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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조계종이 망해야 불교가 산다” 망어죄의 자승스님을 보고
불자의 조건은?
절에 다니면 모두 다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모두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불자의 조건은 무엇일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불자의 조건은 삼보에 귀의 하고 오계를 준수하면 불자라 하였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을 준수 하는 것이 불자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S55.37)”라 하여 삼보에 대한 믿음을 낼 것을 말씀 하셨다.
그리고 “마하나마여, 재가신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곡주나 과일주 등 취기있는 것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는 계행을 갖춥니다. .(S55.37)”라고 말씀 하심으로써 지켜야 할 계를 지키는 것이 재가불자의 조건이라 하였다.
오계를 준수하는 것은 출가와 재가 모두에 해당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계이다. 따라서 오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파계한 것으로 보아 더 이상 불자로 볼 수 없고, 더 이상 비구라 볼 수 없다.
중벼슬이 닭벼슬 보다 못하다는데
최근 자승총무원장이 재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한번 총무원장을 하고 싶은 것이다. “중벼슬이 닭벼슬 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있지만 자승승려에게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중이 고기맛을 알면 절에 빈대가 안 남는다”는 말이 있듯이, 한번 권력에 맛을 들여 놓으니 중벼슬이 닭벼슬 보다 훨씬 나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자승승려의 행각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말을 바꾸고
자승승려는 지난해 승려도박사건이 일어 났을 때 다시는 재임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그 자신이 은처의혹을 받고 있고 또 도박의혹의 당사자로서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 왔기 때문에 물러나라는 요구에 굴복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일년이 지난 이 시점에 말을 바꾼 것이다. 부처님 전에 108배를 하면서 맹세한 말을 이번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말을 바꾼 것이다. 이는 망어죄에 해당된다. 불자와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오계 중에 불망어가 있는데 비구가 거짓말을 하면 바라이 죄를 짓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승단에서 추방되는 조건에 해당된다.
수좌회의 어이 없는 퇴각
이런 우려가 있어서일까 선원수좌회에서는 하안거 결제가 끝나자마자 조계사 마당에서 농성하였다. 묵언단식정진이라는 이름으로 자승총무원장의 재선의 의지를 꺽어 놓겠다고 결의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자승원장이 재선을 선언하는 순간 단식을 중단하고 모두 산으로 돌아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하여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서는 수좌회의 단식중단과 성명서를 보도하였다. 그러나 유독 불교저널만은 달리 보도 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3일 수좌회 촉구대회에서 '자승스님이 차기 총무원장 후보로 등록하는 순간 전국 승려대회도 불사하겠다'던 수좌들의 호기는 쇼맨십에 불과했던 것일까?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어이없는 철수, 불교저널 2013-09-17)
불교저널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조치라 하였다. 자승승려의 재선을 저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단식정진 하였는데, 재선을 선언하는 순간 동시에 단식을 중단하고 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다.
망어죄를 지은 수좌회
이런 수좌회의 행동이 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일까? 이는 언행이 불일치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전 기사를 보면 수좌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수좌들은 정치에 개입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우리는 자승 원장이 약속을 지키고 청정승가 구현의 바탕이 마련되는 즉시 산문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승 총무원장이 재임하겠다고 등록하는 순간 전국 승려대회를 열어 강경대응할 방침입니다.”
("자승 원장 약속 지키면 산문으로 돌아간다", 불교저널 2013-09-12)
작은 승려대회가 지난 9월 12일 조계사에서 열렸다. 자승원장의 연임을 저지하기 위하여 묵언단식정진중에 있는 수좌회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 ‘미니승려대회’라 볼 수 있다.
이날 수좌회에서는 “자승 총무원장이 재임하겠다고 등록하는 순간 전국 승려대회를 열어 강경대응할 방침입니다.”라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그러나 9월 17일 자승원장이 재선출마 선언을 하자 수좌회는 “단식과 묵언정진을 중단하고 산문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함으로써 꼬리를 내렸다. 더구나 수좌회에서는 승려대회 개최 등 향후 계획에 대해선 “논의된 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왜 이렇게 입장이 바뀐 것일까? 이를 지켜 본 불자들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동안 수좌회를 응원하며 자승원장의 연임을 저지시켜 주기를 바랐으나 허무하게 막을 내린 모습을 보면서 수좌회 역시 오계를 지키지 않은 집단임을 알게 되었다. 자승원장의 연임저지를 위하여 지난 13일 열린 결의대회에서 “자승 원장이 후보로 등록하는 순간 전국승려대회를 해서라도 막겠다”고 하였으나 막상 철수하면서 “수좌회에서 공식적으로 그런 입장을 표명하거나 논의한 바는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좌회는 한입으로 두말을 한 것이고 망어를 한 것이다. 수좌회가 망어죄를 지은 것이다.
