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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총리 내정 안대희는 누구
박근혜
대통령이 새 총리 후보자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내정했다. 세월호 참사로 악화한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좋은 총리감을 고르고 고른 끝에 안대희
후보자를 선택했다.
안 후보자가 새 총리 후보자가 된 데는 여러 배경이 있다. 무엇보다 안 후보자가 공직사회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고, 박 대통령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스타일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난국을 돌파해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을 갖춘 ‘돌파형’이라는 점이 고려된 셈이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안대희 후보자는 대법관과 서울고검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법 대선자금과 대통령 측근 비리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 등을 통해 소신을 보여줬다”며 “앞으로 공직사회와 정부 조직을 개혁하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력히 추진해 국가 개조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권 한 관계자는 “안 후보자는 청렴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며 “박 대통령에게도 할 소리를 하며 행정조직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명실상부한 책임총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1955년생인 안대희 후보자는 서울대 행정학과 3학년 때 사법시험(17회)에 합격, 만 25세에 검사가 됐다. 당시 최연소 검사 임용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다. 이후 대검 중수 3·1과장, 서울지검 특수 3·2·1부장 등 특수검사로 거칠 수 있는 곳은 다 거쳤다. 검사 시절 안 후보자는 각종 권력형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국민검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대검 중수부장을 맡았을 때 불법대선자금 수사를 하며 당시 한나라당의 ‘차떼기(돈을 실은 차를 통째로 주고 받은) 사건’을 직접 파헤쳤다. 한나라당에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을 안겨준 당사자다. 안 후보자의 수사 때문에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서울 여의도 당사와 연수원을 매각해 국가에 헌납해야 했다.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는 그래서 탄생했다. 2012년 8월 새누리당에 영입된 그는 임대로 쓰는 새누리당사를 둘러보고는 “제1당 당사가 조금 협소한 인상이다. 그(대선자금) 수사 여파가 아닌가 생각돼 미안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안 후보자는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자금과 측근 비리 수사에서도 원칙을 고수하며 성역없는 수사를 벌였다. 그의 이런 수사 스타일은 국민적 신뢰를 얻는 기반이 됐다. ‘안짱’이라는 팬클럽까지 결성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 때 한마디로 ‘찬밥’ 신세였다. 2000년대 초반 검사장 승진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두 번이나 탈락했다. 타협하지 않는 그의 수사 스타일을 정권이 부담스러워했다는 말이 나왔다. 경남 함안 출신이어서 정권과의 지역적인 인연도 없었다. 당시 먼저 검사장으로 승진한 사시 17회 동기가 그가 재직하던 서울고검의 윗자리로 오는 일도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이제 옷을 벗어야겠다”며 후배들과 통음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사표를 말린 사람이 검찰 선배인 이명재,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었다. 검찰 후배들도 그의 사표를 극구 말렸다. 그는 당시 1년 반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기도 했다. 그때 담배 건넨 후배가 지금 유병언 전 세모 회장 비리 수사를 하는 최재경 인천지검장이다.
2003년 8월부터는 대선자금을 수사, 당시 정권 실세 등 정치인 40명을 기소했고, 이들에게 돈을 준 대기업 총수들을 줄줄이 소환했다. 당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그를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최고 실세”라고 했다. 이에 대해 그는 “무릇 실세라고 하면 되는 것을 안 되게 하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세가 아니다. 이제 권력은 없고 의무만 남았다”고 했다. 그는 2006년 서울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난 뒤 대법관이 됐고, 2012년 퇴임했다. 박근혜의 삼고초려 안 후보자는 대법관 퇴임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2012년 7월 대법관에서 물러난 뒤 그해 9월 미국 스탠포드대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 그를 박근혜 대통령이 붙잡았다.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이던 박 대통령은 안 후보자를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2012년 7월 박 대통령이 처음 안 후보자를 만나 영입을 제의했을 때 안 후보자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겠다”며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여러 차례 안 후보자를 설득했고, 결국 안 후보자는 8월24일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영입 제의를 수락했다. 당시 새누리당 서병수 사무총장은 영입 뒷얘기를 이렇게 전했다. “박근혜 후보가 안 전 대법관을 직접 추천했고,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해서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전 대법관 본인은 원래 정당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으나 박 후보의 제안을 받고 사흘 정도 고민하다가 수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안 후보자는 새누리당의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았다. 안 후보자 본인은 당시 새누리당에 합류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박 후보를 만났을 때 나라를 사랑하는 진정성이 느껴졌고, 한번 말한 것은 분명히 지키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깨끗하고 맑은 나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영입 제안을 수락했다.”
