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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묵상글 (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 줄 것이 없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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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11 05:14
- 줄 것이 없다면
오늘 복음은 어제 사도들의 임명에 이어지는 파견 내용입니다.
그리고 파견하시면서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오늘 저의 나눔은 한 말씀에만 집중하겠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을 듣고 내가 뭘 거저 받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은총을 사는 사람이 못됩니다.
왜냐면 은총이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한 대가나 공로로 받은 것이면 그것은 은총이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것만이 은총이고,
그렇게 받은 것이 많음을 아는 사람만이 은총을 사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은총을 사는 사람은 늘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늘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비결은 은총을 사는 것이라고
믿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면서 은총 체험이 없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자기가 뼈 빠지게 일해 번 것이지 거저 받은 것은 일절 없으며,
그래서 자기가 재산을 일군 보람은 있어도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은총 체험도 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왔고,
거저 받는 것은 하나도 없이 자기가 다 애써 벌어야 한다면
무엇 하러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는지?
이런 상태로 성당에 왔다 갔다 했다면 그것은
하느님 체험은 없이 그저 신자들 만나러 왔다 갔다 한 것이거나
하느님 체험은 없이 그저 예수님 말씀이 좋아서 간 것일 겁니다.
지금 이 친구가 신자가 됐는지 모르지만
옛날에 제 친구는 예수님 말씀을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 삶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는데 그것은
실제로 그가 지침으로 삼은 명언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지요.
아무튼 신자란 은총을 사는 사람이고,
자기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라는 존재도,
나의 건강도,
나의 능력도,
나의 성격도,
나의 부모도,
나의 형제도,
나의 친구도 하느님께서 다 거저 주신 것이고,
꽃도,
공기도,
바람도,
날씨도,
해님도,
달님도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프란치스코처럼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다 거저 받은 것이고,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래서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면
이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니 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자도 아니고,
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이 없는 사람이며,
은총을 살지 못하는 사람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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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종종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스마트폰을 뒤집어 찍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래야 키가 커 보이고 날씬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찍으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렌즈가 아래에 위치하게 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디에 렌즈가 위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하긴 한 때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어서 셀카를 찍을 때 팔을 45도 정도 올리고 나서 15정도 몸을 틀어서 촬영하는 것이 인기였지요. 이 역시 시선의 차이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니 우리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의 시선에 따라 세상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또 상대방이 잘못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나의 시선이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시선을, 특히 사랑을 담은 시선을 가져야 했습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얻고자 한다면 나의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의 삶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요? 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시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평화였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평화를 비는 정도가 아닌, 사람들이 평화를 느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이 아닐까요? 이런 시선을 가지고서만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쫓아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곳이고, 대신 사랑과 평화만이 필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씀으로 전해주십니다.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런 말도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가 그 사랑과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우리의 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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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 혹은 타인의 삶에 어떤 기적이 나타나는지 아무도 모른다(헬렌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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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곧 타자와의 교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받고 싶은 것은 잘 받아들이고 받기 싫은 것은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욕이나 모욕, 꾸중이나 비판은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시간과 노고,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주고받음’이라는 놀이 속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한 가운데 떡 버티어 서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거저 받앗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선사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존재의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곧 우리가 “거저 주어라.”라는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거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늘나라를 “거저 받아들여야”만이 내 안에 하늘나라를 지니게 되고, 다름 아닌 바로 받은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 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자애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곧 우리가 만든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거저 받은 것’, 그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명확히 아는 일입니다.
이토록,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포되고 증거 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그릇되게 선포되거나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을 건너 주어야 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되, 그분께서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목숨까지도 거저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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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강론(2) : 사부 성 베네딕토 대축일(루카 22, 24-27)
오늘은 ‘사부 성 베네딕토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부 베네딕도께서 말씀하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규칙서 7,34)라는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곧 지금 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을 찾는지”(규칙서 58,7) 물어봅니다.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신앙생활(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약해서’ 신앙생활에 대한 열성이 약해진 것은 아닌지, 또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을 찾기’에 몰두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들여다봅니다.