수좌회가 떠난 자리에서
한국불교에서 청정승가를 위한 마지막 보루라는 수좌회마저 망어를 하면서 이렇게 떠나자 그 자리를 재가불자단체들이 매웠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불교포커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참여불교재가연대(대표 이수덕)와 교단자정센터(원장 김종규)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의 재출마 포기를 촉구하며 16일부터 1주일간 철야정진을 진행키로 했다. 참여불교재가연대는 16일 오후 5시40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앞 우정공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승스님의 총무원장 선거 재출마 포기를 촉구하고 "오늘 오후 9시부터 일주일간 철야정진을 하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는 이수덕 대표와 교단자정센터 김종규 원장 등 6명이 참석했다.
( 재가연대 '자승스님 재임 포기' 철야정진, 불교포커스 2013-09-16)
사진 : 불교포커스
자승원장의 연임저지에 단식이라는 극한 투쟁을 하였던 수좌스님들이 이해할 수 없는 퇴각을 하였다. 스님들이 떠난 자리에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재가불자단체들이 들어 앉았다. 그리고 자승원장의 연임저지를 위하여 철야정진을 결의 하였다.
몰락하는 한국불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수좌회 스님들의 어이없는 퇴각을 보면서 이제 한국불교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아무도 자승원장의 재선을 막을 수 없다. 비구 아닌 자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는데 또 오계를 어긴 자가 또 다시 총무원장이 되어도 이를 저지할 세력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한계이다.
몰락해 가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재가불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없다.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부대중의 일원으로서 종회 등 종무에 참여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시주자로서의 역할 밖에 없다.
비구 아닌 자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가도 저지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가장 기본적인 오계를 지키지 않는 승려가 막행막식을 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꼬삼비 비구들의 이야기’를 들면서 오계를 지키지 않는 승려에게 공양거부를 하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꼬삼비 비구들의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오염에 대한 경(M128)’에서
다투는 승려들에게 공양거부를 한다는 꼬삼비 비구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뻐알리니까야 경장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율장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장 마하왁가에 꼬삼비 비구들에 이야기가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오염에 대한 경(M128)’에 꼬삼비 비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기록 되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세존] 1. 한꺼번에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아무도 스스로 어리석은 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참모임이 파괴되어 가지만 자신의 잘못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2. 슬기로운 대화는 잊혀지고 언어는 말의 영역에서만 맴돈다. 입을 벌려 마음대로 소리 지르니 누구에 이끌리는지조차 모른다.
3. 그는 나를 비방했다. 그는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이겼다. 그는 나를 약탈했다. 이와 같이 그에게 적의를 품는 자, 그들에게 원한이 그쳐지지 않네. (Dhp 3)
4. 그는 나를 비방했다. 그는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이겼다. 그는 나를 약탈했다. 이와 같이 그에게 적의를 품지 않는 자, 그들에게만 참으로 원한이 그쳐진다. (Dhp 4)
5.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이 어디에서나 결코 그쳐지지 않는다. 원한을 떠나야만 그쳐진다. 이것이야말로 영겁의 진리이다. (Dhp 5)
6. 우리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리가 없네. 사람들이 이것을 안다면 바로 거기서 다툼은 끝나네. (Dhp 6)
7. 뼈를 부수고 목숨을 빼앗고 소, 말, 재산을 약탈하고 나라를 도둑질하는 자, 그들에게도 화합이 있는데, 어찌 그대들은 그럴 수조차 없는가?
8. 선하게 지내고 또한 흔들림 없는 현명한 벗을 그대들이 얻으면 모든 위험의 공포를 극복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만족하며 그와 함께 유행하라.
9. 선하게 지내고 또한 흔들림 없는 현명한 벗을 그대들이 얻지 못하면 왕이 이미 정복한 국토를 버리는 것과 같이 숲속에 있는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
10. 어리석은 자와 벗하기보다는 홀로 가는 것이 낫다. 악을 짓지 말고 홀로 가라, 숲속의 코끼리처럼 편히 가라.
