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서 반말이니?”
이 한마디가 대한민국을 뒤흔든 유행어가 됐다. 배우 이태임과 가수 예원이 한 예능 프로그램 녹화장에서 설전(舌戰)을 벌이던 중 이태임이 예원에게 던진 말이다. 차가운 바다에 입수(入水)했다 나와 예민해진 이태임에게 나이 어린 예원의 ‘반 토막 말’이 꽤 거슬린 것 같다.
비슷한 장면이 또 하나 있다. 지난 3월28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에 출연한 방송작가 유병재는 아이돌 가수 광희가 거듭 반말을 하자 “근데 왜 반말…”이라고 발끈한 후 말꼬리를 흐렸다고 한다. 동갑내기라 생각한 광희가 친근함의 표현처럼 반말을 사용했지만 이날 광희와 처음 만난 유병재는 적잖이 기분이 상한 표정이었다.
두 상황을 보면서 문득 “한국말은 참 어렵다”던 미국인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에 온 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존댓말과 반말을 구분해 쓰기가 어렵다며 “미국에서는 누구를 지칭하든 ‘유(you)’라고 하면 되는데, 한국에서는 ‘너’라고 함부로 이야기했다가는 멱살 잡힌다”는 친구의 토로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어를 배워가는 외국인조차 알고 있는 ‘아’ 다르고 ‘어’ 다른 한국어를 우린 요즘 너무 쉽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방송심의규정은 ‘언어 순화’를 강조하지만 요즘처럼 반말과 비속어, 문법을 파괴한 유행어가 TV 속에서 판치던 때가 없었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친분 있는 연예인들이 TV 속에서 반말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태가 됐다”는 한 예능 PD의 이야기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리자면, 결국 이태임은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전후 사정을 재더라도 그가 보인 언행이 정당화될 순 없다. 하지만 해당 영상이 공개된 후 대중은 ‘뉘앙스’를 따졌고, 이태임을 향한 동정표가 늘기 시작했다. 잘못의 크기는 다를지언정 ‘쌍방과실’에 무게가 실렸다. “반말 안 했다”는 예원측의 해명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 여론을 뒤바꾼 결정타였다.
‘반말’은 ‘반(半)’이라는 한자에 ‘말’이라는 한글이 더해진 단어이다. 직역하자면 ‘말을 반만 한다’. 의역을 하자면 ‘말이 짧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로 ‘손아랫사람에게 낮추어 하는 말’ 혹은 ‘대화하는 사람과 매우 친밀할 때 쓰는 말’인 만큼 친분이 없는 사람이나 손아랫사람이 반말을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말 한마디면 천 냥 빚을 갚는데, 이 사건은 반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떠안은 모양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을 곱씹게 된다.
부모-자녀 공감 대화법
화내는 대신 잘못된 행동 설명을- 문제 해결 방식 차분히 제시해야 “넌 입에 걸레를 물었니, 말버릇이 그게 뭐야?”B(48·여·서울 구로구)씨는 최근 중학생 딸의 전화 통화 소리를 듣고 버럭 화를 냈다. 욕설을 섞어 가며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딸을 보고 울화가 치밀었다. B씨는 “몇 차례 주의를 줬지만 고쳐지지 않아 감정이 폭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B씨는 곧 후회했다. 그는 “‘걸레라는 표현을 쓰며 화내는 엄마도 똑같은 것 아니냐’는 딸의 말을 생각하니 화를 참지 못한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다”고 했다.
S(55·경기도 구리)씨는 요즘 고등학생 아들과 대화가 안 된다. 얼마 전 중간고사 기간에 제 방에서 게임만 하고 있는 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무슨 천재라고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하느냐”며 몇 분간 언성을 높였다. 아들도 “아빠와는 말이 안 통한다”며 방문을 열어젖히고 거실로 나가 버렸다. S씨는 “엄마와 얘기하다가도 퇴근하고 오면 ‘아빠 떴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소통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녀와의 소통으로 문제를 겪는 부모가 많다. 순간적인 감정에 욕설을 하거나 진심과는 달리 상처를 주는 말로 사이가 멀어지고, 정작 문제 해결은 못하고 말싸움만 하다 끝난다.