또한, [규칙서] 머리말에 나오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9절)라는 말도 되새겨 봅니다. 곧 나는 진정,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서 신앙생활(수도생활)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은 특별히 ‘건강’과 ‘질병’에 가장 민감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상처’와 ‘아픔’, ‘모욕’과 ‘무시’,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처사’를 받았을 때, 무척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훼손되거나 손해 보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반면, 자신에게 ‘관심 있고 이익이 되는 일’에는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듭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대체 왜 그럴까요?
이러한 현상에서, 우선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시대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입니다. 곧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입니다. 자신을 향하여 있고,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는 경향입니다. 그 바탕에는 ‘자신에 대한 애착’과 ‘자애심’, 그리고 ‘이기심’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사라져 버린,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깔려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라는 수면제에 취한 환자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깨어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속정신’에 빠져 있기는 신앙인들도 수도자들도 비 신앙인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만 보이는 것은 혹 제 눈이 잘못 본 것일까요?)
그러나 사부 베네딕토께서는 [규칙서]의 머리말 첫 문장에서 “수도승”을 ‘자기 뜻을 포기하는 자’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4,10)고 말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도 자기 것이 아님을 알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규칙서] 33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마음대로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부께서 제시한 ‘하느님 찾기’는 자기를 손해 보는 ‘자기포기’와 더불어 진행됩니다. 곧 수도생활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정신과 싸우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편, ‘자애심’과 ‘이기심’에 바탕을 둔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라는 이 ‘세속정신’의 바탕에는 더 무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바로 ‘불신앙의 소치’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있고, ‘자신을 중히 여기는’ 바람에 ‘하느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을 향하여 있기에 하느님을 향하여 있지 있고, 하느님을 향하여 있지 않기에 자신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고자 하고, 그러다가 안 되면 절망하고 불신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하고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사랑’하기를 배우기보다 ‘불신’에 떨어진 까닭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신앙들도 수도자들도 그러고 있으니, 참으로 ‘불신앙이 자리 잡은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C.S.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신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이는 비신앙인이나 무신론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수도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곧 신앙인이면서도 신을 잃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익명의 그리스도인; 실천적 무신론자). 그저 자신의 평안과 행복만 중시하는 일종의 웰빙영성을 추구하며, 종교마저도 개인화 되고 사적인 일로 사사화(私事化) 되어갑니다. 심리학자 켄 웰버의 말처럼, ‘해괴한 나르시즘적 퇴행’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질병도, 사고도, 고통도, 허물도, 죄도 아닙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그분을 향하여’ 있지 않음이 문제일 뿐인 것입니다. 곧 하느님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 때문에 바로 그 순간,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기쁨이나 즐거움, 혹은 성공과 승리에서만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질병, 고통과 상처, 무능과 실패를 통하여, 바로 그 속에서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함으로써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당신이 주님임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믿음의 이해 지평’을 넓혀주고, 당신의 ‘신비로운 계획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도록 이끄시는 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온갖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육체의 한계, 능력의 한계, 기능과 재능과 물질의 한계, 시간과 공간의 한계, 지식과 생명의 한계, 그 어느 것 하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전부를 할 수 있고 전부를 가질 수 있는 양, 전부를 알 수 있고 전부를 아는 양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면서도 또 절망에 빠지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희망을 둘뿐 하느님을 향하지 않기에, 끝없이 한계들을 마주치면서도 정작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곧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과 주어진 존재이고 진정한 주님이 계심을 믿고 ‘의탁’하는 일로 건너가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사부 성 베네딕토께서는 우리를 이 ‘불신의 길’에서 벗어나 ‘겸손한 신앙의 길’로 인도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찾기’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인용하여,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규칙서 머리말 35; 마태 6,33)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낫게 여기지 말라.”(규칙서 4,21;72,11; 5,2 참조)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자 수도승의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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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말타면 종 두고 싶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때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 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원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발, 가진 것에 의지 하지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중국춘추전국시대 송나라 학자였던 장자(莊子)는 집이 가난했다. 참다못해 이웃 위나라를 다스리던 문후(文侯)를 찾아가 곡식을 사기위해 돈을 빌려다라고 했다. 위 문후는 흔쾌히 승락하면서 영지에서 수입이 들어오면 그 때 은 삼백냥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하루가 급한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붕어 한 마리가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동해에서 온 붕어는 길 가던 제게 물을 한 바가지만 갖다주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쪽 오나라와 월나라 왕을 찾아가는 길인데, 그곳 서강의 강물을 끌어다가 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붕어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선생이 강물을 끌어다 준다지만 (나는 이미 죽었을 테니)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는 편이 나을 것이오'라고 했습니다."