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키스 / 정끝별
상상의 시간을 살고
졸음의 시간을 살고
취한의 시간을 살고
사랑과 불안과 의심의 시간을 살고
폐결핵을 앓던 시절 한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왼팔이 빠진 채 언니 등에 업혀 울면서 누런 소다 찐빵을 먹었는데, 정말로
흰 왜가리를 탔다, 왜가리의 펼친 날개가 너무 커 창천이 깨지고 벼락을 맞기도 했건만
꿈속 남자와 방 한 칸 얻어 살림을 살았던가
아버지 도박빚에 버스차장이 되어, 미싱공이 되어, 급기야 접대부가 되어
달랑 시집 한 권을 남기고 서른세 살에 요절했다 간절히
첫키스를 했던 남자와 두 딸과 부득부득 살고는 있지만
불쑥 돋아나 칭칭 감기며
조각난 채 일렁이는 불의 끝처럼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한 손은 밤식빵을 뜯으며 그랜드 힐튼을 오가다 문득
봉쇄수도원의 대침묵에 감춰진 희디흰 맨발을 쳐다보고 있는 나. 나였던가?
이미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음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듯
눈이 까만 순록이 되어 눈 덮인 툰드라를 헤맬 적 발바닥이 타는 듯 시렸던
서귀포 물가에 나란히 누워 저무는 생의 끝맛을 보았건만
한여름 네거리에서 빨간 원피스의 미아가 되어 아모레 아모레 미오를 듣던 그때나 지금이나
촌충의 몸은 도대체 몇마디일까
아메바의 촉수는 몇가닥일까
삶이 이게 전부일 거라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되솟는다
나비처럼 펄럭이며 떠다닌다
아직까지 누구도 아니었던 나는
눈을 감고 기다린다 황금빛의
시인의 시간을
도둑의 시간을
거짓말의 시간을
발기된 탑과 덩굴과 안개의 시간을
시집『와락』창비 2008
■ 시인의 말
나는 이미 오늘이 아니다. 그러나 오간 데만 오간 것들과 한 것만 또 한 것들, 여기는 시간이다.
삶보다 빨리 달려가는 말(언어)들의 시간이다.
여기 너머의 사랑이다. 돈돈돈스스스돈돈돈 타전을 기다리는 중이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미래의
별이나 이름을 빼앗긴 과거의 명왕성에게도 나의 사랑을 전해다오.
내 것이 아니었던 내 것들과 결코 내 것이 아닐 내 것들을 향해 다시 꿈꿀 것이다. 한 글자의 이름을
가진 막막한 사물들에게도 안부 전해다오.
여기에서 모든 여기 너머로 다리를 놓는다. 허밍의 너일까. 너를 따라 이 삶을 통과하고 있다. 나는 너를 그렇게 시라고 부른다.
2008년 가을
정끝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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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의 의미: 「황금빛 키스」
"황금빛": 금빛은 귀하고 찬란한 것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덧없고 허망한 느낌도 있다. 황금빛이란 말이 덧씌워진 키스는 단순한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어떤 신비로운 순간을 뜻할 수 있다.
"키스": 키스는 사랑과 욕망, 혹은 시간 속에서 떠도는 관계를 의미할 수 있다. 특히, 시의 마지막에서 "발기된 탑과 덩굴과 안개의 시간"이 언급되는 것을 고려하면, 육체적 사랑뿐만 아니라, 욕망과 그것이 남긴 흔적, 그리고 잊힌 순간들에 대한 탐색을 내포할 가능성이 크다.
전체적으로: "황금빛 키스"는 찬란하면서도 허망한 삶의 한순간, 혹은 삶 속에서 사라지거나 남겨진 관계와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빛나는 순간이지만 사라질 운명이라는 점에서 삶의 덧없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2. 주제
기억과 시간의 층위
시는 다양한 시간대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화자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경험을 복기하는데,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 시간들이 서로 얽히고 교차하면서 기억이 변형되고 왜곡되며,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이 보인다.