최근 ‘막말’ 논란을 일으킨 사회지도층도 마찬가지다. “너 나가”라며 기내 승무원을 몰아세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교수들에게 “목을 쳐 줄 것”이라고 한 박용성 전 중앙대 이사장 등도 상대와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무작정 감정을 배설한 사례다.
특히 부모들은 자녀와의 갈등 상황에서 문제를 푸는 열쇠를 본인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김종영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아이에게 부모는 엄청난 ‘갑’”이라며 “자녀의 마음을 읽어 주지 못하는 부모의 대화법은 큰 상처를 남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갈등 상황에선 감정을 쏟아내고 갈등을 키우기보다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공감 대화’를 하려면 감정과 사실을 분리해 생각하라 전문가들은 대안으로 ‘공감 대화’를 제시했다. 강태완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장은 “화를 가라앉히고 감정과 사실을 분리해 생각할 것”을 주문했다. 먼저 상대를 비난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행동을 콕 집어 지적하는 게 좋다. 그래야 화를 키우지 않는다.
게임에 빠진 아이에게 “너 참 한심하다”고 하기보단 “게임한 지 3시간이 지났다”고 사실만 말해 주는 것이다. 다음은 잘못된 행동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게임을 오래 하면 뇌가 빨리 늙는다”는 식이다. 끝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차분히 제안한다. “한 시간 게임을 했으면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족 간에 ‘공감 대화’를 하려면 먼저 자녀들에게 ‘경청’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오미영 가천대 언론영상광고학과 교수는 “대부분 아이가 하나둘인 가정에서 크다 보니 상대의 말을 듣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오 교수는 가정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경청 교육으로 ‘랜덤 토론’을 제안했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찬반 양쪽 근거를 모두 준비하도록 한 뒤 두 입장을 번갈아 가며 토론하는 방식이다. 오 교수는 “양쪽 입장 모두 옳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맞고 넌 틀렸다’는 선입견을 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김종영 교수는 ‘구성적 듣기’를 제안했다. 그림이나 영상을 보여 주고 자녀가 본 것을 그대로 말하도록 훈련시켜 관찰력과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로 들은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해 귀담아듣는 법을 재밌게 가르쳐 보는 방법이다. 유대인의 ‘하브루타’ 교육방식도 같은 원리다. 수업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짝을 지어 토론하게 하면서 반대 의견을 존중하는 법을 익힌다.
‘공감 대화’는 필수…프랑스선 경청은 ‘의무’ 가르쳐 성인이 돼서도 공감 대화는 필수다. 조롱하고 비난하는 말하기가 반복되면 인간관계에도 금이 간다. 조직에선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 2014년 8월 잡코리아 조사(작장인 304명 대상)에선 직장인의 61%가 “직장에서 동료들과 대화가 잘 안 통한다”고 털어놨다. 승진 등으로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공감의 수사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김종영 교수는 “우리는 경청을 배려 정도로 생각하지만 프랑스에선 토론수업 때 ‘경청을 의무’라고 가르친다”며 “대화의 시작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는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을 분석했다. 총 18분의 연설시간 동안 2393개의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가운데 빈도수가 가장 높은 단어는 ‘our’(68회)였다. 둘째가 ‘we(62회)’였고, ‘I’는 3번밖에 쓰지 않았다. 박 교수는 “일방적인 연설이지만 주어를 ‘우리’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대화처럼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강태완 원장은 “미래형 리더의 조건 두 가지를 꼽는다면 아랫사람의 얘기를 잘 듣고 지시하는 대신 질문하는 자세”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라는 표현을 쓰면 상하 구분이 없어지고 친밀해지는 효과가 있다. 단합이 잘 돼 조직의 효율성을 높인다”고 했다.
설득했다고 믿는 리더 VS 소통도 못했다는 부하 수많은 리더들이 폴로어(flower; 추종자)들을 설득해 일심동체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대부분 리더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그런 설득의 과정을 거쳤다고 말한다. 그런데 웬걸? 폴로어들은 자신들의 리더들이 설득은커녕 소통도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왜 이런 극단적 불일치가 일어나는 것일까.
