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여유롭지 못했고, 뒤늦게 낳은 아들이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 간다는데 풍부한
노자와 여러가지 어려운 상태로 서울로 보낸다는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으리요.
여기 영산포역전의 매포소안에서 어머니는 나에게 나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면서 잘 계세요.
여기는 기차가 달려서 들어오는 영산포 역전의 철로길 이다.
기차가 몇 키로 미터 전에서 한쪽으로 들어오고, 또 위에서 내려오는 하행선은 또 한쪽으로 들어오면서
영산포역 플래트 홈에서 열차를 타기위해서 오르고 또는 내리곤 하는곳이다
여기 영산포역에서 약 200미터 앞에는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영산포구에서는 멸치젓 냄새와 잘 삭은
홍어 내음새가 진동을 하면서 호남의 조그마한 포구의 운치가 더 한층 고조되고 있다.
고향을 이곳에 둔 우리들로서는 너무나 고향의 내음새를 맛볼수 있고 옛부모님의 모습과 어렷을적의
고향 친구들의 얼굴들이 하나씩 둘씩 그려지기 시작한다.
부모님은 이미 고향 선산에 계신지 오래 되셨고, 고향 친구들의 소식이 끈긴지 오래된 친구들도 다수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친구들도 많이 있고 이름도 연락도 두절되고 , 다만 학교다닐때 친한 친구들만이
연락이 되어 가끔 만나서 식사나 한번 아니면 소주도 기우리며 옛 이야기를 나누곤한다.
그런데 더욱 나를 더 추억의 늪에서 헤메게 하는 것은 이 영산포역이 없어 졌다는 이야기이다.
이추억의 영산포역의 플래트 홈에서 서울로 가는 상행선과 목포로 가는 하행선의 기차가 교차하고
기차를 타는 여행자와 가족들의 서로가 손짓을 하며 헤어지는 이별의 교착점의 역(驛 )이기도 하다
이 영산포역전이 사라지면서 나주역은 중간 지점이며 나주 시청이 자리한 지점에 새로 생겼으며 옛날
나주역전은 나주와 광주로 통학을 하다가 일본학생들과 싸움이 벌어져 광주 학생운동의 발발지점의 역(驛)으로
역사적인 현장으로 그 유물들이 보관되는 역사 박물관이 된 셈이다.
지금이야 호남선도 복선으로 개통이 되어 옛날처럼 정거장에서 상행선과 하행선이 교차를 해야하는
불편이 없이 기차가 통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기이 영산포역 안의 플래트 홈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둘째 누나가
살고 계시는 곳으로 가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향의 어머님과 헤어졌던 순간들이 내 머리의 뇌리에
그려 지곤 한다.
45 여년전의 한국의 농촌이라는게 경제적여건이 어려워서 서울로 올라온 아들인 나에게 노자 (여비)도
제대로 못주는 여건들....................
어머니는 내 사랑스러운 아들아 서울에 올라가서 열심히 그리고 성공하거라 하는 심정으로 모자 (母子)간에는
서로의 정을 표현하면서 헤어지곤 하였던 정거장 이다.
나는 이번에 고향에 내려 갔을때 이곳을 꼭 지나게 된다. 왜냐하면 영산포에 사시는 나로서 큰누나가 살고
계시는 집으로 가기위해서 이 역전을 꼭 지나게 된다.
추억의 옛날의 이야기이지만 여기 영산포 역전 앞은 항상 시끄럽고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호남지방의 교통의 요충지 역활을 하기도 한곳이기도 하다. 광주에서 내려오는 직행들이 호남선의 기차
손님과 영암 ,해남 ,강지,장흥, 완도로 가는 기차손님들을 이곳에서 태우기 위해서 이다.
지금은 그 시끄럽고 북적되었던 사람과 기차 그리고 뻐스들은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한적한 영산포역의 추억의
철로(鐵 路)와 플래트 홈 그리고 옛날 기차 미카 0000 만이 역사의 현장에서 보존 관리되어 오고 이 나그네의
옛 45 여전의 추억을 더듬게 하고 있었다.
사실그렇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살아서 이렇게 부모와 자녀의 헤어지면서 사는 이별도 있을 것이고 남녀간의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이별도 있을것이고 법적으로 남녀가 혼인을 합법적으로 해놓고 헤어지는 이혼도 있을
것이고 이 나그네 처럼 죽음으로 헤어지는 부부간의 사별도 있을것이다.
또한 역사에서 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 아니면
국난에 처해서 목숨을 내던진 의병활동을 하신 분들도 있고 6.25 그리고 국토방위에 전념하다가 산화한
애국자들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별이 던간에 사람과 헤어진다는것은 슬픈일이고 또한 인생은 불가피하게 헤어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삶인지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고향답사기 한편을 베드로용상 씀
여기는 우리 조상님들을 모신 고향선산의 입구이다 .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우리 문중의 선영이 있으며
이선산에 부모님 묘소도 함께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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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명이 '베드로'입니다
영산포의 선창가의 홍어 냄새가 일품입니다.그추억이 있어 가끔 홍어의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저도 옛 추억의 글을 써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향의 선산은 한국통신연수원으로 다뺐겨버리고 그뒤에 부모님의 묘소가 영산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똑같은 세대에 공감이 많이 갑니다.
저는 영암이 고향이라 털털이 버스타고 영산포를 자주 지나 다니지요~
대나무 살로 만든 배 상자 추억이 그립습니다.
방장님 고향이 영암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영암군덕진면 강정엘자주 갑니다. 저의 12대조의 시서김선 할아버지의 영당제에 참석하고져 그리고 할아버지 자료정리하려 자주내려갑니다. 반갑습니다
영산포역이 사라졌군요.
전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게서 슬프고 아름다운 비애를 느낍니다.
전 영산포역에 가본 적은 없지만
영산포에 애들 아빠의 큰댁이 있어서 영산포를 방문한 적 있습니다.
정갈한 필치로 담담하게 적어내려 가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얀별꽃'님의 글은 아주훌륭한 글임을 자주느끼고 합니다
사라져 버린 영산포역의 추억은 내 어린 추억을 회상하게큼합니다
이제는 나이를 들어서 인지 추억을 먹고 삽니다.감사합니다
저 철로사진이 마음이 아픕니다
마치 헤어진 연인 같아서 ㅠㅠ
추억이 있는 현장이 사라지고 추억의 회상만할수 있습니다
없어진다는것은 마음이 아프고 헤어진다것은 서글펴 지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