사랑과 상실
첫키스, 결혼, 아이, 과거의 연애 등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등장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지나가고 사라진다. 사랑이 불안과 의심 속에서 지속되며, 이별과 요절이라는 운명적 요소가 강조된다.
삶의 유한성과 존재의 불확실성
"삶이 이게 전부일 거라 생각할 수 없다"라는 구절처럼, 시는 시간과 기억이 뒤엉킨 삶을 조각조각 탐색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와 끝을 질문한다. 폭포처럼 떨어지고 되솟는 시간, 나비처럼 펄럭이며 떠다니는 존재는 확정되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아의 다층적 정체성
화자는 "이미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음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듯"하며, 자신의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음을 느낀다. 수도원의 맨발을 쳐다보는 '나'와 빨간 원피스를 입은 미아가 되어버린 '나'는 다층적 자아를 의미하며,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암시한다.
3. 상징 분석
1) 병과 상처
"폐결핵을 앓던 시절", "왼팔이 빠진 채 언니 등에 업혀 울면서"
→ 육체적 병과 상처는 삶의 결핍과 불완전함을 상징한다. 사랑과 병이 함께 언급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강조하는 장치다.
2) 동물 상징
"흰 왜가리"
→ 왜가리는 순결과 자유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부유하는 존재다. 이 시에서 화자는 왜가리를 타고 날아가지만 결국 폭풍에 휩쓸리듯 떨어진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지만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는 상황을 암시한다.
"눈이 까만 순록"
→ 순록은 차가운 겨울을 견디는 생명력을 상징하지만, "발바닥이 타는 듯 시렸다"라는 표현에서 역설적인 감각이 강조된다. 이는 삶의 상처를 견뎌야 하는 운명을 뜻할 수도 있다.
3) 공간과 장소
"봉쇄수도원의 대침묵"
→ 수도원은 금욕과 신성함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적 갈망이 내포되어 있다.
"서귀포 물가에 나란히 누워 저무는 생의 끝맛을 보았건만"
→ 서귀포는 삶의 끝자락에서 안식을 찾는 장소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끝맛"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서 죽음과 종결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4) 빨간 원피스와 미아
"한여름 네거리에서 빨간 원피스의 미아가 되어"
→ 빨간 원피스는 강렬한 생명력과 욕망을 상징하지만, 그것을 입은 존재가 "미아"가 된다는 점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의 모습을 반영한다.
5) 시간과 존재의 파편화
"촌충의 몸은 도대체 몇 마디일까 / 아메바의 촉수는 몇 가닥일까"
→ 촌충과 아메바는 단순한 생명체이지만, 여러 마디와 촉수를 지닌 존재들이다. 이는 자아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개로 나뉘고, 시간 속에서 흩어지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6) 폭포와 나비
"시간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되솟는다"
→ 폭포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떨어졌다가 다시 공기 중에 흩어지는 속성을 가진다. 시간도 그렇게 단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얽혀 되풀이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나비처럼 펄럭이며 떠다닌다"
→ 나비는 가벼운 존재, 자유로움을 상징하지만, 한편으로는 덧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7) 마지막 연의 황금빛 시간
"시인의 시간을 / 도둑의 시간을 / 거짓말의 시간을"
→ 다양한 시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절대적인 진실이 없음을 의미한다.
"발기된 탑과 덩굴과 안개의 시간을"
→ 탑(고정된 구조물)과 덩굴(휘감기는 것), 안개(흐릿하고 모호한 것)의 대비를 통해 시간과 존재의 모순적 속성을 나타낸다.
총평
「황금빛 키스」는 단순한 사랑과 회상의 시가 아니라, 다층적인 시간과 자아의 혼란 속에서 삶과 존재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시간은 폭포처럼 흐르면서도 나비처럼 흩날리고,
존재는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촌충처럼 마디마디 나뉘며,
사랑과 욕망, 상처와 결핍이 교차하는 삶 속에서 화자는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게 된다.
