 알았습니다. 내 곧 달려 가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는 명호는 헐레벌떡 눈 덮힌 부둣가로 달려갔다. 선창에서는 그래도 배들이 출항을 하는지 기적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약력>
정소성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출생
서울대문리대 불문학과 동 석박사과정 졸업
불문학박사(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 문과대학)
현대문학추천, 동인문학상, 월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
현 단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