***홍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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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사제모임 프로그램 중에 ‘성극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동부에 사는 신부님들은 이미 성극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루레이 동굴’ 관람이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동부에서 온 신부님 7명이 동굴 관광에 다녀왔습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동굴이었습니다. 동굴도 인상적이지만 제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희를 안내해 준 기사 겸 가이드 분이었습니다. 열심한 개신교 신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목사님이었습니다. 숙소에서 동굴까지 2시간 정도 거리였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저는 목사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사제들의 ‘안식년’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는 동안 비용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2018년에 안식년을 했으니 사제생활 27년 만에 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안식년은 7년에 한번 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안식년 계획서를 제출하면, 기본적인 생활비는 교구에서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좋은 제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목사님이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는 ‘이판과 사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판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의 길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판 스님은 불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사찰의 운영과 행정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때로 사판의 스님들 중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판 스님들이 있기에 불교는 사부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에도 수도 사제와 교구 사제가 있다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수도회의 깊은 영성이 있기에 일부 사제와 교회가 물의를 일으킬지라도 가톨릭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도 있고, 가톨릭에도 있는 이판의 치열한 정진과 수도회의 깊은 영성이 부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2006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 40일 피정을 했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당시에 영신수련에는 목사님도 함께 했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분도 함께 했습니다. 저는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좋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에서 대림특강을 했던 이야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길상사 개원식에 축하 인사를 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고, 정보가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정치권력에 의해서 종교가 정해지기도 했습니다. 특정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탄압하기도 했고,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전쟁도 있었습니다. 종교가 권력에 편승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라는 제도는 있지만, 종교가 지니는 보편적인 사랑과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무력해진 적도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으로 우리는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4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매일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종교만이 최고이며, 최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민주화된 시대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에 무엇이 희망을 주고, 무엇이 위로를 주며, 무엇이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그만큼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황금률’을 지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잠시 머물다 가는 지구의 환경과 생명을 위해 함께 연대하는 겁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홍익인간, 인내천, 자비와 사랑이라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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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파견하시며 제자들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사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엄청난 능력들입니다.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과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능력, 나병을 낫게 하는 능력과 마귀를 쫓아내는 힘….
이런 능력은 마치 초인적인 힘을 가진 슈퍼맨처럼 보입니다. 이런 힘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당부하십니다.
묵상하면서 거저 받은 능력이 너무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능력을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는 것도 그에 걸맞은 것이여야 하겠다는 마음에 제자들은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거저 받은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받고 태어난 것은 모두 거저 받은 것입니다. 팔도 거저 받았고, 다리도 거저 받았습니다. 심장도 거저 받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값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당부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우리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거저 받은 우리 팔로 누군가를 돕고 거저 받은 우리 다리로 누군가와 걸어주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십시오.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거저 줄 수 없더라도 거저 주기를 포기하지는 마세요.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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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둥글다는 뜻은….
세상은 둥글다.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도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이비 베이커 프리스트-
막다른 골목을 만나본 적 있을까요?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곳 말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곳에 서본 적 있을까요?
숨고 싶어도 숨을 곳 없는 막다른 곳 말입니다.
수치심 가득한 광장에 서본 적 있을까요?
누구 하나 가릴 것 건네주지 않는 막다른 곳 말입니다.
세상은 둥급니다. 막다른 길,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는 길. 그 막다른 곳이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우리들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가 우리 삶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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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성 베네딕도 아빠스에 대한 자랑”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은 유럽인들은 물론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 인물인 유럽의 수호자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입니다. 아무리 자랑해도 샘솟듯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분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성인 자랑에 돌입하겠습니다. 자랑하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듯이 저도 성인을 닮고 싶습니다.
제 주특기가 자랑입니다. 특히 하느님 자랑, 예수님 자랑, 교회 자랑, 성모님 자랑, 성인 자랑, 형제들 자랑입니다. 이런 자랑보다 정신 건강에 좋은, 유쾌한 자랑은 없고 이런 자랑보다 큰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사제서품 35주년을 맞이하여 했던 강론들 모두가 이런 자랑들로 가득했음을 봅니다.