(Upakkilesa sutta- 오염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28, 전재성님역)
경에 열 개의 게송이 있다. 그 중에 법구경 쌍의 품에 있는 Dhp3-6가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0 번째 게송을 보면 법구경 61번 게송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가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 61)”와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니까야 곳곳에서 종횡으로 사용되고 있다.
입에 칼을 물고 서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하자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게송을 읊었을까? 이는 경의 초반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꼬삼비에서 수행들이 다투고 언쟁을 하고 입에 칼을 물고 서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하자 부처님이 이들 수행승이 있는 꼬삼비로 찾아 왔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그만 두라. 다투지 말고 언쟁하지 말고 논쟁하지 말고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M128)”라고 말씀 하셨다.
이런 부처님의 충고에도 꼬삼비 비구들은 “진리의 주인이신 세존께서는 기다리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관심을 갖지 마시고 ‘지금 여기’에서의 안락한 삶을 영위하십시오. 우리가 이 다툼과 언쟁과 논쟁과 분쟁을 진정시킬 것입니다. .(M128)”라고 말함으로써 부처님이 분쟁에 개입하지 말기를 바랐다.
그러나 부처님은 거듭하여 분쟁을 그칠 것을 말하였다. 세 번이나 충고하였음에도 그치지 않자 부처님은 위와 같은 게송을 읊고 꼬삼비를 떠난 것이다.
꼬삼비 비구들 이야기의 본질은?
꼬삼비 비구들 이야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맞지마니까야에 따르면 화합하지 않은 비구들에 대한 충고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재가불자의 공양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더 회자 되고 있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비구들에 대한 재가불자들의 공양거부로 인하여 교단이 바로 선다는 취지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맛지마니까에는 재가불자들의 공양거부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법구경 인연담에는 매우 상세하게 공양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법구경 6번 게송에서이다. 먼저 법구경 6번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re ca na vijānanti 빠레 짜 나 위자난띠 mayamettha yamāmase 마야멧타 야마마세 ye ca tattha vijānanti 예 짜 땃타 위자난띠 tato sammanti medhaga. 따또 삼만띠 메다가.
‘우리가 여기서 자제해야 한다.’라고 다른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니 이러한 것을 자각하면 그 때문에 다툼이 그친다.(Dhp 6,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맛지마니까야 ‘오염에 대한 경(M128)’ 에도 실려 있다. 승가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자들을 훈계하는 게송이다. 성스런 승가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자들은 ‘우리는 사라진다. 우리는 괴멸한다. 즉, 항상 틀림없이 죽음에 다가선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재가불자의 공양거부
6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에서 공양거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법구경 인연담은 5세기 붓다고사가 주석한 것이다. 그런데 법구경 인연담에 대한 이야기는 거해스님의 법구경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재성님의 법구경은 테라와다 불교의 법구의석을 직역한 것이라 하였다. 붓다고사가 쓴 법구의석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인연담과 달리 6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매우 길다. 작은 글씨로 세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모두 다 옮길 수 없어서 재가불자의 공양거부에 대한 부분만 보면 다음과 같다.
재가신도들은 수행승들이 부처님으로부터 훈계를 받고도 따르지 않은 수행승들 때문에 그 화가 자신들에게 미친 것을 알게 되자 수행승들에게 탁발음식을 주거나 자리를 내주거나 존경을 표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수행승들은 끼니를 때우기가 어렵게 되었고 굶어죽을 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러자 수행승들은 서로의 잘못을 깨닫고 상대방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였다. 재가신도들은 그러한 수행승들에게 부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만 예전처럼 대해주겠다고 말했다.
(법구경 6 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역)
꼬삼비 비구들이 분쟁한 것은 사소한 계율에 대한 것이었다. 율사와 법사가 계율의 적용 문제를 놓고 다툰 것이다. 어느 날 법사가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뒷물할 한 물을 그릇에 남기고 왔는데 이른 본 율사가 죄악이라고 비난한 것에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법사는 뒷물할 물을 남긴 것은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의도가 실리지 않은 부주의한 일이기 때문에 죄악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 율사와 법사가 다투고 반목하고 급기야 서로 말도 안하고 패가 갈리고 말았다. 더구나 율사를 지지하는 신도와 법사를 지지하는 신도로 나뉘어 더욱 더 불화가 심화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 부처님이 방문하여 화해하고 논쟁을 중단할 것을 충고 하였으나 두 패로 갈린 비구들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세 번에 걸쳐서 부처님이 충고 하였으나 이를 받아 들이지 않자 마침내 부처님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뜬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재가신도들이 두 패로 갈린 비구들에게 공양거부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마침내 비구들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었다. 탁발에 의존하는 비구들에게 있어서 공양거부는 굶어 죽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서 통하지 않는 공양거부
꼬삼비 비구들 이야기를 보면 재가불자들의 파워를 짐작할 수 있다. 탁발에 의존하는 비구들에게 있어서 재가불자들의 공양거부는 마치 죽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다투고 화합하지 않는 비구들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공양거부만한 무기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공양거부는 한국불교에서도 통용되는 것일까?