아마도 리더는 설득의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맞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과정을 밟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닐까? 스페인 마드리드 아우토노마대학의 재치 넘치는 심리학자인 파블로 브리뇰(Pablo Brinol) 교수는 바로 그 점을 냉정하게 꼬집는 실험 연구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연구 중에 예 하나를 들어보자. 연구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두 그룹 모두 당연히 ‘등록금 인하’에 강하게 찬성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등록금 인하’는 그들이 찬성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A그룹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을 내려야 하는 이유를 ‘타인을 설득’한다고 상상하면서 이유를 열거하도록 했다. 반면 B그룹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을 내려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킨다고 상상하면서 적도록 했다. 이후 두 그룹 모두에게 등록금을 인하해야 한다는 취지의 제안서 하나를 보여줬다. 결과는 A그룹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강한 동의를 보였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 실험이다. 이번에는 ‘등록금 인상’을 주장하는 안(案)을 설득해야 한다. 당연히 그들의 원래 주장에 반하는 생각이다. 이제는 정반대 결과가 일어났다. 자기 자신을 납득시킨다고 상상하면서 주장을 만들어낸 학생들이 타인에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같은 일을 한 학생들보다 ‘등록금 인상 제안서’에 더 긍정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제 이 결과가 왜 중요한지 한번 알아보자.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후속 연구에 있다. 이번에는 타인을 좀 더 세분화해봤다. 여기에는 어떤 주장에 대해 나와 원래부터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동일 주장 집단)도 있지만 이 주장과는 무관한 다른 측면(정치적 입장 혹은 장애인 정책 등)에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유사 성향 집단)도 있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동일 주장 집단을 설득하는 일을 했을 때보다 유사 성향 집단을 설득하는 일을 하고 난 뒤 자기 확신이 훨씬 더 크게 증가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리더들이 바보는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주장이 똑같은 사람들을 다시금 설득하는 불필요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은연중에 자신과 비슷하지만 그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 성향의 사람들을 설득해놓고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나 계획에 대한 확신을 높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돌아보면 이런 리더들은 정말 많다. 당연히 평소에 부담 없이 어울리기에는 ‘다소 불편’한 사람들이다. 리더라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람들을 설득의 과정에서 배제해 나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결과는 대부분 ‘과대한 자기 확신’으로 이어질 뿐이다.
고사성어 ‘大器晩成’은 ‘사람의 크기’를 비유·상징해 서울에 있는 어느 학교 본관에 붙어 있는 한자에 눈이 꽂혔다. 克己(극기)와 大器(대기)이다. 극기는 ‘자신[己]을 이김[克]’이고 대기는 ‘큰 그릇’이다. 자신을 이겨 큰 인물이 되자(라)는 뜻이다. 그릇을 ‘사람의 크기’의 비유 또는 상징으로 쓰는 것은 동아시아 3국, 즉 한국·중국과 일본이 마찬가지다. 이는 키 체중 같은 몸의 크기보다는 마음의 크기를 이르는 개념이다. ‘키는 작아도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한다. 유명한 사자성어 ‘대기만성(大器晩成)’에서 온 말이다.
‘큰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고 푼다. 역사가 빚은 고사성어다.
이 대기(大器)가 원래 ‘사람’을 넌지시 이른 말이 아니고, 만성(晩成)도 ‘오래 걸려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에는 좀 당황스럽다. 말과 글의 전주(轉注)는 역사처럼 흐르며 숱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든다. ‘전주’는 구르고[轉] 흐르는[注] 것이라는 문자학의 개념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는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이라는 대목이 있다. ‘큰 네모는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희미하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는 뜻이다. 大器는 ‘대방’, ‘대음’, ‘대상’과 함께 노자가 도(道)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도구’ 개념들인 것이다. 시(詩) 또는 선(禪)과도 같은 비유다.