오늘의 입당송이 성 베네딕도의 삶을 압축 요약합니다.
“베네딕도는 그 이름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
오늘의 옛 어른들의 말씀도 그대로 성 베네딕도의 모습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어른스러움이란 곧 관대함이다.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에서 나온다.”<다산>
“군자는 세 번 변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하며, 말을 들어보면 엄정하다.”<논어>
저녁성무일도 아름다운 독서와 계응송도 그대로 성인의 삶을 압축하는 듯 했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증거자로다. 그는 구름들 사이에 있는 아침 별과 같고 보름의 둥근 달과 같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전 위에 비치는 태양과 같고 영광의 구름에 걸린 무지개와 같도다.”<집회50,5-7>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했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계응송>
성 베네딕도 자랑의 절정은 복음 낭독전 함께 노래한 부속가일 것입니다. 길다싶지만 은혜로운 내용이라 전부 인용합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같도다.
작은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소에 우리 인도하소서.”
후배 수도승들이 얼마나 흠모사랑한 성인인지 부속가 전부가 감동적입니다. 어제 저녁 아름다운 무지개 선물을 받았는데 흡사 성인 임종후 올라가신 하늘길을 상징하는 듯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제 좋아하는 성인이 베네딕도와 약 600년 후대의 프란치스코인데, 그대로 성 베네딕도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사라는 신원에 긍지를 느낍니다. 이를 노래한 짧은 자작시 역시 제 복된 신원을 드러냅니다.
“밖으로는 산,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강,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맑은 강, 성 프란치스코”
산과 강의 보완관계처럼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성 베네딕도를, 안으로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를 닮고 싶은 것이 제 간절한 염원이요, 결국은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 배치도 성인 자랑에 잘 드러맞습니다.
첫째, 성인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제2독서 바오로의 말씀이 흡사 사랑의 찬가를 연상케 합니다. 그대로 성 베네딕도가 살았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성인이 베네딕도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평화의 사랑, 감사의 사랑, 말씀의 사랑 또한 베네딕도에게 해당됨을 깨닫습니다.
둘째, 성인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지혜의 선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권고합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사랑이 지혜이고 지혜가 사랑입니다. 참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에서 분별력의 지혜가 나옵니다. 참으로 지혜를 추구했고 지혜를 사랑한 성인이었습니다. 역시 단숨에 읽혀지는 잠언의 말씀도 그대로 성인의 모습같습니다.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그래,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주님은 이런 지혜의 사람들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이들의 앞길을 보살피십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이들은 정의와 공정과 정직을, 모든 선한 일을 깨닫고 그대로 이를 실천하니 지혜는 바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성인은 “따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따름입니다. 사랑의 버림, 사랑의 떠남, 사랑의 따름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버리게 되고, 떠나게 되고, 따르게 됩니다. 베네딕도의 삶의 여정도 그대로 복음의 사도 베드로와 일치됨을 봅니다. 성인의 평생 여정도 자발적 사랑에서 기인된 버림의 여정, 떠남의 여정, 따름의 여정으로 요약됩니다. 참으로 성인은 주님을 향해 끊임없이, 한결같이, 묵묵히 버리고 떠나 따랐던 평생 삶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현세의 풍성한 축복은 물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 확약하셨는데, 베네딕도가 받은 축복도 베드로 못지 않습니다. 성인의 무수한 후예들인 수도승들의 활약은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했고 교회를 풍요롭게 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회 하늘을 환히 밝히는 태양같은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아주 예전 저녁 불암산에 감동하며 써놨던 시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저녁 침묵의 불암산이 상징하는바, 평생 큰 사랑, 깊은 지혜로 고요히 묵묵히 주님을 따랐던 성 베네딕도 아빠스입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겸손한 사랑과 지혜로 항구히 주님을 따랐던 성인을 닮게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사편34,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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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이란 길>
나를
보내시는 벗
나를
맞이하시는 벗
그 사이
나
걷는 길
나를
맞이하시는 벗
만나시러
나를
통해서
나를
보내시는 벗
걷는 길
나를
보내시는 벗
만나시러
나를
통해서
나를
