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야, 카페야?
대구 ‘커피명가 라핀카’
하얀 건물에 빨간 작은 문. 마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닮았다. 커피콩이 흩어져 있는 손잡이 앞에서 잠시 문 안쪽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나른한 도시의 오후, 수상한 그 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순진무구하고 겁이 없는 앨리스처럼 순수한 나 자신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그 문으로 주저 없이 들어선다.
수상한 커피나라 ‘커피명가 라핀카’ 커피체리가 가장 먼저 반기는 신기한 공간
행복한 커피농장
전국이 커피 열풍에 휩싸인 요즘, 그 중심에 대구가 있다. 대구 시민들의 유별난 커피 사랑은 ‘커피명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명가는 이화여대 스타벅스 1호점보다 9년이나 앞선 1990년에 문을 열었다. 경북대 북문에 문을 연 1호점은 커피를 자가 배전(로스팅)한다는 것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시절 직접 로스팅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수준 높은 커피 애호가가 되었고, 대구를 커피의 도시로 만들었다.
커피명가를 시작으로 다빈치, 슬립리스인시애틀(SIS), 핸즈커피, 안에스프레소 등이 생겨나면서 대구는 토종 커피 브랜드의 천국이 되었다. 그 사이 커피명가는 전국 서른네 곳으로 늘어났고, 작년 12월 수성구 만촌동에 ‘커피명가 라핀카’를 오픈했다.
라핀카(La Finca)는 스페인어로 ‘농장’을 뜻한다. 최근 들어 대관령에도 커피 농장이 생기긴 했지만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거의 수입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농장이라 이름 붙이고 농장을 꿈꾼다. 농장의 평온함과 산지의 감동, 그리고 커피 본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이름에서부터 커피의 진실이 느껴진다.
커피명가 설립자 안명규 대표는 스스로 ‘커피헌터’라 한다. 맛있는 커피는 신선하고 좋은 원두에서 나오는 법. 좋은 생두가 있는 곳이라면 험한 오지도 마다않고 찾아간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케냐, 브라질,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 커피 생산국의 농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세계 곳곳의 좋은 생두를 들여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과테말라 COE(Cup Of Excellence)에서 6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엘인헤르또 농장과는 독점 계약을 맺었다.
커피명가 라핀카에서는 매일 아침 8시부터 30분 동안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가 단돈 1,000원! 이 커피는 ‘행복한 커피’로 불린다. 행복한 커피 판매수익금은 모두 행복한 기금으로 사용된다. 행복한 기금은 커피명가와 직거래하는 커피 농장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책이 되고, 나아가 교사들의 월급이 된다. 좋은 생두를 지키기 위해 그곳 아이들까지 지키고 싶은 마음. 어쩌면 커피명가의 커피 맛은 바로 그 마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왼쪽/오른쪽]스페인어로 농장을 뜻하는 ‘라핀카’ / 세계 곳곳의 커피 농장에서 들여온 원두 원두를 직접 볶고 정성껏 추출해온 지 어느덧 24년
꿈꾸는 커피박물관
커피 열매가 그려진 커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커피체리와 생두가 도열하듯 서서 손님을 맞이한다. 이국적인 커피체리와 잘생긴 커피콩의 환대를 받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시원스런 창 앞에 어린 커피나무들이 눈부시게 자라고 있다. 카페 안쪽에 원두와 커피 추출 도구들을 전시해놓은 진열장이 있다. 이 진열장은 커피로 칠을 해서 어여쁜 커피색을 띤다. 커피 빛깔이 한옥 마루만큼 편안하게 느껴진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작은 공간에는 커피 볶는 옛날 도구들과 이국적인 소품들이 놓여 있다. 마치 태평양을 건너 어느 커피 농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생두를 삽질하며 잠시나마 커피 농장을 체험하는 깨알 같은 재미도 맛볼 수 있다.
그제야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테이블 하나에 의자 4개가 놓인 흔한 풍경은 간곳없고 긴 나무 테이블이 투박하게 놓여 있다. 그러나 자리에 앉기는 아직 이르다.
[왼쪽/오른쪽]커피잔과 원두로 장식한 출입문 / 생두를 삽질하는 재미를 느껴봐도 좋다. [왼쪽/오른쪽]옛날 로스팅 도구 / 커피로 칠을 한 벽면은 편안한 한옥 마루를 닮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커피가루를 붙여 만든 작품이 걸려 있다. 2층에는 박물관 전시실처럼 유리상자가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상자 안에는 예멘, 자메이카, 콜롬비아, 케냐 등의 스페셜티 커피를 전시해놓았다. 각국 커피의 특징을 설명한 안내문과 농장 사진이 이해를 돕는다. 조명 아래 보석처럼 전시된 생두를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신맛, 단맛, 쓴맛 등 커피의 다섯 가지 맛을 자동차 계기판처럼 표시해놓아 마셔보지 않고도 취향에 맞는 커피를 고르는 재미가 있다.