이는 결국 "황금빛 키스"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찬란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삶의 순간과 사랑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황금빛 키스」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관계
이 시의 제목이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The Kiss)」**를 연상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하지만 시의 내용과 클림트의 그림 또는 그의 생애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1. 클림트의 그림 「키스(The Kiss)」와의 연관성
클림트의 「키스」는 황금빛 배경과 화려한 문양 속에서 한 쌍의 연인이 열정적으로 포옹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시에서 "황금빛"과 "키스"가 결합된 것은 이 작품과의 연결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① 황금빛의 의미
클림트는 금박을 사용하여 작품에 성스럽고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의 황금빛은 욕망과 사랑을 찬란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황홀함 속에 감춰진 덧없음을 상징한다.
→ 시에서도 황금빛이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삶의 덧없음 속에서 빛나는 한순간임을 암시한다.
② 키스의 의미
클림트의 「키스」에서 사랑은 소유와 포획, 욕망을 의미한다.
하지만 「황금빛 키스」의 시에서는 사랑이 삶과 시간 속에서 흩어지는 경험으로 표현된다.
결국, 클림트의 작품이 사랑을 가장 황홀한 순간으로 고정하려 한다면, 시는 그 순간이 끝없이 부서지고 흩어짐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시의 제목이 클림트의 「키스」를 연상시키지만, 내용적으로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2. 클림트의 일생과의 연관성
클림트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예술과 정서적 경험이 시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① 사랑과 욕망, 그리고 여성들
클림트는 생애 동안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지만,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특히, 그는 강한 애정과 예술적 교감을 나눈 여성 모델들이 많았으며, 수많은 자녀를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음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듯"
→ 시 속의 화자 역시 과거의 사랑과 욕망을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하는데, 클림트의 관계 맺음과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이 그러한 느낌과 닿아 있다.
② 클림트의 작품 속 여성과 시 속 여성의 삶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들은 찬란한 금빛 속에서 아름답게 표현되지만, 그들의 존재는 종종 욕망과 죽음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황금빛 키스」에서도 여성의 삶은 기구하다. **"폐결핵을 앓던 시절", "아버지 도박빚에 버스 차장이 되어, 미싱공이 되어, 급기야 접대부가 되어"**라는 구절에서 여성의 삶은 사회적 억압과 가난 속에서 희생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클림트의 여성들이 욕망과 찬란한 황금빛으로 감싸여 있지만, 동시에 그 속에 억압과 소멸이 내재해 있듯이, 시에서도 "황금빛 키스"라는 제목 속에서 삶의 비극성이 함께 녹아 있다.
③ 죽음과 덧없음
클림트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모티프가 많다. 예를 들면, **「죽음과 삶(Death and Life)」**이라는 작품은 한쪽에 죽음, 한쪽에 찬란한 삶이 대비되며, 이는 시에서 시간의 흐름과 황금빛 순간의 덧없음과도 연관될 수 있다.
3. 결론: 클림트와 이 시의 관계
① 제목과 형식적 연관성
"황금빛 키스"라는 제목은 클림트의 「키스(The Kiss)」를 연상시키며, 그의 황금빛 양식과 사랑의 이미지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② 내용적으로 반대 방향의 의미
클림트의 작품이 사랑을 **"영원히 고정된 황홀한 순간"**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시에서는 사랑과 삶이 흩어지고,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덧없는 순간"**을 강조한다.
③ 클림트의 삶과의 유사점
클림트의 여성 편력, 사랑과 욕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유는 시에서 등장하는 사랑의 흔적, 삶의 부침, 그리고 시간이 가져가는 존재의 의미와 닿아 있다.
따라서, 이 시가 클림트의 작품과 직접적인 오마주(헌정)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예술적 모티프와 생애가 시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