맞이하시는 벗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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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히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선포자들이 파견될 때 어떤 분부를 받았는지 들어 봅시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이 말씀이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설사 누가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운다 하더라도, 이제 세상이 그것을 선포합니다. 세상의 파멸이 곧 복음 선포입나다. 너무 많은 재난을 입은 이 세상은영광의 자리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세상 스스로, 마치 이제 또 다른 나라가 오고 있으며 그 나라가 자기 뒤를 이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세상을 사량한 바로 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습니다. 세상의 파멸 자체가 세이 사랑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집이 흔들리며 무너질 위험에 처했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달아날 것입니다. 그 집이 서 있을 때 그 집을 사랑했던 사람은, 그 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 즉시 빠져나갈 것입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데,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그대로 보듬고 있다면, 우리는 그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파묻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에 세상에 묶여 있는 한, 세상의 파멸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끊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제자들이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견되었던 그 시대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지상의왕국이 번성히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우리는 이와 유사한 진리를 본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첫째 단계, 곧 영혼안에서 자라는 갈망의 단계를 상세히 설명한다: 갈망은 모든 천사보다 멀리 뻗고 …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리 뻗는다. 그것은 우리가 지각을 통해 도달하는 모든 것 너머에까지 뻗친다. 우리는 갈망을 피하거나, 억누르거나, 막을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더 깊이 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엑카르트가 말한 둘째 단계, 곧 “두려움과 희망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엑카르트는 이 둘째 단계에 대해 본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각이 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갈망이 아무리 모든 것을 동경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하느님인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지성과 갈망이 끝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엑카르트가 말한 셋째 단계는, 우리가 “모든 시간적인 것을 잊을” 때 나타난다. 이리하여 그는 본 설교에서 우리의 영원한 젊음과 새로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의 영혼은 그것이 창조되던 때만큼이나 젊다. 실로 나의 영혼은 그때보다 더 젊다. 나의 영혼이 오늘보다 내일 더 젊어진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루카 복음 8장을 본문으로 삼은 설교에서 그는 만물이 하느님 안에서 경험하는 “영원한 새로움”과 색다른 기쁨에 대해 말하면서,이것이 새로운 시간 의식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시간 의식은 우리가 실현된 종말론을 깨달을 때 일어난다. “타격을 받기 전에, 즉 살인이 실행되기 전에 불안에 떨다가 죽을 수 있듯이, 우리는 기쁨에 겨워 혹은 그것을 기대하는 가운데 죽을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하느님의 손에 넘겨지기 전에 영원한 복에 겨워 죽을 수 있다. ”
기쁨은 우리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장엄하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기 전에 맛볼 수 있는 영생의 기쁨이다.(201)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항상 깨어 있으라
히야친따는 숲 저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냐 오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소리높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여기저기를 찾아 보았으나 아무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히야친따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루치아에게로 돌아왔다.
“오빠가 없어"
“그럼 여기 있거라. 내가 찾아 볼께 "
그러나 루치아도 역시 찾지 못했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온통 샅샅이 뒤진 끝에 겨우 찾아냈는데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이마를 땅에 대고 돌담 구석에 숨어 기도에 여념이 없었다.
루치아는 가까이 가서 어깨를 흔들었다. 소년은 비로소 제 정신이 든듯 일어섰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깼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하느님께 기도드렸니?”
“응. 천사의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만 완전히 잠겨 버렸어.”
“넌 히야친따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니? 아주 큰 소리로 불렀는데.”
“아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
귀여운 이 열 살 난 소년은 이렇게 기도에 잠길 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몇십 미터 떨어진 곳인데도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느님 안에 몰입할 만큼 뛰어난 명상적 영혼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탈혼이 아니겠는가?
소년은 기도하기 위해 전에도 가끔 그들을 떠나 한 구석에 몸을 감춘 적이 있었다. 두 소녀가 그를 부르면 얼마 후에 돌담 뒤나 숲속에서 대답하였다.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니? 우리도 함께 기도하고 싶었는데.”