한국불교에서 승단의 불미스런 사태가 일어날 때 마다 재가단체에서 흘러 나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승단에 공양거부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승려도박사건 처럼 계를 지키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을 때 공양거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양거부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 한국불교의 현실이 부처님 당시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탁발에 의존하여 생계를 이어 가는 부처님당시에는 꼬삼비의 예를 보듯이 재가의 공양거부로 통제가 되었으나, 탁발의 전통이 있는 한국불교에서 공양거부 운동을 해 보았자 굶어 죽을 일이 없이 때문에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어느 절이든지 취사를 할 수 있는 공양간이 있어서 축적해 놓은 쌀과 음식재료를 이용하여 밥을 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공양거부 효과가 없는 것이다. 다만 시주를 거부함으로써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할지 모른다.
재가불자들이 시주거부 운동을 하여도
한국 불교에서 승려들이 개판을 쳐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탁발의 전통이 없기 때문에 ‘공양거부’라는 말은 사실상 실효가 없다. 남는 것은 시주 거부이다. 부처님 전에 삼배를 하고 불전함에 돈을 넣는 행위나 등을 다는 것, 또는 불사에 동참하는 것 등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시주거부 운동 역시 큰 효과가 없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개인사찰 갖는 것이 붐이 된 한국불교에서 승려들은 이미 사유재산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자들의 도움 없이도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는 곳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더구나 조상이 물려준 문화재와 막대한 토지를 다량 보유하여 문화재 관람료 또는 사찰입장료를 징수하는 사찰의 경우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수입원이 있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이 시주거부 운동을 하여도 끄덕 없다.
이래도 저래도 통제되지 않는 한국불교
은처, 도박, 횡령, 먹튀, 폭력 등 온갖 부정적인 말들이 한국불교에서 오간다. 그러다 보니 은처를 한 자는 ‘은처승’이라고 하고, 도박을 한 자는 ‘도박승’이라 한다. 사찰의 토지를 팔아 먹튀한 자는 ‘횡령승’이 될 것이고, 비리를 폭로 하겠다는 사미승을 죽도록 팬 자는 ‘폭력승’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은처승, 도박승, 횡령승, 폭력승이 판을 치는 곳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 은처승, 도박승 혐의를 받고 있는 자가 또 다시 총무원장이 되려 하여도 아무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계를 지키지 않는 비구 아닌 자가 또 다시 총무원장이 되려 할 때 승려대회를 열어서라도 저지 하겠다던 수좌회 스님들도 ‘이상한 퇴각’을 하였을 뿐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마지막 보루라고 여기던 수좌스님들도 납득하지 못하는 명분으로 물러난 마당에 이제 더 이상 개판치는 승려들을 저지할 방법은 없는 듯 하다. 부처님 당시 처럼 재가불자들이 공양거부로 통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주거부로도 통하지 않는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것이 한국불교이다. 그런 한국불교에 있어서 기득권을 거머 쥔 승려들의 세상이 되었다.
승려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한국불교에서 승려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는다. 독신비구종단을 표방하는 종단에서 은처를 해도 결혼을 하여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시주돈으로 도박을 하여도 고발한 자가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은처, 도박, 횡령, 성폭행, 폭력, 음주, 성매수 등 아무리 개판쳐도 안전한 곳이 한국불교의 승가집단이다. 그런 승가집단에서 은처, 도박승 혐의를 받는자가 또 다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하지만 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비구 아닌 자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를 노려도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런 승가집단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다름아닌 ‘재가승가’일 것이다. 비구계를 지키지 않는 일본불교처럼 직업으로서 승려집단인 재가승가인 것이다.