대선전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박근혜 후보와 안대희 정치쇄신위원장이 충돌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박 후보가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한광옥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영입하자 안대희 위원장이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다. 안 위원장은 당시 “한광옥 전 고문을 요직에 임명하면 내가 정치쇄신위원장을 사퇴하겠다”고 했었다. 안 위원장이 반발한 명분은 한광옥 전 고문이 비리 혐의에 연루됐던 인사라는 것이다. 한 전 고문은 2003년 나라종금 퇴출저지 청탁과 함께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으로부터 1억1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적이 있다. 이때 대검 중수부장으로 한 전 고문의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바로 안 위원장이었다. 안 위원장은 “무분별한 비리인사 영입은 정치쇄신특위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한 전 고문을 영입한 박근혜 후보로선 안 위원장의 반발이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박 후보는 안 위원장과 한 전 고문 양측을 오가며 중재에 나서야 했다. 박 후보는 당초 한 전 고문을 국민대통합위원장에 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박 후보는 안 위원장의 입장을 감안해 국민대통합위원장은 박 후보 본인이 맡고, 한 전 고문에게는 국민대통합부위원장을 맡기는 것으로 상황을 수습했다. 안 위원장도 박 후보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대선이 끝나고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안 후보자는 외부 활동을 자제했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서울 용산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정중동 하던 그가 용산에 사무실을 내자 “서울시장 출마 준비를 하는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당시 “지방선거에는 나가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 말대로 지방선거에는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그가 새 총리로서 세월호 참사 이후 악화한 민심을 수습하는 존재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지 주목된다.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사법시험 동기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전효숙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김능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이 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고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였다. 25세에 최연소로 검사에 임용되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2·3부장을 거쳐, 대검찰청 중앙수사본부 과장을 2번 역임하였다. 2006년 대법관이 되었고 2012년 대법관에서 퇴임하여 박근혜 대선 후보 캠프에 몸 담은 후 대선이 끝나자 정권에 참여하지 않고 현재는 안대희법률사무소의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경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중퇴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노무현 대통령과 동기) 1980년 검사 임용 1982년 프랑스 국립사법관 학교 수료 2003년 3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2004년 6월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2005년 4월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2006년 7월 ~ 2012년 7월 대법관 출생과 성장 그의 아버지는 회사원이었으며, 부산교대부속초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아버지가 서울특별시로 발령이 나서 혼자 부산에 남아 중학교를 다니다가 숭문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재학 중 사법 시험에 합격하자, 서울대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였다. 검사 시절 비자금 수사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와 한나라당 대선자금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로 실체를 파헤치며 국민들 사이에서 안짱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수사를 같이하던 송광수와 함께 검사로는 최초로 팬클럽이 결성되기도 했다.[2] 대법관 시절 안대희는 중앙일보 네트워크 분석에서 대법관 중 전원합의체에서 보수적인 의견을 가장 많이 낸 대법관으로 꼽혔다. [3] 또 김영란 대법관과는 분석에 사용된 판결에서 만장일치를 보인 것을 제외한 18건의 판결 중 16건에서 반대 의견을 내는 모습을 보였다.[4] 대법관으로서 그는 형사 사건과 조세 사건에 있어서 엄격하지만, 여성과 난민·무허가건물 입주자 등의 사회적 약자 보호엔 적극적이란 평가를 하는 언론도 있다. [5] 사형 확정 판결을 내린 것은 70대 어부가 젊은이들을 죽인 '보성 연쇄 살인사건'과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 두 건이다. 자기 스스로 기억에 남는 판결로는 백화점이 남품업자이 고용한 직원들에게 백화점 판촉일을 시키는 관행을 중지시킨 것을 꼽았다. [6] 취미 당구도 즐기며, 실력은 300 정도 친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또한,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골프·테니스·바둑도 즐긴다. [7] 주석 이동 ↑ "2002 대선 자금 보인다, 보여", 《시사IN》, 2007년 11월 28일 작성. 2009년 6월 12일 확인. 이동 ↑ "범민련·송두율·전공노 건건이 충돌 … 대법원은 ‘이념 대결’ 중", 《중앙일보》, 2008년 5월 28일 작성. 이동 ↑ "김영란 - 안대희, 박시환 - 김황식 ‘물과 기름’", 《중앙일보》, 2008년 5월 28일 작성. 이동 ↑ 권석천, 박유미, 최승식, 토요인터뷰 - 안대희 대법관 “판사 이념에 좌우되는 재판은 정의 아닌 불의, 중앙일보 이동 ↑ 황방열, 이병한, 권우성, "정치로부터의 사법부 독립은 100% 이뤄졌다, 사형 집행 안 될 거라 생각하니 판결 부담 덜했다", 오마이뉴스 이동 ↑ 강훈, 고졸 출신 안대희 대법관 "그냥 사시 봤는데 2년 만에 붙었어요"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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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희 전 대법관(사진)이 6일 경기도청을 찾았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요청에 따라 도청 직원들에게
특강을 하기 위해서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90612404250451 |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