“난 혼자 기도하는 것이 좋아. 혼자서 묵묵히 생각하고 많은 죄 때문에 슬퍼하시는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혼자 있고 싶어.”(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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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0,8)
예전 공동체를 방문하셨던 손님 신부님이 강론 중에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생각하느라 꾸물대는 저희에게 가장 중요한 동사는 바로 ‘come & go: 와라 그리고 가라’고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라 보라고 부르셔서 당신과 함께 머무르도록 하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제자들을 이제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가라’ 하고 하십니다.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0,8~10)
하늘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물론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르는 말씀이었지만, 그것보다는 가르침을 필요한 민중들의 가난한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서 기인하고 고려한 가르침이었다고 봅니다. 지금껏 갖가지 질병으로 가난과 고통으로 짓눌려 살아 온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사치이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대에 따라 다른 적응이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 선포자가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그 풍부한 가르침이나 능력을 베풀 때 가난한 이들에게 거저 주어라, 하신 것이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을 선포하는 사람의 특권이자 특은입니다. 가르치고 전하면서 복음 선포자가 느끼고 깨달은 삶의 기쁨과 보람을 어찌 물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전대 곧 돈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의도는 복음 선포자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세상적인 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으로 새겨들어 봅니다. 복음 선포자의 필수 항목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물건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은총과 사랑을 선포하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칼과 표창과 창이 아닌 오직 오직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아간”(1사17,12~54) 것처럼 복음 선포자도 세상적인 것이나 인간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믿음 곧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손수 마련해 주신다는(야훼이레 창22,14참조)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꾼이 먹을 것을 제공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생활의 안정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집 저 집으로 전전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말이 생겨나서 공동체 내 갈등과 불화를 초래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도 어느 고장에 가거든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0,11)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배경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의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 결코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는 점과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합당하게 돌봐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무릇 하느님의 섭리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맡기고, 오직 자기 소임에 충실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떠나가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슨 일을 원하실 때는 반드시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하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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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 버팀목이신 그분 뜻 따라 복음 선포를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099198&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7-10 ㅣNo.174096
우리는 자신이 받은 것을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시하거나, 오히려 자신의 공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한 여태까지, 가족과 주위의 이웃들로부터 공짜로 받은 게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을 게다. 신앙에서도 우리가 이만큼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깨닫고, 세상을 거룩한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어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키워 주신 덕분일 게다. 우리는 이처럼 공짜로 받은 것을 ‘은총 또는 특전’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선포하여라. 그리고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또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마귀를 쫓아내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신다. 우리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만 할게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보잘것없고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담담하게 고백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이는 금이나 은이나 여행 보따리도 필요가 없다. 하느님 나라의 평화가 단지 거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기에.
사실 제자들은 자기 것이라고는 전혀 챙기지 못한 채, 오직 복음 선포에만 전념해야 할게다. 그런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으리라. 어떤 이들은 박해받기도. 형제들이 요셉에게 했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그들을 팔아넘기기도. 그러나 제자들은 개의치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을 게다. 그들은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앞서 보내신 이들이기에. 그렇지만 그분 눈길을 떠나는 순간, 어쩌면 그분께서 주신 그 능력도 사라질 게 당연하다.
복음 선포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 주신다. 이 은총을 알아보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출발점이리라. 그저 밥 한 끼에 성경만 읽은 그 옛날에는 돈 한 푼도 없으니까, 마음이 참으로 편했단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노인 연금이라는 돈이 좀 수중에 생기니까 손주들에게 용돈도 주고, 하고 싶은 것이 여기저기서 종종 생긴다나.
처음엔 그게 그저 좋았는데, 점점 욕심이 생겨나, 그 전보다 오히려 마음이 산란해지고 평화롭지 못하게 된 게 쾌나 아쉽단다. 기도 속에 참으로 자유롭게 사시던 할머니에게 얼마 안 되는 돈이 영성 생활에 끼치는 하나의 사례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재물만 모으면 삶이 안정되리라 여긴다. 그러나 속담에 ‘말 타면 종두고 싶다.’는 게 되듯, 욕심은 가진 만큼이나 더 불어날 게 뻔할 뻔자다.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게 내 노력인 것 같지만, 사실은 거저 받았을 뿐이니까.
세상눈으로는 많이 가지면 행복해지라 착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소유 자체가 그리 큰 힘이 아니다. 악한 기운이 덮쳐 서서히 또는 급작스레 무너진 것을 수차 보고 또 보았으니까. 우리는 그분께서 버팀목이 되어 주셨기에 여태 어떤 욕망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래도 홀가분하게 살았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살도록 파견된 신앙인이다. 그저 남 달리가 아니다. 예수님은 늘 ‘부족한 채’로만 살라신다. 그래야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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