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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초 7국의 난 (기원전 154년) - |
우리가 흔히 진한제국으로 부르는 것처럼 한나라는 진나라의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던 대표적인 고대 제국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던 초기에는 폭압적인 진의 지배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한 고조는 가혹한 법치를 완화하고 안정된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조처들을 발표하여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정권임을 강조했다.
특히 아직 굳건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국공신들의 반란을 없애기 위해 이른바 군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국제(郡國制)란 군현제와 봉건제가 절충된 것으로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서북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세력인 한신 등 7인의 왕과 소하 등 제후에게 분봉,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거기에는 진나라가 군현제를 통해 너무나 급격하게 중앙집권을 추진했기 때문에 단명에 그쳤다는 고조의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의 제후왕들은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으로 하나씩 하나씩 제거되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장인 초왕 한신, 양왕 팽월, 회남왕 경포....
감쪽같이 고조의 덫에 걸려든 한신은 한탄하여 말하기를 "세상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날랜 사냥개는 삶아 없어지고,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구석에 처박히게 되며, 적국이 패하면 지모있는 신하는 필요없게 된다더니........" 그러나 그도 비참하게 예정된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기원전 195년 고조가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할 때에는 이미 거의 모든 제후왕들은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다. 유언처럼 "유씨가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불문율이 남겨졌다.
그런데 동성의 제후왕들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혈연관계도 소원해지고 점차 자신의 영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 중앙권력에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군은 15개에 불과하고 제후국은 30여 개에 달했으며 큰 제후국은 군 5, 6개를 합친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마침내 무제의 아버지인 경제 때에 이르러 제후국에 대한 압력이 시작되었다. 경제는 박사인 조조의 의견을 채용, 제후왕의 과실을 헤아려 영지를 삭감하는 등 제후국의 축소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오, 초 등 7개국 제후들이 연합하여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오초 7국의 난. 기원전 154년의 일이었다.
오왕 유비는 황실의 원로였지만 40년간 오나라를 다스리면서 오나라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오나라 국부의 원천인 소금과 구리의 산지를 헌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에 경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겹쳐 난을 주도하게 되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중앙에 입조하러 갔던 그의 아들이 경제와 함께 바둑을 두던 중, 경제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절명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제후들은 점점 가난해져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 일어나서 살 길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유비의 호소에 응해 초, 조 등 중국 동남부의 6국이 가세 간신 조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흉노 등 외세와의 동맹도 꾀하고 있었으며, 초반의 전세를 장악 한나라는 건국 50년만에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7국의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조가 참수되었으나 반군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경제의 친동생 양왕이 반란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자 반격의 실마리가 마련 되었다. 진압군 총사령관인 주아보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반란군의 어떠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아리 없는 전쟁에 지치고, 보급로가 차단된 반란군은 점점 굶주림에 쓰러져갔다. 마침내 오왕은 살해되고 다른 제후왕들도 모두 살해되니 반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오초 7국의 난을 끝으로 한황실의 중앙권력에 도전할 지방세력은 없었다. 이제 제후국의 정치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운영되었고, 제후왕은 국정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무제는 추은령을 실시하여 제후권의 발호에 마지막 쐐기를 박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권력을 완성했다. 추은령이란 제후왕의 사망시 적장자 이외의 아들에게도 토지를 나누어주고 이를 열후로 승격시켜 중앙정부의 관할하에 있는 군에 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제후왕의 영지는 더욱 세분, 축소되게 마련이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즉위 기원전 87년 71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장장 54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고대제국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장식했다. 그것은 아마도 진시황이 꿈꾸었던 세계였을 것이다. 한무제는 진시황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 전제군주의 가장 대표적인 전형이 되었다.
무제 때는 오늘날 중국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판도가 형성되었다. 그는 외정에도 힘써 오랜 숙원인 흉노 정벌에 총력을 기울여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며, 베트남을 정복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조선의 사람들은 1년간이나 왕검성을 지키기 위해 굳세게 항쟁했으나 끝내 멸망, 한4군이 설치되었다. 우리나라로서는 최선진국이었던 고조선이 멸망함으로써 커다란 역사적 손실을 입었다. 후발 국가인 고구려 등이 다시 강성해 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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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楚七國-亂