본관을 나와 정원을 지나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큰 로스팅 기계가 쉴 새 없이 커피를 볶아 식히고 있다. 갓 볶은 커피 향기는 신혼부부 깨소금 향기 부럽지 않다. 로스팅 기계 옆은 생두를 보관하는 창고다. 창고 안에는 각국에서 수입해온 어마어마한 양의 생두가 자루에 담겨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생두자루들 사이에 LP판이 진열되어 있고, 커다란 스피커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두 달에 한 번씩 음악회와 영화제가 번갈아 열린다. 창고에서 소극장으로 변신하는 이색 공간이다. 커피자루에 기대앉아 음악을 듣는 일은 특별한 경험임이 틀림없다. 창고 앞 온실에는 커피콩에서 발아된 커피나무들이 꿈처럼 자라고 있다.
커피나라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2층 스페셜티 전시실에서 찜해둔 커피와 어울릴 만한 케이크 한 조각을 앞에 두면 박물관도 카페도 아닌 묘한 공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깊고 풍부한 맛의 커피와 박물관의 기분 좋은 만남이 즐겁다.
[왼쪽/오른쪽]2층으로 올라가는 연인 / 세계의 스페셜티 커피가 전시된 2층 [왼쪽/오른쪽]보석처럼 전시된 생두와 안내문 / 자동차 계기판처럼 표시한 커피의 맛과 품질 [왼쪽/오른쪽]커피자루가 쌓여 있는 창고 / 커피나무가 꿈처럼 자라는 온실
그리고 나와 나누는 소통 한잔
안명규 대표에게 커피란 한마디로 무어냐고 물었다. “커피는 소통입니다.” 도서관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고등학교 시절, 사서 선생님이 내어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며 나누던 대화가 커피처럼 따뜻하고 향긋했다는 그는 그렇게 커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커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커피명가를 열었다. 커피명가는 ‘이름난 집[名家]’이라는 뜻이 아니다. 밝을 ‘명(明)’ 자를 써서 밝은 공간, 즉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단순히 커피만 파는 곳을 원하지 않았다. 커피의 처음을 알고, 커피 문화를 음미하며, 커피를 통해 소통하는 곳이기를 원했다.
커피는 단순히 ‘맛있다’는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신맛, 단맛, 과일맛, 흙맛 등 오묘하고 다양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 산지의 자연 환경에서부터 수확하는 방법, 로스팅 그리고 추출하는 모든 과정이 커피의 맛을 좌우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커피를 마시느냐가 커피 맛을 완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를 마시는 가장 큰 기쁨 역시 커피의 향기와 풍미보다는 커피와 함께 나누는 대화에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나 자신과 나누는 커피 한잔이다. 빌리 조엘은 “내 커피잔 속에 위안이 있다”고 했다. 오늘, 당신이 나누는 커피 한잔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소통의 공간 [왼쪽/오른쪽]정원에서 바라본 ‘라핀카’ / 나 자신과 나누는 ‘소통’ 한잔
여행정보
커피명가 라핀카
주소 : 대구시 수성구 국채보상로 953-1
문의 : 053-743-0892, www.myungga.com
1.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경부고속도로 북대구IC → 시청, 신천대로 방향 → 침산교 지하차도 → 신천대로 → 동신교, 신천교, 시청 방향 지하차도 옆길로 진출 후 우회전 → 국채보상로에서 유턴 → MBC네거리에서 차량등록사업소 방향 → 커피명가 라핀카
* 대중교통
서울→대구 :
서울역(1544-7788)에서 동대구역까지 KTX 하루 60여 회(05:30-23:00) 운행, 약 1시간 50분 소요
서울고속버스터미널(1588-6900)에서 15~40분 간격(06:00~익일 01:30) 운행, 약 3시간 40분 소요
※동대구역이나 대구고속버스터미널에서 ‘라핀카’까지 택시로 약 10분 거리. 택시비 5,000원 안팎
2.주변 음식점
미성복어 : 복어 요리 / 수성구 들안로 87 / 053-767-8877 / korean.visitkorea.or.kr
봉산찜갈비 : 찜갈비 / 중구 동덕로36길 9-18 / 053-425-4203
안빛고을 : 흑태찜 / 중구 약령길 25 / 053-425-6660
3.숙소
히로텔 : 중구 국채보상로 657-12 / 053-421-8988 / 굿스테이 / korean.visitkorea.or.kr
뉴그랜드호텔 : 북구 칠성남로38길 46 / 053-424-4114 / 굿스테이 / korean.visitkorea.or.kr
크리스탈관광호텔(베니키아) : 달서구 달구벌대로 1910 / 053-655-7799 / www.crystalhotel.co.kr
엘디스리젠트호텔 : 중구 달구벌대로 2033 / 053-253-7711 / www.eldishotel.com
유니온관광호텔 : 중구 태평로 117 / 053-252-2221 / www.unionhtl.co.kr
글, 사진 : 유은영(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