창피한 이야기로 가득한 신동아 9월호
신동아 9월호 (점입가경! 조계종 비리 폭로전) 에 따르면 자승원장에 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불자로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도박승이 총무원장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불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 만일 친지들 모임이나 친구들 모임에서 자승승려의 도박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 된다면 불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그게 아니라..”라고 변명할까? 아마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화제가 바뀌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망할 조짐으로 가득 찬 조계종
비구 아닌 자가 불교의 수장으로 있고, 은처와 도박혐의를 받는 자가 불교를 대표하는 한 불자들은 모두 다 똑 같은 사람들로 매도 당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수좌스님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자기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현재의 상황이 앞으로 30년 가량 지속된다면 조계종단이라는 종명이 지속될 수 있겠는가"라고 자문한 뒤에 "더 이상 머뭇거리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 망할 조짐으로 꽉 차있다, 그릇을 확실하게 비우고 새로운 판을 짜야 종단의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적명스님, [봉암사 적명 스님과의 대화] 수좌회가 자승 총무원장 연임 반대 외친 까닭 , 오마이뉴스 2013-08-26)
수좌스님은 조계종이 망할 조짐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판을 다시 짜야 함을 강조한다. 더 이상 현재의 조계종에 대하여 희망이 없음을 말한다.
“조계종이 망해야 불교가 산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다. 책의 제목이 파격적이어서일까 한 때 이를 패러디한 말이 유행하였다. 수좌스님의 말을 빌면 “한국불교가 죽어야 불교가 산다”라고 바꾸어 말 할 수 있다. 특히 조계종이 망해야 불교가 살 수 있다. 은처, 도박, 횡령, 폭력 등으로 점철되어 세속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승가집단이 망해야 한국불교가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재선에 도전한 자승원장이 다시 총무원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해를 함께 하는 기득권 승려들이 똘똘 뭉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반대를 하고 단식을 하고 108배를 해도 소용이 없다.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등 승단추방에 해당되는 바라이죄를 지어도 끄덕 없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한국불교를 몰락으로 가게 하고 나락으로 빠뜨리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할 것이다. 자승원장이 재선되면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더구나 승려대회가 열려 각목이라도 난무 하게 되면 더 빠르게 몰락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운명이다. 따라서 망할 불교라면 빨리 없어지는 것이 좋다. 어쩌면 이번 자승원장의 재선으로 인하여 한국불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지 모른다.
마치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듯이
어떤 이는 한국불교에 대하여 뿌리가 썩은 보리수로 비유하고 있다.내부적으로 곪아 터진 한국불교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뿌리가 썩은 한국불교에서 벌어진 갖가지 추문은 앞으로 사람들 입에서 회자 될 것이다. 그리고 문학작품에서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활용될 것이다. 마치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듯이.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불교가 내부적으로 부패하였을 때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아스님의 아소까에 따르면 부패한 승가집단으로서 불교에 대한 혐오를 다음과 같이 문학작품에 실려 있다고 한다. 자승원장이 두 번째로 총무원장이 되어 불교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1. “만일 불교도와 접촉하면…, 그는 목욕을 해야 정화된다.” (닐깐뜨의 ‘뿌라야쉬뜨 마유카’에서)
2. “불교사원에 가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으로 그 부정을 제거하기 위해 정화가 필요하다.” (아빠라까의 스므리띠 브라다 하리뜨에서)
3. “신이나 조상에게 봉헌한 식사에 불교도나, 아위지까, 노예, 유배자를 대접하는 사람은 100빠나의 벌금이 부과된다.” (까우띨야)
4. “불교 비구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꿈속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없고 보는 것을 피해야 한다.” (야즈나발까, 유명한 힌두법전 문헌가)
5. “브라흐민이 불교도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심지어 큰 위험에 처했을 때라도 죄가 된다.” (아그니 뿌라나)
6. “하얀 이빨, 눈은 절제하고, 머리를 삭발하고, 노란 가사를 입은 이 노예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거행할 것이다.” (바유 쁘라나)
7. “불교로 개종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며 머리 깍은 사문과 말하는 것만으로도 지옥에 떨어진다.” (비누 쁘라나)
(아소까, 8편 412-413p, 일아스님지음)
진흙속의연꽃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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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가와 출가자가 계와율을 지킴에 불교도로서 같은것이다"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계행의 뛰어난 불자에게 삼배를 받는자가 바로 스님이며, 삼보이다.
사람이 아닌 마왕에게 스님이라 칭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망어죄라 하는데 , 보통의 소시민도 그러한 행동을 아니한다,
자승이라 하든지 아니면 그냥 모씨라 그러하십시오.
지초불님!
계와율 안지키면 어떻게 되남요~?
재가불자에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무늬만 같다고 동일한가요?
자승을 화수분님께서 옹호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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