4마디 뜻을 함께 살피면 만성은 ‘오래 걸린다’가 아닌 ‘이루기 어렵다’로 읽힌다. 높은 이치인 道를 이루기가 쉬울까? 晩자 또한 ‘해가 저물다, 늦다’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다. ‘오래 걸린다’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나중에 왕충이란 후한시대 학자가 『논형(論衡)』에서 쓴 대기난성(大器難成)이 이런 ‘노자 읽기’를 뒷받침한다. ‘어렵다’[難]는 것이다.
위나라 최염 장군의 사촌동생인 최림은 외모도 빈약하고 출세가 늦어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은 일찍이 그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대기만성이니 좌절하지 말고 노력하라”고 격려했다. 그의 믿음대로 최림은 나중에 천자를 보좌하는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대기만성이 지금처럼,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처음 고사라고 한다.
그 큰 그릇 말고도 흉금(胸襟)처럼 아예 가슴을 사람의 마음에 비기는 말들도 있다. 흉(胸)은 신체부위 중에 가슴을 이르는 말이고, 금(襟)은 ‘옷깃’의 뜻으로 가슴속이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다. 앞가슴 여미는 옷깃이면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길이를 재는 자와 부피 재는 되를 이르는 도량(度量)이 ‘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을 뜻하고, 어떤 상황의 크기를 (되로) 헤아린다는 국량(局量)이 ‘남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마음’으로 쓰이는 것과도 흡사하다. 배포나 아량, 회포와도 느낌 비슷한 아름다운 말들이다.
원래 道를 말하던 큰 그릇이, 그 뜻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그릇의 역할로 뿌리 내린 것이다. 그런 ‘그릇’ 중의 중요한 개념이 금도(襟度)이다. 금(襟)은 옷 의(衣)자의 다른 글자체인 衤[의]자와 (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뜻 금(禁)자의 합체다. 끈으로 저고리 앞섶이 풀어 헤쳐지지 않도록 막는(여미는) 것을 상상하면 될까? 그래서 뜻이 옷깃이다. 옷깃으로 섶이 여며진 저고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감싼 것, 즉 ‘가슴’이 되고 이내 ‘가슴에 품은 생각’의 뜻으로 늘어난다. 가슴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그림을 읽는다고 할까, 시(詩)를 바라본다고 할까? 문자가 가진 비유와 상징의 세계다. 만들어질 때 품었을 생각으로 읽으면 더 아름답다.
도(度)는 기량(氣量)이나 국량(局量)과 같이 ‘그릇 크기를 잰다’는 뜻에서 시작해 제도나 법도와 같은 의미까지를 품는 단어다. 도리(道理)와 같이 의당 해야 할 일 등의 의미로 일상에서 쓰는 도(道)와 흔히 헷갈리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이 이 금도를 ‘금하는(지켜야 하는) 도리’로 착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전문가들이나 언론이 때때로 지적하지만, 이런 혼동은 그치지 않는다. ‘남을 넉넉하게 품는 큰 아량’을 이르는 아름다운 이 말이 ‘금도를 벗어났다’, ‘금도를 넘었다’ 따위의 말로 유치한 정치판 싸움에 동원되어 굴욕과 수모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틀린 말이다. 대통령을 향한 ‘각하 삼창(三唱)’으로 “시대착오적 생각의 소유자”라는 평판을 들은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행한 그의 언사(言辭)를 되돌아보게 된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불명에 퇴진한 이 전 총리는 물론 그를 둘러싼 여야 정치인들이 “금도를 벗어났다”라는 비틀린 말로 벌이는 공방전은 매번 정치적 이슈가 떠오르는 상황의 신호탄과도 같다. 바르지 못한 조잡한 말로 벌이는 ‘싸움’이 어찌 제 역할을 하랴? 금도와 각하뿐이 아니다. 최소한 말이라도 올바른 정치인을 보고 싶은 생각은 헛된 꿈인지?
말은 생각의 그릇이다. 바르고 커야 한다. 자신을 극복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극기(克己)라야 대기(大器)이다. 그 큰 그릇은 사람이기도 하고, 도(道)이기도 하다. 더러운 그릇이 무슨 소용이랴? 뜻을 새겨가며 말하고 바르게 행하라.
<精吾 문윤홍·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