"황제와 제후들은 골육인데 어찌 친척들끼리 골육 상쟁을 벌이게 하려 하느냐?" "오직 그리해야만 천자는 존귀해지고 종묘는 편안해질 것입니다." "유씨는 너로 인해 평안해겠지만, 조씨는 위태롭게 될 것이다. 나는 죽어버리겠다." 그리고는 독약을 먹고 죽으면서 말했다. "나는 너에게 화가 닥치는것을 차마 볼수가 없구나." - 사기 원앙조조열전 中 |
"고조(유방)께서 천하를 평정했을 시기에는 형제분들이 얼마 되지 않았고 황자들도 어렸기 때문에 커다란 영지를 다만 동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책봉했습니다. 그리하여 첩복(妾腹)의 황자 유비(劉肥)에게는 제(齊)의 70여 성을, 배다른 아우 유교에게는 초(楚)의 40여개 성을, 다시 유비에게는 오(吳)의 50여 성을 내렸으니 이는 천하의 절반을 준 것입니다." "헌데 지금 저 오왕 유비는 이전에 자신의 아들이 죽은 일로 원한을 품고 병을 핑계 삼아 도무지 입조 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형을 내려야만 마땅한 죄이나 선제(한문제)께서는 인자하시여 너그럽게 용서하시었습니다. 그 은덕은 가히 지극한 것이라 마땅히 오왕은 새출발을 해야 할터인데, 더욱 방자해져 화폐를 사사로히 주조하고 바닷물을 멋대로 제염(製鹽)하며, 천하의 도망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유비의 봉지를 삭감해도 반란을 일어날것이고, 삭감을 하지 않아도 반란은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점은 삭감하면 반란은 빨리 일어나나 피해는 적을 것이고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은 늦게 일어날 것이나 피해는 막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사기 오왕비열전 中 |
"황제께서는 간신들의 손아귀에서 조종되고 있습니다. 감언이설을 일삼는 이들은 제후들의 땅을 불법으로 빼았고 선량한 사람에 대한 처벌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속담에 '쌀겨를 다 털어버리면 쌀을 먹는다'는 것이 있듯이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영지 삭감이 아니라 나라를 몽땅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찌 모반을 하겠소. 폐하의 뜻을 거스릴 수는 없소." "어사대부 조조는 폐하를 미혹하여 충신을 가리고 어진이를 막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를 미워하고 모든 제후들은 그를 증오합니다. 얼마 전에 불길한 징조인 혜성이 나타났고 메뚜기때가 일어났으니 이제 거사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왕께서는 안으로 조조를 죽이고 밖으로 대왕의 뒤를 쫓는다면 가는 곳마다 모두 항복할 것이며 복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라고 여기십니다." |
"그대는 오나라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오왕의 대장군인 진녹백이라는 자는 어떤 자요? 그리고 오, 초의 반란은 진압될 수 있겠소?" |
"반란군의 명분은 조조의 목숨이니, 조조를 죽이면 자연스럽게 해산될 것임." |
"오나라 군대는 정예병이니 직접 싸우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장군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창읍(昌邑)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보루를 높게 쌓고 버티면서 양나라에 일을 다 맡기십시오. 오나라 군은 분명 정예부대를 총동원해서 양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그 기회에 회사구(淮泗口)를 공격해 오나라의 보급선을 끊어버리면 됩니다. 적은 지칠대로 지쳤을테니, 온전하고 강한 군대로 일거에 무너뜨리면 됩니다." |
"장군께서 동으로 오와 초를 주멸하는데, 승리하면 종묘가 편안해지나, 이기지 못하면 천하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능히 신의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
"오왕 유비는 부유한데다 죽기를 각오한 용맹한 군사를 모은것이 오래되었습니다. 태위께서 오신다는것을 들었으니 필시 효관과 민지의 막히고 좁은 곳 사이에 매복을 두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여기서부터 조금 서쪽으로 가십시오. 그러한 다음 남전(藍田)으로 내달리고, 무관(武關)을 나와 낙양(雒陽)에 이르시면 그 사이는 늦어도 불과 하루이틀 차이밖에 되지 않는데, 바로 무고(武庫)로 들어가시어 북을 쳐서 울리십시오. 제후들이 이를 듣고는, 장군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고 여길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길로 해서 급작스레 그들 앞에 서야 합니다" - 한서 주아부전 |
"대군이 한 덩어리로 모여 가더라도 특별한 방법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5만명만 주시면 양자강과 회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회남과 장수를 수중에 넣고, 다시 무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대왕과 합류하겠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책(奇策)입니다." |
"왕께서는 반군의 이름을 내걸고 있는데, 어찌 군대를 남에게 빌려주겠습니까. 만약 배신하면 큰 일이 날것입니다. 더구나 병권을 갈라놓는것은 좋지 못합니다." |
"오나라 군대에는 보병이 많은데 보병은 험난한 지형에서도 싸울 수 있습니다. 한나라 군대는 전차와 기병이 많은데 이들은 평지에서 싸워야만이 제대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진격하시며 항복하지 않은 성읍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재빨리 서쪽으로 달려가 낙양의 무기창고부터 점령하십시오. 그리하면 오창의 양곡을 보급받고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한나라 군대를 막고 뭇 제후들을 호령하신다면, 관중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제가 무능하여 임명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제가 장군이 되려는것이 아닙니다. 다만 왕께서 가지고 계신 한나라의 절부(節符 : 증명서)를 한장만 주십시오. 반드시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
"오나라의 반란군은 곧 당도할 터인데, 그러하면 이까짓 하비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오." |
"내가 저토록 허술한 자와 대사를 논하려 했단 말이냐!" |
첫댓글 한조의 충신 조조와 오나라의 왕 유비...
그거슨 역평행이론
그러고 보니!
감사합니다ㅋㅋ열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걸 시간순으로 배열했군요 알아보기 쉽네요~
위키 3.3에서 조착이 조조로 읽혀야 한다는 부분이 그럴싸하지만 전혀 틀린 말입니다. 錯이 현대중국어에서 [cuo4]로 읽히는 것은 [착]에서 받침이 탈락하고 거성(去聲)으로 화 됨으로 [춰4]로 와전된 것입니다. 원시중국어인 객가어에서 [초], [촉]으로 읽히는 것을 보면 千故反은 [초]이지 [조]가 될 수 없습니다. 반절법을 논하면서 현대중국어를 근거삼다니 이율배반이로군요. 그런데 저것은 [조]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錯은 措의 가차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ㄷㄷ